무협지/개방서생

제1장 기동괴동(奇童怪童)-2

오늘의 쉼터 2016. 5. 31. 00:58

제1장 기동괴동(奇童怪童)-2

 


귀수신투(鬼手神偸) 왕한상(王漢湘).


투(偸), 도(盜), 편(騙),  경공(輕功) 등이 뛰어나며


그 중에서도 투도술(偸盜術)은 천하제일임을 자타가 공인하는 터였다.


그러나 남의 물건을 함부로 훔쳐 내지는 않았다.


진귀한 보물이나 비급만이 그의 시선을 끌었으며,


한 번 건드렸던 사람의 물건은 다시 손대지 않는다는 철칙을 지니고 있었다.


천도탈혼(天賭奪魂) 방문웅(方文雄).


도박술(賭博術)에 관한 한 입신(入神)의 경지에 이르렀으며,


아직 그와 겨루어 이겼다는 인물은 단 한 명도 나타나지 않았다.


성수마의(聖手魔醫) 여소량(呂紹梁).


당대제일의 의원이며  괴의(怪醫)로 알려져  있었다.


그는 오로지 몇 종류의 환자에게만 관심을 기울였다.


한데 하나같이 천하절독(天下絶毒)에 중독되어 생사지경을 헤매는 자,


절맥(絶脈)이나 절증(絶症)에 걸려 도저히 치유가 불가능한 자,


오장육부(五臟六腑)가 제자리를 벗어나고 심맥(心脈)이 파열되기 직전인 자 등


생명이 경각에 달린 자들뿐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치유하는 데에도 특별한 조건이 있었는데,


것이 무엇인지는 당사자만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조건이란 것이 얼마나 까다로운 것일지 짐작하기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그의 손에 목숨을 구한 자는 몇 명밖에 되지 않았으므로…….



남궁진악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알겠습니다. 연사매의 뒤를 따라다니며 보살피도록 하겠습니다."


"한웅이가 연아와 동행할 터이니, 그리 알아라."


일순, 남궁진악의 눈에 야릇한 빛이 스쳐 갔다.


이 때, 팽소환이 음성을 낮추며 물었다.


"천수공녀에게 정혼자(定婚者)가 있음을 아느냐?"


"강북월녀의 오빠인 강북일남(江北一男) 하충(河忠)과 정혼한 사이인 줄 알고 있습니다."


팽소환은 미간을 좁히며 계속 물었다.


"그에 관해 얼마나 알고 있느냐?"


"일월문(日月門)의 차대문주로 주목받고 있는 고수라고 들었습니다."


"그러한 인재와 교분을 맺는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그만 나가 보거라."


팽소환의 말은 간략했으나, 숨은 뜻은 참으로 광범위했다.


정실(正室)을 나선 남궁진악은 발걸음을 옮기며 냉소를 머금었다.


'팽지연, 네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내 손아귀를 벗어날 순 없다. 
멍청이 놈을 동정하여 얕은 꾀를 쓴 모양이나… 흥!'



냉한웅이 묵직한 음식 보퉁이를 등에 지고 느릿느릿 관도 위를 걷고 있을 때.


"무얼 그리 꾸물거리는 게야!"


낙양일색 팽지연의 앙칼진 음성이 그의 고막을 뾰족하게 찔러 댔다.


하지만 그가 걸음을 조금도 빨리 하지 않자, 팽지연은 다시 악을 써 댔다.


"삼척동자도 무거워하지 않을 것을 가지고… 엄살 부리지 말고 빨리 따라와!"


"……."


그래도 냉한웅은 귀머거리인 양 무표정하였다.


그의 걸음걸이는 매우 불안했다.


그가 술 취한 사람처럼 비칠비칠 대자, 팽지연이 매섭게 눈을 흘기며 노려보았다.


"어쩜 이렇게 지지리도 못났을까. 식충이 같으니라구."


단물이 똑똑 떨어질 것 같이 귀엽고 예쁜 입에서 나온 이 독설!


하나, 그녀의 흑수정 같은 눈망울엔 물기가 번져 있었다.


만일 그녀가 조금이라도 늦게 몸을 돌렸다면


냉한웅은 그녀의 눈가에 함초롬히 매달린 이슬을 발견했으리라.


아, 그렇게만 되었다면 훗날의 가슴 아픈 사연을 만들지는 않았을 텐데…….


팽지연은 등을 돌린 채 내심 절규(絶叫)했다.


한웅아.


아버님이 당장 숨넘어갈 듯한  너를 안고 태검장에 들어오던 날을 이 누이는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당시 너의 얼굴엔 훈훈한 인정에 감화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데 철부지 누이가 널 더러운 거지라고 손가락질했었지.


순간, 누이는 보았다.


무섭도록 딱딱하게 굳어 버린 너의 얼굴을…….


두려웠다!


너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내 스스로에 대한 두려움이었어.


그날 침상에 누운 채 얼마나 후회의 눈물을 쏟았는지 모른다.


날이 밝으면 너에게 사과하겠다고 맹세도 했어.


하지만 너의 무심(無心)한 표정을 대하니,


나오려던 말이 도로 목구멍 속으로 들어가 버리더구나.


뿐만 아니라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끓어올라 그만……!


이것 또한 용기 없는 자신에 대한 노화(怒火)였지.


벌써 오 년… 그 많은 시일이 덧없이 흘러갔구나.


남아 있는 너의 생명은 불과 삼 년 남짓.


미련 없이 떠나 성수마의(聖手魔醫)를 찾아가거라.


인연(因緣)이 닿는다면, 오음절맥(五陰絶脈)을 치료받을 수 있을 게다.


그러니, 이번 기회를 틈타 떠나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