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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시간표 30

오늘의 쉼터 2015. 6. 12. 00:12

그녀의 시간표 30 

 

 

 

 

 

금사장과의 담판에서 홍지연은 회사의 주식 지분 20퍼센트와 국내외에서 사용할 수 있는

한도 1억원의 법인카드 한 장을 요구했다.

지분계산은 자신과 훗날 낳게 될 자식의 몫을 합한 결과였고,

카드는 인생을 즐기기 위한 현대인의 기본 품목이었다.

금사장은 법인카드와 주식지분 중 반은 당장 양도하고,

남은 10퍼센트 지분은 자식을 낳으면 그때 양도하겠다고 했다.

다만 두 가지 전제조건이 있었다.

금사장 자신 외에는 그 어떤 남자에게도 사랑과 스킨십을 허용해선 안 된다는 것.

그리고 반드시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것. 그녀는 금사장의 조건을 듣고 하마터면 실소할 뻔했다.

그녀의 자궁은 신선했고, 남자들 역시 이제 질릴 만큼 질렸기에 그 까짓 조건 전혀 어려울 것이 없었다.

 

부인과의 개별회담에서 홍지연은 대표의 충고대로 움직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식을 갖지 않겠다는 것이 그녀가 제시한 조건의 전부였다.

부인은 석녀였다.

부인은 홍지연이 덜컥 임신하여 아이를 낳게 되는 상황을 최악의 시나리오로 간주했다.

자식이 생기면 부인의 존재는 자연스레 미약해질 것이고, 심지어는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었다.

부인은 자신의 명의로 된 주식 지분 30퍼센트 중 매년 1퍼센트씩 15년 동안 양도해 주겠다는

내용의 계약서에 순순하게 사인했다.

뿐만 아니라 외제 고급차와 강남의 평수 넓은 아파트, 매달 적지 않은 금액의 품위유지비를

얹어주기로 옵션으로 덧붙였다.

 

그녀가 금사장과 그의 부인과 합의한 계약서에는 그 밖의 자질구레한 사항들이 수도 없이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야말로 무시해도 되는 내용이었다.

그녀는 대표의 권유로 두 계약서 모두 장관을 넷이나 배출한 유명 로펌을 찾아가 공증을 받아놓았다.

 

“로또 당첨이 뭐 별거겠어요. 이런 게 진짜 대박이죠.”

 

긴 이야기가 비로소 끝났다.

지배인이 시계를 확인하더니 눈까풀을 씀벅거렸다.

하지만 나 역시 시간을 확인하고 있었다.

 

“이런, 시간이 아직 남았네? 보자… 일만오천 원 돌려주쇼?”

 

지배인이 마지못해 거스름돈을 내게 돌려주며 얼핏 생각났다는 듯 덧붙였다.

 

“혹시나 해서 알려드리는데, ‘오야봉 경축드립니다’ 이게 영화제목이에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여러 곳의 비디오가게를 순례했다.

구석구석 빼놓지 않고 샅샅이 뒤졌지만 안타깝게도 영화는 찾지 못했다.

이후로도 수차례 비디오가게를 찾아 지방을 전전했고,

인터넷 음란물 사이트 운영자에게 정중한 부탁글과 함께 비싼 대가를

지불할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음을 알려도 보았지만 결과는 번번한 헛수고로 끝났다.

어쨌거나 홍지연의 과거에 대해 꽤 많은 수확이 있었다.

그래도 내 머릿속에는 지워지지 못한 의문이 남아 여전히 맴을 돌고 있었다.

그녀는 엄연하게 계약된 여인이거늘,

 어찌하여 아직도 수많은 염문의 여주인공으로 이름이 널리 회자되는 것일까?

 

하지만 지금은 의문을 해결하기보다는 달리 시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다.

내가 홍지연에게 사랑고백을 했다는 건 이미 전 직원이 아는 사실,

적들의 살벌한 견제와 경계를 느슨하게 만들려면 내가 먼저 무장해제를 선언해야 한다.

이른바 허허실실 작전으로, 다음날 나는 회사 홈페이지에 짧게 글을 남겼다.

 

‘홍지연 대리를 진심으로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만 나의 사랑을 접기로 합니다.

사랑했으므로 진정 행복하였네라.’

 

젠장. 올리자마자 엄청난 덧글이 달라붙기 시작했다.

회사 홈페이지 개설 이후 최고의 덧글 수라고,

앞으로도 이 기록은 쉽게 깨지지 않을 것 같다며,

팀장이 내 어깨를 토닥거려주며 연신 침을 튀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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