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시간표 27
근처 은행을 찾아 현금서비스를 받았다.
입구를 들어서기 전 팻말을 확인했는데 거기에는
‘쪽발이와 쪽발이의 친구는 출입금지’라고 적혀 있었다.
국제화시대에, 그것도 한류가 아시아를 강타하고 있는 이 시대에 저러면 되겠나 싶었지만,
나름대로 기막힌 곡절이 있을 것이라 짐작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부리나케 다녀올 것이니 기다려줄 것을 다짐했었는데 어째 지배인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난감해할 필요는 없었다.
어딘가에는 순간이동이 가능한 트랜스포터 빔 장치가 설치되어 있다.
과연 어디서 나타났는지 지배인이 금세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입술에는 먹물 같은 묻어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자장면 양념이었다.
그사이를 못 참고 순간이동하여 중국집에 다녀온 모양이다.
“여기… 돈…”
오만원을 내미는데 지배인이 눈살을 찌푸렸고 다시 삼만원을 더 얹어 건넸다.
카드 빚을 못 갚으면 이제 사기죄에 해당된다는데, 이러다 철창신세를 지는 건 아닐까?
그러나 당장의 현실이 아쉬운 판에 달리 방법은 없고 어쩌겠는가.
입에 담배를 꼬나문 채 제법 한참 동안 제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던 지배인이 어느 순간
카운터다운을 시작했다.
“셋 둘 하나… 무대 중앙에 선 남자는 겉으로 보기에도 비쩍 마른 노인네였어요.
그래도 왠지 사람을 압도하는 카리스마가 있었달까.
어쨌거나 그때 느꼈죠. 쟤네들 깍두기구나.”
보스의 고희기념으로 제작된 이른바 헌정영화였다.
그래도 세 사람은 희망을 버리지 못했다. 돈의 출처가 무슨 상관이랴,
영화만 좋다면 투자액 회수는 물론 이익을 남길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들의 희망은 영화가 시작되고 곧 사라지고 말았다.
완전한 어둠이었고, 배우의 형체는 보이지 않는데 여자의 끈적끈적한 교성이 흘러나왔다.
그 순간 대표가 난데없이 헛기침을 했는데, 그로 보아 교성의 주인이 누구인지 짐작이 갔다.
“원시시대도 아닌데 교성과 교성으로 대화가 이뤄졌고,
뒤엉킨 남녀의 몸에선 비 오듯 땀이 흘러내렸어요.
나로선 영화내용이 난해하더라고요. 대표님과 홍지연에게 설명을 부탁했지만
영화에 푹 빠졌는지 입술을 꾹 깨문 채 도통 설명을 안 해주더라고요.”
촬영을 하면서 조금 이상하다 싶은 부분이 없지 않아 있었다.
너무 적은 대사와 촬영 내내 거의 반나체 차림이었다는 것.
촬영은 블루스크린 스튜디오에서만 진행됐다.
감독은 영화의 특수기법인 크로마키(chroma-key)라고 설명했다.
“영화의 배경은 2222년,
진보된 인간들은 지금처럼 불편하게 입을 움직여 말하지 않고,
옷도 거추장스러운 이물질일 뿐이죠.
영화 ‘스타쉽 트루퍼스’를 보면 남녀가 혼욕하면서도 아무렇지 않아 하잖아요.
2050년쯤 되면 그렇게 될 거고, 좀더 지나면 옷은 박물관에서나 구경하게 될 겁니다.
블루스크린 스튜디오에서만 촬영이 이뤄지는 건 아시다시피 배경이 미래사회이기 때문이죠.”
나중에 알고 보니 감독이라는 자는 유명감독과 이름만 같았을 뿐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사진을 구해 얼굴을 확인했어야 했는데, 이래저래 실수가 많았다.
“황급히 시사회장을 빠져나왔죠.
야쿠자를 상대로 소송을 걸 수도 없고…
우리 모두 정신적 경제적으로 피해가 컸어요.
다들 제정신이 아니었죠. 미친 짓이었어요, 우린 미쳤었던 겁니다.”
내가 생각해도 미쳤던 게 분명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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