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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시간표 31

오늘의 쉼터 2015. 6. 13. 13:16

그녀의 시간표 31 

 

 

 

 

타 부서 사람들의 반응 역시 한결같았다.

나의 가상한 용기를 치하해 주고자 그들은 앞 다투어 나를 찾아왔다.

방문행렬은 끊이지 않았고, 결국 팀장은 업무의 올스톱을 선언했다.

덕분에 나는 주인으로서의 예를 갖춰 방문객을 맞이할 수 있었다.

방문객에 대한 답례로 나는 그들에게 일일이 사인을 해주었다.

가끔은 등이나 옷에 사인을 해달라고 요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유, 솔직히 처음에는 인상이 제로였어. 이제 보니 유… 용기 있는 맨이야.

나, 유를 러브하고 싶어 미치겠어.”

 

대화중에 영어를 남발하는 영업1팀장의 치사였고,

다음으로 한때 철학자가 꿈이었다는 총무부장의 치사가 이어졌다.

 

“정말 대단해! 자본주의시대 삶의 질을 결정하는 요소로 욕망을 한정하기보다 인간의 보편적이고

심리적인 성향의 한 형태로, 더 나아가 존재론적인 자기 인식의 한 형태로까지 확장시켰어.”

 

대체 뭔 소리란 말인가.

듣기에 그다지 나쁜 소리가 아닌 것 같아 잠자코 있었지만 관자노리가 지끈거려

결국 두통약을 삼켜야 했다.

자신의 정체를 그저 차대리라고만 밝힌 어떤 사내는 자신이 직접 그렸다는

마른명태 정물화를 내게 선물해 주었다.

 

“흔히들 정물화하면 꽃이나 과일을 연상하는데,

정물(靜物)의 어원은 움직이지 않는 사물, 즉 죽은 사물을 의미합니다.

이 말에는 살아 있던 어떤 존재의 주검이라는 의미가 내재되어 있죠.

마른명태는 제 몸을 푹푹 끓여 죽음조차 사랑으로 승화시키는 존재,

정말이지 속 시원하고 훈훈한 사랑의 실천이 아닐 수 없습니다.”

 

거기까지 듣고 나는 예술하네 철학하네 하는 인간들 다시는 상종을 말아야겠구나 결심했다.

나름대로 서두른다고 서둘렀지만 보통 나와 면담하기 위해서는 짧게 십 분,

길게는 삼십 분 줄을 서야 했다.

오는 손님을 마다할 수도 없고 이래저래 난감한 입장인데,

어쩐 일로 팀장이 나서서 이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언제 준비했는지 팀장과 수하들은 ‘질서’라고 적힌 완장을 어깨에 둘러찼다.

그들은 복도를 어슬렁거리며 잡담이나 새치기, 졸고 있는 사람들을 콕콕 찍어내어 조치를 취했는데,

비교적 그 위반행위가 경미한 사람은 훈계처분, ‘공공의 적’으로 분류되는 사람들은 퇴장

혹은 줄 맨 뒤로 보내는 식의 강도 높은 제재가 이뤄졌다.

그러다 보니 자연 여기저기서 불평불만이 터져 나왔다.

아무리 그래도 손님인데 이런 식으로 박대할 수 있느냐.

누군 돈이 없어 완장을 못 사는 줄 아느냐.

나도 집에 가면 금으로 된 완장이 한 트럭이다.

솔직히 완장들의 태도가 다소 강압적이었던 건 사실이다.

잦은 실랑이와 고함소리가 번번이 복도를 울리더니,

급기야 방문객의 발길이 한순간 뚝 끊어지고 말았다.

 

그제쯤 사인하는 것이 슬슬 지겨워지고 있었다.

솔직히 마음도 손도 홀가분했다. 하지만 안심은 금물.

어느 순간 꽃바구니와 화환이 사무실로 떼거리로 밀려들기 시작했다.

거기에는 크기만 다를 뿐 리본장식이 매달려 있었는데,

‘당신의 손가락에 건배’라고 천편일률적으로 적혀 있었다.

 

“초심을 잃지 말고 끝까지 대중과의 약속을 지키라는 의미야.”

 

팀장이 그럴싸하게 해석해 주었다.

그나저나 어디선가 참 많이 들어본 대사였다.

어디였더라 한참을 생각하다가 문득 영화 ‘카사블랑카’가 떠올랐다.

어느 어여쁜 여인에게 릭 선수가 던지는 잽 같은 스트레이트 펀치.

다만 영화에서는 눈동자였는데 어쩐 일로 지금은 손가락으로 단어가 비틀어져 있다.

어쨌거나 저들의 갸륵한 정성을 외면하는 건 인간으로서 할 짓이 못 된다.

나는 순전히 팬서비스 차원에서 또 다른 이벤트를 마련했다.

다음날 나는 홈페이지에 비교적 장문의 글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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