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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시간표 32

오늘의 쉼터 2015. 6. 13. 13:21

그녀의 시간표 32 

 

 

 

 

 

발없는 새가 있다더군요.
늘 날아다니다 지치면 바람 속에서 쉬고

평생 딱 한 번 땅에 내려앉는데

바로 죽을 때라고 합니다.

내 기억 속에 무수한 사진들처럼

사랑도 언젠가는 추억으로 그친다는 걸 난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만은 추억이 되지 않을 것 같았는데…

사랑을 간직한 채 떠날 수 있게 해준 당신께

고맙다는 말을 남깁니다.

 


글을 남겨놓고 나는 대단히 흡족했다.

아는 인간은 다들 알겠지만,

내가 쓴 글은 백 퍼센트 패러디였다.

영화 ‘아비정전’과 ‘8월의 크리스마스’에는 꽤 멋진 대사가 수두룩한데,

내가 올려놓은 글 역시 두 영화의 대사였다.

 

이번 글 역시 빅히트였다.

이번에도 팀장은 격려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회사 홈페이지 개설 이후 최고의 댓글 수를 기록한 지 단 하루 만에

새로운 신기록이 작성될 것이라고 팀장은 호언했다.

팀장의 장담대로 겨우 반나절 만에 어제의 댓글 기록이 깨졌다.

팀장이 내 옆에 바짝 붙어 서서 부럽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

 

“참으로 놀라운 재능을 가진 인간이야.

이런 인간이 어찌하여 작가가 되지 않고 이런 후줄근한 회사에 다니는지 도통 모르겠어.

자네, 이쯤에서 회사 그만두고 작가나 되지 그래. 내 보기엔 조앤 롤링이나 톨스토이,

김성종도 자네보단 못해. 아마도 소설을 발표하자마자 대박일 게 틀림없어.”

 

팀장의 말대로 그렇게 할까 한순간 심각하게 고민을 했는데, 홍대리가 불쑥 딴죽을 걸어왔다.

 

“적어도 댓글 베스트셀러 작가는 가능하겠네요.

그러다 제 밥그릇까지 잃지 말고 초심이나 지키세요.”

 

나는 그녀의 따끔한 충고를 애정의 표시로 받아들였다.

나의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척하면서도 때때로 툭 말을 던져와 충고를 해주는 걸 보면

내게 전혀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지 싶었다.

 

“인기라는 거… 거품이잖아요. 일희일비하지 않을 겁니다.”

 

종종 이십을 갓 넘겼을까 말까한 연예스타들이 신산한 표정을 연기하며 나처럼 말하곤 한다.

그들의 한마디는 여지없이 연예면 헤드라인을 장식하는데,

그때마다 고개가 삐딱하게 기울어지는 것은 왜일까?

그들이 하마 선승의 경지에 이르렀단 말인가?

최불암 김혜자 안성기 같은 사람들을 우리는 국민배우라고 호칭하는데,

그러고 보면 허명이 아닐까 의심해봐야 한다.

국민배우라는 사람들이 갓 스물 몇밖에 되지 않은 사람들보다 깨달음이 늦되다니!

어쨌거나 인기란 거품이다.

나의 인기 역시 언제든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었다.

경계심을 늦춰선 안 된다.

겉으론 웃어도 속으론 항상 칼날을 벼르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퇴근시간을 얼마 남겨놓지 않은 시각, 나는 오랜만에 휴게실에 들러보기로 했다.

언젠가 폭행을 당한 이후 발길을 끊었던 곳, 하지만 이제 세상인심은 바뀌었다.

나는 그것을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야 안심하고 다음 계획에 착수할 수 있는 것이다.

 

“어? 저 친구… 마른명태잖아.”

 

“마른명태가 맞아?”

 

매캐하고 자욱한 연기 저편에서 두 사내의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잊으려야 결코 잊을 수 없는 목소리. 언제 어느 때 연기를 뚫고 무쇠 같은 주먹이 날아올지 모른다.

나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얼른 방어 자세를 취하며 가만히 그쪽을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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