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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시간표 29

오늘의 쉼터 2015. 6. 12. 00:06

그녀의 시간표 29 

 

 

 

 

어느 날, 사장 부인이 그녀가 근무하는 비서실을 방문했다.

부인은 이모저모 살피고는 개인면담을 요구했다.

두 여인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복도를 걸어갔는데, 도중에 부인이 이렇게 말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고, 구르는 돌이 박힌 돌을 빼는 법이다.

내 너를 보건대 능히 그러고도 남을 화상이다.”

 

홍지연은 그때 끈 떨어진 뒤웅박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나의 화려한 날은 이제 끝이로구나, 장탄식을 터뜨리며 신세를 한탄했다.

이제 어찌해야 하나, 홍지연은 고민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그녀가 고민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그 즉시 금사장에게 부인의 방문과 협박사실을 알렸다.

전화기 저편 금사장이 벌벌 떨며 그녀에게 간절하게 호소했다.

 

“뭘 물어도 절대 그런 사실 없다고, 아무 일 없었다고 무조건 잡아떼…

안 그러면 난 죽은 목숨이야.”

 

갖은 폼은 다 잡고 다니더니만, 머리 조아리며 고양이에게 생선을 진상하는 생쥐였다.

전화를 끊고 나서 다행히 깨달음이 있었다.

즉각 문자메시지를 날렸다. 내일부터 출근을 거부하겠으며 모처에서 단식투쟁을 벌이겠다,

내용은 이랬다.

 

단식투쟁 장소로 미네르바만큼 더없이 적당한 장소는 없었다.

단식투쟁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생수를 마시던데, 그녀는 대신 술을 마셨다.

홍지연으로서는 오랜만에 맘껏 회포를 푸는 절호의 기회였다.

하지만 금사장으로서는 전혀 그렇지가 못했다.

들리는 소문으로 식음을 전폐한 금사장이 홍지연의 이름 석 자를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리다 실신했으며, 사흘 밤낮으로 울고 짜며 직원들에게 신경질을 부려놓았다고 한다.

 

다시 사흘 후, 금사장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비서실장이 홍지연을 찾아와 회담을 제의했다.

회담장소는 미네르바. 비서실장 외 직원 2인이 회담에 나섰고, 이쪽에서는 대표와 지배인을 포함

3인이 원탁에 둘러앉았다.

이른바 6자회담이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기대치가 달랐던 이유로 회담은 결코 타협점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대타협을 위한 지루한 회담은 꼬박 사흘 밤낮으로 이어졌지만 결과는 ‘6자회담 실패, 끝내 결렬’이었다. 어느 희부옇한 새벽 비서실의 3인은 몹시 초췌한 얼굴로 미네르바를 떠났다.

 

“비서실 사람들, 대단하더라고요. 놀아도 그렇게 잘 노는 사람들 처음 봤어요.

지치지도 않고 꼬박 사흘 밤낮 먹고 마시며 춤추는데, 나갈 때 보니까

후들거리는 다리를 제대로 추스르지도 못하더라고요.

덕분에 매상이 많이 올라 싫진 않았지만…”

 

회담이 결렬된 후 비서실장은 사장 부인을 전격적으로 방문했다.

비서실장이 부인을 어떻게 꼬드겼는지 몰라도 다음날 부인은,

홍지연의 사표가 아닌 타부서로의 재배치를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성명서는 금사장과 부인의 절묘한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금사장은 홍지연을 놓치기 싫어했고, 부인 역시 그녀를 회사에서 쫓아낸들

감시만 더 힘들어질 뿐 이렇다 할 이득은 별로 없었다.

 

“이 기회를 놓칠 홍지연이 아니었죠.

얄팍하게도 연봉의 재협상을 요구했고, 무려 연봉이 세 배 인상됐습니다.

홍지연은 흡족했고 대표님을 방문한 자리에서 신이 난 목소리로 브리핑을 했습니다.

내심 칭찬을 기대했는데,

대표님께서는 오히려 못마땅한 얼굴로, 너무 생각없이 섣부르게 결정한 게 아니냐,

한번 뿐인 인생 그렇게 막 사는 게 아니라며 따끔하게 혼쭐을 내시더군요.”

 

홍지연은 대표의 충고를 받아들여 직접적인 이해당사자 간의 개별회담을 재요구하는 서한을

금사장과 부인에게 인편으로 전달했다.

다시 지루한 과정이 반복됐지만, 그 결과는 대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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