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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시간표 24

오늘의 쉼터 2015. 6. 9. 16:20

그녀의 시간표 24 

 

 

 

“젊으나 늙으나… 스치듯 한 번이라도 본 3사내는… 그녀의 속살을 상상하죠.”

 

지배인의 지적은 예리하고 정확하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홍지연이 내게 던진 첫마디… 평생 잊혀지지 않을 겁니다.

‘여기… 신입사원 아직 뽑나요.’ 그녀가 이곳에 입사하기를 원했던 이유가 뭔 줄 압니까.”

 

나는 조금 어리둥절했다.

그럴 만한 간절한 이유가 있었을까.

지배인이 손목시계를 확인하더니 곧 뒷말을 이었다.

 

“세상의 온갖 유혹에 시달리기 싫어서… 귀찮았답니다.

대표님께서 직접 면접을 보았는데, 굉장히 솔직한 대답이라며 매우 흡족해 하시더군요.”

 

대학 1학년이 끝나고 그녀는 학교를 휴학했다.

처음 한동안은 그럭저럭 지낼 만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학내에 그녀의 존재가 소문으로 퍼졌다.

날파리들이 달라붙는 것이야 어쩔 수 없다지만,

그녀를 사이에 두고 하루에도 몇 번씩 빈번하게 폭력사태가 발생했다.

그녀를 목표로 정한 이들은, 선후배 동기 사제간이라는 구분을 깡그리 무시했다.

 

어느 날 총장이 비밀회합을 제의했고, 곧 학장들이 소집됐다.

총장은 하염없이 눈물을 뿌리며 피를 토하듯 열변을 늘어놓았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할밖에요. 여러분처럼 제 가슴도 찢어집니다.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참아내고, 견뎌내야지요.”

 

총장의 결연한 목소리에 모두들 가슴을 쥐어짰고,

그러다 누군가의 선창으로 하염없는 통곡이 이어졌다고 소문은 전한다.

하필이면 그날 기상이변으로 소낙비가 내렸는데,

다른 곳은 멀쩡한데 총장실만 심각한 홍수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조금은 부풀려졌겠지만, 총장과 학장들의 슬픔이 얼마나 컸는지는 미루어 짐작이 가능하다.

 

“총장이 대기업에 추천서를 써줄 테니, 학교를 그만둬 달라고 통사정을 하더랍니다.

홍지연은 순순하게 그리 하겠다고 대답했고, 총장의 강력한 추천이 먹혔는지

사흘 후에 출근을 시작했죠.”

 

하지만 그곳의 생활도 학교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녀는 회사로부터 상당한 금액을 제시받으며 명예퇴직을 권유받았다.

총장과 대기업 대표이사의 추천은 그 후로도 여러 번 반복됐고, 명예퇴직 역시 마찬가지였다.

덕분에 그녀는 회사생활 1년 만에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없다,

돈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라고 부자들은 호시탐탐(虎視耽耽) 허심탄회(虛心坦懷) 자주 하소연한다.

그녀 역시 그 심정을 그제쯤 이해할 수 있었다. 매일 펑펑 낭비와 사치를 일삼는데도 그녀의 돈은

어째 줄어드는 기미가 전혀 없었다.

써도 써도 줄지 않는 건 이 세상에 돈뿐이로구나.

깨달음이 있고, 그녀는 간절하게 일이 하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여길 찾아온 겁니다.

그녀에게 여긴 단순히 직장만이 아니었어요.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곳,

뭐랄까 파라다이스. 한마디로… 딱이었죠.

자랑하는 건 아니지만 이곳엔 홍지연과 비슷한 경험을 가진 여자들이 수두룩합니다.

대표님만 해도 젊은 시절 고통이 극심했었다고 하더군요.

대표님이 그러시는데, 당신이나 홍지연 같은 여자들은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이 희망이요,

꿈이랍니다. 하지만 어디 그게 쉽나요.

세상 남자들이 가만히 내버려두질 않는데…

이 말을 하면서 대표님께서 어찌나 눈물을 흘리셨는지…

귀찮았던 과거를 회상하는 것만으로도 고통이요 괴로움이라고 말씀하시더군요.

가만… 지금 시간이… 어라, 오 분 지났네.”

 

손목시계를 확인한 지배인이 느닷없이 내게 손바닥을 펴보였다.

 

“일분에 만원. 어떻게… 더 들을 거요.”

 

얼른 머리를 굴렸다.

다행히 내게는 12분의 여유가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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