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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시간표 26

오늘의 쉼터 2015. 6. 11. 23:50

그녀의 시간표 26 

 

 

 

 

그 인간은 걸핏하면 블록버스터 어쩌고저쩌고 떠벌렸고,

늘 한일 합작이라 으스대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줄거리는 국적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한국걸와 일본맨의 유체이탈 러브스토리.

한국에서의 촬영은 자신이 맡고 일본 쪽은 다른 감독이 책임지는 투톱체제였다.

듣기로 대작이었고, 적어도 6개월쯤 빡빡한 일정을 각오해야겠구나 싶었는데,

뜻밖에도 촬영은 불과 보름 만에 끝났다.

편집을 하느라 이틀을 보내고, 다음날 곧바로 시사회가 열렸다.

두 사람은 한껏 멋을 낸 이브닝드레스 차림으로, 지배인은 카드 할부로 구입한 정장차림으로

시사회에 참석했다.

 

“그날 그곳에 모인 사람 중 한국인은 우리가 유일했어요.

기자, 영화관계자, 관객들까지 모두 일본인이었죠.

특이하게도 남녀 모두 블랙 톤의 정장차림이었고, 객석에는 남녀로 가득 찼는데

언뜻 봐도 부부이거나 연인 같았습니다.

홍보사가 특별한 이벤트를 마련했다던데, 바로 이거였구나 싶더군요.”

 

일본에서 요즘 유행하는 머리 스타일이 그러한지 몰라도,

여자들은 납작하게 다리미질이라도 했는지 깻잎머리였고,

남자들은 짧게 머리칼을 쳐올린 스포츠형이었다.

사회는 일본의 유명 코미디언이라는 중년남자가 맡았다.

감독의 간단한 인사말이 끝나고, 다음으로 주연배우인 홍지연의 무대인사가 있었다.

그녀는 무대 중앙으로 사뿐사뿐 걸어 나갔고, 중세 유럽의 귀부인처럼 우아한 포즈로

객석을 향해 인사했다.

기자들이 앞 다투어 홍지연을 향해 카메라를 들이대며 연신 플래시를 터뜨렸고,

관객들 역시 엄청난 박수와 환호로 그녀를 반겨주었다.

 

“그 순간 팍 가슴에 와 닿는 것이 있더라고요.

월드컵 4강? 올림픽 메달리스트? 그것만이 애국의 길은 아니다 이겁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죠.

우리 세 사람은 이 영화 대박이 틀림없구나하고 나름대로 확신했고,

찢어진 입이 정확히 귀에 걸려 있었죠.

감독의 제안으로 우리는 전 재산을 영화에 투자한 상태였어요.

너무 기뻤어요.

너무 좋은 나머지 우린 거의 동시에 눈물을 뽑아냈죠.”

 

세 사람은 감정이 북받쳤고, 결국 엉엉 소리 내어 울고 말았다.

시사회장의 분위기가 잠시 숙연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래도 그들은 마냥 행복했다.

그들의 눈물은 기쁨의 표시였고, 밝은 미래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다.

 

종종 나이든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옛날이 좋았지, 라고. 살다보면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치거나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가끔은 경험하기 마련이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누군가는 외쳤다지만,

그건 현실을 도외시한 발언으로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일 뿐이다.

구멍이 뚫린 하늘을 보았다면 아마도 파괴된 오존층을 보고 그리 짐작했을 것이다.

 

홍지연에 뒤이어 제작사와 영화사의 대표를 맡고 있는 작달만한 키의 한 남자가 무대 중앙으로 나섰다. 그 순간 객석의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더니 구십도로 허리를 꺾었다.

그러면서 박자를 맞춰 일제히 뭐라고 지껄였는데, 그쪽 말을 조금 안다는 대표의 번역에 의하면

“오야봉 경축드립니다”라는 뜻이었다.

세 사람은 거의 동시에 낯빛이 싸늘하게 변했다.

뭔가 심상찮은 분위기였고, 불길한 예감이 찰나 머릿속을 질렀다.

 

“이봐요, 형사씨. 여기 들어올 때 입구에 붙여놓은 팻말 봤죠?

그 팻말에 뭐라고 적혀 있었는지 기억합니까?”

지배인이 꽤 심각한 표정으로 뜬금없이 물었다.

나는 미처 팻말을 보지 못했다.

“그래요? 햐, 궁금한 부분에서 딱 끓기네.

다음부턴 지갑에 돈 좀 넉넉하게 갖고 다녀요.

오늘은 여기까지. 다음에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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