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그녀의 시간표

그녀의 시간표 25

오늘의 쉼터 2015. 6. 9. 16:23

그녀의 시간표 25 

 

 

지갑에서 7만원을 꺼내어 주면서도 아깝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만한 가치는 충분했다.

이제는 돈을 건네받은 지배인이 다음 이야기를 맛깔스럽게 풀어놓을 차례였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일까?

잔뜩 이맛살을 구긴 채 지배인은 침묵으로만 일관하고 있었다.

시간은 돈인데, 이래선 안 되겠다 싶었다.

 

“대체 왜 이러는 거요?”

 

“이번 얘기는 15분짜리인데, 이러면 내가 손해 아닙니까? 꼼수부리지 말고 더 얹어봐요.”

 

어쨌거나 칼자루는 지배인이 움켜쥐고 있었다.

 

“…순 날강도로군.”

 

지갑 통째로 강도에게 건넸다. 그래봤자 3만원이 부족했다.

 

“추접하게 없는 사람 붙잡고 실랑이질할 수도 없고…

아, 12분으로 요약해서 말하면 되겠군. 질문은 사양이니 그리 알아요.”

 

한정된 시간에 많은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는 요령이 필요하다.

 

“홍지연이 영화를 찍었다고 하던데…”

 

“그건 어찌 알았을까? 몇 사람밖에 모르는 일급정보인데…”

 

지배인이 가만히 눈을 내리감았다.

지배인에게는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 눈꺼풀을 내리감는 묘한 버릇이 있었다.

 

“맞아요, 한때 영화배우였어요.”

 

고객 가운데 일본인 영화감독이 있었다.

웬만한 감독의 주머니사정으로는 발을 들여놓기조차 쉽지 않은 곳이 미네르바였다.

하지만 성공한 감독답게 그는 달랐다.

서너 번 드나들며 감독은 홍지연을 만났고, 그만 홀딱 빠져들고 말았다.

감독은 대표를 찾아가 홍지연을 캐스팅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즈음 대표는 인생의 쓴맛에 시달리고 있었다.

삼재에라도 걸렸는지 도통 술술 풀리는 일이 없었다. 대표는 신중하고 싶었다.

머뭇거리자 조급해진 감독이 히든카드로 대표의 동반출연을 제의했다.

 

귀가 솔깃했고, 대표는 지배인을 불러 영화감독에 대해 자세히 알아볼 것을 지시했다.

그즈음 지배인은 평수 넓은 아파트로 집도 옮겼고 차도 고급으로 바꾸었다.

포기하고 있었는데 무슨 복이 터졌는지 늦둥이까지 보았다.

대표의 은근한 지시를 받는 순간 그의 머릿속으로 ‘대박이다’ 메아리가 울리고 있었다.

대표는 한물갔어도 홍지연은 믿을 수 있었다.

어느 여배우와 비교해도 도무지 모자란 곳이 없는 그녀였다.

명함첩을 뒤적여 SW신문사의 영화담당기자에게 전화를 넣었다.

 

“박형, 쓰카모라는 감독에 대해 좀 아십니까?” “알다마다요.”

 

지배인은 조사랄 것도 없는, 늘 그랬듯이 전해들은 내용을 양념으로 버무려 대표에게 보고했다.

일본최고의 감독으로 차기작에 출연할 한국 배우의 캐스팅과 투자자 물색을 위해 겸사겸사

한국에 머무르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기분 좋은 보고에 한껏 고무된 대표는 그 즉시 감독에게 전화했다.

영화의 제목이 무엇이냐, 시놉시스를 보여달라,

출연진 섭외는 끝났느냐, 촬영일정은 어찌 잡혔느냐,

홍보는 어찌할 것이며 개봉관은 얼마나 확보할 수 있느냐,

제3국으로의 수출 가능성은 몇 퍼센트냐 등을 묻고 듣느라 제법 통화가 길어졌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몹시 흡족한 표정의 대표가 지배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쓴 것이 다하면 단 것이 온다…

고진감래(苦盡甘來)라고, 내가 그런 것 같아요.

고생했으니 이제 즐거움을 누려야죠.”

 

엇비슷한 시각, 아마도 일본인 감독 그 인간은 이런 일본 속담을 중얼거리고 있었을 것이다.

쓴 약에 익숙해진 사람은 독약조차 보약으로 믿는다.
 

'소설방 > 그녀의 시간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녀의 시간표 27   (0) 2015.06.11
그녀의 시간표 26   (0) 2015.06.11
그녀의 시간표 24   (0) 2015.06.09
그녀의 시간표 23   (0) 2015.06.09
그녀의 시간표 22   (0) 2015.06.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