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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시간표 9

오늘의 쉼터 2015. 6. 1. 23:30

그녀의 시간표 9
 

 

 

 

 

장미꽃 배달은 포기했다.

 

이메일을 통한 그림편지로 방법을 바꿨다.

 

돈이 절약된다는 측면에서 경제적이고,

 

무엇보다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기에 마음이 편안했다.

 

그러나 이 방법에 곧 회의가 느껴졌다.

 

그녀가 내 이메일을 읽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하루는 내가 들으라는 듯이 그녀가 이렇게 말했다.

 

“요즘은 스팸메일도 러브레터처럼 보내나 봐요. 짜증나 미치겠어요.”

 

그녀의 짜증을 일시에 없애주는 방법이 없을까.

 

그러다 퍼뜩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어미는 언젠가 아비가 보낸 러브레터의 두께만큼 사랑이 쌓였노라,

 

편지에 페르몬향수라도 뿌렸는지 뻔한 거짓말인 줄 알면서도 속고 말았노라 고백한 바 있었다.

 

물론 그에 대한 대가를 어미는 혹독하게 치렀다.

 

어미의 나이 겨우 서른 중반 즈음,

 

남편이라는 작자는 음주운전 교통사고로 저세상으로 떠났다.

 

이후로 모든 좋지 못한 결과의 원인은 죽은 아비의 몫이었다.

 

어미는 육두문자를 늘 입에 달고 살며 평생 아비를 원망했다.

 

유행이 돌고 돌듯 구애의 방법도 그다지 다르지 않으리라.

 

고전적인 방법이라 조금 미심쩍긴 했어도 시도해볼 만한 가치는 있었다.

 

그 즉시 인사과 여직원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홍대리의 집주소를 알려주면 평생 은인으로 모시겠다는 약속을 내용에 포함했다.

 

간곡한 표현이 여기저기 흔했기에 아마 거절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불과 몇 분이 지나지 않아 답장이 날아왔다.

 

―홍대리님… 일급 시크리트로 분류되어 있는데요.

 

저로선 접근이 불가능해요.

 

웬만하면 도와주고 싶었는데, 미안하네요.

 

일급 시크리트? 이 회사가 비밀 첩보기관이라도 된단 말인가?

 

산업스파이가 노릴 만한 대단한 기술이라도 보유하고 있어?

 

설령 그렇더라도 여직원의 집주소가 일급 시크리트라니?

 

여자의 적은 여자… 여자는 여자를 질투한다?

 

생뚱맞은 여직원의 변명을 나는 이렇게 해석했다.

 

위험하긴 해도 직접 러브레터를 전하기로 했다.

 

업무에 대한 질문이나 여자의 심리 상담 등 핑계거리는 많았다.

 

처음 얼마간 그녀는 당황해하며 어처구니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는 나의 지극한 정성에 감동했는지 순순히 러브레터를 받아주었다.

 

자신의 예정된 운명을 이제 거부하지 않기로 결심한 게야…

 

그녀의 변화를 나는 이렇게 분석했고, 하루는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데이트를 신청했다.

 

― 회사 뒤쪽에 개미슈퍼마켓이라고 있는데요,

 

퇴근하고 만나요. 오케이 신호로 키스를 날려주면 좋겠는데…

 

쪽지를 펼쳐본 그녀가 이맛살을 찡그렸다.

 

순간 불길한 예감이 머릿속을 질렀다.

 

내가 너무 성급했어. 아직 데이트는 무리인데… 하지만 섣부른 기우였다.

 

파티션 너머로 그윽한 눈길이 느껴졌고, 그녀가 입술을 오므리더니 쪽 키스를 날려주었다.

 

 

 

꼴깍. 침이 넘어갔다.

 

그녀와 나의 데이트하는 모습이 문득 눈앞에 펼쳐졌다.

 

거미줄에 걸려 바동거리는 여인에게 큼지막한 거미가 접근하고 있었다.

 

여인은 그녀였고, 침을 질질 흘리며 몹시 서두르고 있는 거미는 바로 나였다.

 

제발… 살려주세요.

 

그녀의 애원에도 쩝쩝 입맛만 다시다가 더는 못 참겠다는 듯 입을 쩌억 벌려 삼키려 하는 거미…

 

그 순간 어디선가 컬컬한 사자후가 들려온다.

 

…대가리 박을래, 커피 뽑아올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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