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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시간표 11

오늘의 쉼터 2015. 6. 4. 22:08

그녀의 시간표 11
 

 

 

 

 

 

 

 그녀는 한마디 변명조차 없었다.

 

죽음에의 공포에 시달렸던 나를 봐서라도 그래선 안 되는데,

 

적어도 패거리를 보낸 이유에 대해서는 설명이 필요했는데,

 

오늘따라 그녀는 묵언수행을 하는 비구니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그녀의 침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로서는 알지 못하지만 한편으로 몹시 걱정은 되었다.

 

그녀는 아침나절부터 손톱을 물어뜯는 등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문자를 보냈다.

 

채 1초도 지나지 않아 그녀의 핸드폰에서 짤막한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빨라도 너무 빨랐지만, 기술의 발전 속도는 늘 우리의 상상을 불허한다.

 

휴대폰을 확인한 그녀가 허둥지둥 사무실을 나갔다.

 

의아했다. 내가 보낸 문자메시지가 그토록 충격적이었나?

 

휴대폰에 저장된 문자메시지를 다시 확인해보았다.

 

‘당신을 사랑한다는 건 제게 고통입니다.

 

그래도 당신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신의 명태.’

 

“어이!”

 

팀장이 손짓으로 나를 호출했다.

 

“쇼킹한 걸… 성 취향이 꽤 독특해. 자네야… 충격으로 받아들이겠지만…

 

알다시피 난 결혼했고, 또 거 뭐시냐… 난 이성애자야.

 

어차피 안 될 사람인데 괜히 찝쩍거리지 말고 차라리 커밍아웃을 하는 게 어때?”

 

느닷없이 웬 커밍아웃? 항명의 의미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시치미 떼긴… 군출신에다가 카리스마 넘치고… 그러니 마음이 끌렸겠지.

 

아무리 그래도 취향이 다른데 곤란하지 않겠어?”

 

눈을 더욱 동그랗게 만들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팀장이 쯧쯧 혀를 차더니, 자신의 휴대폰 화면을 내게 들이밀었다.

 

“이거 당신이 보낸 문자 맞지?”

 

내 손가락을 분질러버리고 싶었다.

 

이런 엄청난 실수를 하다니! 팀장이 팀원들에게 소리쳤다.

 

“마명태씨가 지금 심각한 정체성 혼란상태입니다.

 

다들 바쁘겠지만 따뜻한 동료애로 그에게 도움을 줬으면 합니다만….”

 

그것이 신호였다.

 

무리가 협공으로 나를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눈빛은 어떤 사명감으로 번득였는데,

 

협박과 강요와 회유, 나중에는 세뇌교육도 마다하지 않았다.

 

“요즘 경찰들 참 편하게 월급 먹는 것 같아.”

 

“아무래도 우리라도 나서서 공무원들 일거리 좀 만들어줘야 하는 거 아냐?”

 

“우리나라 민주국가?”

 

“흥, 우리 회사는 아직 80년대야.”

 

“오늘 80년대식 폭력이 어땠는지 구경시켜줘?”

 

“그러지 말자. 폭력 써서 실토 받으면 너도 우리도 쪽팔리잖아.”

 

“이봐, 쉽게 가자. 응?”

 

“나 마명태는 동성애자요, 이것만 인정하면 모든 게 간단히 끝나잖아.”

 

그들의 지능적이고 세련되고 잘 훈련된 팀플레이는 정말 대단했다.

 

당장 끔찍한 변고가 내 신상에 발생할 것 같은 위기의식을 느꼈고,

 

나는 냅다 사무실에서 도망쳐 나왔다.

 

계단참에 이르러서야 겨우 저들의 동향을 살폈는데, 다행히 쫓아오는 낌새는 없었다.

 

나는 안도하며 담배를 찾아 입에 물었다.

 

하지만 담뱃불을 붙이지 못하고 손을 멈춰야 했다.

 

아래층 계단참에서 두런거리는 남녀의 대화소리가 들려왔다.

 

장담컨대 여자의 목소리는 홍대리였다.

 

슬쩍 고개를 내밀어 아래를 살폈다.

 

그녀의 얼굴이 반쯤 보이는 반면 사내는 윤기로 번들거리는 구두코만 조금 엿보였다.

 

‘저 사내… 누구지?’

 

분위기가 자못 심각했다.

 

설마… 새로운 연적의 출현? 분위기가 왜 저래? 뭐야,

 

이미 사고라도 친 거야? 갑자기 울화가 치밀었다.

 

저놈을 당장… 으득 어금니가 깨물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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