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시간표 10
슈퍼마켓이 문을 닫은 지 얼마 후 아예 사람의 발길이 끊어졌다.
그녀는 아직 오지 않고 있었다.
대체 얼마를 더 기다려야 그녀를 만날 수 있을까.
그녀가 오긴 오는 것일까.
차오른 낙엽이 비웃듯 자꾸 무릎께를 건드렸다.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 이만저만한 고충이 아니다.
거기에 춥고 허기까지 졌으니 고충이 오죽할까.
그래도 이런 것쯤 두 눈 딱 감고 견뎌내면 그만이다.
가엾게도 나는 떨고 있었다.
저것들, 나를 포위한 저 무리들…. 나는 머리칼이 꼿꼿하게 서 있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 이곳을 벗어나고 싶지만, 감히 그럴 수가 없었다.
발을 떼고 싶어도 오금이 저려 도무지 가능하지가 못했다.
나를 제외하고 또 다른 생명체가 있었다. 놈들은…. 밤의 제왕 고양이였다.
그들은 내 존재 따위 안중에도 없다는 듯 행동에 거침이 없었다.
어둠속을 어슬렁거리다 갑자기 사나운 이빨로 위협했고,
그때마다 나는 오싹오싹하니 소름이 끼쳤다.
사람들은 모르고 있었다.
고양이에 대한 사람들의 지식은 거의 전부가 엉터리였다.
고양이들은 사람들을 까맣게 속이고 있었다.
내 연약한 살가죽은 언제든 갈기갈기 찢어질 수 있었다.
놈들은 호랑이나 표범이나 살쾡이와 같이 어엿하게 맹수였다.
아아, 끔찍해라….
먼 훗날, 역사가들은 나의 죽음을 어떤 식으로 기록하고 있을까.
고양이에게 사냥 당한 최초의 인간?
나의 참혹한 시체사진이 내일아침 신문 1면 톱을 장식하는 것은 아닐까.
고양이들은 포수처럼 당당한 폼으로 내 주위에 서 있겠지.
이런 일이 생길 줄 알았으면, 무겁고 귀찮더라도 계속 자전거체인을 갖고 다니는 건데….
하지만 당장은 죽음을 염려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놈들은 탑돌이라도 하는 듯 뱅글뱅글 내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경건하고 엄숙한 것으로 보아 마치 제(祭)라도 지내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러나 아무것도 장담하지 못하는 것이 지금의 나의 처지였다.
아직은 멀쩡한 육신이 유지되고 있지만,
처참한 몰골로 언제라도 바뀔 수 있는 것이 나의 모습이었다.
이 모든 건 내가 아닌 놈들의 의지가 결정하는 문제였다.
의식이 끝나고 놈들의 한 끼 식사꺼리로 전락되는 것만은 피하고 싶은데
원한다고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이러저러 시름이 깊어졌다.
불안하고 두려워 눈앞이 캄캄하다.
그러다가 문득, 이 끔찍한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묘안이 떠올랐다.
“거기… 119죠? 저는 사람인데요…. 고양이들이… 막 나를…”
불현듯 눈물이 뺨을 타고 미끄러졌다.
첫 데이트에 대한 기쁨을 만끽하기는커녕 죽음의 공포 속에서 허우적거리게 만들다니,
고양이처럼 사뿐사뿐 내게로 걸어오길 바랐는데 도리어 패거리를 보내어 날 위협하다니…
그녀가 원망스러웠다.
119대원들이 도착했다.
맨 앞에 선 대원이 캠코더 플래시로 나를 비추며 이렇게 말했다.
“아, 좋아요… 그대로… 롱테이크니까 좀 참으세요.”
“캠코더 저리 치워요! 언론사에 그거 돌렸다간 그 즉시 명예훼손으로 고소할 거요. 알겠어요?”
나의 협박에도 캠코더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미간을 좁히며 제 불만을 터뜨렸다.
“거 참, 촬영에 협조 좀 합시다. 포즈가 그것밖에 안 나와요.
지금 목숨이 간당간당한 위급상황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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