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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시간표 6

오늘의 쉼터 2015. 5. 31. 22:18

그녀의 시간표 6


 

 

 

 

가죽장갑을 손에 끼우고 손깍지를 했다.

 

장갑이 빈틈없이 손가락에 찰싹 달라붙었다.

 

가슴이 방망이질 치며 전의가 불타올랐다.

 

이웃집 형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자전거 체인은 똬리를 튼 뱀처럼 보였다.

 

부디 뱀처럼 녀석들을 질겁하게 만들기를….

 

체인을 손에 움켜쥐고 한쪽 손목에 두 바퀴를 돌려 감았다.

 

결심을 다지듯 양손에 힘주어 순간 ? 옆으로 펼쳤다.

 

팽팽하게 늘어난 체인을 보자 자신감이 커졌다.

 

마지막으로 주먹 쥔 손으로 퉁퉁 배를 두들겼다.

 

여자들이 코르셋을 하면 이런 느낌이겠지.

 

처음에는 영 어색하더니 이제는 제법 몸에 익숙하다.

 

누군가의 주먹이 배를 노려 찔러온다 해도 아마 큰 충격은 없을 것이다.

 

됐어!

 

모든 준비는 끝났다. 이제는 기선제압이다.

 

기선을 제압하면 승부는 이미 끝난 거야…. 이웃집 형의 충고였다.

 

눈빛이 중요해. 절대 눈싸움에서 지면 안 돼. 하지만…

 

아아, 나로서는 가능하지 못한 일이다!

 

눈빛이 마주치면 건방지다고 했고, 반대로 쳐다보지 않으면 수업에 집중하지 않는다며

 

몽둥이를 휘둘렀다.

 

이래도저래도 맞을 수밖에 없었던 수업시간,

 

그 무참한 6년의 세월을 어떻게 무사히 끝마칠 수 있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대견하고 신기하다.

 

차라리 눈을 감아버려? 마구잡이로 휘두르다보면 재수없는 누군가는 맞을 테고,

 

그렇게 되면 지레 겁을 집어먹고 앞다투어 살려달라고, 목숨만은 제발 살려달라고

 

설설 매달리지 않을까?

 

는 링 안에서 헐떡거리는 권투선수도 아니요,

 

무대에서 웃고 울며 화내는 팔색조의 배우도 아니었다.

 

그저 바라보며 ‘겨우 저 정도밖에 못해’라고 비꼬기만 하는 관중이요 관객이었다.

 

그 정도가 내 분수에 적당했다.

 

에라, 될 대로 되겠지…. 두 눈을 질끈 감고, 체인을 빙글빙글 돌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한 놈 딱 한 놈만 걸려라,

 

이런 심정이었다.

 

체인에 맞아 한 놈이 아이코 비명을 지르며 고꾸라지면, 무표정한 얼굴로 억양 없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니들 목숨은 내게 달렸어. 사람이 좋다고 언제까지 좋은 게 아냐…. 다들, 대가리 박아.”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일까. 이제쯤 누군가는 체인에 맞아 비명을 질러야 하고,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면서 고통을 호소해야 하는데,

 

그래야 준비한 다음 대사도 지껄일 수 있는 것인데,

 

난데없이 까르르 웃음소리라니? 웃음에 섞여 간간이 박수소리가 흘러나왔다.

 

차력쇼를 준비하려고 지각했나보네? 저 친구, 보기보다 정보가 빠른데요.

 

홍대리가 좋아하면 됐지, 뭐…. 송과장이 섭섭하겠어요.

 

차력쇼는 송과장 전매특허잖아요…. 예상이 빗나갔다.

 

“이름이 뭐예요?”

 

그녀는 심청이였고, 나는 심봉사였다.

 

그녀가 내 이름을 물었을 때 두 눈이 번쩍 떠졌다.

 

세상에나,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이라니! 입이 쩍 벌어졌다.

 

“운동을 좋아하나 봐요?”

 

느닷없이 그녀가 한 손을 불쑥 내밀더니 명치부터 배꼽까지 주르륵 훑었다.

 

“어머나, 딱딱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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