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그녀의 시간표

그녀의 시간표 7

오늘의 쉼터 2015. 6. 1. 23:16

그녀의 시간표 7


 

 

 

 

 

회식이 있었다.

 

공주를 위해 신하들은 나이와 직급을 불문하고 갖은 장기를 뽐냈다.

 

팀장은 안쓰러운 몸매로 헐렁한 브레이크댄스를 시연해보였고,

 

차장은 기가 차지도 않는 로봇 춤을 선보였다.

 

비쩍 마른 박대리와 덩치가 곰 같은 강대리는 듀엣으로 노래를 불렀는데,

 

듣기에는 제법 그럴싸했다.

 

키가 큰 송과장은 뜬금없게도 차력시범을 보여주었다.

 

아마도 내게 영향을 받은 바 있었던 모양인데,

 

마시다 만 맥주병을 쳐들고 머리로 깨부수는 통에 잠시 실내가 소란스러웠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그다지 괘념치 않아 했다.

 

그는 홍대리가 깜짝 놀란 눈으로 바라봐준 것만으로 흡족한 것 같았다.

 


나는 살폿살폿 엉덩이를 흔들며 싱겁게 박수만 쳐주었다.

 

잡기로는 영 재주가 없는 사람이 나였다.

 

하지만 우연인 척 그녀와 자주 눈을 부닥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내 상식으로 적어도 이 방법이 여자에겐 최고였다.

 


파티는 클럽에서 노래방으로 이어졌다.

 

그때까지 그녀는 왜 자신이 공주인지를 신하들에게 증명해주지 않고 있었는데,

 

노래방에 와서야 자신의 진가를 유감없이 확인시켜 주었다.

 


“사실은 컨디션이 좀 그랬는데요,

 

너무 정성으로 환영하시니 이제라도 보답해야 할 것 같아요…”

 


그녀의 공연이 선언되자 신하들이 바빠졌다.

 


팀장과 차장은 거의 동시에 넥타이를 풀더니,

 

머슴처럼 머리에 둘러매고 끝을 당겨 단단히 조였다.

 

다른 팀원들도 나름대로 준비를 챙겼다.

 

분위기 탓에 나도 뭔가 준비를 해야 했다.

 

마침 내 옆에 나뒹굴던 탬버린이 있었고,

 

그것을 집어 드는 것으로 준비를 끝냈다.

 


그녀는 인도의 무희처럼 먼저 손가락을 워밍업시켰다.

 

그녀의 엄지와 인지 손가락이 부드럽게 가슴 쪽으로 흐르더니,

 

블라우스의 단추 두 개를 시원하게 풀었다.

 

와우! 주책없이 송과장이 환호성을 질렀다.

 

음악이 흘러나오고, 이윽고 그녀의 상체가 흐느적흐느적 물결치기 시작했다.

 

그녀의 가슴살이 파도처럼 오르락내리락 수없이 반복했다.

 

신하들은 침묵한 채 그녀의 율동과 노래에 흠뻑 빠져들었다.

 


그녀의 무대로서 노래방은 비좁았다.

 

그래도 그녀는 유감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주었다.

 

남자들은 더없이 만족하고 행복해했다.

 

그녀는 완벽했다.

 


나는 그녀와 나의 운명을 확신했다.

 

그녀에게 그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주위를 둘러봤지만 꽃은 한 송이도 보이지 않는다.

 

그때 시야에 잡힌 것이 있었다.

 


검정의 가죽장갑을 손에 받쳐 들고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캔맥주를 홀짝거리던 일행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로 쏠렸다.

 

그녀 역시 일행과 나를 번갈아보며 조금은 당황해하는 눈치였다.

 


“내 사랑… 징표예요…”

 


가죽장갑 한쪽을 그녀의 손에 쥐어주고, 나머지 한쪽을 정성껏 내 가슴속에 갈무리했다.

 


“이런 또라이…”

 


어디선가 캔맥주 깡통이 날아왔고, 정확히 내 미간을 맞히더니

 

바닥에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험난한 여정이 시작됐구나, 고통으로 직감했다. 

 


 

'소설방 > 그녀의 시간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녀의 시간표 9  (0) 2015.06.01
그녀의 시간표 8  (0) 2015.06.01
그녀의 시간표 6  (0) 2015.05.31
그녀의 시간표 5  (0) 2015.05.31
그녀의 시간표 4  (0) 2015.05.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