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장군의 아들

제2부 黑龍의 飛翔-혼돈 78

오늘의 쉼터 2014. 8. 27. 12:41

제2부 黑龍의 飛翔-혼돈 78

 

 

 

흘레나 달기똥구멍이나, 별명치고는 해괴망측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

흘레는 원래 서울의 명문교라 할 청운소학교(靑雲小學校) 출신으로,

인왕산록 누상동(樓上洞)에 살았다.

필자 자신이 등장하여 송구하지만 필자 역시 청운 출신으로,

누상동과 큰 길 하나를 사이에 둔 옥인동(玉仁洞)에 살았었으므로,

흘레와는 어려서부터 잘 알고 있었다.

필자보다 나이가 네댓은 위의 선배 격이었지만,

개고기 골목대장이었으므로 동네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흘레라는 해괴망측한 별명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덴만규(天滿宮)’라는 어마어마한 별명을 가졌었다.

덴만규란 남산에 있는, 일본의 사찰 같은 곳의 하나다.

당시 서울의 각 소학교에서는 습자(習字: 서예)에 능한 학생들의 작품을 뽑아

덴만규에 출품하여 입선을 하면 여기에 전시되었다.

덴만규에 입상을 하면 큰 명예로서, 가슴에 사꾸라(벚꽃) 배지를 달고 다녔다.

흘레는 어려서 서예에 재능이 있어 덴만규에 뽑혀 여봐란 듯이

가슴에 벚꽃 배지를 달고 다녔던 것이다.

그것이 그에게는 큰 자랑이어서, 항상 ‘덴만규, 덴만규’ 하고 외다시피 하고 다녀,

덴만규란 별명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집안이 넉넉할 것은 없었지만 구차하지도 않았고,

명문가라 할 수는 없어도 버젓이 김씨 성을 가진 뼈대 있는 집안이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어머니가 자식을 남겨둔 채 개가하고 난 다음,

천성인 개고기의 본령을 발휘하여 주먹패로 흘러버리고 만 것이다.

키나 체격은 크지 않았고, 주먹패답지 않은 예쁘장한 얼굴에 동작이 민첩하고 부지런하였다.

후에 권투 선수가 되었지만 무슨 급에서 얼마만큼 활약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가 언젠가 우리 동네에 권투 글러브를 들고 나타나서

어린 꼬마들에게 반강제로 권투를 시키는 것이었다.

필자 자신도 그의 협박적인 강제로 하여, 난생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권투 글러브를 손에 끼고 난타전을 벌였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가 덴만규에서 어떻게 해서 흘레로 별명이 바뀌게 되었는지 또한 모른다.

듣건대, 바로 김두한이 붙인 별명이라는 것이다.

그는 원래 얼굴도 예쁘장하게 잘생긴 데다가 붙임성이 있고 부지런해서

여자가 많이 따랐고, 그 자신도 몹시 여자를 좋아했던 듯싶다.

치마만 두르면 절구통도 마다하지 않았다.

여자를 가리지 않고 섭렵하다가 그만 동성동본의 여자를,

그것도 겁탈하다시피 가졌다는 것이다.

거기서 그쳤으면 좋을 것을, 이를 동료 건달패에 자랑을 했고

그것이 그만 김두한의 귀에까지 들어간 모양이었다.

남달리 씨족 관념이 강한 김두한이었다.

“이놈아! 개하고 흘레를 붙을 것이지 동성동본의 일가 여자를 겁탈해?

네놈이 안동 김씨가 아닌 게 천만다행이닷!”

보기 좋게 주먹 한 방을 터뜨렸다는 것이다.

그때부터 그는 흘레란 별명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럼 달기똥구멍은 또한 어떠한가?

 

달기똥구멍.

해괴하다기보다, 코믹한 별명이어서 절로 웃음이 난다.

흘레나 달기똥구멍 같은 별명을 가진 건달만을 잘 알고 있어서 좀 민망하지만,

필자는 달기똥구멍도 어려서부터 잘 알고 있다.

그는 흘레보다 나이는 한두 살 위였을 것이다. 그러나 둘은 단짝이었다.

흘레가 청운 출신인 것에 비해, 그는 같은 인왕산록의 명문인 매동(梅洞) 출신으로,

지금도 있는 내자(內資) 아파트에서 가까운 금교(禁橋) 근처에 살고 있었다.

아버지가 고물상을 하고 있어 궁색한 집안은 아니었고, H상업학교의 물도 먹었다.

졸업은 하지 못한 것으로 안다.

날씬한 키에 싸울 때면 휙휙 날았다고는 하지만, 싸우는 것을 직접 목격한 일은 없다.

그는 아직은 흘레란 별명이 붙기 이전인 덴만규를 찾아 자주 우리 동네에 놀러 왔었다.

올 때면, 아버지의 고물상에서 훔쳐왔을 것이 분명한 엽전을 호주머니 안에

가득히 갖고 와서 아이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당시 엽전은 지금처럼 귀하고 비싸지는 않았지만 아이들에게는 인기였다.

엽전에 미농지(美濃紙)를 말아 제기를 만들어 찼기 때문이다.

늘씬하고 잘생긴 얼굴인데 어떻게 해서 달기똥구멍이란 별명이 붙었는지 모른다.

당시의 그를 기억하는 이의 증언에 의하면 두 가지 설이 있다.

그는 남달리 순정파이고 격정이 사나이였다고 한다.

조그만 일에 감동도 잘하고,

감동을 하면 좋은 일이거나 슬픈 일이거나 눈물을 잘 흘렸다고 한다.

한번 울 때면 엉엉 소리내어 울 뿐만 아니라,

눈에서 달기(닭의) 똥 같은 굵은 눈물 방울을 뚝뚝 흘렸다고 한다.

그것이 그런 별명을 갖게 된 까닭이라는 것이다.

또 하나는, 커서 머리를 기른 다음 손질을 하지 않아

언제나 수세미 같은 머리를 하고 다녔으며,

잠에서 깨어나면 뒷머리가 베개에 짓이겨져 흡사 닭의 똥구멍처럼

엉켜 있대서 붙여진 별명이었다는 것이다.

이러나저러나 소년 시절의 필자는 흘레나 달기똥구멍처럼 기운이 세고

싸움을 잘하는 자는 없는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위에는 또 위가 있는 법이어서,

종로패에 들어서서는 똘마니급에서도 하바리에 지나지 않았다.

종로꼬마 밑의 머리 빠진 개고기,

 그 머리 빠진 개고기 밑의 꼬붕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러나 군대에 장군이 있고 장교가 있으며, 또한 졸병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주먹패에서도 똘마니급들은 매우 귀중한 존재였다.

흘레나 달기똥구멍은 그래도 자기 앞가림을 할 만한 힘을 갖고 있고,

워낙 날쌔고 부지런해서 매우 쓸모가 있는 일꾼들이었다.

종로꼬마가 이들을 자전거 보관소의 관리원으로 발탁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응, 너희들, 이제부터 수고가 많겠구나. 잘들 해봐.”

김두한은 황송해하는 그들의 앞으로 다가가서 어깨까지 쳐주었다.
 
중앙우편국 자전거 보관소에서 걸음을 옮겨 다시 조선은행 앞 광장으로 나온

김두한은 감개가 무량했다.

백화점 미쓰꼬시, 중앙전화국, 신축의 장관을 자랑하는 저축은행 본점,

남대문으로 통하는 남대문통(南大門通)은 경성의 월가라 할 만큼 은행을 비롯한

고층 건물이 하늘을 찌르고 있지 아니한가.

조선상업은행, 백화점 죠지야(현 미도파), 야스다 은행(安田銀行), 식산은행(현 상업은행),

경성전기, 지요다(千代田) 빌딩, 총독부 도서관, 이 밖에 제각기 현대 건축미를 자랑하는

대소의 건물들.

이 건물을 끼고, 일본인이 번영을 누리고 있는 혼마찌, 메이지, 아사히마찌가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실로 경성의 실질적인 심장부인 것이다.

경성의 노른자위인 이 지역은 완전히 일본인의 장악하에 있는 것이다.

이 중심부를 장악하지 못하고 어떻게 서울을 장악했다 할 수 있겠는가.

종로만을 장악한 것으로 만족할 수 없다.

서대문과 마포와 동대문과 시구문 밖에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고 해서,

안심하고 숨을 돌릴 수는 없다.

바로 일본인의 중심부이며 서울의 심장인 이 지역마저 반드시 틀어쥐어야 한다.

그것은 김두한의 의지이며 염원이었다.

한갓 중앙우편국 자전거 보관소 일각에 발을 들이고서,

가슴이 뿌듯해지고 흐뭇한 감개를 느끼게 되는 것은

그 의지와 염원이 마침내 이루어질 듯한 서광이 보였기 때문이다.

이 지역에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마침내 마련했기 때문이다.

교두보를 확보한 셈인 것이다.

“정말 고마운 일이군. 이 노른자위를 우리에게 선선히 내주다니…….”

김두한은 혼잣말처럼 옆에 있는 종로꼬마에게 말했다.

그러나 종로꼬마는 이에 대꾸하지 않았다.

수표교 싸움의 승리의 대가로는 너무 작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김두한이 너무 작은 일에 감격을 잘하는 것에 오히려 불만스러운 마음을 갖고 있었다.

“고맙다고 인사나 하러 가자구.”

김두한이 걷기 시작했다. 부하들이 우르르 뒤따랐다.

이만한 일로 하야시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러 간단 말인가. 그건 시기상조였다.

하야시가 자전거 보관소 운영권을 건네준 대가로 앞으로 무엇을 요구해 올지 모르는데,

벌써부터 답례의 인사를 가다니.

종로꼬마도 김무옥도 그 뜻을 알았다면 망치나 심청, 그 밖에 누구라도 불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김두한 자신만은 하야시와의 협상의 대가가 무엇인가를 알고 있는 것이다.

그는 그것을 실행할 작정으로 있는 것이다.

그 결심을 알고 있는 것은, 그 협상의 자리에 입회했던 김동회뿐이었다.

김동회는 김두한의 의중을 알고, 하야시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가겠다는 것을

기쁘게 찬성하며, 자진해서 안내를 맡으려고 나섰다.

그러나 김두한의 발은 혼마찌와는 정반대 방향인 남대문 쪽으로 향해 가는 것이었다.
 
“아니, 두한아. 어딜 가는 거지?”

보폭이 넓은 김두한의 빠른 걸음에 종종걸음으로 따라붙은 종로꼬마가 물었다.

하야시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러 간다면서,

김두한은 정반대 방향인 남대문 시장 쪽으로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대문 시장.”

“남대문 시장엔 뭣 하러?”

“호오따이를 만나러.”

“호오따이?”

“그래. 이제까지 자신이 관할하고 있던 자전거 보관소를

우리에게 빼앗겼으니 얼마나 억울하겠냐?

고맙다고 인사를 가는 것이 우리의 의리일 것 같아서 말야…….”

그러고 보니, 김두한이 고맙다는 인사를 가겠다는 것은 혼마찌깡의 하야시에게가 아니라,

호오따이에게였던 모양이다.

남대문 시장. 남대문 시장은 동대문 시장과 함께 서울 장안의 양대 시장이었다.

동대문 시장이 ‘배우개장’이라 불렸던 것에 비해 남대문 시장은 흔히 ‘남문안장’

또는 ‘신창안장’이라고 불렸다.

또한 동대문 시장은 그저 ‘광장(廣藏)’이라고 불리기도 했었다.

그것은 포목상으로 거부였던 종로 상인 박승직(朴承稷)·장두현(張斗鉉)·최인성(崔仁成)·

김한규(金漢奎) 등이 설립한 광장주식회사에 의해 운영되는 시장이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종로 상인을 중심으로 한 순수한 민족 자본에 의해서 설립된 시장이었던 셈이었다.

그러나 이에 비해 남대문 시장은 사정이 좀 달랐다.

남대문 시장은 1921년 ‘조선농업주식회사’의 설립과 함께 시작되었다.

1907년에 성립되었던 이완용 내각의 내무대신(內務大臣) 송병준(宋秉畯)이 설립한

부동산 금융 회사로, 표면에 나타날 수 없는 송병준 대신 그의 장남인 송종(宋鍾)이 사장으로,

차남이 전무로 앉은, 주식회사라기보다 가족 회사인 셈이었다.

그러나 1922년에 이르러 남대문 시장의 경영권은 ‘조선농업’에서 ‘중앙물산’으로 넘어갔다.

중앙물산은 공인 자본금 90만 원, 불입 자본금 22만 5000여 원의 일본인 회사였다.

회사의 설립 목적도 바로 남대문 시장을 경영하는 것이었다.

시장의 경영권이 일본인 회사로 넘어가게 되자,

1936년 일본인들은 남대문 시장이란 명칭조차 말살하고 회사명을 ‘중앙물산 시장’으로

고쳐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이 시장에 출시, 판매하는 조선인 상인이나 수매자들은

그냥 그대로 남대문 시장이라 불렀던 것이다.

물론 남대문 시장 안의 대부분의 상인들은 조선 사람들이었지만 일본 상인들도 적지 않았고,

시장의 운영권이 일본인에게 있었으므로 일본인의 입김이 강했던 것은 오히려 당연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특히나 시장 근처 아사히마찌 일대는 일본의 고급 요정, 고급 음식점이 많았다.

때문에 일본 기생이 많이 살고 있어 늘 일본인들이 많이 꾀어들었고,

그 가운데는 권력층인 총독부 고관들도 많았다.

이런 고관급들이 오는 날이면 일본 주먹패들이 삼엄한 경비를 펴,

조선 사람들은 근처에 얼씬도 못 했다.

이것은 솔직히 김두한의 분통을 건드리기에 너무나 충분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뿐만이 아니었다.

사촌이 논을 사도 배가 아프다는데,

그 규모가 큰 남대문 시장의 이권을 바로 눈앞에 놓고 군침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남대문 시장 자체도 탐이 나기는 했지만,

그보다도 남대문 시장을 통해 일본인의 유흥가 아사히마찌를 장악하고 싶었던 것이 속셈이었다.

종로패의 규모는 커지고 부하들의 숫자도 늘어났다.

이제 방대해진 조직의 활동비는 종로 야시장의 경비금(警備金)이나

일부 상인들의 상납금만으로는 충당하기 어렵게 된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지 두둑한 돈주머니를 틀어쥐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본인 유흥가를 장악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김두한이 자전거 보관소에서 남대문 시장 쪽으로 발길을 돌린 것은 이 때문이었다.

물론 그가 한번 남대문 시장에 발을 들였다고 해서 당장 그곳을 장악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기회에 남대문 시장의 사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호오따이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러 간다는 것은 좋은 구실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미 밝힌 대로 남대문 시장의 세력을 잡고 있는 것은,

주먹에 가죽 장갑 대신 항상 흰 붕대를 감고 다녀 호오따이란 별명을 가진 그 사나이였다.

당시, 조선 사람이면서 밥 먹고 살기 위해 일본인의 하수인이 되어

그들 편에 선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호오따이도 결국은 일본인의 중앙물산에 고용된 주먹패의 두목이었다.

그는 고용주인 중앙물산의 간부들의 신변 보호와 시장 내 상인들의

신변을 보호해 주는 명목 아래 얼마만큼의 돈을 받았다.

심지어 지게꾼의 자리를 소개해 주거나 잡일을 알선해 주고 돈을 받기도 했다.

결국 지게꾼이나 잡상인들도 호오따이 휘하의 주먹패들의 승인 없이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었고, 그만큼 시장 내의 그의 세력은 절대적이었던 것이다.

지게꾼조차 주먹패에 상납을 해가면서 자리를 얻게 되는 것이었지만,

그 자리라는 것이 또 문제였다.

어느 자리나 일거리가 많은 것이 아니어서,

지게꾼들은 좋은 자리를 놓고 항상 다투게 되는 것이었다.

서로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다가 때로는 커다란 싸움으로 번지기도 하는 것이었다.

김두한이 많은 부하들을 거느리고 남대문 시장으로 들어섰을 때도

공교롭게 지게꾼들의 자리다툼이 크게 번지려 할 때였다.

김두한과 싸움은 그만큼 숙명적인 인연이 있었던 것인지 모른다.

그는 싸움이 있는 곳에 항상 뛰어들기도 잘하지만,

싸움 편에서 그를 숙명적으로 불러들이는 것인지도 몰랐다.

보아하니 싸움은 일본인 지게꾼과 조선인 지게꾼과의 싸움이었다.

일본인 지게꾼이 일본 주먹패의 힘을 등에 업고 조선인 지게꾼의 자리를

 빼앗게 되어 싸움이 비롯된 모양이었다.

“우리도 못 벌어먹을 바에야 네놈들도 여기선 못 벌어먹어!”

조선인 지게꾼들이 일본인 지게꾼에게 시비를 걸어,

바야흐로 일대 격전이 벌어지려는 때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