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장군의 아들

제2부 黑龍의 飛翔-혼돈 77

오늘의 쉼터 2014. 8. 27. 12:39

제2부 黑龍의 飛翔-혼돈 77

 

 

민자의 입에서 흐느낌과도 같은 얕은 신음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그것이 생리적으로 저절로 터져 나온 것이라기보다

여자의 농염한 기교인 것처럼 들렸다.

이에 김두한의 기분은 오히려 자극이나 흥분보다도 뒤틀려오는 듯했다.

그러면서도 그 작은 육체는 영글 대로 영글어서 손이 닿기만 해도

탁 터져버리는 봉선화의 씨주머니와 같은 정열보다도,

아직 덜 영근 콩깍지에서 덜 영글어 까내는 것 같은 풋풋하면서도

비릿한 내음이 나는 것만 같았다.

이를 의식하면서, 그녀와 더불어 이불을 들썩거리고 있는 자기 자신에게서

일찍이 발견하지 못한 잔인성을 보는 듯싶었다.

그것은 살이 찢기고 뼈가 부러지고, 피로 피를 씻는 어떠한 싸움판에서도

느껴보지 못한 잔인성인 것만 같았다.

산 채로 닭털을 북북 뜯어내는 것과도 같은…….

그것이 일종의 죄책감을 가져다 주는 듯도 싶었다.

동시에 이 작은 여체가 풍기는 가련함도 가져다 주었다.

이 여자는 무엇 때문에 이 어린 나이로 정도 사랑도 없는 남자에게

쉽사리 무릎을 열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그는 그 가련한 여자를 동정했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 서투르지가 않은 이 여자와, 이 여자를 이토록 길들인

뭇 남자들에게 질투와는 색깔이 다른 증오감을 느꼈다.

“민자, 민자라 했지? 너 대단한 솜씨로구나?

도대체 몇 놈의 남자로부터 몇 번이나 했기에…….”

그는 술기가 되살아 오른 주정뱅이처럼 뇌까렸다.

피를 보면 더욱 감정이 거칠어지고 더욱 잔인해질 수 있는 것처럼,

기왕 잔인한 남자가 된 이상 더욱 가학해 주고 싶은 짓궂은 심사와도 같았다.

민자는 짓눌린 상태에서 가만히 한숨을 몰아쉬었다.

눈을 감은 채 장님처럼 동공을 뒤룩거렸다.

“누가 그러던데……, 입을 맞추면서 키들거리는 여자처럼 불성실한 여자는 없다구요…….”

“그래서?”

그 말뜻을 몰라 그는 되물었다.

“하지만 이렇게 몸을 섞고 있으면서

그런 짓궂은 말을 하는 남자보다는 덜 불성실할 거예요.”

김두한은 조금 무안해졌다.

아직도 여자에게는 미숙한 자기 자신을 깨달은 것이다.

그것이 싫어 그는 윽박지르듯이 다시 뇌까렸다.

“내가 몇 번째 남자이고, 몇 번이나…….”

“오늘로 세 번째 남자예요……,

첫 번째 남자로부터는 꼭 세 번, 두 번째 남자는 좀 많아 스물세 번,

세 번째 남자는 이제가 시작이구요…….”

민자는 힘도 들이지 않고 말했다.

그녀의 말은 자신의 행위에 박자를 맞추려는 것처럼 리드미컬하기조차 했다.

“잘도 세어봤군!”

그는 밉살스러운 놈의 턱에 주먹 한 방을 더 터뜨리듯이 허리에 힘을 주었다.

(요컨대, 남자가 여자에게 책임질 일은 아무것도, 아무것도 없다!

오직, 이 시간이 있을 뿐이다!)

 

바위 밑에서 끼여 죽는 가재가 없다는 진리를 직접 몸으로 체험하고 배운

김두한은 느지막한 시간에 요정 부용에서 나왔다.

어떻게 해서 부용에서 머무르게 된 것인지 그 자신도 몰랐다.

아마도 취중에 민자에게 현혹되어 미적거리고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너무 취한 그가 염려되어 주인 쪽에서 붙잡아

그대로 묵게 하였던 것인지 모른다.

하여튼 해장술을 겸한 반주가 곁들인 융숭한 아침상을 받은 다음에야

비로소 거동한 것이다.

그동안 민자는 상머리에 붙어 앉아 시중만을 들었다.

이불 속에서 잠자리에 들 때는 동등한 자격이지만,

일단 이불 밖으로 나오면 지체가 다르다는 듯이 깍듯하게 모시는 태도였다.

그러면서도 비록 하룻밤일망정 김두한 같은 거물을 자신의 것으로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을 무척이나 대견해하는 듯했다.

그러한 그녀가 갸륵해서 그는 한몫 듬뿍 집어주고 싶었다.

그러나 호주머니 안을 뒤져도 집히는 것은 부스러기 잔돈 몇 푼만이 있을 뿐,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물론 쓸 만한 곳에 쓰고 뿌릴 만한 곳에 뿌렸다고는 하지만,

1000원이란 거금을 하룻밤 사이에 탕진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하여 마음이 어두워질 것은 없었다.

돈이란 있으면 으레 쓰게 마련이고,

없으면 또 생기게끔 되어 있는 것이니까…….

그는 오히려 휘파람이라도 불고 싶은 가뿐한 기분으로 부용을 나온 것이다.

몸이 무겁고 찌뿌드드할 때 한바탕 싸우고 나면 몸이 풀리는 것처럼,

여자와 이불 속에서 뛰는 것도 또한 몸을 푸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간밤의 모든 일을 기억해 낼 수 없을 만큼 취했어도,

 새벽에 민자와 자리를 함께 했음으로 해서 몸이 거뜬하게 풀린 듯싶었다.
(애들이 싸움보다 여자를 더 좋아하는 것은 이 때문인 것일까?)

그는 자기 자신도 앞으로 여자를 좋아하게 될 것이란 계시를 받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대문 밖에는 우미관 골목 안 패거리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유난히 몸집이 큰 왕발과 똘마니급인 조무래기 아이들이었다.

이들은 두목이 이곳에 머물러 있는 것을 알고 만약을 위해 망을 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이 관례처럼 되어 있는 것이지만, 중간 보스급의 누군가로부터 지시를 받았을 것이었다.

아이들은 두목이 너무 무섭고 어려워서 제대로 말도 붙이지 못하고 뒷걸음질치듯 하며,

꾸벅 고개만을 숙여 인사를 했다.

김두한은 어린 부하들이 이때처럼 민망하고 쑥스럽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마치 이들이 자신의 침실에서의 수작을 엿본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아직도 그는 여자에 관한 한 순진한 숙맥이었던 것이다.

“나오시는 대로 메이지의 성림 다방으로 모시고 오라 하던데요.”

겨울을 재촉하는 제법 싸늘한 아침인데도
왕발은 여전히 구두를 신지 않은 맨발이었다.

“누가 그래?”

김두한은 미심쩍은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심청 형님이…….”

왕발이 호인다운 웃음과 힐끔거리는 눈으로 대답했다.

두목의 비밀을 알고, 재미있어하는 것이라고나 할까.

그는 정강이로의 발씨름으로 김두한 이외에 어느 누구에게도

져본 일이 없는 괴력을 갖고 있었지만,

워낙 인심이 좋고 머리가 둔한 데다가 싸움 솜씨가 없어,

심청을 중간 보스로 모시고 있었다.

“메이지의 성림 다방이라? 무엇 때문에?”

“혼마찌깡 사람들과 만나기로 되어 있다던데요.”

“그래?”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마음에 짚이는 데가 없었던 것이 아니다.

이미 혼마찌깡패와는 화해를 했고, 화해의 조건을 협상중인 것이다.
(다까끼구미나 다께다구미를 때려부수는 작전이나 그 협의를 위해 모이고 있는 것일까?)

“망치나 종로꼬마는?”

“함께 갔어요.”

“그래?”

김두한은 혼자 돌려 세워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침 늦게까지 여자를 끼고 잔 일이 잘못된 일처럼 생각되었다.

그는 그 길로 메이지로 직행했다.

두목의 몸으로 단신 일본패 영역의 중심지로 가는 것이 위험하고

경솔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그의 급한 성격과 두둑한 배짱이 머뭇거리고 있게 하지 않았다.

메이지의 성림 다방.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경성의 끽다점(다방)이라고 하면,

혼마찌의 ‘메이지제과(明治製菓)’·‘본성옥(本性屋)’·‘금강산(金剛山)’ 거기에

하세가와의 ‘낙랑(樂浪)’ 정도였지만, 근래에 와서 부쩍 늘어 이 거리 저 모퉁이에는

내부 장치에 정성을 다한 다방이 늘어, 이른바 다방의 ‘범람 시대’라 일컬어지게 되었다.

오늘날 서울의 다방 범람에 비하면 문자 그대로 금석지감(今昔之感)이 있지만,

다방이 가장 많이 들어선 곳이 메이지로,

 ‘성림(聖林)’·‘에리자’·‘다이나’·‘프린스’·‘백룡(白龍)’ 등이 그것이었다.

이 가운데서 가장 손님이 많은 곳이 성림이었다.

미국의 파라마운트 영화사의 출장원을 지낸 기노시따(木下仲七)란 자가,

연속 연주용의 전기 축음기를 비치하고, 유행하는 영화 음악을 틀어 기분을 내어

젊은 남녀들을 불러들여 온 다방으로 유명했다.

김두한도 몇 차례 이 다방에 들러보기는 했으나, 일본패 영역 내란 이유 이외에도

 그런 따분한 음악 분위기가 싫어 자주 들르지는 않았었다.

영화는 좋아했지만 음악에는 음치에 가까웠으니까…….

황금정 입구로 해서, 언젠가 대활극을 벌인 기꾸스이 앞 골목을 지나 성림으로 직행했다.

뛰지는 않았지만 마음이 급해 성큼성큼 보폭이 넓었다.

다방 문 앞에 이른 그는 문을 여는 데도 충분한 의미를 가하려는 것처럼

신중히 무게 있게 문을 밀었다.

서부 활극의 건맨처럼 언제 어디서 총알이 날아올지 몰라

자연 일거수일투족이 신중해지는 것처럼, 적지로 뛰어든

그의 태도가 신중해지는 것도 당연했는지 몰랐다.

그러나 문을 열고 다방 안에 들어선 김두한은 좀 뜻밖이어서 맥 빠진 기분이 들었다.


으레 다방 안이 일본패와 종로패로 득실거리고 있을 줄 알았더니 뜻밖으로 한산했고,

조용히 음악만이 흐르고 있었다.

만약 김무옥이 일어나 맞지 않았으면 어떤 음모에 말려든 것이나 아닐까 하고,

크게 경계했거나 실망했을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김두한은 성급하게 물었다.

“우편국의 자전거 보관소를 인수하러 갔어…….”

“왜 그런 일에 날 부르지 않았지?”

“모처럼 재미를 보고 있는데 깨울 수가 있어야지!

늦게 배운 도둑질에 밤새는 줄 모른다더니

너, 도대체 이번엔 달걀 몇 꾸러미를 축냈지?”

김무옥은 빈정거리듯 씩 웃으며 말했다.

두 사나이는 두목과 부하의 처지에 있다고는 하지만

또한 흉허물 없이 터놓고 지내는 친구이기도 한 것이다.

언젠가 남순옥과 달걀 한 꾸러미로는 모자라고 두 꾸러미로는

남을 만큼의 횟수로 관계했다는 얘기를 우스개삼아 했었는데,

그는 이를 생각해 내고 한 말이었다.

“야, 듣기 싫어!”

김두한은 골이 난 사람처럼 소리쳤다.

얼굴이 목덜미까지 붉어졌다.

정말 골이 난 것이 아니라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더구나 옆에 아직도 낯이 선 곤또(近藤)가 야실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곤또는 윤영호라는 이름을 가진 조선 사람이었지만, 곤또라는 창씨명으로 더 통했다.

일본 도꾜의 야꾸자 세계에서 고로스께(칼잡이)로 상당히 이름을 떨쳤다던가.

그는 특히 쓰바메(제비라는 뜻)를 잘 썼다.

쓰바메란 우리의 은장도(銀粧刀)만한 작은 칼을 말하는 것이다.

곤또는 손에 쥐어도 보일 듯 말 듯한 작은 단도를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녔을 뿐만 아니라,

싸울 때면 언제 어느 결에 쓰바메를 뽑아들어 긁었는지,

상대방에게 항상 S자 형의 상처를 입힌다는 것이다.

칼자국을 S자로 남긴 것만 보아도,

그것이 곤또의 소행인 것을 쉽게 판별해 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는 무슨 연유로서인지(사실은 살인을 해서였지만) 일본에서 돌아와

김무옥을 거쳐 종로패가 된 것이다.

그가 김두한에게 소개되었음은 물론이다.

주먹패에는 구색으로라도 칼잡이가 필요한 것이겠지만,

김두한은 맨주먹의 실력이 아닌 칼잡이는 비겁하다 해서

그다지 탐탁지 않게 생각해 왔다.

그런 곤또 앞에서 여자 이야기로 무안을 주는 것이 싫었던 것이다.

“그런데 넌 왜 함께 가지 않고 여기에 남아 있지?”

김두한은 마음속이 편안치 않아 정색을 하고 물었다.

그의 심기가 편안치 않은 것을 본 김무옥도 웃음기를 걷고 대답했다.

“그만한 일에 모두가 몰려갈 필요가 있겠어?

그리고 언제 네가 나타날지 몰라서 말야.

왕발에게 네가 일어나면 곧 이리로 모시고 오라 일러두어서 기다리고 있었지.

이제 곧 아이들이 돌아올 때쯤 되었으니까, 차나 마시며 기다리자.”

김두한이 마음을 풀며 자리에 앉자마자였다.


다방 문이 열리면서 일단의 패거리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김동회를 선두로 하여 종로꼬마·심청·망치, 번개로 통하는 만석 등등의 면면이었다.

모두가 태산을 업어온 듯 씩씩거리면서 희색이 만면했다.

“우리는 약속을 이행했어.”

앞장선 김동회가 김두한을 발견하고는 악수를 청하는 손을 내밀면서 말했다.

김두한은 그 말뜻을 알아들었다.

혼마찌깡에서 약속을 이행했으니까,

이번에는 종로패에서 약속을 이행할 차례라는 은근한 압력인 것이다.

그는 무거운 책임을 느끼면서 김동회의 손을 마주 잡았다.

“아주 노른자위야. 아직 아침이 이른 편인데도,

자전거가 자그마치 100대도 더 늘어서 있다니까.”

자리에 앉자마자 종로꼬마가 신이 나서 말했다.

“워낙 자리가 좋아서 말이지…….

이제 우리는 혼마찌에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게 될 것이구,

남대문 시장 쪽으로도 발을 뻗을 수 있을 거야.”

평소에 말수가 적은 망치도 기분이 좋은 듯 한마디 거들었다.

그러나 김두한은 드러내놓고 좋아하지 않았다.

자전거 보관소의 관리권을 인수한 대가로서의 책임을 통감했기 때문이다.

“호오따이가 순순히 물러나던가?”

언제나 주먹에 붕대를 감고 있대서 호오따이란 별명을 갖게 되었다는

그는 남대문 시장 내의 만만치 않은 주먹계의 소두목이며,

이제껏 중앙우편국의 자전거 보관소의 관리권을 맡아온 자이다.

이 짭짤한 이권을 종로패에 빼앗기고 말았으니 뱃속이 편할 리가 없었다.

“제놈이 순순히 물러가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어?”

모두를 대신해서 김동회가 말했다.

“어디 한번 가보자.”

김두한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주문한 차가 나오기도 전이었다.

이제 자신의 영역 내로 들어오게 된 현장을 자신의 눈으로 확인해 보지 않고는

직성이 풀리지 않아서였다.

김두한이 일어서자 모두들 뒤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주문한 차를 마시지도 않고 떼지어 몰려 나가는

이들에게 다방측에서는 감히 투덜거리지도 못했다.

다방 성림에서 중앙우편국까지는 비좁은 뒷골목 길을 통해

엎드리면 코에 닿을 지점이었다.

우편국 옆 자전거 보관소에는 과연 수십 대 아니,

100대가 넘을 만큼 자전거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정오가 가까워지면서, 새로 자전거를 맡기는 학생, 일반 부민(府民) 상인들,

또 혼마찌 상가에서 물건을 사입하고 자전거에 싣고 떠나는 상인들 등

계속 맡기고 찾는 보관소는 제법 분주했다.

김두한은 그 분망한 광경을 바라보면서 자못 감개가 무량했다.

전에도 이 앞을 지나친 일이 있고, 이러한 광경이 눈에 띈 일은 있었다.

그러나 무심코 스쳐 지나쳤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

일본인 상가인 혼마찌와 장차 남대문 시장으로 뻗어 전서울을

완전 장악할 수 있는 교두보를 확보한 셈인 것이다.

그는 임시로, 그리고 새로 관리인이 된 ‘흘레’와 ‘달기똥구멍’ 앞으로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