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장군의 아들

제2부 黑龍의 飛翔-혼돈 75

오늘의 쉼터 2014. 8. 27. 12:37

제2부 黑龍의 飛翔-혼돈 75

 

 

“내게 병을 줄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산삼과 같은 보약을 주려는 것이 무슨 뜻이란 말이오?”

김두한은 하야시보다도 통역자인 다무라 쪽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다무라는 실제 필요가 없는 통역을 하려고 하야시 쪽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아노(저어)…….”

그러자 하야시가 그의 말을 제지하면서 말했다.

“나, 김두한과 단둘이서만 얘기하고 싶은데,

다들 물러나 있게 해줄 수는 없을까?”

하야시는 아직도 비좁은 방 안이 빽빽하게 느껴지리만큼 꽉 늘어서서

버티고 있는 김두한패의 사나이들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 말뜻을 알아들은 김무옥이며 망치가 서로 얼굴을 마주 쳐다보았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거요.

잠시 동안 나가서 별실에서 기다리고 있든지…….

입회자는 쌍방에서 무방한 김동회 하나면 족할 테니까.”

다무라가 물론 하야시의 말을 통역했다.
거기에 김동회마저 나서서 덧붙이는 것이었다.

“두한아, 그렇게 해. 무릎을 맞대고 허심탄회하게 얘기를 나눠보라구.”

김두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 생각할 것도 없었던 것이다.

하야시가 직접 자기 있는 곳까지 찾아왔고,

사과를 겸해서 뜻밖의 이권까지 넘겨주겠다는 마당에,

그만한 제의를 못 받아들일 까닭이 없었다.

무엇보다 하야시의 태도가 진지했고,

그토록 진지한 그의 속마음을 얼른 알아내고 싶었다.

“다들 잠깐 나가 있지…….”

김두한은 앉은 채 부하들을 치켜 올려다보면서 말했다.

김무옥·종로꼬마·망치 등 모두는 불만스러운 표정이었으나

두목의 명령을 거역할 입장에 있지 않았다.

그들은 우르르 방 밖으로 몰려 나갔다.
그 뒤로, 역시 탐탁한 표정이 아닌 다무라도 쫓아 나갔다.

방 안에는 서로 마주하여 대좌한 하야시와 김두한,

그리고 다무라를 대신하여 통역자로서의 김동회만이 남게 되었다.

방을 나간 사나이들은 마루에서 마당 쪽으로 물러나 있는지 사뭇 조용해졌다.

이를 기다렸다는 듯이 하야시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두한 아우님, 우리 솔직히 이야기를 나누어봅시다.”

그 한마디는 김두한을 소스라치도록 놀라게 했다.

일본말이 아닌, 완전한 조선말이었기 때문이다.

하야시가 일본 사람이 아닌 조선 사람이란 말을 풍문처럼 들어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항시 일본말을 하고, 일본옷을 입고 있으며 일본인 아내와 함께

일본인의 거주 지역 중심지에서 일본 주먹패의 두목으로 있는

그를 한 번도 조선 사람으로 여겨본 일이 없었다.

그러한 하야시의 입에서 어김없는 조선말이 튀어나온 것이다.

이제까지 천장이 얕은 온돌방에 어울리지 않는 위화감을 주었던 하야시의 일본옷 차림이,

그 조선말 한마디로 어색치 않은 친근감을 주는 듯싶었다.

김두한은 우선 적의부터 풀 수 있었다.

 

“아니, 하야시 상. 당신은 역시?”

김두한은 자기 심중의 놀라움부터 표시했다.

물론, 하야시가 조선 사람이었다는 것을 확인한 놀라움이었다.

하야시는 김두한의 놀라움을 무시하듯 말을 이었다.

“사람은 각자 놓여 있는 입장에 따라 살아가는 방법도 다른 법이오.

나도 두한 아우와 마찬가지로 조선 사람이면서도,

일본인 행세를 하면서 살아가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란 것이 있소.

그것을 이 자리에서 구차스럽게 설명하고 싶진 않소이다.

하지만 피는 물보다 진하다 하지 않소.

팔은 안으로 굽는 것이고, 같은 조선 사람의 피를 이어받고 있는

우리가 서로 맞서서 으르렁거려야 할 이유는 애당초 없었던 거요.

서로 놓여 있었던 처지와 각자의 다른 이해관계로 하여 적대시해 왔던 것은 사실이지만,

지난번 수표교 싸움과 같은 불상사는 처음부터 내가 원했던 것이 아니었소.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는지는 둘째로 치고,

아무튼 그것은 나의 중대한 실수였소.

거듭 사과를 하는 터이지만,

힘으로써 종로패와 견줄 수 없다는 것도 새삼 깨달았소.

우리 혼마찌깡이야 경찰 힘의 뒷받침이 없으면……

허헛, 무력하기 짝이 없는 집단이어서 말이오…….”

하야시는 씁쓰레한 고소를 스스로 내뿜으면서 말했다.
그러나 그의 말투는 낮고 조용조용했지만, 조리가 있고 박력도 있었다.

원래 하야시는 주먹보다도 머리로 주먹패를 다스려온 인물이었다.

배운 것이 많지 않으면서도,

그의 말솜씨에는 지식인다운 교양미도 풍겼고,

조리와 박력이 있는 화술은 설득력도 있었다.

입담이 좋기로 정평이 나 있는 김두한도 그의 능숙한 이야기 솜씨에 말려들어,

주로 듣는 편이 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우리 혼마찌깡은 하나로 똘똘 뭉쳐 있는 것 같으면서도 의외로 허술한 점도 있단 말이오. 왜 그런지 아시오?”

하야시의 준수하면서도 강렬한 시선이 똑바로 김두한을 정시했다.
김두한은 그 작은 눈을 껌벅거렸을 뿐 말이 없었다.

하야시가 자신의 취약점까지 스스로 노출시켜 보이는 까닭을 전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조선 사람이기 때문이오.”

하야시는 자조적으로 내뱉었다.

“음!”

김두한은 자기도 모르게 신음과도 같은 한숨을 추슬렀다.

같은 조선 사람끼리만이 공유하고 공감하는 비애로운 감동이라고나 할까.

어찌 됐든 그는 가슴이 뭉클해져 오는 것이었다.

“특히 지난번의 그 싸움으로 하여 나는 톡톡히 망신도 당했지만,

체면이 실추된 것도 사실이라오.

하지만 체면 따위는 다음 문제요.

나로서는 좀 난처한 입장에 빠졌단 말이오.”

“어떤?”

김두한이 최초로 보인 반응에 하야시는 자신을 얻은 듯이 강조했다.

“혼마찌깡 내부에서야 설마 별 문제가 없겠지만,

변두리의 일본 애들이 조선인인 나를,

조선 사람인 나를 제거하려고 칼을 갈고 있단 말이오.”

김두한의 안면에 고정된 하야시의 시선은 여전히 흐트러지지 않고 있었다.

 

“그것들이 어떤 놈들이에요?”

이제까지 잠자코 듣고만 있던 김두한이 분연한 목소리로 물었다.

하야시가 조선 사람이라고 해서 일본애들이 제거하려 든다면,

그것은 나쁜 놈들이다.

같은 조선 사람으로서 그대로 흘려버릴 수 없는 일이었다.

김두한의 목소리가 분연해진 것은 그 이유 하나만으로써 충분했다.

“이웃한 신마찌의 기꾸찌구미 아이들은 다음으로 치고,

서대문애들과 하세가와 일대의 중국인 촌 아이들,

심지어 용산의 애들까지 들썩거리고 있단 말이오.”

“아, 그놈들!”

김두한은 맞장구를 치듯 말했다.

신마찌의 기꾸찌구미도 그렇지만,

중국인 촌을 나와바리로 하고 이는 다까끼구미나 다께다구미에 대해서는

김두한도 어느 만큼의 예비 지식을 갖고 있었다.

지금의 태평로와 순화동 입구,

서울역 일대에 걸친 중국인 촌을 나와바리로 삼고 있는 다까끼구미와 다께다구미는,

혼마찌깡패의 입김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을 만큼 제법 큰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구미(組)’란 단어가 의미하듯이, 이들은 건축·토목업계의 ‘노가다’ 출신이었다.

건설중에 있는 구조물 꼭대기를 제비처럼 날아다니는 ‘도비’ 직업을 갖고 있는 우락부락한

독종들이 야스다(安田)·스즈끼(鈴木)·요시다(吉田) 등의 힘을 바탕으로 뭉쳐 있었다.

이들은 건축업 이외에도 중국인을 상대로 하는 아편 밀수 판매에도 관계하고 있어

수입이 꽤 짭짤했다.

이들은 그들 독자적인 힘으로도 아편의 밀수 판매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누구의 허락이나 남의 힘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았던 것이다.

바로 이들이 하야시가 조선인이란 이유로 그를 제거하고 혼마찌 일대까지

석권하려고 들썩이고 있다는 것이다.

주먹계의 상전이라 할 하야시에게조차 고개를 빳빳하게 세우고 맞서려는 그들인 것이다.

이들이 순전한 조선인패인 종로 김두한패에 고개를 숙일 까닭이 없었다.
때문에 이들은 항상 김두한의 눈에 거슬려왔었다.

기회만 있으면 확 쓸어버릴 심산으로 있었다.
김두한이 하야시의 말에 ‘아, 그놈들!’ 하고 중얼거린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 가벼운 한마디의 중얼거림 속에도 증오가 있었고,

그 증오심은 단순한 김두한의 표정 속에 역력히 드러났다.

이를 놓칠 리 없는 하야시였다.

“아우님, 어떻소? 난 아우님의 힘을 필요로 하고 있소.

한번 놈들을 처치해 주지 않겠소?”

하야시는 힘주어 말했다.
그러나 김두한은 이내 대꾸하지는 않았다.

물론 마음이 동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 않아도 늘 눈에 거슬려온 놈들이었다.

거기다가, 조선인이라고 해서 하야시를 거세하겠다는

이유만으로도 놈들을 응징할 명분은 있었다.

하지만 김두한도 머리가 있었다.

고작 중앙우편국의 자전거 보관소 관리권 하나를 미끼로

호락호락 하야시에게 넘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이 기회에 하야시에게 단단한 다짐을 받아두어야 한다.

“글쎄요, 한번 생각해 봐야죠.”

 

김두한의 미지근한 대답에 하야시는 좀 초조해진 듯했다.

여기까지 찾아와서 새파란 김두한에게 먼저 고개까지 숙였는데,

퇴짜를 맞고 돌아선다면 혼마찌깡 두목으로서의 체면도 말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생각해 보다니, 대가는 충분히 치르겠소.”

너무 조급해진 나머지 바깥에 목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았을까 싶게끔 큰소리로 말했다.

그러고는 자신의 조선말이 밖으로 새어 나간 것을 염려하는 듯

다시 목소리를 낮추며 말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혼마찌패에서 직접 나서서 처리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사정이 있어서 아우님에게 부탁하는 것이오.

그런 만큼 우리의 인원을 동원할 수는 없소.

하긴 김동회 군이나 노점룡 등은 서로 원한다면 내보낼 수도 있겠지만 말요…….

그 밖에 필요한 자금만은 충분하게 내놓겠소.

중앙우편국의 자전거 보관소 이외에도 말이오.

그 밖에도 적당한 것이 있으면 앞으로도 아낌없이 내놓겠소. 그리고 또…….”

조리와 설득력이 있는 화술로 정평이 나 있는 하야시였지만,

다소 흥분을 해서인지 말의 두서를 잃어가고 있었다.

그만큼 이 문제는 그에게 심각했던 것이다.
이에 비하면 김두한은 침착했다.

이제 칼자루는 자기 편에서 쥐고 있는 것이니까.

“그래, 얼마를 내놓겠어요?”

버젓하게 흥정할 수 있는 여유조차 가졌다.

“착수금으로 우선 1000원 한 장…….”

“그 정도면 충분하지만, 성공을 하면?”

“성과 여하에 따른 것이겠지만, 최고 3000원을 더 얹지.”

하야시는 잘라서 말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김두한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묵묵부답이었다.

하지만 김두한의 마음이 동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솔직히, 만족할 만한 금액이었다.

싸움이라면 밥보다 좋아하는 주먹패들인 것이다.

솔직히 표현하면, 직업적인 싸움패인 것이다.

충분한 돈이 생긴다는데 마다할 까닭이 없었다.

그동안 남을 위해 싸운 일이 어디 한두 번의 일인가.

청부 싸움이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청부 살인까지도 할 수 있는 이들인 것이다.

돈도 생기고, 그들을 쳐부술 명목상의 명분도 있는데…….

“어디 한번 해보기로 할까요?”

김두한은 식은 죽 먹기나 되는 것처럼 가볍게 대답했다.

“고맙소, 아우님.”

하야시는 무릎걸음으로 한 발 다가가서 김두한의 손을 덥석 잡았다.

“두한아, 잘 생각했어. 나도 그 싸움에는 한몫 낄 테니까.”

이제까지 시무룩한 표정이기만 했던 김동회도 기쁜 듯이 말했다.

“그렇지만 형님, 일을 치르고 난 다음 시끄럽지 않게 해주셔야 합니다.”

김두한은 최초로 하야시에게 ‘형님’이란 호칭을 붙이고서는 말했다.

같은 조선 사람끼리의 주먹계 선배라면 형님이라 불러도 무방하다는 단순한 마음에서였다.

“알겠어, 아우님. 뒤치다꺼리는 내가 책임지겠으니까…….”

하야시가 기쁜 듯이 김두한의 손을 잡아 흔들 때였다.

밖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무슨 일인가 싶어 김두한의 작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야시가 말이나 약속과는 달리 경찰을 몰고 온 것이나 아닐까.

아니면 경찰이 하야시의 뒤를 밟고 쫓아와서 은신처를 덮친 것이나 아닐까 하는

불길한 예감이 든 것이다.

하지만 불길한 예감은 순간적인 기우에 지나지 않는 듯싶었다.

떠들썩했던 소요가 가라앉더니 환성에 가까운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두한아, 다루마찌가 나왔어. 다루마찌가 풀려 나왔단 말야.”

후닥닥거리는 발소리와 함께 기쁨에 넘친 망치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뭣? 다루마찌가?”

김두한은 잡고 있던 하야시의 손에 더욱 힘을 가했다.

“형님,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그는 머리까지 조아렸다.

“머리 빠진 개고기도 풀려나고, 딱부리와 애꾸도 풀려 나왔대.”

김두한은 복받치는 기쁨을 더 이상 가눌 수 없어,

하야시의 손을 놓고 후닥닥 마루로 튀어 나갔다.

그리고 마루 아래로 뛰어내렸다.

김무옥과 얼싸안고 있던 다루마찌가 그의 품에서 풀려 나오면서 김두한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김두한에게 무슨 잘못을 저지르기라도 한 것처럼 어색해하는 웃음을 싱긋 웃었다.

“고생 많았지? 얻어터지지나 않았냐?”

김두한은 다루마찌의 어깨를 토닥여주면서 위로했다.

“몇 대 얻어맞기는 했지만 뭐, 괜찮아요.”

“머리 빠진 개고기는?”

“곧장 병원으로 갔어요. 워낙 상처가 심해서요.”

“딱부리는? 애꾸는?”

“딱부리도 애꾸도 워낙 얻어터져서요.

좀 편히 쉬겠다고 수표교 밑 구멍으로 기어 들어갔어요.”

양아치에게는 편히 쉬는 자리가 자신의 보금자리인 다리 밑인 모양이었다.

“응, 잘됐군. 어느 병원인지 머리 빠진 개고기를 찾아가 보도록 해.

다루마찌·딱부리·애꾸에겐 잘 먹이도록 하고 말이지.”

김두한은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곁의 부하들에게 말했다.

그러는데 어느 결에 나왔는지 하야시가 웃는 낯으로 다가왔다.

“우리들은 돌아가겠어.”

물론, 일본말로써였다.

“그것 봐, 전부 풀려날 것이라 했잖아.

두한아, 너도 종로 거리를 누비고 다녀도 괜찮을 거야.”

김동회는 마치 그것이 자기의 공로이기나 한 것처럼 어깨를 소스라뜨렸다.

하야시가 다무라에게 무엇인가 귀엣말을 했다.

“협상은 이것으로 끝난 것으로 알겠소. 약속은 오늘 밤 안으로 지킬 거요.”

다무라가 통역을 했다.

“이따 밤에 가찌도끼 바에서 만나지. 내가 갖고 나갈 테니까…….”

김동회가 덧붙였다.

그것은 예의 착수금 1000원을 두고 말하는 것이었다.

김두한은 갑자기 어리벙벙해지는 기분을 느껴,

하야시 일행에게 제대로 인사를 하는 것도 잊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