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장군의 아들

제2부 黑龍의 飛翔-혼돈 76

오늘의 쉼터 2014. 8. 27. 12:38

제2부 黑龍의 飛翔-혼돈 76

 

 

이날 밤, 관철동 골목 안은 오래간만에 활기를 되찾았다.

예의 수표교 싸움 이후,

종적을 감추고 숨어들었던 김두한을 비롯한 거물급 주먹패들이 자유를 얻어 거리로 뛰쳐나왔고,

그동안 유치장에 갇혀 있던 패들도 한꺼번에 풀려났기 때문이다.

싸움에 이기고도 패자처럼 그늘 속에 몰려 있던 이들이 비로소 승전고(勝戰鼓)를 울리고,

승리의 축연을 올리는 셈이었다.

그 승리의 축연은 패자 편인 혼마찌깡의 두목 하야시가 마련해 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가 사건 자체를 무마시켜 주기도 했지만,

낮에 백기를 들고 찾아들듯 직접 김두한을 찾아와서 사과를 하고 협상을 제의해 왔으니까.

더군다나 협상의 대가로 거금 1000원을 착수금으로 제공키로 한 것이다.

그 돈은 약속대로 이날 저녁 김동회를 통해 어김없이 전달되었다.

돈은 갓 은행에서 인출해 내온 듯한,

날이 서서 살이 베어질 것 같은 1원짜리 빳빳한 지폐로 된 열 다발의 돈 뭉치였다.

특사 격인 김동회로부터 전달받은 돈 뭉치를 앞에 놓고 김두한은 희색이 만면했다.

이쯤이면 대단한 전리금(戰利金)인 셈이었다.

그는 주먹패의 두목 자리에 오른 이후,

그다지 용돈에 궁해 본 일이 없었다. 어지간한 거액의 돈을 주물러보기도 했다.

하지만 호박이 덩굴째 굴러 들어온 것 같은 거액의 공돈은 그에게도 드문 일이었다.

커다란 입이 저절로 벌어진 것도 당연했는지 모른다.

이를 지켜보고 있는 김무옥·문영철·망치·종로꼬마·심청·다루마찌의 눈도 반들반들 빛나고 있었다.

김두한은 부하들의 얼굴을 둘러보지 않고도, 그 눈빛의 뜻을 알고 있었다.

이들은 누구 할 것 없이 그동안 따분했고 굶주렸던 것이다.

“너희들 그동안 수고했어! 아이들과 나누어 쓰도록 해!”

그는 그 자리에 있는 부하들에게 새 돈 다발 하나씩을 나누어 주었다.

그것도 손에서 손으로 직접 건네주는 것이 아니라,

노름판에서 딜러(물주)가 패를 한 장씩 돌리듯이 가볍게 내던져 준 것이다.

방바닥에 떨어지는 돈 다발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마다하는 김동회에게도 굳이 한 다발을 건네주었다.

“나머지는 오늘 밤 진탕 마셔줘야지, 핫핫핫!”

그는 서너 다발로 줄어든 돈 다발을 이쪽저쪽 호주머니에 쑤셔넣으며

어깨를 흔들면서 웃어 젖혔다.

그는 원래 전리금을 혼자 착복하는 쩨쩨한 두목이 아닌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부하들이 따르는 것이겠지만,

두목의 차지가 많다고 해서 불만을 품는 부하도 있을 수 없었다.

실제로 이날 밤, 그는 많은 부하들을 거느리고 진탕 마시고 다녔다.

가찌도끼 바에서 시작하여 2차 3차, 관철동 골목뿐만 아니라 종로 일대를 누비듯 쏘다녔다.

마치 그동안 못 마신 분량만큼 보충을 하려는 것처럼.

이 기회에 잠깐 김두한의 술버릇에 대해 스쳐갈 필요가 있겠다.

 

김두한의 주량은 앉은자리에서 정종 한 되들이 두 병쯤 거뜬하게 비우고도

갈지자 걸음을 하지 않을 만한 실력이었다.

2차로 다음 집에 가서 같은 분량만큼 마셔도,

두꺼비 파리 잡아 먹은 것 같은 선선한 얼굴을 할 수 있었다.

다소 얽은 얼굴이 붉어져서 푸르죽죽하게 얼룩져 보이기는 하였지만…….

선천적으로 술에 어울리는 체질이기도 하였지만,

젊은 혈기와 체력이 이를 감당해 낼 만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밖에 술을 마시는 요령도 있었다.

그는 술을 마시기로 되어 있는 날이면 반드시 미리 뱃속을 든든하게 채워놓는다.

결코 빈속으로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이다.

요정과 같은 술집은 물론이지만, 값싼 색주가에 들르게 되어도 우선 주방부터 찾아든다.

주방장이나 요리사에게 먼저 듬뿍 쥐여주는 것이다.

그 까닭을 구태여 설명할 필요가 없겠다.

푸짐한 안주며 정성을 다한 음식이 나올 것은 뻔한 이치였다.

주먹패와 술집 여자는 밀접한 관계가 있어, 이들이 마시는 술자리에는 으레 여자가 끼어들었다.

김두한도 여자를 싫어할 까닭이 없어,

아니 무척 좋아해서 그의 옆자리에도 항상 여자가 앉았다.

하지만 아무리 술에 취해도 허튼 주정뱅이들처럼 여자의 앞가슴이나 넓적다리를 더듬는

따위의 주접은 떨지 않았다.

이 시절의 그는 여자에 관한 한 아직은 순수해서 그렇지도 않았지만,

그 이후 여자를 사뭇 알게 된 이후에도 여자가 필요하면 데리고 나가 잠을 잘망정,

많은 부하들이 보는 앞에서 추태를 부리지 않았다.

아무리 술집의 여자라 해도 반말이나 해라를 하지 않았다.

항상 한 사람 건너 사람이 알아듣지 못할 만한

낮은 목소리로 조용조용 속삭이듯 말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봉사료인 이른바 화대(花代)에 인색을 떠는 인물이 아닌 것이다.

아무렇게나 안호주머니에 손을 쑤셔넣고,

대충 손에 잡히는 대로 꺼내어 여자의 방석 밑에 슬그머니 밀어넣는 것이다.

그 시절의 술집 여자는 요즘 여자들처럼 계단 아래까지 쫓아와서

손님의 팔을 붙들고 보채는 따위의 극성을 부리지 않았지만,

아무튼 이러한 술자리의 매너를 갖고 있었던 김두한은 여자들로부터

인기가 없으려야 없을 수가 없었다.

특히 이날 밤의 김두한은 무척이나 기분이 좋아 있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이제까지 경찰의 지명 수배를 받고 피신해 있었던 몸인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종로 일대를 누비고 마시고 다니는 데도 거뜬한 것이다.

정복의 순사며 낯익은 형사가 그를 보고도 일부러 못 본 체하고 오히려 피해 가고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그의 호주머니 안은 두둑했다.

돈을 마구 뿌리며 쏘다니고 마셨다.

어지간해서는 취하지 않는 그도 인사불성이 될 만큼 마셨다.

코가 비뚤어지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고나 할까.

 

이튿날 아침, 잠과 술에서 깨어난 김두한은 적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깨가 허전하고 으스스한 느낌에 잠에서 깨어난 그는 누운 채 방안을 두리번거렸다.

천장이 얕게 느껴지는 낯선 방이었다.

이제까지의 피신처였던 정릉 보국사의 골방도 아니고,

하룻밤을 은신한 옥금의 방인 것 같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자신의 아지트인 조양 여관은 더욱 아니었다.

(어떻게 하다 여기서 자게 된 걸까?)

생각해 보기에 앞서, 전신이 허전한 느낌에 자신이

전라의 모습으로 누워 있다는 것을 깨닫고 흠칫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평소에 겨울이고 여름이고 벌거벗은 모습으로 자본 일이 없었다.

잠옷 같은 건 갖추고 있지도 않았지만,

언제나 입고 있는 겉옷만 벗고 나머지는 입은 채로 잤다.

주먹패의 두목쯤 되면 언제나 전장(싸움터)에 있는 것 같아서,

편안히 한가롭게 옷을 벗고 잠을 잘 수가 없는 것이었다.

언제 어느 때 어디서 싸움이 터져 달려나가야 할지 모르는 것이다.

특히 경찰에 쫓기거나 피신해 있을 때는 더욱 그러했다.

언제 경찰의 기습을 받아 튀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피신해 있던 얼마 동안은 숫제 겉옷도 벗지 않고 입은 채로 잠을 잤었다.

언제 한가롭게 옷을 벗고 잤었단 말인가.

그리고 독방에서 혼자 자는 일도 없었다.

으레 동료 부하와 함께 잤다.

조양 여관에 들어 있을 때도 혼자서 자는 일이 드물었다.

싸움과 싸움으로 점철되는 나날을 보내는 주먹패들은 얼른 생각하기에

무서울 것이 없는 듯해 보여도, 의외로 겁이 많은 것이다.

불안해서 도무지 혼자 잘 수가 없는 것이다.

그만큼 적이 많고, 원한을 많이 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주먹계를 다스리는 두목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그 불안감은 똘마니들보다 한층 더할지도 몰랐다.

머리가 크면 큰 만큼 더 적이 많고, 원한 관계도 그만큼 더 많을 터이니까.

때문에 주먹패의 두목급들은 항상 몰려다니며, 심복 부하에 에워싸여 있다.

서로가 서로에 의지해야만이 비로소 마음이 놓이고 안심하고 잠을 청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둘러보아도 낯선 방에서 전라의 모습으로 잠을 잤다니.

“게, 아무도 없냐?”

여기가 어디든 간에 필시 옆방에 대기하고 있는 부하들이 있을 듯싶어 소리쳐 보았다.

그러자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홀연히 나타나기나 한 것처럼 발치 아래서 소리가 들렸다.

“어머나! 깨셨군요?”

깜짝 놀란 듯한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밝다기보다 오히려 졸음에 들씌워 있다가

꿈결에서 소리친 것만 같았다.

서서히 다가오는 얼굴에 김두한은 다시 한 번 놀랐다.

소학교(초등학교)를 갓 나왔을까 말았을까 싶은 너무나 앳된 얼굴의 여자였던 것이다.

다소 헝클어진 머리였으나 눈웃음이 많은 맑은 눈이었고,

한쪽 편으로만 돋아나 있는 덧니가 앳된 얼굴에 가련미(可憐美)를 더해 주는 듯싶었다.

“너, 누구지?”


여간해서는 여자에게 반말을 하지 않는 그가 반말로 물었다.

여자가 소녀티가 가시지 않을 만큼 어려 보였기 때문이다.

“어머머! 그렇게 딴전을 부리시는 게 어딨어요? 능청을 떠시는 것도 아니구.”

소녀 같은 여인은 이제 소녀 같지 않은 눈을 흘겨 보였다.

“누구더라? 나, 통 모르겠는데…….”

생각 탓인가, 눈에 좀 익은 것 같으면서도, 영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시치미 떼지 마세요. 남 잠자는 시간에 문 열라, 술 내라,

하다 못해 수청을 들라, 온갖 트집 다 잡으시고는.”

“내가? 수청까지 들라구? 어디서?”

김두한은 정말 능청을 떨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전혀 기억에 없었다.

그만큼 술에 취해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술에 취해 기억까지 상실해 본 경험도 일찍이 없었다.

“누굴 놀리시는 건가요? 부용(芙蓉)에서요! 저, 부용의 민자(民子)예요…….”

“부용? 부용의 민자?”

부용이라고 하면, 바로 우미관의 옆 골목 안에 있는 요정으로,

조양 여관의 다음 골목에 있었다.

훨씬 오래된 일이기는 하지만,

지금은 만주로 도망쳐 가 있는 쌍칼 니또류 무사시가 부용 주인의 목에 단도를 들이대고

북북 긁고 있던 아슬아슬한 순간에, 김두한이 뛰어들어 위기를 구해 준 일이 있었다.

이로 인해 쌍칼은 만주로 도망쳤고, 김두한은 쌍칼을 꺾었다고 해서 일약 유명해졌지만,

아무튼 이 사건 이후 부용의 주인은 김두한에게 각별하게 대해 주었었다.

아마 이날 밤에도,

조양 여관으로 돌아오다가 마지막으로 부용에 들러 술을 청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미 술집 문을 닫은 늦은 시간이었지만,

문을 흔든 것이 김두한이었기 때문에 문을 열어주었고,

여기서 다시 술을 마셨는지 어쨌는지는 모르지만,

민자란 여자에게 수청을 들라고 딸려 보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서 날 이렇게 벌거벗겨 놓았는가?”

“어머머! 속이 답답하고 갑갑하다 하시면서 혼자 훌렁훌렁 벗고 나서…….”

“뭐라구? 내가 옷을 훌렁훌렁 벗었다구?”

“그러고는 이내 이불을 뒤집어쓰고는 드렁드렁 코만 고시지 뭐예요!”

“헛헛!”

전혀 기억에 없는 일들에 김두한은 멋쩍은 웃음밖에 웃을 도리가 없었다.

“세상에 그런 법이 어딨어요?

같이 자자구 끌고 올 때는 언제고,

혼자 이불 뒤집어쓰고 드렁드렁 코만 골고 자면 난 어떻게 하란 말예요?”

“그래서 어떻게 했어?”

“벌거벗은 남자의 이불 속으로 뛰어들어 갈 수도 없고,

이렇게 앉은 채 꼬박 새웠지 뭐예요.”

“저런! 내가 못할 짓을 했군.

너무 어린애 같고 내 큰 몸집에 짓눌렸다간 터질 것만 같아

아마 술김에도 삼갔던 것인지도 모르지, 헛헛!”

“어머머! 어디 가재가 바위에 찡겨 죽는 것 보셨나요? 후훗.”

캬들거리며 웃는 여인에겐, 이제 소녀 같은 모습은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뜻밖으로 능숙한 민자의 대답에 김두한은 여자의 성숙을 본 듯했다.

그것이 일종의 안심과도 같은 기분을 갖게 했다.

동시에 피로한 몸의 상태와는 달리 남자의 욕망이 꿈틀꿈틀 살아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아니, 씩씩하게 살아 일어난 욕망으로 하여 몸의 피로한 상태 자체가 말끔히 가시는 것만 같았다.

“너 참 맹랑한 계집애로구나!”

김두한은 맨살의 굵은 팔뚝을 이불 밖으로 뻗었다.

“어머머! 맹랑한 계집애라뇨? 여자 나이 스물이 계집애인가요?”

‘어머머!’ 하는 것은 그녀의 입버릇인 듯했다.

“허어! 스물. 그렇게 되어 보이지 않는데?”

“그래, 몇 살쯤 된 것으로 보셨어요?”

“많아야 열여덟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말을 주고받은 끝에, 민자는 앉은뱅이 걸음으로 다가들었다.

미끼도 매달려 있지 않은 김두한의 팔뚝에,

그녀의 작은 몸집이 덥석 물린 붕어처럼 손쉽게 빨려든 것이다.

김두한은 어색하지 않게 그 작은 몸집을 받아 안으며 이불 속으로 끌어들였다.

“진작 들어올 일이지, 그래 추운데 이불 밖에서 졸고 있었단 말야?”

“여자가 남자를 겁탈할 수는 없는 것이지 않아요?”

민자는 맨살의 남자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이불 밖에서 떨면서 졸고 있었던 것이 사실인 듯, 그녀의 몸은 차가웠다.

그것을 품으로 녹여주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그는 힘껏 여체를 끌어안았다.

이미 여체를 경험한 바 있는 그는 이제 언젠가처럼 여자로부터의 피교육자이지만은 않았다.

그의 거동이나 행동 하나하나는 마치 굳건한 소신이라도 담겨 있는 것처럼

확실하고 정확했으며, 또한 정교한 것이었다.

하지만 여자를 이처럼 가깝게 껴안아본 것이 실로 얼마 만의 일인가.

그는 문득 그에게 첫경험을 안겨다 준 남순옥을 생각했다.

그녀를 못 잊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찌 됐든 자신의 동정(童貞)을 가져간 여인으로서의 남순옥은

기억에 남을 만한 여인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 여자는 어떻게 되었는가.

그가 만들어준 예금 통장 하나만을 움켜쥐고 사라진 뒤 종적을 감추어버렸다.

여자의 마음은 갈대 같다더니,

여자의 배신은 습성인 것일까. 결국 여자란 품속에 안고 있을 때만이 소중한 것일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이 여자도 바람처럼 사라져버릴지도 모른다.

그는 어쩐지 여자를 학대해 주고 싶은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의 거동은 저절로 거칠어갔다.

그러나 민자는 이에 저항하지 않았다.

남자의 거친 행동에 길들여져 있기라도 한 것처럼

뜻밖으로 능숙한 민자의 대답에 김두한은 여자의 성숙을 본 듯했다.

그것이 일종의 안심과도 같은 기분을 갖게 했다.

동시에 피로한 몸의 상태와는 달리 남자의 욕망이 꿈틀꿈틀 살아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아니, 씩씩하게 살아 일어난 욕망으로 하여 몸의 피로한 상태 자체가 말끔히 가시는 것만 같았다.

“너 참 맹랑한 계집애로구나!”

김두한은 맨살의 굵은 팔뚝을 이불 밖으로 뻗었다.

“어머머! 맹랑한 계집애라뇨? 여자 나이 스물이 계집애인가요?”

‘어머머!’ 하는 것은 그녀의 입버릇인 듯했다.

“허어! 스물. 그렇게 되어 보이지 않는데?”

“그래, 몇 살쯤 된 것으로 보셨어요?”

“많아야 열여덟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말을 주고받은 끝에, 민자는 앉은뱅이 걸음으로 다가들었다.

미끼도 매달려 있지 않은 김두한의 팔뚝에,

그녀의 작은 몸집이 덥석 물린 붕어처럼 손쉽게 빨려든 것이다.

김두한은 어색하지 않게 그 작은 몸집을 받아 안으며 이불 속으로 끌어들였다.

“진작 들어올 일이지, 그래 추운데 이불 밖에서 졸고 있었단 말야?”

“여자가 남자를 겁탈할 수는 없는 것이지 않아요?”

민자는 맨살의 남자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이불 밖에서 떨면서 졸고 있었던 것이 사실인 듯, 그녀의 몸은 차가웠다.

그것을 품으로 녹여주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그는 힘껏 여체를 끌어안았다.

이미 여체를 경험한 바 있는 그는 이제 언젠가처럼 여자로부터의 피교육자이지만은 않았다.

그의 거동이나 행동 하나하나는 마치 굳건한 소신이라도 담겨 있는 것처럼

확실하고 정확했으며, 또한 정교한 것이었다.

하지만 여자를 이처럼 가깝게 껴안아본 것이 실로 얼마 만의 일인가.

그는 문득 그에게 첫경험을 안겨다 준 남순옥을 생각했다.

그녀를 못 잊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찌 됐든 자신의 동정(童貞)을 가져간 여인으로서의 남순옥은

기억에 남을 만한 여인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 여자는 어떻게 되었는가.

그가 만들어준 예금 통장 하나만을 움켜쥐고 사라진 뒤 종적을 감추어버렸다.

여자의 마음은 갈대 같다더니, 여자의 배신은 습성인 것일까.

결국 여자란 품속에 안고 있을 때만이 소중한 것일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이 여자도 바람처럼 사라져버릴지도 모른다.

그는 어쩐지 여자를 학대해 주고 싶은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의 거동은 저절로 거칠어갔다.

그러나 민자는 이에 저항하지 않았다.

남자의 거친 행동에 길들여져 있기라도 한 것처럼 순종했다.

거기서 첫경험일 까닭이 없는 여자의 농염함을 보는 듯싶었다.

그는 실제로 바위에 끼어 죽지 않는 가재를 실증해 보려는 것처럼

무거운 몸을 여체 위에 실었다.


거기서 첫경험일 까닭이 없는 여자의 농염함을 보는 듯싶었다.

그는 실제로 바위에 끼어 죽지 않는 가재를 실증해 보려는 것처럼

무거운 몸을 여체 위에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