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장군의 아들

제2부 黑龍의 飛翔-혼돈 73

오늘의 쉼터 2014. 8. 27. 12:36

제2부 黑龍의 飛翔-혼돈 73

 

 

“뭐라구? 내가 하야시를 만나본다구?”

김두한도 그 말이 실감나지 않았던지,

의구심이 많은 눈으로 김동회를 바라보았다.

“응. 우두머리와 우두머리끼리 직접 만나 부딪쳐야지,

밑의 놈들이 암만 더듬어야 소용이 없는 거야.”

“그렇지만 지금 내가 어떻게 그를 만나?”

김두한은 고개를 흔들었다.

도전장을 먼저 보내놓고, 그 기일이 되기도 전에 기습을 해온

그들의 배신과 비겁함이 새삼스러운 분노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러구 있을 거야?

언제까지 숨어서 팥죽이나 먹고 있을 거냔 말야?”

다그쳐오는 김동회의 말에,

김두한은 굳게 입만 다물었을 뿐 더 이상의 대꾸를 하지 않았다.

기실, 아무런 대답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만나봐, 만나보라구. 청계천을 사이에 두고 허구한 날 으르렁거리지만 말구,

보스끼리 직접 부딪쳐보라구! 뭔가 길이 있을 거야.”

김동회의 커다란 눈이 화경처럼 반들거렸다.

“하지만 말야. 내가 만나겠다고 해도 그가 만나겠다고 나설는지 그것도 모르는 일이구,

만나겠다고 한다 해도 지금 내 심정으로는 그의 사과부터 받아내야겠어.”

김두한도 김동회의 역설에 다소 마음이 움직인 모양이었다.

다소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이다.

이쯤 되면 반승낙을 받은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김동회는 상체를 김두한 앞으로 바싹 내밀었다.

“두 보스가 만날 수 있도록 내가 책임을 지고 주선하겠어.”

그는 자신만만하게 장담했다.

그것도 그럴 것이, 그는 이제 두 두목의 대담을 새삼 공작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하야시로부터 그럴 수 있도록 지령을 받고 있는 것이다.

두목 하야시의 체면을 손상시키지 않고,

두 사람을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게 하는 길을 그는 모색하고 있던 중이었다.

“하야시 형님으로부터 사과를 받아내는가 아닌가도 두 사람의 담판 여하에 달려 있는 것이니까.

하야시 형님은 말이 통하는 사람이야. 그리고 영리하고 말이지.

김두한, 너 같은 사람을 끝내 적대시하고 싶지 않을 거란 말야. 한번 만나보라구.

만나겠어, 안 만나겠어? 분명하게 대답해 보라구.”

김동희는 강조를 하다 못해 거의 협박하듯이 대들었다.

“만난다면, 어디서 어떻게 만나지?”

김두한은 마지못한 듯 대답했다.

그러나 그 대답은 승낙을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결심이 이미 선 것이다.

“두한이 너와 하야시 형님이 일 대 일로 만나도 좋아!

그것이 싫으면 양쪽에서 한 명씩 붙어도 좋고…….

거기에 내가 양자의 협상을 주선하는 입회인으로 동석해도 좋고 말이지.”

이미 두목 하야시와 말을 맞추어놓은 각본 그대로인 것이다.

김동회의 말에 거침이 있을 수 없었다.

 

“하지만…….”

김두한은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아무래도 마음에 꺼림칙한 구석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뭐가 어떻다는 거야?”

김동회가 안타까운 듯이 대들었다.

“날 이 모양으로 손발 꽁꽁 묶어놓고,

어디서 만난다는 거야? 거리에 섣불리 나다닐 수도 없는 몸인데…….”

김두한의 말에 김동회도 다소 난감했다.

거기까지는 두목 하야시와 사전 협의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잠시 머뭇거렸으나 언제까지 머뭇거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

다 익어가는 협상을 이 때문에 깨박칠 수는 없었다.

“장소는 아무래도 좋아.

네가 좋다고 한다면 하야시 형님을 이리로 모셔오도록 하지.”

그것은 김동회의 독단이었다.

과연 하야시가 적진이나 다름없는 관수동 골목 안까지 찾아들 것인가.

그것은 의심스러운 일이었다.

신변의 위험을 느낄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무엇보다 자존심의 문제였다.

내로라 하는 혼마찌깡의 두목 하야시가,

주먹계의 까마득한 후배인 김두한을 만나려고 그의 본거지 안으로 먼저 찾아들 것인가.

그것은 지극히 의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이미 토해 낸 말을 거두어들일 수는 없었다.

일을 성사시키려면 하야시를 설득시키는 것뿐이다.

“그렇다면 좋아. 만나지.”

김두한은 마침내 쾌히 승낙을 했다.

그러나 이제까지 잠자코 듣고만 있던 김무옥이 불쑥 내뱉었다.

“야, 그러다가 하야시 그 자슥(자식), 형사 떼를 불러들이는 것 아냐?”

김동회는 모욕감을 느끼며 얼굴이 벌겋게 붉어졌다.

그러나 참았다. 다 된 밥에 재를 뿌릴 수는 없는 것이니까.

“하야시 형님은 그래도 야꾸자의 오야붕이란 말야.

의리를 아는 신사고……. 그런 신의를 저버리는 짓은 안 하지.”

“그런 신의 있는 사나이라면 어떻게 도전장을 내놓고 먼저 후이우찌(不意打: 기습)를 해오지?”

“그건, 그건…….”

그 대목에 이르러서는 김동회도 말이 막힐 수밖에 없었다.

“그건 말야, 밑의 아이들이 저지른 일이지, 하야시 형님의 뜻이 아니었단 말야.

그렇기 때문에 오야붕끼리 서로 담판을 하자는 게 아냐?

무슨 쇼부가 나든 날 게 아니냔 말야.”

여기서 물러설 수 없는 김동회는 목소리에 힘을 주고 가다듬었다.

“그것은 김동회 이름 석 자, 아니 내 목을 걸고 맹세하지. 그러나 나에게도 부탁이 있어.”

“부탁은 또 무슨 부탁?”

이번에는 김두한이 다시 받았다.

험악하기보다 어색한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는 듯 목소리가 부드러웠다.

“우리가 일체의 신변 안전을 보장하는 대신,

하야시 형님에 대한 신변 안전도 생각해 줘야 한단 말야.

혼마찌깡의 두목으로서의 예우를 갖추어 결코 결례됨이 없도록 말야.”

“좋아, 나도 남자야. 그 정도야 약속하지.”

김두한의 선선한 대답이었다.

 

타협은 생각한 것보다 쉽게 이루어진 셈이었다.

김동회는 가벼워진 마음으로 관수동 옥금의 집을 나섰다.

두목 하야시가 지령한 대로 양 두목의 회담이 이루어질 수 있게 된 것이다.

문제는 두목 하야시로 하여금 김두한의 은신처이며

그의 본거지로 찾아들게 하는 일만이 남았다.

‘뭐라구? 내가 긴또깡 그놈을 만나기 위해 내 발로 그곳으로 걸어간단 말인가!’

권위 의식도 자존심도 강한 하야시가 필시 그럴 것만 같았다.

그러나 피신중에 있는 김두한의 처지를 역설하면 이해도 해줄 것만 같았다.

무엇 때문이건 김두한과 단독 회담을 요구한 건 하야시 자신이며,

그는 배짱도 있고 머리 회전이 빠르니까. 우선 혼마찌깡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아침에 경찰서로 찾아나선 하야시는 돌아와 있지 않았다.

부두목 다무라도 없었다.

오후 3시가 넘어서야 하야시는 다무라와 함께 돌아왔다.

좀처럼 낮술을 입에 대지 않는 그가 낮술을 마셨는지 다소 얼굴이 불콰했다.

그런 만큼 매우 유쾌한 표정이기도 했다.

“뭐, 김두한을 만났다구?”

주위를 꺼리는 듯 나직한 목소리의 김동회의 보고를 받고 하야시는

뜻밖으로 커다랗게 소리쳐 반문했다.

술기운인 것일까, 그만큼 기분이 좋아서인 것일까.

“우메하라, 넌 아무래도 김두한의 사람 같아?

경찰이 눈을 벌겋게 뜨고 뒤지고 있는데도 못 찾고 있는 김두한을

여행에서 돌아온 날로 만나다니, 헛헛.”

웃음소리도 예에 없이 탄력이 있는 것이, 역시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그러나 김동회는 그것이 자기를 칭찬하는 것인지 나무라는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그런 채로 여전히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분부하신 대로 단독 회담을 하도록 합의를 보았습니다.”

“어디서?”

그 대목에서 김동회는 멈칫했다.

“종로…… 관수동의…… 그의…….”

어쩔 수 없이 그는 말을 더듬었다.

“아니, 내가 종로로 찾아간단 말인가?”

예상한 대로의 반문에, 김동회의 목은 자라목처럼 기어들었다.

“저어…… 그…… 김두한은 경찰을 피해 숨어 있는 몸이니까요…….

나다닐 수 없는 처지니, 우리 쪽에서 찾아가는 것이 순서가 아닐까요?”

“핫핫핫.”

그러자 하야시는 헌걸차게 웃기부터 했다.

그리고 그 웃음소리는 꼬리가 길었다.

“……핫핫, 그러나 긴또깡 그는 이제 숨어 있지 않아도 돼.

두 손 내젓고 거리를 활보해도 된단 말야, 핫핫.”

하야시는 또다시 기분 좋은 웃음을 터뜨렸으나, 김동회는 영문을 몰랐다.

“경찰의 윗사람들과 타협이 됐어.

오늘 이후로 김두한과 그 패거리들에 대한 지명 수배를 풀기로 말이지…….

예의 수표교 싸움 건으로 그들이 경찰의 신세를 지는 일은 앞으로 없을 거야.”

“옛?”

“그러나 말이지, 내가 김두한을 만나야 할 일은 여전히 남아 있어.”

 

기실 하야시는 예의 수표교 싸움 이후 난처하게 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종로패에게 도전장을 낸 것부터가 잘못이었지만,

기왕 도전장을 냈으면 정정당당하게 싸웠어야 할 일이지,

그 신사 협정을 어기고 새벽에 기습을 했다는 것은 더 말할 나위 없는 큰 실수였다.

이건 의리를 생명으로 하는 야꾸자로서 할 짓이 아닌 것이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비겁한 행위인 것이다.

게다가 기습을 했으면 한 대로 통렬한 승리라도 거두었으면 모를까,

거꾸로 비참하게 역습을 당하여 처참한 꼴을 당하고 말았으니 이 무슨 창피인가.

다니구찌 같은 거물급 주먹이 자전거 체인에 얼굴을 얻어맞아

뱀이 지나간 자국같이 보기 흉하게 찢겼는가 하면,

턱이 박살이 난 놈,

다리와 허리가 부러진 놈,

제대로 운신도 못 할 만큼 큰 부상을 당한 자도 자못 20명이 넘는다.

한마디로 대참패였던 것이다.

이 무슨 망신이며 치욕이란 말인가.

더구나 소문은 서울의 주먹계뿐만 아니라,

종로·혼마찌를 가릴 것 없이 조선인·일본인 상인들로부터

일반 시민에게까지 파다하게 퍼졌다.

“아니, 도대체 혼마찌깡 패거리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던 거야?

일본 상인들을 보호한답시고, 일본 상인들만 괴롭히는 우물 안 개구리지 뭐야.”

“두목 하야시의 지휘와 통솔이 잘못된 것이지 뭐야.

그 해사하고 말쑥한 미남 얼굴로 어떻게 우락부락한 주먹패들을 다스려갈 수 있겠어?”

일본인들 사이에서 노골적인 불만이 터져 나온 것이다.

“그 하야시란 자는 조센진이란 소문이 있더니,

아무래도 종로패와 야합하여 우리 일본인을 골탕 먹이려 한 것이 아닐까?”

심지어 그런 험담을 하는 자까지 있었다.

하야시의 처지는 그저 난처한 정도가 아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혼마찌깡의 세력을 시기하는 도신치(東新地: 신마찌 유곽촌)의 기꾸찌구미를 위시하여,

광화문·서대문 일대를 중심으로 한 일본인 건달의 세이다이몽구미(西大門組),

하세가와(현 소공동)와 태평로 일대의 중국인 촌을 장악하고 있는

일본인의 소수 세력인 다까끼구미(高木組) 등이 이 기회에 일본인의 중추 세력권인

혼마찌 일대를 호시탐탐 넘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 판국에 사건이 확대되어 간다는 것은 하야시로서는 바람직한 일이 되지 못했다.

어떻게 해서든지 빨리 사건을 수습해야만 했다.

그런데 사건 후, 경찰에서는 조선패만을 마구 검거해 가고 있는 것이다.

종로패의 두목 김두한을 비롯해서 굵은 중간 보스급을 검거하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하야시 자신을 위해 바람직한 일이 되지 못했다.

무엇보다 여론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선인 사이에서는 물론, 일본인 사이에도 마찬가지였다.

하야시가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 동분서주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보람은 있었다.

소문이야 어떻게 돌고 있건 간에 그의 영향력은 아직도 대단했던 것이다.

 

이미 언급한 일이 있지만,

새로 혼마찌 경찰서로 부임해 오는 경찰서장이나 간부들은

으레 먼저 혼마찌깡의 하야시에게 인사를 왔다.

하야시가 그러한 인물인 만큼,

어지간한 일로 그가 직접 경찰서로 찾아가서 간청하는 일은 드물었다.

그저 전화 한 통이나, 그의 친필의 메모 한 장이면 대개 통했다.

당시의 마사오까 서장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번 사건에서는 하야시 자신이 직접 찾아가서 간청을 했어도

마사오까 서장은 듣지 않았다.

깡마른 얼굴에 도수 높은 안경을 낀 서장은 입을 굳게 다물고 고개를 내젓는 것이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이번 사건에는 일본인측에 부상자가 많았을 뿐만 아니라,

범인을 연행해 가는 정복 경관들을 기습하여 이들을 때려눕히고 범인을 탈취해 갔으니,

경찰의 위신이나 체면을 위해서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일본 경찰을 뭐로 안단 말이오?

그런 불령(不逞)한 센진(鮮人) 불량배들은 이 기회에 모조리 쓸어버려야 합니다.”

“놈들을 쓸어버릴 기회는 앞으로도 얼마든지 있을 것이오. 제발 이번 기회만은 없었던 것으로 치고 조용히 넘어가게 해주시오.”

하야시는 전에 없이 고개를 낮추었으나, 마사오까의 고집도 완강했다.

“증거가 명백한 이 기회에 놈들을 일망타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야시도 더 이상 말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하는 수 없이 세꼬야를 통해 총독부의 정무총감(政務摠監)에게 압력을 가하게 했다.

도야마 미쓰루의 후광은 대단했다.

하긴 정무총감 자신도 도야마계로, 세꼬야와 한통속이었으니까.

“경찰 서장의 목이 성하고 싶거든 하야시의 청을 들어주는 것이 좋을 거요.”

정무총감의 일침이 효력이 없을 수가 없었다.

서장 마사오까는 자기 목이 달아나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아직은 멀쩡한 자기 목을 쓰다듬으면서 직접 하야시에게 전화를 걸고, 면회를 요청했다.

김동회가 봉천에서 돌아온 날 아침, 하야시가 정장을 하고 경찰서로 나선 까닭이었다.

하야시가 경찰서로 찾아가서 서장으로부터 어떤 대답을 받았는지는 불문가지한 일이다.

수표교 싸움에 관련한 김두한과 그 패거리들에 대한 지명 수배를 해제할 뿐만 아니라,

이미 체포된 아이들을 전원 석방한다는 확약을 받은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서장은 하야시의 청탁을 처음부터 선뜻 받아들이지 않은 것을 진사(陳謝)했다.

그런 뜻으로, 반주가 곁들인 점심 대접까지 융숭하게 한 것이다.

하야시가 평소에 즐기지 않는 낮술을 들게 된 것도 그 까닭이었다.

하야시는 기분이 좋아져서 기고만장해 혼마찌깡으로 돌아왔다.

거기서 김동회로부터 김두한과의 단독 회담의 약속을 받아왔다는 보고를 듣게 된 것이다.

“그래, 김두한이 언제 어디서 만나재?”

“상황은 달라졌지만, 관수동에 있는 자기 은신처에서 만났으면 하던데요.”

김동회는 황송하다는 듯이 아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