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장군의 아들

제2부 黑龍의 飛翔-혼돈 71

오늘의 쉼터 2014. 8. 27. 12:33

제2부 黑龍의 飛翔-혼돈 71

 

 

김동회도 마음속으로 동감했다.

이 많은 돈을 몸에 지니고 가기도, 아닌게 아니라 문제인 것이다.

이제 주저할 것도 없었고, 더 이상 사소리의 눈치를 살필 것도 없었다.

어차피 잃어버렸던 물건이 아닌가.

김기환이 돈을 가로챘었더라도 꼼짝없이 당할밖에 없었던 것이 아니었던가.

밑져야 본전인 것이다.

“네, 알겠습니다. 형님의 물건을 사겠습니다.”

“사주어서 고맙군.”

흥정은 그것으로 끝났다.

물건을 보지도 않았고, 물건 값을 따져 묻지도 않았다.

“그럼, 이 때문에 오늘내일은 못 떠나는 게 아닙니까!”

“기왕 늦었지 않았나. 하루이틀 늦게 태어난 셈치면 그만이지, 핫핫!”

김기환은 커다랗게 웃었고, 김동회도 소리를 모아 너털거렸다.

이날 밤, 두 사나이는 가죽 제품에 대해서는 더 이상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마침 주문한 중국 요리가 당도해서 본격적인 술자리가 벌어졌을 뿐이다.

술자리는 주먹패 특유의 왁자지껄한 것이 되었고 별다른 화제도 없었다.

다만 취중에 오고간 몇 마디가 귀에 담을 만한 말이라면 말이었다.

“형님, 서울에 한번 안 가시렵니까?”

“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김동회의 물음에 김기환은 한숨처럼 내뱉은 것이다.

아무리 봉천 땅에서 주름을 잡고 있다 하지만

이국 땅에서의 애수나 향수를 저버릴 수 없는 모양이었다.

“어떻게 손을 써볼까요?”

인사로만 한마디 한 것은 아니었다.

두목 하야시에게 간청을 해서 그가 손만 써준다면,

불가능한 일로만은 생각되지 않았던 것이다.

김기환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이윽고 내뱉듯이 그는 말했다.

“아서! 그런다고 지명 수배가 풀릴 것도 아니겠고,

서울로 돌아가자니 김두한 녀석 설쳐대는 것 꼴도 보기 싫구!”

그는 억지로 쑤셔넣듯 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아무렇게나 내뱉은 듯한 말이었으나, 비탄이 어려 있는 것처럼 들렸다.

그 말을 들으면서 김동회는 서울로 돌아가면 할 일이 부쩍 많아질 것처럼 생각되었다.

많은 일이 기다리고 있는 서울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그로부터 이틀 뒤였다.

그동안 김기환으로부터 예의 가죽 제품을 사들였다.

현금은 7000원만 남기고, 쌍칼 등에게 떼어주고 남은 5000원어치만 물건을 샀다.

재고가 그 정도밖에 없었기도 했지만,

아편의 7000원 원금만은 갖다 바쳐야 한다는 사소리의 의견을 받아들여서였다.

실로 오랜만에 돌아온 서울이었다.

서울의 새벽 거리는 크게 달라진 게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달라진 것은 자기 마음뿐이며, 그동안 폭삭 늙어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기차에서 내린 그는 망설일 것도 없이 발길을 혼마찌깡 쪽으로 돌렸다.

싫든 좋든, 그것은 김동회의 숙명의 행선지인 것이다.

 

혼마찌깡의 철대문은 언제나처럼 굳게 닫혀 있었다.

김동회는 눈앞에 절벽이 가로놓인 것같이 아득해하는 표정으로 철대문을 바라보았다.

이제부터 어떠한 얼굴로 두목 하야시를 만나야 할까 생각하니 정말 아득한 생각만 들었다.

중문을 살며시 밀어보았다. 뜻밖에도 문은 열려 있었다.

초인종을 누르는 수고를 던 것이 요행처럼 생각되었다.

낙엽이 뒹구는 넓은 앞마당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이제껏 깊은 심연 속에 가라앉아 있었던 것만 같은 고요한 건물 안쪽에서

일단의 사나이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너,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이제야 돌아오다니, 무슨 사고가 있었냐?”

“오야붕이 굉장히 노하고 계시단 말야.”

항시 혼마찌깡을 지키고 있는 하야시의 꼬붕들이었다.

수위실처럼 되어 있는 바깥 방에 모여 있던 자들이 김동회가 돌아온 것을 알고

반가워서 몰려나온 것이었다.

모두 일본 아이들로, 김동회보다 하바리 똘마니급들이었다.

“응, 응. 미안하군 미안해!”

김동회는 일본말로 건성 인사를 했다.

두목에게 할 변명을 이들에게 할 필요도 없었고, 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바깥이 좀 떠들썩해서였을까, 안쪽에서 쫓아 나오는 사나이가 있었다.

“어이! 너 도대체……. 아무튼 잘 돌아왔어! 아니끼가 굉장히 기다리고 계시니까.”

하야시의 처남 오까무라였다.

“늦어져서 정말 죄송합니다. 아니끼는 지금 일어나 계신가요?”

김동회는 오까무라에게만은 정중하게 사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응, 어디를 가시려는 것인지, 지금 출타 준비를 하고 계시는 중이야.”

“제가 돌아왔다고 전갈 좀 해주시지 않겠습니까?”

“알았어!”

오까무라가 선선히 대답했다.

그러나 그가 안쪽을 향해 발길을 돌리기도 전이었다.

안쪽에서 조용하지만 무게 있는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냐?”

다름 아닌 두목 하야시의 목소리였다.

김동회는 늦게 돌아왔다는 죄책감으로 다리가 굳어지는 것 같은 감각을 느꼈다.

“네, 우메하라 군이 돌아왔습니다!”

오까무라가 종종걸음으로 달려가서 안쪽을 향해 보고했다.

“그래? 들어오라 해!”

현관을 내려서고 있는 것일까, 아주 가까이서 들리는 목소리였다.

김동회는 현관으로 들어섰다.

현관에서 두목과 마주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으나,

하야시는 현관에도 없었고 긴 복도에도 없었다.

어디에서 말을 건네온 것일까.

김동회는 신발을 벗고 긴 복도의 안쪽을 향해 걸어 들어가려 했다.

“이쪽이야!”

그러자 바로 옆에서 하야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욕탕을 겸한 세면대 쪽이었다.


목욕탕의 문은 열려 있었다.

일본인의 실내복이라 할 유까타 차림의 하야시는 얼굴에 비누 거품을 잔뜩 묻히고

거울 가까이 얼굴을 갖다 대고는 면도를 하고 있었다.

김동회가 문 앞에서 허리를 굽실하였으나, 하야시는 뒤돌아보지 않고서도

거울 속으로 그를 지켜볼 수 있었다.

“늦게 돌아와서 죄송합니다.”

“무엇을 꾸물거리고 있었던 거야?”

하야시는 여전히 뒤돌아보지 않은 채로 물었다.

조용조용한 낮은 목소리로 그가 꾸짖고 있는 것인지,

용서를 하려는 것인지 도무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김동회는 거울 속의 두목의 얼굴을 응시하면서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실은…….”

“아편을 잃어버려서 그렇다고 말하려는 건가?”

두목은 김동회의 말을 가로챘다.

김동회는 더 이을 말도 없었다.

“바보, 아편을 빼앗긴 것도 바보지만 그까짓 짱골라(중국인을 낮춰 부르는 말)놈들에게 당하다니. 사소리를 보호하라고 딸려 보냈더니, 먼저 당하는 놈이 어딨어.”

하야시는 여전히 뒤돌아보지 않은 채, 싹싹 경쾌한 소리를 내며 턱수염을 깎으면서 말했다.

김동회는 억울함을 억지로 참으려는 듯 입술을 꽉 다물었다가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분연히 말했다.

“아편은 되찾았습니다.

짱골라인 마적단놈들을 해치워 복수도 보기 좋게 했습니다.”

“그래? 하지만 처음부터 빼앗기지 않고, 놈들에게 당하지 않은 것만은 못하지.”

하야시는 아편을 되찾고 복수를 했다는 게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냉랭하게 말했다.

김동회는 더 이상 변명할 여지도 없었다.

“가서 기다리고 있어. 내 곧 세수를 끝내고 들어가겠으니.”

하야시는 수도꼭지를 틀고 세면기에 물을 받으면서 말했다.

여전히 김동회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멋쩍은 얼굴로 두목의 등뒤를 바라보고 있던 김동회는 머쓱해져서는

응접실 격인 도꼬노마(床の間) 방으로 갔다.

오까무라가 그의 뒤를 따르려다가 하야시가 불러 세우는 바람에 뒤쫓지 않았다.

김동회는 넓은 다다미방에 방석도 없이 한쪽 구석에 혼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아무래도 두목의 노여움은 대단한 것 같았다.

어떠한 형벌이 내려질까 조마조마한 마음이었다.

세수를 끝내고 이내 오겠다던 하야시는 좀처럼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30분도 더 기다렸을까.

이윽고 나타난 두목은 출타 준비를 끝낸,

일본인의 정장(正裝)인 하오리 하까마 차림이었다.

김동회는 반사적으로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야시의 뒤를 따라 들어오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김동회는 새삼 각오를 새롭게 했다.

두목 하야시가 부하를 질책할 때면,

언제나 아무도 없는 단둘만의 자리를 만든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 앉아…….”

방 안으로 들어선 하야시는 김동회에게 이르고는,

그 자신이 먼저 상좌인 앉은뱅이 탁자 앞에 조용히 무릎을 꿇고 앉았다.

하야시가 정좌(正座)를 하고 앉은 것을 본 김동회는 두목의 단죄가 얼마나 삼엄한 것이 될까

두려움을 느끼면서 무겁게 고개를 떨어뜨렸다.

“정말 여러 가지로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두 손을 방바닥에 짚고 일본식으로 사과했다.

그러나 두목의 목소리는 의외로 부드러웠다.

“아편을 되찾았다는 것은 정말인가?”

“정말이고말고요. 아편을 되찾았을 뿐만 아니라,

중국 마적단에게 복수하였을뿐더러, 아편을 비싼 값으로 처분했습니다.”

김동회는 각오한 단죄가 의외의 방향으로 흐르는 듯싶어 기쁜 듯이 말했다.

“그런 거짓말 같은 정말도 있는 모양이지?”

하야시는 노해 있기는커녕

그 자신도 기쁜 듯이 말하고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나마 세꼬야 상에게 얼굴이 섰군.”

세꼬야란 이미 몇 번 소개한 바가 있는,

일본의 하마구찌 수상을 저격하고 조선으로 피신해 와 있는 도야마 미쓰루의 직계 거물로,

국제 아편 밀수단의 총책인 그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인 것이다.

“이처럼 물건을 되찾을 수 있었던 것은…….”

김동회는 다시없는 기회라 싶었다.

아편을 빼앗기게 된 경위로부터 김기환을 우연히 만나 물건을 되찾고 이를 처분할 수 있게

되기까지의 자초지종을 침을 튀기듯이 신이야 넋이야 지껄여댔다.

하야시도 팔짱을 끼고 김동회의 열변을 흥미 있는 듯이 듣고 있었다.

“이렇게 된 것이 모두, 김기환의 덕분이었지요.”

그는 무릎걸음으로 다가들듯이 하며 말했다.

이 기회에 김기환을 도울 수 있는 방편을 찾아보겠다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하야시의 반응은 뜻밖으로 냉담한 것이었다.

“김기환, 그놈에게도 그런 일면이 있었던가?”

“네, 그렇습니다. 남자다운 남자라 할까,

야꾸자다운 야꾸자라 할까, 정말 의리 있는 사나이입니다…….”

김동회는 다시금 힘있게 말했으나, 하야시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어떻게든지 형님께서 손을 쓰셔서,

그가 서울로 돌아올 수 있게끔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그의 은혜에 보답하는 저의 의리라고 생각하는데요.”

김동회의 눈빛은 여느 때 없이 번쩍번쩍 빛났다.

그러나 하야시는 천천히 고개를 옆으로 젓는 것이었다.

“내가 지금 김기환 그런 녀석에게 손을 쓸 수 있을 만큼 한가한 줄 아나?

노마로부터 얘기 들었겠지?

종로패와의 불상사로 지금 내 발등에 불이 붙었단 말야.”

이번에는 하야시의 눈빛이 반들반들 빛나고 있었다.

 

“노마로부터 대충 얘기는 들었습니다만 어떡하다 그렇게 된 거죠?

일은 잘 수습되었습니까? 김두한이 피신을 하고 있다던데,

그동안 체포되지나 않았나요?”

김동회는 궁금증이 왈칵 몰려들어 한꺼번에 몇 가지를 동시에 물었다.

“잘 수습이 되지 못했으니까 발등에 불이 붙었다는 게지.

하지만 넌 김두한의 안부가 제일로 염려스러운 모양이지?”

하야시는 못마땅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뭐,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아니긴 뭐가 아냐. 하지만 아무튼 좋아.

난 이제부터 그 때문에 경찰서로 나가보지 않으면 안 돼.

그래서 하는 말인데 너, 아직 여독으로 피곤하겠지만 오늘중으로,

오늘중으로 말야, 어떻게든 김두한을 찾아내 주어야겠어.”

하야시는 다부지게 말했으나,

어딘가 명령조라기보다 사정을 하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김동회는 무엇인가 사태가 긴박하다고 느꼈으나,

아직은 김두한이 무사하다는 것을 알고 마음이 놓이는 듯도 싶었다.

그런 채로 아직 두목의 진의를 알 수가 없어 물끄러미 하야시의 표정을 살필 뿐이었다.

“아무래도 김두한을 찾아낼 수 있는 적임자는 너밖에 없을 테니까 말야…….”

“찾아서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김동회는 물론 사태가 어떻게 변천되어 있는가를 몰랐다.

김두한이 어디로 숨어들었는지 알 길이 있을 것 같지도 않았고,

그를 찾아낼 자신이 서지도 않았다.

막연했지만 두목의 진의를 알아내기 위해 물었을 뿐이다.

“응, 만나서 내가 단독 면담을 요구한다고 전해 줘!”

“단독 면담요?”

너무나 놀라서 되물었다.

하야시가 그런 제의를 한다는 것이 정말 뜻밖이었던 것이다.

그는 두목이 우월감에 차 있고,

김두한을 멸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한 두목이 김두한에게 단독 면담을 제의한 것도 뜻밖이지만,

여간해서는 일선에 직접 나서지 않는 그가 이 일엔 앞장을 서려는 것에도

의외로움을 느낀 것이다.

“단독 회담이 되면 좀 불편한 점이 있을까?

서로 경호원 하나쯤 따라붙는 것도 좋겠지.

난 다무라 상 하나를 수행토록 하겠으니까,

김두한도 아무나 하나 데리고 와도 무방하겠지.

그리고 우메하라, 너도 합석을 해도 무방해.

넌 어차피 내 편인지 김두한 편인지 애매한 놈이니까 말야.”

하야시는 여느 때 없이 싸늘한 눈으로 흘낏거리더니,

이제 더 이상 나눌 말이 없다는 듯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오리 하까마 자락에서 바람이 이는 듯싶었다.

김동회도 따라 일어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자 하야시는 문득 생각난 듯이 덧붙이는 것이었다.

“물론 내 제의를 거부하는 것은 자유야.

하지만 그건 김두한을 위해 매우 불행한 일이란 것을 말해 두는 것도 좋겠지.”

하야시는 방을 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