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장군의 아들

제2부 黑龍의 飛翔-혼돈 70

오늘의 쉼터 2014. 8. 27. 11:39

제2부 黑龍의 飛翔-혼돈 70

 

 

어둠이 깃들었다.

밤이 온 것이다.

싫든 좋든 떠나야만 하는 봉천에서의 마지막 밤인 것이다.

이제 마적단에 복수도 해낸 이 마당에 날개라도 돋친 듯 훌훌 떠나야 할 봉천이다.

그런데도 정든 고향에서 돌팔매질에 몰려 쫓겨 가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마적단 두목 곰바위가 자신의 신변을 찾고 있다는 데서 오는 불안감 때문일까.

아니면 빼앗긴 물건을 되찾고서도 자기 수중에 넣지 못하고 있다는 미련 때문일까.

이것도 저것도 아닌 듯싶었다.

꼬집어서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김기환에 대한 막연한 실망감 때문인 것만 같았다.

김동회는 우울했다.

김기환이 자기를 도와준 것은 야꾸자끼리의 의리로서가 아니라,

주먹패의 기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설사 의리감으로 출발했었다 하더라도 목전에 이익만 있으면 사나이 끼리의 의리도 

헌신짝처럼 버릴 수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김기환은 구실을 붙여 하루 빨리 봉천에서 자기를 내몰려 하고 있는 것이나 아닐까.

그 의구와 김기환에 대한 실망이 그를 암울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밤 7시가 지났다. 8시가 가까워오고 있었다. 시장기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나 김기환으로부터는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그를 맞으러 오겠다던 부하들도 나타나지 않았다.

(철저하게 속았구나.)

억울함을 달래기 위해서도, 실컷 먹고나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여관집 며느리에게 저녁상을 차리게 했다.

물론 고량주를 청했다.

세 사람이 겸상인 저녁상을 받았다.

사소리도 이노마도 지네 먹은 닭처럼 시무룩한 표정이었다.

“동회! 넌 봉천을 떠나더라도, 난 혼자 남을 테야.”

독주 한잔을 들이켜고 난 사소리가 볼멘 목소리로 내뱉었다.

김동회는 그 까닭을 묻지 않았다.

묻지 않아도 그 까닭을 훤히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아편 덩어리에 미련 이상의 욕심을 내고 있는 것이다.

“난, 어떻게 해서든지 그것을 되찾아야 하니까!”

사소리는 결연하게 말했다.

그러나 김동회의 귀에는 같은 감도(感度)로 전달되지 않았다.

무망함을 알았기 때문이다.

김기환의 의지가 의리 쪽보다 욕심의 쪽으로 흘렀다면, 그것은 무망한 일인 것이다.

마적단의 수중에 있는 것보다 더 무망한 일인 것이다.

“아서! 목숨이 두 개만 있다면 한번 해볼 짓이지만 말야…….”

김동회는 자포자기하듯 독한 술을 입 안에 털어넣는 것처럼 마셨다.

그러는데 밖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들렸다.

하나나 둘이 아닌, 여럿이서 작당해서 몰려오는 기척이었다.

이제 김기환의 부하들이 맞으러 온 것인가.

마적단 두목 곰바위가 자신의 거처를 알고 부하들을 이끌고 습격을 해온 것인가.

김동회는 바짝 긴장을 하고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러나 긴장도 불안도 부질없는 기우였다는 것을 이내 깨달았다.

“아우님, 동회 아우님.”

커다란 목소리로 소리치며 들어서는 것은 다름 아닌 김기환이었기 때문이다.

일찍이 들어보지도 못했던 것 같은 낭랑한 목소리였다.

김동회는 화닥닥 용수철처럼 튀어 일어났다.

“형님.”

벌컥 문을 열고 뛰어나가 맞았다.

김기환은 활짝 웃었다.

그리고 방 안을 흘끗 들여다보았다.

“아우님, 봉천의 마지막 밤을 즐기시려 했던 모양이지?”

간단하게 차린 술상을 본 모양이었다.

앞장선 김기환 뒤에 어둠 속이라 잘 분간이 되지는 않았지만,

쌍칼 니또류 무사시·점백이·떡매, 그리고 중머리의 중국인인 듯싶은 부하가 따랐다.

“뭐, 기다리고 있기 좀 지루해서요.”

김동회는 김기환의 환한 얼굴 하나만 보고서도,

암울했던 기분도 취기도 한꺼번에 날아가는 것을 느꼈다.

김기환은 끈이 많은 편상화(編上靴)를 벗느라고 잠시 지체했으나

최종 목적지가 바로 이 여관방이기나 한 것처럼 머뭇거리지 않고 들어섰다.

“하마터면 이 송별연에 끼지도 못할 뻔했지만, 송별연의 자리치고는 너무 초라한 것 같구먼.”

김기환은 술상을 내려다보더니,

자리를 권하기도 전에 먼저 그 상머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점백이, 네가 가서 중국 요리라도 시켜오지. 좀 푸짐하게 말야, 핫핫핫.”

그는 무엇이 그렇게도 유쾌한지 너털거리고 웃었다.

태산이라도 업어온 듯 대견해하는 표정이었다.

“아우님, 참 일이 잘되었단 말요.”

점백이가 중머리의 중국인 부하를 앞세우고 나간 다음이었다.

김기환은 새삼스럽게 정색을 하며 말하는 것이었다.

“무엇이 말입니까, 형님?”

김동회는 상체를 앞으로 내밀었다.

“마적단 두목 곰바위와 협상이 잘되었단 말야.”
 
(무슨 협상?)

김동회는 물으려다 그만두었다.

묻기 전에 김기환이 너무나 유쾌해서 못 견디겠다는 듯 술술 불어댔기 때문이다.

“자아식, 그러니까 곰바위, 미련한 곰바위지!

아우님의 몸값으로 몇 푼 집어줬단 말야.

하기야 제깐 놈이 우리 쌍칼 형님하고 맞상대해서 견뎌내겠어?

손장난으로 솜씨 잠깐 보여주었더니 수그러지더래, 핫핫.”

김기환은 마냥 즐거운 듯이 웃어 젖혔다.

잠깐 보여줬다는 손장난이란 물론 칼솜씨를 두고 한 말이었다.

“아우님! 쌍칼 형님께 고맙다고 인사드리쇼.

쇼부를 보신 것은 쌍칼 형님이셨으니까.”

쌍칼 니또류 무사시는 김동회의 인사를 받기도 전에 먼저 활짝 웃기부터 했다.

주인이 던진 막대기를 제대로 물고 온 강아지가 주인 앞에서 연신 꼬리를 칠 때처럼.

“형님! 정말 고맙습니다.”

김동회가 쌍칼을 향해 깊숙이 고개를 숙이고 미처 고개도 들기 전이었다.

또다시 김기환이 헌걸차게 웃어대는 것이었다.

“핫핫핫! 그러나 아우님, 신나고 기분 나는 일이 그것뿐이 아니란 말요.”

쌍칼 쪽을 향해 숙였던 고개를 들면서 김동회의 시선은 곧바로 김기환에게로 옮겨갔다.

“그 검정이를 처분했단 말요.”

검정이란 아편을 두고 한 말이다.

김동회도 그러했지만 사소리의 눈이 광채를 띠었다.

“좋은 작자를 만나 팔아넘길 수 있었단 말야.

좀더 시간이 있었으면 더 좋은 작자를 만나기 위해 고를 수도 있었겠지만,

어디 그럴 만한 시간이 있었어야지!

곰바위와의 협상이 쉽게 이루어질 걸 모르고 있었고,

아우님이 오늘 밤 안으로 떠나야 할 것으로만 알고 적당한 작자가 나선 김에

성급하게 팔아넘겼지 뭐야! 그래도 대금을 들고 돌아가야 할 것만 같아서…….”

이번에는 김기환이 주인이 던진 막대기를 제대로 물고 온 강아지의 꼴로 신이야 넋이야 주워댔다.

“도, 도대체 얼마나 받았습니까?”

허겁지겁 물은 것은 김동회보다 사소리였다.

“아우님들에게 의논도 해보지 않고 팔아치워서 좀 뭣하지만, 모두 1만 5000원을 받았지.”

“1만 5000원이요?”

김동회는 강한 바람을 얼굴 정면으로 받은 때처럼 흐느끼듯이 되받았다.

1만 5000원이면 엄청난 대금이다.

밑천이 7000원밖에 들지 않은 것을 곱쟁이도 더 되는 1만 5000원이라니!

정말 생각도 못 해본 거금이었다.

마적단에게 복수를 가할 수 있었다는 것만도 요행으로 생각하고,

아편에 미련을 갖지 말자고 다짐까지 하지 않았었던가.

아편을 되찾은 데다가, 가만히 앉아 곱쟁이가 넘는 장사를 하다니

너무나 꿈만 같아 실감이 나지도 않았다.

자기네끼리 처분하려 했다면 곱쟁이는커녕,

본전치기라도 했으면 다행이라 여기지 않았었을까.

“그만한 값이면 되었겠지?”

“형님!”

김동회는 목이 메어오는 듯싶어 말을 잇지도 못했다.

그러자 김기환은 떡매로부터 가방을 건네받더니,

장난꾸러기 아이가 과자 봉지를 통째로 쏟아놓듯이,

돈 가방을 거꾸로 들고 돈 다발을 방바닥에 쏟아놓는 것이었다.

방바닥에 수북이 쌓이고 흩어지는 돈 다발! 그것은 황금은 아니었다.

하지만 황금처럼 빛나는 것만 같아 눈이 부신 느낌이 들었다.

김동회는 눈시울이 뜨거워져서 한참 동안 바라볼 수도 없었다.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사소리는 정말 굵은 눈물 방울까지도 뚝뚝 떨어뜨리고 있었다.

“좀더 받을 수 있었을 것을……, 섭섭하더라도 아우님네 돈이오, 가지시오!”

김기환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견금여석(見金如石)이란 말이 있다더니,

그야말로 돈 다발을 자갈덩이 알듯 굴려놓은 것이다.

김동회는 마음속으로 아아! 남자다! ‘대자(大者)’다!라고 부르짖으며,

무릎걸음으로 김기환 앞으로 다가갔다.

“형님! 정말 고맙습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김동회의 진정이었다.

주먹계의 두목이 아무나 될 수 없다는 것을 그도 알고는 있었다.

주먹의 힘도 있고, 도량도 있어야 한다.

머리도 있고, 조직력도 있어야 하며 통솔력도 있어야 한다.
 
비록 망나니패의 집단이라 하지만 김기환이 뫄관패의 두목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만주로 쫓겨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봉천을 휘어잡는 두목으로 행세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대자다운 풍모가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런 것을, 그가 아편을 가로챈 것이나 아닐까 잠시라도 의심했던 일이 죽고 싶도록 부끄러웠다.

“은혜랄 게 없지. 내가 그렇게 되었고 아우님이 나였더라도, 이렇게 했을 것이니까.”

“하지만 너무너무 고맙습니다.

어떻게 이 많은 돈을 제 것이라고 주워 담을 수 있겠습니까?”

김동회는 다시 한 번 돈 더미를 내려다보았다.

100원짜리, 10원짜리 지폐도 더러 섞여 있었지만 주로 1원짜리로 묶인 돈 다발이었다.

정말 이 돈을 자기 몫이라고 몽땅 주워 담았다간, 쌍칼 니또류 무사시의 수리검이

날아들기 전에 벼락과 같은 형벌이 내려질 것만 같아 감히 손을 댈 수도 없었다.

“헛헛! 아편을 판 돈이니까, 아우님네 돈이지.”

“아닙니다, 형님. 반타작이라도 하십시다.”

“반타작?”

김기환은 잠시 생각하는 듯 팔짱을 낀 자세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윽고 하나의 단안이라도 내리려는 것처럼 말했다.

“반타작은 너무 많은 것 같고……,

하긴 쌍칼 형님이나 떡매·점백이 등 아우들과 아이들의 수고도 많았고,

아우님의 기분도 알 만하니, 아우님이 직접 몇 다발 나눠주구료.”

김기환의 말이 떨어지자 김동회는 비로소 돈 더미에 손을 댔다.

그러고는 마치 벌여놓은 사과 더미에서 절반을 뚝 떼어놓듯 돈 더미를 갈라 밀어놓았다.

그러자 김기환은 손을 가로저었다.

“그렇게는 너무 많아.”

그는 갈라놓은 돈 더미 가운데서 하나, 둘, 셋, 세 다발만을 집어들었다.

10원짜리로 묶인 것이었다.

정확히 3000원이다.

3000원이면 물론 적은 돈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이 적정선이기라도 하다는 듯이,

그리고 그것이 돈 다발이 아닌 정말로 사과 더미 가운데서 세 알의 사과를 집어들듯이 집은 것이다. 그러고는 쌍칼 앞으로 돈 뭉치를 내밀었다.

“형님! 형님이 알아서 아이들에게 나눠주시지요.”

김동회는 정말로 황송했다.

황송한 것 못지않게 감동도 했다.

(이런 멋진 사나이가 서울에서 쫓겨났다니!)

그는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통증과도 같은 감각을 느꼈다.

“형님, 어떻게든 은혜를 갚을 길을 찾겠습니다.”

“아니, 그럴 것 없어. 하긴, 당장 아우님에게 의논이랄까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으니까…….”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다뇨?”

김동회는 김기환에게 은혜를 갚을 일이 당장 눈앞에 있다는 것에 오히려 기쁜 듯이 반문했다.

“핫핫!”

김기환은 좀 멋쩍어하는 듯한 한 조각의 웃음부터 웃었다.

“실은 말야……, 내가 봉천에 온 후 가죽 장사에 손을 댔지.”

“가죽 장사요?”

김동회는 놀란 듯이 되물었으나, 가죽 장사라면 머리에 짚이는 것이 있었다.

가죽이라면 물론 쇠가죽을 말하는 것이리라. 쇠가죽은 이 시절 무척 귀한 물건이었다.

군화(軍靴), 배낭 등 군수품으로 쇠가죽이 이용되기 때문에 말끔히 군에 징발되다시피 했다.

조선 사람들은 제대로 가죽 구두 한 번 신어보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삐걱삐걱 소리가 나는 돼지 가죽 구두를 신고 뽐내는 시절이었으니까.

그러나 만주는 조선과 사정이 달랐다.

그처럼 품귀 상태는 아니었던 것이다.

가죽 구두·가죽 가방·가죽 점퍼 등 얼마든지 값싸게 살 수가 있었다.

때문에 상인은 물론, 만주로의 일반 여행자도 만주에서 가죽 제품을 사오는 것이 상례였다.

만주의 가죽 제품이 서울에 오면 갑절 이상으로 값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혼마찌깡의 두목 하야시도 만주로 올 때마다 부하들을 시켜 가죽 제품을 잔뜩 사들이게 했었다.

김동회는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김기환이 장사에까지 손을 대고 있다는 것이 너무 뜻밖이어서 놀란 것이다.

“응, 재고(在庫)가 아직 많이 있지. 어떻게든 빨리 처분을 해야겠는데,

무엇도 약으로 쓰려면 없다는 듯이, 얼른 작자가 나서지 않는구먼.”

“쇠가죽은 조선으로 가져가면 장사가 잘된다던데요?”

“누가 아니래! 하지만 나나 우리가 어디 자유롭게 조선 땅을 넘나들 수 있어야 말이지.”

“허어!”

김동회는 김기환을 대신해서 한숨을 추슬렀다.

“그래서 말야……. 아우님이, 내 쇠가죽 좀 사주지 않겠나?”

김동회는 말하는 김기환 쪽보다 사소리 쪽을 먼저 쳐다보았다.

만주에서 가죽 제품을 사가지고 가면 장사가 된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아편 판매 대금의 처분권은 어디까지나 사소리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빼앗긴 물건을 되찾고 엄청난 대금까지 받게 되어 흥분해 있었던 사소리였지만,

순간 낯빛이 달라졌다.

의심 많은 그의 가슴에 또다시 의혹의 구름이 인 모양이었다.

그 표정을 본 김동회도 얼른 대답을 하지 못했다.

“뭐 억지로 떠맡기겠다는 뜻은 아니지만 말이지…….

사실 이 많은 돈을 아무리 세 사람이서 분담해 갖고 간다 하더라도,

세관이나 이동 경찰의 눈에 띄면 곤란할걸.

필요한 만큼의 적당한 금액만 현금으로 가져가고,

나머지는 물건으로 바꿔가는 것이 좋을 거야.”

김기환의 이 한마디는 어떠한 협박보다도 더 효험이 있는 듯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