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장군의 아들

제2부 黑龍의 飛翔-혼돈 69

오늘의 쉼터 2014. 8. 27. 11:38

제2부 黑龍의 飛翔-혼돈 69 

 

 

김기환은 등받이가 높은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닭싸움 구경하듯 바라만 보고 있었다.

“거둬들여!”

그는 나직이 떡매에게 일렀다.

떡매는 식탁 위에 수북이 쌓여 있는 돈 다발과 예의 아편 덩어리를 부지런히

가방 속에 쓸어 담았다.

돈 다발과 아편 덩어리를 가방 속에 쓸어 담은 것을 곁눈질로 확인한 김기환은

이제 볼장은 다 보았다는 듯이 잠자코 자리에서 일어났다.

광란한 김동회와 사소리, 그리고 이노마는 아직도 가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있었다.

그들이야 미처 날뛰건 말건, 그러다가 살인이라도 하게 되건 말건,

김기환은 아랑곳할 것 없다는 듯이 밖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그의 뒤로 부하들이 우르르 따라나섰다.

입구 쪽에서 수리검을 꼬나 쥐고 섰던 쌍칼 니또류 무사시도 칼을 거두어

다시 허리춤에 꽂고, 김기환의 뒤를 따랐다.

“형님, 우리도 뜹시다!”

김기환패가 슬그머니 빠져나가는 것을 제일 먼저 깨달은 이노마가 당황해서 소리쳤다.

그제야 김동회는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당황하는 것 같지 않았다.

김기환패를 뒤쫓아 도망치려 하지도 않았다.

이마에 진물처럼 돋아 있는 땀을 손등으로 뻑 문질러내면서 나자빠져 있는

마적패들을 내려다보았다.

마적 떼들은 저마다 보기 흉한 꼴로 나둥그러져 있었다.

그중에는 마지막 단말마의 고통을 호소하는 것처럼 사지를 뒤틀면서

꿈틀거리는 자가 있기는 했지만,

 아마 이들에게 저항력 따위는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저항 능력은커녕,

하나둘은 정말 숨이라도 거둔 것이 아닌가 싶게 움칫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죽었을지도 몰라.)

언뜻 불길한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뛰어야겠구나.)

그는 출구 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때 안쪽에서 울부짖는 듯한 고함 소리가 들렸다.

이제껏 김기환패의 무서운 서슬에 꼼짝도 하지 못하고 떨고만 있던

술집 주인이 김기환패가 빠져나간 것을 보고 소리친 것이다.

짐승의 포효 같은 중국말 고함 소리를 물론 김동회는 알아듣지 못했다.

아마도 김기환패가 음식 값도 치르지 않고 기물만 파괴하고 도망친 것에 항변하는 것이거나,

죽은 듯 나둥그러져 있는 마적패들을 보고 무서워서 소리치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면서 김동회는 좀 난처하다고 생각했다.

김기환이 자기 부하들만 뽑아 나간 것이 다소 무책임하다고도 생각했다.

술집 주인마저도 후려치고 도망치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렇게 하고 싶지가 않았다.

“왜 그러지?”

그는 사소리에게 물을 수 있는 여유를 아직 갖고 있었다.

 

이 경황 속에서도 가질 수 있는 그 여유는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일까.

그것은 후련함 때문이었다.

이대로는 물러설 수도 죽을 수도 없었던 사나이로서의 본망(本望),

사무쳤던 복수의 감정을 충족시켰다는 후련함 때문이었다.

그에게는 잃어버린 아편 덩어리에 대한 미련 같은 것은 있지도 않았다.

때문에 이를 되찾았다는 것에 대한 기쁨도 있지 않았다.

오직 있었던 것은 복수를 할 수 있었다는 쾌감뿐이었다.

이마에 돋은 땀을 손등으로 씻어내며 죽은 듯 나둥그러져 있는 마적 떼를

내려다보면서 회심의 미소를 머금을 수 있었던 것도 이 후련함 때문이었다.

놈들이 실제로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함.

그러나 그 불길함조차 건너뛴 후련함이었다.

설사 이로 하여 살인자가 되어 옥에 갇히고,

똑같이 죽음을 당하게 된다 하더라도 그 죽음의 공포조차 건너뛴 후련함이었다.

이미 김기환패가 빠져나간 것을 깨달은 다음에도 여유를 잃지 않은 것도,

술집 주인이 소리소리 지르면서 울부짖는 것을 보고도 도망치려 하지 않은 여유도

그 후련함 때문이었다.

“물어내라는 거야!”

사소리가 김동회의 나직한 물음에 대답했다.

“무엇을?”

“사람이 죽었으면 관(棺) 값을, 다쳤으면 약값을 물어주고 가야지,

그냥 가버리면 어쩌냐는 거야.”

“어떡하면 좋지?”

“주고 가든가, 내빼든가 해야지.”

내빼려 했다면 벌써 내뺐을 것이 아닌가.

“얼마면 될까?”

“협상을 해봐야지.”

사소리는 아직도 울부짖고 있는 술집 주인에게로 다가갔다.

그사이, 김동회와 이노마는 여전히 죽은 듯 나둥그러져 있는 마적패들을 지켜보았다.

정말로 죽었는가 아닌가 확인해 보려는 것처럼 발길로 툭툭 쳐보기도 했다.

“비겁한 놈들, 우리는 단 셋뿐이야. 목숨이 붙었거든 얼마든지 덤벼보란 말야.”

김동회는 일본말로 쏘아붙였다.

조선말은 통하지 않더라도 일본말이 통하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나둥그러져 있던 놈 하나가 겨우 김동회를 쳐다보며 두 손을 모아

눈물과 함께 비는 것이었다.

“목숨만은 살려…….”

역시 서투른 일본말로써였다.

이를 향해 다시 가격할 마음은 이제 없었다.

“100원, 100원이나 내라지 뭐야?”

사소리가 속삭일 것도 없이 큰소리로 외쳤다.

(100원? 100원이면 싸지? 복수, 복수를 했다는 후련함에 비하면.)

그것이 엊그제의 일이었다면 곤란하다.

하지만 지금은 노마가 가져온 돈으로 하여 호주머니 안이 두둑한 것이다.

김동회는 주인에게 그가 요구한 돈을 건네주었다.

술집 주인은 언제 울부짖었느냐 싶게, 셰셰(謝謝)를 연발하는 것이었다.

김동회는 술집을 나왔다.

물론, 사소리와 이노마가 뒤를 따랐다.

술집 주인이 문 밖까지 뒤쫓아 나와 연방 고맙다고 치하를 했으나,

마적패들이 뒤따라오는 기색은 없었다.

어둠이 짙게 덮여 있었다.

북국의 찬바람에 별마저 떨고 있는 것처럼 영롱하게 빛났다.

그 어둠 속에 김기환이나 그 패거리들의 모습은 없었다.

술집 안에서 지체하고 있는 동안,

이들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길이 없었다.

으레 여관집에서 만날 수 있으려니 하고, 그다지 조급해할 것도 없었다.

혹시나 마적단의 다른 패거리들이 뒤를 밟지나 않을까 싶어

골목 안을 살펴가면서 여관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곳에 김기환이나 그 패거리들은 있지 않았다.

다른 때 같았으면 이 시간이면 웅성거렸을 넓은 방,

 아래층, 2층도 오늘따라 붐비지 않고 한산했다.

주인도 이들을 맞지 않았다.

옷이라고는 그 단벌밖에 없는 것인지 때묻은 노랑 저고리,

다홍 치마의 며느리가 이들을 맞았을 뿐이다.

“김기환 형님은 돌아오시지 않았나요?”

“예.”

“떡매나 점백이는?”

“그이들도 안 왔어요.”

“어디들 갔을까?”

“모르겠는데요.”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말에 여인은 딴전을 부리듯 대답했다.

김동회는 좀 맥 빠진 기분을 느꼈으나 조급할 것은 없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빼앗긴 아편 덩어리를 마적단으로부터 되찾은 전과를 올린 것이니까,

그들끼리 모여 기분 내키는 술잔이라도 기울이고 있으려니 하고 가볍게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김동회 자신도 시장기를 느꼈다.

싸울 때는 몰랐으나, 혼신의 힘을 다해서 싸웠기 때문인지 온몸이 기진한 것처럼

나른해지면서 공복을 느낀 것이다.

나가서 한잔하고도 싶었으나,

언제 김기환이 돌아오거나 연락을 취해 올지 몰라 여관에서 기다려야만 했다.

고량주를 곁들인 주안상을 차리게 했다.

독한 술을 몇 잔이나 기울였으나 좀처럼 취하지 않았다.

마침내 복수를 했다는 흥분이 아직 가시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제 빼앗겼던 아편도 되찾았으니

빨리 이를 처분하고 서울로 돌아가야겠다는 마음에 들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사소리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도 긴장이 풀려서인지,

흥분이 덜 가셔서인지 그저 시무룩한 얼굴이기만 했다.

“동회! 우리가 아무래도 당한 것만 같아.”

사소리가 기어이 한마디 했다.

“무얼?”

“김기환한테 말야.”

“왜?”

“나타나지 않는 까닭이 뭐야?

돈과 아편만을 챙기고 먼저 빠져나간 까닭이 뭐냔 말야?”

김동회는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사소리의 말 그대로 머리에 와닿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먹힌 것 같아!”

사소리가 볼멘소리로 덧붙였다.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 하지 않았는가.

처음에는 순수한 의협심으로 빼앗긴 물건을 찾아주려 했다가,

물건을 찾고 보니 딴생각이 났을지도 모른다.

워낙 아편은 귀하고 값이 나가는 것이니까.

김기환 자신은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탐욕스러운 그의 부하 떡매나 김동회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점백이 등이 두목을 부추겨 물건을 가로채려 할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사소리의 의심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김동회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꼭 그렇다고만 믿고 싶지도 않았다.

사람이란 믿고 믿다가 믿어지지 않는 것을 의심해야지,

불신부터 앞세울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그 아편 덩어리는 이미 잃어버린 것으로 체념했던 물건이 아닌가.

그가 아직까지 봉천에 머물러 있었던 것은 그 물건을 되찾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순전히 마적단에 복수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 복수를 마침내 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이 누구의 덕분이었던가.

김기환의 힘이었다. 그가 없었고,

그의 힘을 빌리지 않았던들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것이었다.

마적단에게 보기 좋게 복수를 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김기환에게 신세를 지고 은혜를 입은 것이 되는 것이다.

그 이상 무엇을 바랄 수 있단 말인가.

체념했었던 아편 덩어리를 되찾겠다는 자체가 견물생심의 욕심이 아니고 무엇인가.

김동회는 아편에 미련을 갖지 않기로 했고, 김기환을 의심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이제 목적을 이룬 이상 은혜 입은 김기환에게 감사하며 봉천을 떠나는 것뿐이다.

“그딴 소리 마. 김기환 형님은 그런 분이 아니란 말여.”

김동회는 한마디로 사소리의 말을 묵살했다.

그러나 사소리의 찌푸린 미간은 좀처럼 펴지지를 않았다.

사소리의 의혹이 적중한 것이었던지 이날 밤,

김기환이나 그 부하들은 여관에 얼씬하지도 않았다.

아무런 전갈도 보내오지 않았다.

다음날 정오가 다가오는 시간까지도 아무런 기별이 없었다.

김동회도 차츰 의혹의 마음이 깊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의혹의 마음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봉천을 빨리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서울로 돌아가야 한다는 마음으로 조급해 있었기도 했지만,

김기환이란 인물에 실망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야, 사소리! 나 혼자라도 먼저 서울로 돌아가야겠어.”

“뭐라구? 그건 어떡허구?”

사소리는 펄쩍 뛰었다.

“네가 혼자 남아서 처리해도 충분해.

난 그것에 미련을 갖지 않기로 했으니까.”

김동회는 빨리 서울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실정과 봉천을 떠나야겠다는 심정을

진솔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때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반사적으로 바깥을 내다보았다.

그리고 또한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여관 앞마당으로 들어선 것이 점백이였기 때문이다.

점백이는 혼자였다.

“어쩐 일이시오?”

김동회는 지난날의 감정 따위는 제쳐놓고 나아가 맞았다.

“내 팔자도 기구하지. 내가 여기서 당신의 뒷바라지나 하고 있어야 하니.”

점백이는 아무래도 묵은 감정을 말끔히 씻어낼 수 없는 모양이었다.

“헛헛! 내 뒷바라지 하지 않아도 되도록 나 오늘로 봉천을 떠나겠수다.”

“기미를 알아차린 모양이시지?”

“무슨 기미?”

“여기 마적단 두목 곰바위가 노발대발해서 당신네들을 찾고 있단 말요.”

(왜?)

김동회는 반문하려다 그만두었다.

묻지 않아도 그 까닭을 알 만했다.

(죽었구나!)

가슴이 철렁했다.

“사람을 쳐도 적당히 쳐야지.

아고(턱)가 아스러져 버렸는가 하면 갈비뼈가 몇 개씩 부러졌다,

배창자가 끊어졌다 하고 야단이니까.”

(죽지는 않았구나!)

김동회의 표정은 굳어졌으나, 그러한 속에서도 일종의 다행함을 느꼈다.

“지금 쌍칼 형님이 곰바위와 담판중이기는 하지만, 좀 골칫거리란 말예요.

아무래도 오늘중에 봉천을 떠났으면 좋겠다는 것이 아니끼의 생각이란 말예요.”

아니끼란 물론 김기환을 두고 한 말이었다.

“그럼, 그 검정이는?”

사소리가 다급한 듯 끼어들었다.

검은 색안경 속의 점백이의 눈이 경멸하듯 사소리의 얼굴을 흘겨보는 듯했다.

“그까짓 아편 덩어리 몇 개가 문제란 말요? 사느냐 죽느냐가 문제지.”

김동회는 솔직히 암담한 심정을 느꼈다.

회오리바람과 같은 거센 바람 속에 휘말려 든 느낌이었다.

그러나 침착을 가장하며 말했다.

“알겠소! 하지만 기환 형님을 한 번도 뵙지 못했는데 떠날 수는 없지 않소?”

“지금 아니끼는 당신네들 때문에 골치를 썩고 있단 말요.

오늘 밤, 야간 기차표를 끊어놓겠다 하셨으니까 떠날 준비나 해두란 말요.

그동안 꼼짝도 하지 말고 여관방을 지키고 계시오.

 이따 밤에 우리 아이들이 모시러 올 거요.”

그뿐, 점백이는 자리에 앉지도 않고 돌아서 나갔다.

원한을 품고 있는 자에게 오히려 신변 안전을 도모하는 심부름이나 하고 다니는 것에

불만을 품고 있음이 역력했다.

그 감정의 시위를 하려는 것처럼 그의 어깨는 소스라쳐 있었다.

그 등뒤에다 대고 김동회는 말했다.

“형님께 세심한 데까지 신경을 써주셔서 고맙다고나 전해 주시오.”

점백이는 이에 대꾸하지 않았다.

이제는 새끼에 꿰인 돌멩이였다.

밤까지 기다리라니 기다릴밖에 없었다.

김기환의 부하들이 맞으러 올 그 시간까지…….

지루하고 초조하고 암담한 시간 속에 날은 저물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