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장군의 아들

제2부 黑龍의 飛翔-혼돈 68

오늘의 쉼터 2014. 8. 27. 11:37

제2부 黑龍의 飛翔-혼돈 68 

 

 

어둠침침한 속에서도 한눈으로 알아볼 수 있는, 검은 색안경의 점백이였기 때문이었다.

점백이는 중국인까지 포함된 서넛의 부하까지 거느리고 떠들썩하게 들어서고 있었다.

김동회는 순간 못 본 체할까 말까 잠시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점백이라고 하면 역시 껄끄러운 상대였다.

김기환의 중재로 일시 화해를 했다고는 하지만 마음으로부터의 것은 아니었다.

김동회 자신이 마적단에 품고 있는 복수심만큼,

점백이도 자신을 향한 복수심에 불타고 있을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를 못 본 체한다는 것은 비겁하다.

그는 천천히 엉덩이를 일으켜 홀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점백이도 검은 안경 속으로 금방 김동회를 발견한 듯 휘적휘적 어깨를 흔들면서 다가왔다.

그 거동이며 안경 속의 보이지 않는 눈빛이 적의에 차 있는 듯했다.

“동회 씨! 거, 팔자 한번 좋으시구료.”

다가오면서 내뱉는 점백이의 한마디는 역시 껄끄러운 것이었다.

이런 경우, 주먹패는 저절로 긴장을 느끼면서 몸과 마음을 동시에 무장시키게 마련이었다.

수가 틀리면 언제라도 주먹이 날아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소 사정이 달랐다.

“거, 무슨 소리요?”

김동회는 속이 뒤집혔지만 부드럽게 미소지으면서 물었다.

“나, 솔직히 당신에게 감정이 좋지 않으면서 당신의 꽁무니를 쫓아다니며 시중을 들어야 하는데, 당신은 서울에서 갖고 왔을 넉넉한 주머니로 계집년 꿰어 차고 마실 수가 있으니…….”

김동회는 솔직히 모욕감을 느꼈다.

이 모욕감을 벗어날 수 있고, 상대방의 모욕적인 주둥이를 다물게 하려면 번개같은

선제의 주먹이 나는 것이 상책이었다.

또 여기가 서울이었고, 다른 경우 같았으면 벌써 그렇게 해서 끝장이 났을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스스로 비굴함을 느끼면서 타협하듯이 말했다.

“형씨, 노여움 푸시고 우리 함께 한잔 나눕시다.”

“동회 씨, 재수도 좋지! 지금 당신은 나와 함께 술을 나눌 시간이 없단 말요.”

수수께끼 같은 그 말을 당장 납득하지 못하고,

점백이의 해답을 기다리면서 멍청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 애들이 당신이 잃어버린 아편 덩어리를 찾았단 말요.”

“뭐, 뭐, 뭐라구요?”

김동회는 갑자기 반벙어리가 된 것처럼 말을 더듬었다.

“그 아편 덩어리를 우리 형님이 사기로 했단 말요.”

우리 형님이란 물론 김기환을 두고 한 말이었다.

“그러니 어서 가보란 말요!

당신의 여관으로. 형님이 당신의 꼬붕 사소리와 함께 기다리고 계시니까.

술과 계집은 내가 인계해서 대신 마셔주고, 즐겨줄 테니까. 헛헛!”

웃음소리에도 털이 달린 것 같은 점백이의 목소리가 이젠 역겹게 들리지도 않았다.

 

이럴 수도 있는 것일까.

 김동회는 자기의 귀를 의심했다.

자세한 경위를 모르는 채,

점백이가 일부러 비아냥거리는 것이나 아닐까 하고도 생각했다.

아직까지도 원한을 품고 있는 점백이가 자기를 골탕먹이려고

어떤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이나 아닐까 하는 의혹도 있었다.

하지만 내일이면 봉천을 떠나야겠다고 마음먹은 이 마당에 의심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속는 셈치기로 했으나,

이것이 사실이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노마와 함께 미루미루깡깡을 나왔다.

남아 있는 점백이가 등뒤로 조소를 보내고 있는 것만 같아 등뒤가 군시럽게 느껴졌다.

물론 하숙집 여관으로 급행했으나, 달리는 역마차가 그처럼 더디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그러나 점백이의 말은 비아냥거린 말도 음모도 아닌 사실이었다.

하숙집 아래층에는 흥분한 사소리는 물론,

김기환과 그 부하들 모두가 다소 들떠 있는 듯이 보였다.

노마를 김기환에게 인사를 드리게 한 것은 물론이지만,

미처 서울 소식을 전해 줄 틈도 없었다.

밤 7시, 마적단이 아편 덩어리를 김기환에게 팔러 올 것이란 것이었다.

김기환이 득의에 찬 얼굴로 설명한 바에 의하면 일이 이쯤 된 경위는 대충 이러했다.

김동회에게서 아편 덩어리를 빼앗아간 예의 마적단들은 아직도 아편을 처분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들도 범행 직후에 아편을 내다 팔기가 꺼림칙했을지도 모른다.

물건을 빼앗긴 자들이 뒤쫓을 것이 두려워 한참 동안 잠적해 있었을 것이다.

또한 아편의 판매 루트를 잘 몰라 차일피일 시간을 흘렸던 모양이다.

그렇게 뜸을 들이다가 물건을 팔러 쇼뜰마찌에 나타난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쇼뜰마찌를 배회하는 마적단의 소행인 것으로 믿고 이들을 미행했던

김기환의 부하들에게 덜미가 잡히고 만 것이다.

이 사실은 즉각 김기환에게 보고되었다.

김기환이 급히 현장에 나타난 것은 물론이다.

“허어! 이건, 정말 좋은 물건이오.

도대체 어디서 났소? 내가 다 사리다. 좋은 값으로 내가 사겠으니 이따 다시 만납시다.

이만한 물건을 사려면 충분한 돈을 마련해야 되겠는데,

지금 당장에는 그런 많은 돈을 갖고 있지 않으니까…….”

이렇게 해서 마적단과의 가매매가 구두 합의되어 밤 7시에 만나기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약속 장소는 하숙집 여관에서 그리 멀지 않은 조그마한 스탠드바라 했다.

노마를 마중 나간 김동회와 사소리가 미루미루깡깡에서 만나기로 약속되어 있다는 말을 듣고,

점백이를 시켜 김동회를 불러들이게 한 것이다.

“형님! 정말 그 아편을 사실 작정이십니까?”

“아우님도 멍청할 때가 있군.”

가볍게 웃는 김기환에게서 더 물을 것도 더 들어야 할 대답거리도 없었다.


겨울을 재촉하는 북국 하늘에 어둠이 덮였다.

그러나 충분한 조명으로 밝혀져 있는 실내가 바깥 하늘보다도 더 어두운 것으로 느껴졌다.

바닥에 붉은 주단이 깔려 있고,

벽면이 빨간색과 푸른색으로만 장식된 칙칙한 인상 때문인 것일까.

그것도 아닐 것이다.

하나의 음모가 도사리고 있어,

실내의 분위기가 납덩이처럼 가라앉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음모는 다름 아닌 김기환패와 김동회패가 공모해서 먹이가 빠져들기를

기다리며 파놓은 함정인 것이다.

작은 스탠드바라 하지만 역시 대륙적인 규모가 있어 홀 안은 허전할 만큼 넓었다.

널찍널찍한 공간 사이사이에 몇 개의 원탁과,

등받이가 높은 안락 의자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이쪽저쪽의 테이블에서는 벌써 주연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 안쪽, 가장 깊숙한 테이블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바로 김동회와 사소리, 그리고 이노마였다.

이들은 술잔을 앞에 놓고 있을 뿐,

이를 기울이려고도 하지 않은 채 여섯 개의 동공이 입구 쪽을 향해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다.

이윽고 7시가 가까워오자 김기환을 선두로 하고 7명쯤 될까,

일단의 사나이들이 안하무인 격으로 떠들썩하게 들어서고 있었다.

김동회는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그 일단의 사나이들 가운데, 꿈에도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마적단놈들이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미루미루깡깡에서 흥정을 붙여왔던 놈,

얼굴에 약물을 뿌렸던 놈,

단추가 많은 말쑥한 중국옷 차림새의 물주 같았던 놈,

이 몇몇들이 바로 눈앞에 있는 것이다.

그동안 쇼뜰마찌·가스가의 야시장을 누비다시피 찾아 헤맸던,

바로 그 밉살스러운 얼굴들인 것이다.

순간 김동회는 가슴이 곤두박질치고 피가 역류하며 머리끝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김기환과 그 마적단패들은 마치 같은 패거리들이기나 한 것처럼 화기애애한 담소를 나누면서,

김동회 쪽과는 정반대 방향인 구석진 빈 테이블로 자리를 하고 앉았다.

김기환은 김동회와 얼굴을 마주할 수 있는 쪽으로 앉아 있었다.

그 옆에는 필시 돈 가방인 것이 분명한,

큼직한 가방을 소중한 듯 안고 있는 그의 심복 떡매와,

통역인인지 아니면 역시 중국인 부하인지 모를 중국옷 차림의 사나이 하나가 배석하고 있을 뿐,

나머지 4명은 모두 중국 마적단놈들이었다.

김기환은 상대방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일부러 소수만 대동하고 나타난 것이다.

대화는 마치 즐거운 화제를 나누는 것처럼 한참 동안 계속되었다.

주로 중국인 부하와 마적단 사이에 교환되었다.

자리가 멀어 들리지는 않았지만,

들렸다 하더라도 김동회가 알아들을 수 없는 중국말이었다.

한참 후에, 떡매가 손가방을 열더니

돈 다발을 차곡차곡 테이블 위에 쌓아 올리는 게 아닌가.

점백이와 그 부하들이 일전에 나누어 가지려 했던 바로 그 돈 다발이었다.


탁자 위에 수북이 쌓여가는 돈 다발을 보고,

4명의 마적단들의 눈이 광채를 띠면서 빛났다.

이들이 꼴깍하고 삼킨 마른침이 딸꾹질처럼 크게 김동회의 귀에까지 들리는 듯싶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가운데에 앉은 마적단 한 놈이 허리춤을 끄르면서

아편 덩어리를 꺼내놓는 것이 아닌가.

김동회는 숨이 콱 막히고 눈이 뒤집힐 것만 같았다.

은종이로 싸고, 기차 안에서 산 사과 망태 속에 들어 있는,

빼앗겼을 때 그대로의 덩어리였다.

뒤집힌 눈에도 분명한 7개의 덩어리였다.

김기환이 서두르지 않는 침착한 거동으로 물건을 받아 내용을 살펴보았다.

냄새도 맡아보고, 손톱 끝으로 눈곱만큼 아편을 떼어내어 혀끝으로 맛을 보기도 했다.

그러고는 떡매에게 아편 덩어리를 건네는 것이었다.

떡매가 재빨리 받아 빈 돈가방 속에 아편 덩어리를 챙겨 넣었다.

그러자 김기환은 입가에 너그러운 여유의 미소까지 머금고는 탁자

위의 돈 뭉치를 마적단놈들 앞으로 밀어놓는 것이 아닌가.

(정말로 돈을 주고 사려는 것인가?)

김동회는 다시 한 번 놀랐다.

네 놈의 마적단이 동시에 엉덩이를 들었다.

돈 뭉치를 보고 황홀해서 모두 얼이 빠져 있는 것만 같았다.

그 가운데 한 놈의 팔이 돈 뭉치 속으로 뻗쳐왔다. 그 순간이었다.

어둠 속에서 홀연히 나타난 모습 하나가 있었다.

이 사나이가 중국말로 무엇인가 외마디소리를 질렀다.

“꼼짝 마라!”

하고 소리친 것이다.

그와 동시였다.

어둠을 가르면서 네 개의 단검이 동시에,

각각 마적단 네 놈의 테이블 위에 화살처럼 날아들어 정확하게 꽂힌 것이다.

쌍칼 니또류 무사시였다.

비록 우미관 뒷골목의 왕자 김두한에게 맞고 만주로 쫓겨 온 쌍칼이었지만,

그 솜씨는 아직도 녹슬지 않고 있었다.

한때 서커스 무대에서 젊은 여인을 십자로 팔을 벌려 세워놓고,

머리끝과 양팔 끝은 물론, 온몸에 무수한 수리검을 던져 판자 위에

칼로 인영(人影)을 그려놓고 갈채를 받았던 솜씨인 것이다.

그는 어둠 속에서 모습을 나타낸 것과 동시에,

양손에 각각 두 자루씩의 수리검을 들고 동시에 뿌린 것이다.

그것이 굵은 빗방울처럼 후드득거리며 날아와서

놈들의 테이블 위에 한치의 에누리도 없이 꽂힌 것이다.

마적 떼들이 소스라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혼비백산했다는 것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사색이 된 이들이 소리난 쪽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불빛이 닿는 조명 안으로 모습을 드러낸 쌍칼의 양손에는

아직도 각각 두 자루씩의 수리검이 쥐어져 있었다.

움칫만 하면 언제든지 날아들 자세로.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마적 떼들은 도망갈 구멍을 찾으려는 듯이 허둥거렸다.

그러나 이들이 도망칠 틈바구니는 이미 없었다.

홀 이쪽저쪽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던 손님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우르르 몰려든 것이다.

이들은 그저 술을 마시는 체하고 있었던 김기환의 심복 부하들이었다.

더구나 입구 쪽에는 쌍칼 니또류 무사시가 승리감에 겨운 듯한

회심의 미소를 머금고 양손에 똑같이 두 개씩의 수리검을 꼬나 쥔 채 버티고 있는 것이다.

마적패들은 독 안에 든 쥐였다.

이들은 공포에 질린 얼굴로 서로 마주 쳐다볼 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거기에 김동회가 어슬렁어슬렁 도깨비처럼 모습을 나타냈다.

그 좌우로 사소리와 이노마가 뒤따랐음은 물론이다.

김동회는 붉은 불빛 아래에서도 그 표정이 파르스름하게 느껴질 만큼 창백해 보였다.

순전히 분노로 하여 낯빛이 바랜 얼굴인 것이다.

그 눈빛만이 희미한 어둠 속에서도 이글이글 불타올랐다.

복수심에 사무친 눈인 것이다.

“마음 내키는 대로!”

김기환이 떠들썩할 것도 없이 조용히 한마디 내뱉었다.

김동회에게 마음 내키는 대로 처치해도 좋다는 분부인 것이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였다.

어슬렁거리며 천천히 모습을 나타냈을 때와는 달리 김동회는 비호처럼 날아들었다.

맨 앞에 선 놈의 턱주가리를 힘껏 후려쳤다.

단단한 턱이 질그릇 깨지는 소리와 함께 그 커다란 덩치가 와장창,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나자빠졌다.

김동회의 얼굴에 고춧가루인지 약물인지를 뿌리고,

맥주병으로 그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던 바로 그놈이었다.

그는 나자빠진 놈의 어디라 할 것 없이 짓이기듯 발길로 짓밟았다.

순수한 분노, 그렇다, 순수한 분노였다.

놈들에게 당했던 수모도 수모였지만 그동안 다리 밑에서 추위에 떨며 노숙도 했고,

중국집 유리창을 깨가며 음식 도둑질로 허기를 달래야 했던 고초,

서울로 돌아가려야 돌아갈 수 없었던 원한, 쌓이고쌓인 분노가 한꺼번에 폭발하듯 터진 것이다.

밑에 쓰러진 놈은 무엇을 호소하는지 으, 으, 으, 짐승처럼 울부짖다가 숨이라도 끊긴 듯

축 늘어져서 움칫도 하지 못했다.

그래도 김동회는 분노의 발길질을 멈추지 않았다.

싸움판에서 뼈가 굵은 그였다.

상대가 쓰러지고 용서라도 구해 오면 더 이상 가격하지 않아온 그였다.

그러한 그가 이성을 잃은 듯이 이처럼 잔인했던 것은

그동안 쌓인 분노가 너무나 너무나 사무쳤기 때문이었으리라.

그것은 사소리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한때는 강원도 일대에서 한가락 한 독종의 싸움꾼인 것이다.

그는 김동회가 몸을 날린 것과 함께 또한 마적패에 달려들어 주먹 한 방씩을 날려

놈들을 조용히 잠재웠다.

그러고는 그 역시 미친 것처럼 쓰러진 놈을 발길질로 짓이겨댔다.

광란한 두 사나이를 거든 것은 이노마 하나뿐,

김기환이나 그 부하들은 굳이 손을 쓸 것도 없었다.

그저 얌전하게 바라만 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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