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장군의 아들

제2부 黑龍의 飛翔-혼돈 67

오늘의 쉼터 2014. 8. 27. 11:36

제2부 黑龍의 飛翔-혼돈 67 

 

 

하숙집 주인의 방으로 옮겨 앉자,

김기환이 먼저 운을 뗐다.

“그건 차츰 말씀드리기로 하고, 형님은 객지에서 어떻게 지내고 계십니까?”

김동회는 무릎을 꿇은 자세로 먼저 정중히 물었다.

“나 말인가? 사내 대장부는 도처에 유청산(有靑山)이라 하지 않는가? 핫핫!

다행히 무사시 형님이 봉천에 터를 잡고 계셨고,

서울에서 쫓겨 온 뫄관패 아이들도 적지 않아 이럭저럭 견딜 만은 하지. 헛헛!”

헌걸차게 웃는 김기환에게는 주먹계의 두목다운 대자의 풍모가 있었다.

그는 봉천으로 쫓겨 온 이후, 먼저 와서 터를 잡고 있었던 니또류 무사시,

곧 쌍칼의 조직과 과거 뫄관패에 속해 있던 부하들을 합해 근 40명에 이르는

아이들을 거느리게 되었고, 이들에게 신문팔이를 비롯해서 여러 가지 장사를 시켜

경제적으로도 궁색을 면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말했다.

주먹의 힘도 널리 알려져서 이젠 봉천 바닥에선 아무도 얕잡아볼 수 없는

막강한 집단이 되었다고도 말했다.

여관집 주인이 예의 노랑 저고리, 다홍 치마의 며느리를 시켜 주안상을 들여보냈다.

그것은 주인의 각별한 대접이었다.

며칠을 이 여관에 묵으면서도 받아보지 못했고, 목격한 일도 없는 예우였다.

이것만으로써도 김기환이 이곳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을 짐작할 만했다.

“그건 그렇고, 아우님은 도대체 무슨 용건으로 봉천엘 왔고 난처한 일에 빠졌다니,

무슨 일이 있단 말요?”

김기환은 독한 고량주를 권하면서 거듭 물었다.

김동회는 이제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일곱 덩어리의 아편을 밀수하게 된 경위와 마적단인 듯싶은 놈들의 간계에 속아

이를 빼앗기게 된 자초지종을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음! 습격을 당한 장소가 어디라 했지?”

팔짱을 끼고 신중하게 듣고 있던 김기환이 고개를 크게 한번 끄덕이고 나서 물었다.

“미루미루깡깡의 건너편 중국 음식점 2층에서였습니다.”

“그래?”

김기환은 마음에 짚이는 것이 있기라도 한 듯, 쌍칼 쪽을 향해 물었다.

“형님! 역시 그놈들 행패가 아닐까요?”

“아무래도 그런 것 같군.”

쌍칼 역시 마음에 짚이는 바가 있었던 모양이다.

김동회는 두 사람의 표정을 보는 것만으로도 물건을 되찾을 희망이 보이는 것 같은

후련함을 느꼈다.

“알겠어. 벌써 날이 많이 지났으니 물건을 찾을 수 있다고 장담할 수는 없겠으나,

내 힘써 알아보도록 하지.”

김기환은 힘주어 말하고 나서, 바깥쪽을 향해 커다랗게 소리치는 것이었다.

“야아! 거기 아무도 없냐.”

그러자 득달같이 들어서는 것은 검은 색안경을 낀 점백이였다.

 

점백이의 점 박힌 눈이 검은 안경 속에서 번뜩인 것을 김동회는 육감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인사를 나누지. 인사를 나눈다기보다, 점백이! 네가 인사를 드려야 옳을 것 같군.”

점백이의 눈이 또 한 번 검은 안경 속에서 번뜩였다.

“인사를 나눌 것도, 드릴 것도 없어요! 혼마찌깡의 이사무 아닙니까?

세상이 넓고도 좁다더니, 여기서 다시 만나게 될 줄 몰랐습니다.”

점백이는 무뚝뚝하게 내뱉듯이 말했다.

“아, 이미 아는 사이였던가? 거, 잘됐군.

아우님이 봉천에 와서 좀 난처한 일이 생긴 모양인데,

우리가 도와주어야겠어. 점백이, 네가 앞장을 서서 말이지.”

점백이의 기분을 알 까닭 없는 김기환이 무 자르듯이 말했다.

“헛!”

점백이는 맥 빠진 웃음부터 웃고 나서 적당한 거리를 두고 김동회 앞에 마주 앉았다.

“형님의 분부시라면 따를 수밖에 없겠지만,

사실 난 이사무 이 사람에게 원한 하나를 품고 있거든요.”

김동회는 다시 한 번 번뜩이는 점 박힌 눈을 검은 안경 속에서 보고는 열없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아서. 무슨 원한을 갖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김동회 아우님은 내가 봉천에서 만난 최고의 빈객이란 걸 알아야 해.

쇠털처럼 날이 많으니,

정 원한을 풀고 싶다면 다른 훗날로 미루는 것이 좋을 거야.”

김기환은 점백이가 김동회에게 도대체 무슨 원한을 어떻게 갖게 되었는가 따위를

캐어묻지도 않았다.

그것은 두목의 눈으로 보면 어린애 장난과 같은 하찮은 일로 생각되었을지도 모른다.

“섭섭한 일이 있었다면 풀어주시고, 잘 부탁합니다.

살다 보면 원한도 은혜도 한꺼번에 풀 수 있는 길이 있으니까.”

김동회가 먼저 무릎걸음으로 다가가서 점백이에게 악수를 청하는 손을 내밀었다.

점백이도 김동회의 손을 마주 잡았다.

“형님의 명령이니까 그것이 무엇이든지 듣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나의 노여움이 풀린 것이라고는 오해하지 마시오.”

점백이는 다부지게 말하는 것이었다.

“헛헛헛, 좋아! 난, 그래서 점백이를 좋아하니까.

훗날의 대결을 난 흥미진진하게 지켜볼 테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안 돼!

내일부터 아이들을 풀어 마적단과 그 오야붕 곰바위 일당의 동태를 살피도록 해.

특히 이들이 아편 밀매를 하고 있지나 않은지.”

김기환은 김동회가 당한 일의 경위를 자세하게 설명해 주고,

또한 세밀한 분부를 내리는 것이었다.

“우리 조선 사람들이 만주에까지 와서 마적단에 당할 수는 없는 것 아냐? 안 그래?”

김기환은 유독 점백이 쪽을 바라보며 힘주어 말했다.

그러는데 빠끔히 문이 열리면서 노랑 저고리에 분홍 치마의 새며느리가 얼굴을 디밀며 말했다.

“손님에게 전보가 왔어요.”


전보는 서울의 노마로부터 온 것이었다.

오후 2시 30분 봉천역에 도착하겠으니 마중을 나와달라는 간략한 내용의 것이었다.

송금을 해달라 했더니 노마가 직접 돈을 가지고 오는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서울 소식이 궁금했던 터에 어찌 됐든 노마가 온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었다.

이날 밤, 김기환과 그 패거리들이 물러간 다음에 술이 거나하게 취해 있었으면서도

김동회는 좀처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서울을 떠난 지 벌써 보름도 지났고, 언제 돌아갈 수 있을 것인지

아득하기만 하여 초조했기 때문이다.

다음날, 사소리만을 김기환의 부하에게 딸려 보내 범인들을 추적케 하고

김동회는 노마를 맞기 위해 일찍부터 봉천역으로 나갔다.

“형님! 도대체 어떻게 되신 거예요?”

봉천역을 휘저어놓은 것 같은 혼잡 속에서도 노마는 김동회를 발견하고는

그 품에 안겨들듯 하며 우거지상이 되어 울부짖었다.

“자아식! 어떻게 되긴 어떻게 돼? 좀 사정이 있어 오래 머물게 된 것뿐이지.

그래, 서울에 별고는 없냐?”

김동회는 가슴을 뭉개는 듯한 착잡한 심정을 억누르고, 심상한 체 물었다.

“별고가 없는 게 다 뭐예요! 서울 온 장안이 벌집 쑤셔놓은 듯한데요.”

“야, 너 누구 가슴 철렁하게 만드는구나. 벌집 쑤셔놓은 듯하다니?”

“우리 패와 종로패가 그예 크게 붙었어요.”

“뭐라구?”

“혼마찌깡패가 종로패를 기습했다가,

수표교 다리 위에서 일대 편싸움을 벌였지 뭐예요.”

“뭐라구?”

김동회는 똑같은 말로만 되물었을 뿐 다른 말은 꺼내지도 못했다.

“형님이 서울에 계셨던들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예요.”

“도대체 어떻게 되었기에?”

노마는 도대체 어디서부터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서 갑자기 말더듬이가 된 듯 머뭇거렸다.

“글쎄, 혼마찌깡 오야붕이 김두한에게 도전장을 내게 되었는데 하필이면

그 심부름을 내가 하게 됐어요.”

“허어!”

“처음에는 날짜와 시간을 받아 장충단 공원에서 맞붙기로 되어 있었는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날짜를 당겨 일찍 맞붙게 됐지 뭐예요.”

“그래서 어떻게 됐어?”

김동회는 답답해서 못 견디겠다는 듯 다그쳐 물었다.

“어떻게 되긴 어떻게 돼요? 피장파장이지요.

양쪽에 부상자만 수두룩하게 나고,

지금 서울에선 경찰의 검거 선풍이 불어대고 있단 말예요.”

“그럼, 그럼 김두한은 어떻게 됐어?”

김동회는 허겁지겁 물었다.

혼마찌깡패와 종로패가 편싸움을 벌였다면,

김두한은 어디까지나 상대편의 두목이다.

그런데 자신의 두목 하야시보다도 상대편의 두목 신변부터 염려가 되다니,

김동회는 그러한 자기 자신에게서 김두한을 향한 자신의 경사도(傾斜度)를 느꼈다.

“어디로 숨어들었는지 감감무소식이래요.”


김동회는 노마를 이끌고 역마차를 탔다.

역을 중심으로 부챗살 모양으로 잘 뻗은 내리막길을 내려가면서,

노마는 역시 이국 풍경이 이색적으로 느껴져서인지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김동회는 반가운 심복 부하를 맞이하게 되었으면서도

도무지 개운한 기분이 될 수 없었다.

막상 역마차를 탔으면서도 갈 곳조차 마땅치 않았다.

이 이른 시간에 아무도 없는 여관으로 돌아갈 마음도 나지 않았다.

그는 생각이 내키는 대로 마차를 쇼뜰마찌 도깨비 시장 쪽으로 몰게 했다.

그래도 할 일이 도깨비 시장 쪽에 남아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우연히 김기환을 만나 그의 도움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잃어버린 물건과 범인을 마지막 순간까지 집요하게 쫓아야 하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숙명과도 같은 과제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봉천의 거리를 방황하고 있는 자기 자신이 무엇인가

크게 잘못된 것처럼 생각되기도 했다.

(서울로 돌아가야 한다! 벌써 서울로 돌아갔어야 옳았을 것이 아니었을까?)

그랬던들 혼마찌깡패와 종로패가 맞붙게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김두한과 그 패거리들이 경찰에 쫓기는 몸이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없는 동안 서울에서 일어난 모든 일이 자기가 서울에 없었음으로 해서

일어난 일처럼 생각되었다.

“그래, 우리 아니끼는 어떻게 하고 계셔?”

아니끼란 물론 혼마찌깡의 두목 하야시를 두고 한 말이었다.

“대단히 노하고 계셔요.”

“왜?”

“무엇보다, 모두가 다무라 형님이나 다니구찌 상이 저지른 일이니까요.

약속을 어기고 종로로 기습해 들어간 자체를 심히 못마땅하게 여기고 계셔요.

또 기습해 들어갔으면 들어간 대로 종로패에 묵사발을 안겨주었으면 모를까,

도리어 처참한 꼴을 당하고 말았으니까요.”

“흐음! 하지만 김두한이나 그 꼬붕들이 경찰에 쫓기고 있다는데,

형님은 가만히 구경만 하고 계신단 말야?”

“오야붕께서는 사건이 확대되는 것을 바라지 않으시고, 사건 자체가 원만히 수습될 것을 희망하셔서, 자주 경찰서에도 드나들고 계신 듯하지만…….”

“그래서?”

김동회는 뭔가 다급해진 마음에 다그쳤다.

“당사자인 김두한이 어디에 숨어들었는지 자취를 보이지 않고,

김두한패와 말을 건넬 만한 적당한 인물도 없고,

우미관의 와까사끼 사장이 앞장서서 뛰고는 있지만,

그 쪽발이 노인의 말이 어디 종로패에 통해야죠.”

노마는 막막한 듯 말했다.

그러나 더 조급하고 막막한 것은 김동회였다.

그 초조한 심정에 불을 지르려는 것처럼 노마는 덧붙였다.

“그리고 말입니다,

형님이 봉천에서 우물거리고 있다고 오야붕이 대단히 노하고 계신 모양이던데요?

그까짓 아편 몇 덩어리 잃어버렸다고…….”

김동회는 적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서울로 노마에게 돈을 보내달라 했을 때도,

아편을 잃어버린 사실은 운도 떼지 않았었다.

그저 사정이 있어 곧 서울로 돌아갈 수 없다고만 적어 보냈을 뿐이었다.

그런데 서울에 앉아 있는 두목이 아편을 잃어버린 사실까지 알고 있다니…….

아무리 만주에까지 세력권을 뻗치고 있는 두목이라 하지만,

마적단에 아편을 빼앗긴 사실까지 알고 있다니,

그것은 놀라움 이상의 공포가 아닐 수 없었다.

“물건을 인수할 자가 없으면 없는 대로 돌아올 일이지, 하시면서요.”

하야시는 이미 아편 밀수단의 봉천 책임자가 체포된 사실까지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음…….”

김동회는 괴로운 한숨을 몰아쉬었다.

“저더러 당장 모셔오라고, 아니 당장 끌고 오라고 말씀하셨어요."

(음…….)

김동회는 다시 한 번 무겁디무거운 한숨을 짓깨물었다.

(돌아가야겠구나……. 내일이라도 당장 돌아가야겠어…….)

서울로 돌아가서 두목으로부터 어떤 징벌을 받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하루속히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김두한과 협상할 사람은 형님밖에 없을 테니까요.”

조급하고 답답한 마음을 달래주려는 것처럼 노마가 덧붙였다.

(그래, 서울로 돌아간다. 하지만 마적단에의 복수를 포기한 것은 아냐.

서울의 사건을 수습하고 나서, 난 즉시 봉천으로 되돌아오는 거다.)

그는 마음속으로 부르짖고 있었다. 어느덧 역마차는 쇼뜰마찌 어귀에 이르렀다.

마차에서 내린 김동회는 노마를 이끌고 악머구리 들끓듯 하는 시장 바닥 속으로

휩쓸려 들어갔다.

노마는 보는 것 듣는 것 모두가 신기한 것뿐이어서,

김동회의 뒤를 놓치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서도 연신 한눈을 팔았다.

그러나 김동회의 눈은 여느 때 없이 이글이글 불타고 있었다.

봉천에서의 마지막 날까지,

마지막 순간까지 범인 마적단을 찾겠다는 복수심에 불타는 집념의 눈빛이었다.

그렇다고, 어제도 그제도 찾지 못한 범인들인 것이다.

하필이면 마지막 날에 걸려들 리도 만무한 일이었다.

미루미루깡깡 앞에 이르자,

팔뚝시계를 잠깐 들여다본 김동회는 아무 말 없이 그 안으로 들어섰다.

노마를 맞으러 봉천역으로 나가면서 사소리와 대충 약속을 해놓았기 때문이다.

그는 김기환의 부하들을 따라 나가면서 낮에는 쇼뜰마찌를 밤에는

가스가의 야시장을 뒤질 것이라며,

시간이 나면 미루미루깡깡에서 목을 축일 것이라고 했었던 것이다.

사소리는 와 있지 않았다. 온종일 쏘다닌 피로와 허기가 엄습해 왔다.

호주머니 속에는 노마로부터 건네받은 거금 300원이 있었다.

그동안 먹고 싶어도 못 먹고, 마시고 싶어도 못 마셨던 한풀이나 하면서

봉천에서의 마지막 밤을 즐길 심산이었다.

그리고 말도 통하지 않는 중국 여자까지 앉혀놓고 막 첫 잔을 기울이려 할 때였다.

입구 쪽이 떠들썩해서 무심코 바깥쪽을 내다봤던 그의 눈이 저절로 빨려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