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장군의 아들

제2부 黑龍의 飛翔-혼돈 66

오늘의 쉼터 2014. 8. 27. 11:35

제2부 黑龍의 飛翔-혼돈 66 

 

 

마지막 바람인 북바람의 오야(親) 차례가 점백이에게로 돌아갔다.

마작의 경기 방식을 설명하자면 복잡하지만,

요컨대 오야의 차례에서 연거푸 연짱을 하면,

다른 때 훌라(오르는 것) 열 번을 한 것보다 몇 갑절 효력이 있는 것이다.

이제껏 슬슬 잃어주었던 점백이는 마지막 고비에서 솜씨를 부리기 시작한 것이다.

자기 몫이 될 패와 자기가 떠야 하는 패를 마음대로 쌓았을 뿐만 아니라

그 커다란 좌우 양손에 두 패씩을 감추어놓고 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것이었다.

몇 번씩 거푸 오르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양원순은 아연 긴장을 했다.

넷이서 함께 하는 게임의 다른 패들도 화끈 달아올랐다.

다른 패란, 성이 한씨(韓氏)인 데다가 다리 하나가 의족(義足)이어서

‘한다리’라 부르는 유도 선수 출신과, 어디서 연유했는지 모르는

‘배달부’란 별명을 가진 도박계의 베테랑들이었다.

이들도 점백이가 연달아 연짱을 하자 바짝 긴장을 하면서 의아해하는 눈빛을

그에게 던졌으나 그의 솜씨가 워낙 교묘하고 빨라서 덜미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완전한 확증을 잡지 않고서 섣불리 투정을 부렸다가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몰라

 머뭇거리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아니면 애초부터 점백이와 한통속인 사기 도박단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양원순은 이제 사정이 달랐다.

자기 패는 건성으로 뜨면서 점백이의 손만은 예의 주시했다.

그의 커다란 손아귀 속에서 순간보다도 더 짧은 찰나,

그 찰나에 마작 패가 바꿔치기 되는 것을 분명하게 본 것이다.

이제까지 속아온 분함이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양조장 하나가 후딱 날아가버린 원통함도 있었다.

게다가 든든한 김동회가 뒤에 버티고 있는 것이다.

그에게 있지도 않은 용기가 저절로 솟구쳐 올랐다.

“형씨이, 이게 무슨 짓이오!”

그는 점백이의 손을 꽉 움켜잡았다.

처음엔 점백이의 입가에 사기 도박꾼 특유의 비굴한 미소가 흘렀다.

“아니, 왜 그러시오?”

“왜 그러다니? 비겁하게! 패 차고(여분의 패를 숨겼다는 뜻) 누구 눈을 속이려는 거요?

이 손을 펴보란 말요, 펴봐!”

양원순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장내가 소연해진 것은 말할 것이 없다.

평소에 말수가 없고 얌전한 호구인 그가 이처럼 돌변했으니 더욱 놀라운 일이었다.

그 놀라움은 점백이에게 더 큰 것이 아닐 수 없었다.

“뭐라고? 내가 패를 찼다구? 이거, 돈 몇 푼 떼이더니 실성한 것 아냐?”

그는 언제까지 비굴한 웃음만을 짓고 있을 수는 없게 되었다.

그는 잡힌 왼손을 그대로 움켜쥔 채 그 검은 색안경을 서서히 벗어 방바닥에 내려놓고,

좌우 양편에 똑같이 돋아 있는 점 박힌 눈을 부릅뜨는 것이었다.

저절로 귀기가 어렸다.

다음 순간,

언제 어디서 뽑아들었는지 단도를 재빨리 꺼내 힘껏 마작판 위에 내리꽂는 것이었다.

 

마작판 위에 꽂힌 칼자루가 파르르 떨렸다.

일순, 장내에 무겁디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것은 곧 공포의 침묵이었다.

“너 봤어? 봤느냐 말야. 내 손 안에 패가 있는가 없는가,

이 칼로 손등을 찍어 펴보란 말야.

너 알지? 없으면 너 피맛을 좀 봐야 할 거야?”

검은 점으로 하여 흰자위가 없는 눈이 양원순뿐만 아니라 장내를 흘겨보았다.

무서운 눈이라기보다 으스스하도록 음산한 눈이었다.

그 서슬에 양원순은 말할 것 없이 방 안의 사람 모두가 부르르 떨었다.

“공연한 일로…….”

데라꾼이 무거운 분위기를 수습하려는 듯 앞으로 나섰다.

그러나 그를 밀쳐내듯 하고 앞으로 나선 것은 김동회였다.

고릴라처럼 어슬렁거리며 앞으로 나온 것이다.

“그래, 봤다. 내가 봤어!”

그는 주먹패 특유의 이죽거리는 말투로 내뱉은 것이다.

점백이의 으스스한 눈빛이 김동회에게로 건너왔다.

그 으스스한 눈빛은 그대로 살의라도 품고 있는 듯했다.

이를 감지 못 할 김동회가 아니었다.

느릿느릿 어슬렁거리며 다가선 그의 동작이 그처럼 민첩하게 돌변할 수가 없었다.

마작판 위에 꽂혀 있는 단도를 재빨리 뽑아든 것과 동시였다.

그의 통나무 같은 손이 양원순이 움켜잡고 있는 점백이의 팔목을 대신 틀어쥐었다.

“그래, 내가 그 손등을 찔러주지.”

그는 왼손으로 점백이의 팔목을 움켜잡은 채, 오른손을 높이 치켜 들었다.

순간, 점백이가 외마디 비명 소리를 냈다.

“형님! 용서하십쇼.”

그것은 그대로 애원이었다.

점백이가 서글프도록 저자세로 나온 것은 뜻밖이었다.

김동회 자신에게도 뜻밖이었다.

하지만 점백이는 필사적이었던 것이다.

검은 점은 그의 눈의 흰자위에 박혀 있었던 것이지,

눈동자에 박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싸움판·노름판에서 자라온 점백이도 사람을 볼 줄 아는 제대로의 눈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대개의 경우 검은 점이 돋아 있는 눈을 부릅뜨고,

번뜩이는 칼끝만 보아도 사람들은 사색이 되어 부르르 떨게끔 되어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미루나무처럼 크고, 고릴라처럼 몸집 큰 이 사나이는 보통 사람이 아닌 것이다.

무엇보다 그에게 잡힌 손목의 압박감에서 이를 느낄 수 있었다.

맥주병 마개를 손톱으로 튀겨 따는 괴력의 소유자인 것이다.

손을 뽑으려 해도 뽑히지 않으리란 것을 점백이는 알아차린 것이다. 아니, 실제로 단도로 손등을 찌를 기세이며, 능히 이를 해낼 수 있다는 것을 감지했던 것이다.

김동회는 점백이의 애원의 절규에 주춤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형님을 못 알아봐서 죄송합니다. 어디의 누구신지, 못 알아모신 것 용서하십쇼.”

김동회는 비로소 잡은 손을 풀어주고, 들었던 칼을 내던지며 말했다.

“나, 혼마찌깡의 이사무야! 속여먹은 것 게워놓지 않으면,

네놈의 핏주머니를 들쑤셔놓을 테니 그런 줄 알아.”

점백이의 점 박힌 눈길이 무겁게 아래로 떨어졌다.


승부는 이로써 끝난 셈이었다.

점백이는 김동회를 제대로 알아모시고 무릎을 꿇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점백이는 속임수로 따먹은 돈의 전부를 양원순에게 돌려주지는 않았지만

상당액을 도로 게워놓았다.

양원순이 그 가운데서 또한 상당액을 김동회에게 떼어준 것은 물론이었다.

거기까지는 만사형통이었다.

그러나 김동회는 공연한 원한 하나를 산 셈이 된 것이다.

점백이는 사기 도박꾼으로도 이름을 날렸지만,

무시무시한 뫄관패에서도 내로라 하는 중간 보스급인 것이다.

“두고 보라지! 내 언젠가 복수를 하고 말 테니까!

그까짓 쪽발이패에 붙어먹는 김동회 그놈에게 원수를 갚고 말 테니까!”

점백이는 공공연히 그런 말을 하고 다녔다.

김동회도 점백이가 뒤에서 욕을 하고 다닌다는 것을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치지도외하고 있었다.

점백이쯤은 언제라도 맞상대해도 좋다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점백이를 공교롭게도 봉천 땅에서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는 말 그대로였다.

하숙집 2층에서 엉거주춤한 자세로 아래층을 내려다보고 있던 김동회는

대담하게 뛰어내려 점백이에게 알은체를 할까 말까 잠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같은 피를 이어받은 동족인 것이다.

더구나 소속은 다르다 하지만 같은 서울에서 주먹으로 행세해 온 똑같은 주먹패인 것이다.

자신의 난처한 처지를 설명하면 의외의 도움을 줄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주먹패의 협객다운 의리가 아닌가.

김동회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나무 사다리의 꼭대기에 발을 내렸다가 잠깐 주춤했다.

아무래도 점백이는 껄끄러운 상대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는 자기에게 원한을 품고 복수를 하겠다고 공공연하게 뇌까려온 상대가 아닌가.

머리의 상처도 덜 아물고 몸도 쇠약해진 이때,

점백이가 원한을 품고 같은 패거리들과 작당을 해서 몰매라도 가해 오면 어쩔 것인가.

(죽기밖에 더하랴!)

젊은 주먹패다운 오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여기서 소란을 피웠다가는 필경에는 이 여관에서마저 쫓겨나게 되고,

그렇게 되면 빼앗긴 아편 덩어리를 찾기도 그르고, 마적단에의 복수도 그르치게 된다.

(신중해야지…….)

김동회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좀더 동태를 살펴보기로 했다.

점백이를 비롯한 패거리들은 쌓인 돈 뭉치를 앞에 놓고 기고만장해 있었다.

은행을 턴 것일까, 대도박단을 턴 것일까, 상당한 돈 더미였다.

김동회에게는 자기 자신이 그 패거리에 한몫 끼지 못한 것이 서운하게 느껴질 만큼의 큰돈이었다.

(어디에서 저런 돈이 났을꼬?)

혼자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아래층의 패거리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는 것이었다.

장군을 맞는 일본 군대의 졸병들처럼.

이윽고 들어서는 건장한 몸집의 사나이.

“앗…….”

김동회는 하마터면 소리칠 뻔했다.

목 둘레에 여우털인지 족제비털인지 누런 짐승 털이 달린 검은 가죽 점퍼를 입은

늘씬한 키의 사나이.

김동회는 꿈이 아닌가 확인하려는 것처럼,

아니면 이 사나이의 위용에 눈이 부셔서인 듯 자기 눈을 손등으로 비벼댔다.

뫄관패의 두목 김기환이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김기환이 소위 꽃잡이(소매치기)의 두목으로 몰려 홧김에 일본 순사를 때려눕히고,

만주인가 중국으로 피신했다는 말은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를 바로 봉천 땅에서 만나게 되다니…….

물론 김동회는 김기환과 주먹계의 지체로서도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처지에 있지 않았다.

김기환은 주먹계의 대선배일 뿐만 아니라 관록이나 권위로도 그를 따를 수 없었다.

그러나 그와 안면은 많은 편이었다.

한때, 김기환이 종로로 진출하기 위해 우미관 주인 와까사끼의 요진보가 된 일이 있었고,

와까사끼는 일본패의 두목 하야시의 고문 격이었기 때문에,

자주 김기환과 함께 혼마찌깡에 나타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두목 하야시의 심부름으로 와까사끼를 찾아갔다가 김기환과 마주친 일도 있었다.

김동회 자신이 김기환을 알고 있는 것만큼 그가 자신의 존재를 기억하고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 낯선 땅, 더구나 궁지에 몰려 있을 때 김기환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반가움 이상의 기쁨이었다.

“아니, 아무 데서나 함부로 까발릴 일이 아니지 않아?”

하숙방 안으로 들어선 김기환은 방 한구석에 수북이 쌓여 있는 돈다발을 바라보며,

누구에게 향한 말인지 모르게 나무랐다.

목소리는 높지 않았지만 무게가 있었다.

“염불에는 마음이 없고, 잿밥에만 마음이 있다더니…….

빌어먹을 놈들 같으니라구!”

역시 목소리는 높지 않았지만 눈빛이 날카로웠다.

늘어선 사나이들이 점백이를 비롯해서 굽실굽실 고개를 조아렸다.

“빨리 치우지 못해! 쓸어 담으란 말야!”

이번에는 다소 언성을 높여 소리쳤다.

그러자 한 사나이가 여행용 가방 안에 돈 다발을 쓸어 담았다.

“분배는 내일 해줄 테니까, 돈 가방은 곧 내게로 가져와!”

김기환은 다부지게 명령하고는 곁에 선 또 한 사나이를 돌아다보았다.

키도 몸집도 그다지 크지 않았지만 눈빛이 표독스러운,

이미 청년기를 벗어난 중년의 사나이였다.

이제껏 김기환의 느닷없는 출현에 넋을 잃고 있던 김동회는

눈빛이 표독스러운 사나이를 발견하고 다시 한 번 놀랐다.

그 사나이야말로, 김두한에게 치도곤을 맞고 만주로 쫓겨 갔다는

쌍칼 니또류 무사시였기 때문이다.

역시 와까사끼의 요진보 역할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그도 혼마찌깡의 출입이 잦았고, 김동회와도 안면은 있었다.

이제 그는 2층 바닥에 엎드려 아래층만을 내려다보고 있을 수만은 없게 되었다.

더구나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린 김기환이 쌍칼에게 무엇인가

귀엣말처럼 말하고는 방을 나가려 하지 않는가.

김기환이 자기를 알아보고 반겨 맞아줄 것인가 아닌가를 가릴 틈이 없었다.

2층 맨바닥에 엎드려 아래층을 내려다보고 있던 김동회는 엎드려 있던

그 자세에서 나무 사닥다리의 밑동 계단을 한 손으로 짚고,

공중 회전을 하듯 몸을 날려 아래층으로 뛰어내렸다.

“형님! 김기환 형님이 아니십니까?”

김동회는 기다란 허리를 깊숙하게 숙였다.

하늘에서 뛰어내리듯 돌연 2층에서 몸을 날려 내려선 사나이에 놀라

김기환도 한 걸음 뒷걸음질쳤다.

“절 몰라보시겠습니까? 혼마찌깡의 우메하라 이사무 김동횝니다.”

김동회는 김기환에게 억지로라도 자신의 기억을 되살리게 하려는 듯

얼굴을 그의 앞으로 내밀었다.

김기환도 너무 뜻밖이어서인지 당장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김동회의 아래위를 훑어보더니,

기억 상실증 환자가 비로소 기억이 되살아나기 시작한 순간과 같은 표정을 지으면서

말하는 것이었다.

“아니, 당신 웬일이지?”

김기환의 기억 속에 김동회의 존재는 아직 남아 있는 듯했다.
김동회는 그것만으로써도 기뻤다.

“혼마찌깡의 하야시 오야붕의 명령을 받고 봉천으로 내려왔다가

일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지금 굉장한 궁지에 몰려 있습니다.”

김동회는 그대로 지옥에서 부처님을 만난 기분이었던 것이다.

앞뒤를 가릴 것 없이 솔직히 털어놓았다.

“도대체 무슨 명령을 받고 왔단 말야?”

김기환은 물론 하야시와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와까사끼를 통해 몇 번 술자리를 함께 한 일도 있었다.

하지만 서로 앙숙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어도 껄끄러운 사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패와 조선 망나니패의 두목 사이였으니까.

더구나 하야시는 조선뿐만 아니라 만주에도 세력권을 뻗치고 있는 실력자였다.

이에 비해 지금 서울에서 쫓겨 온 김기환은 역시 서울에서 쫓겨 온

지난날의 뫄관패의 세력을 규합하여 기반을 닦아가고 있는 처지였다.

이를 시기한 하야시가 자신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특사 격으로 심복인 김동회를 보낸 것이 아닐까.

김기환의 눈에 일순 경계의 빛이 흘렀다.

“아닙니다! 순전히 장삿속으로 왔습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선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김동회는 주위를 둘러보는 시늉을 했다. 이를 눈치 못 챌 김기환이 아니었다.

“대부분, 내가 서울에서 데리고 있던 아이들이니까 염려할 것은 없지만…….

좋아, 자리를 옮기도록 하지.”

김기환은 쌍칼 니또류 무사시만을 동행케 하고 김동회를 이끌고 방을 나왔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여관집 주인의 방으로 들어서는 것이었다.

“도대체 무슨 명령을 받고 왔다는 게지? 아니 굉장한 궁지에 몰렸다니,

도대체 어떻게 됐다는 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