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장군의 아들

제2부 黑龍의 飛翔-혼돈 63

오늘의 쉼터 2014. 8. 27. 11:33

제2부 黑龍의 飛翔-혼돈 63 

 

 

분명한 조선말이었다.
김동회는 잠자코 뒤돌아보았다.

노랑 저고리에 분홍 치마를 입고,

하얀 행주치마를 두른 새색시 같은 젊은 여자였다.

만주 땅에 많은 조선 사람들이 건너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첫발을 딛자마자 조선 여자를 만났다는 것은 대단한 반가움이었다.

그러나 단순한 유녀(遊女)인 것인지,

호객(呼客)을 하는 것인지 모르는 그는 잠자코 사소리를 건너다보았다.

“그래, 갑시다!”

사소리는 한쪽 눈을 찡긋해 보이는 윙크까지 하면서 말 한마디에 순순히 따라나서는 것이었다.

그만큼 이곳 사정에 익숙하기 때문인 것이겠지만, 눈까지 찡긋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어쩌면 예상한 대로 그런 종류의 유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여인이 안내한 곳은 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헐어빠진 2층 양옥 검은 벽돌집이었다.

너무 오래되어 글씨도 제대로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의 간판이 붙어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大成館(대성관)’이라 되어 있었다.

고양이 이마빼기만한 앞마당이 있었으나 한 그루의 나무도 서 있지 않았고,

한옆으로 잿더미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한마디로 황량하기 짝이 없는 음침한 집이었다.

“장 영감은?”

앞마당으로 들어서자 사소리가 물었다.

“곧 오실 거예요. 아침을 드시고 기다리시래요!”

김동회는 그제야 이 여자가 단순한 유녀가 아니라고 직감했다.

아마도 애초에 노랑 저고리에 분홍 치마, 하얀 행주치마의 여자가 마중을 나가면

따라오라는 정도의 사전 약속이 되어 있는 듯싶었다.
결국 이 여자도 아편 밀수 루트의 하부 조직인지도 모른다.

이윽고 아침상이 나왔다.

고봉으로 된 밥사발이었다.

워낙 식성 좋은 젊은이들이어서 고봉으로 된 밥으로도 모자랐다.

한 사발씩 더 청해 먹으려고 사소리가 안쪽에다 소리를 쳤다.

어차피 이 집은 밥만 사 먹으면 잠은 공짜로 재워주는 하숙집 같은 여관인 것이다.

노랑 저고리의 여인이 다시 나타났다.

“우리, 밥 한 그릇씩 더 주슈!”

사소리가 말했으나, 여인은 이에는 대답하지 않고 말했다.

“잠깐 나와보시래요!”

여인의 말에 사소리는 까닭도 묻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뜨다 만 수저를 그대로 밥사발 위에 놓은 채였다.

그러나 사소리는 이내 돌아오지 않았다.

다시 청한 밥사발도 여인은 갖다 주지 않았다.

김동회는 누르스름한 엽차로 입가심을 하고 무료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아편 밀수에 가담했다는 그 자체가 모험적이기는 했지만,

어쩐지 자기 자신이 자기도 모르게 어떤 엽기적인 사건에 말려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예감은 불행하게도 적중되어 가는 듯 싶었다.

한참 만에 나타난 사소리의 표정이 몹시나 어두웠기 때문이다.

그가 내뱉은 한마디는 가슴을 더욱 철렁하게 했다.

“이거, 야단났는데!”

 

“아니, 무슨 일이기에?”

김동회의 표정도 자연 일그러질 수밖에 없었다.

사소리는 너무 실망이 큰 나머지 말도 하고 싶지 않다는 듯 쉽게 입을 열지도 않았다.

“물건을 인수해야 할 사람이 어제 헌병대에 붙들려 갔대!”

“그럼 어떻게 되는 거야?”

“그러니까 야단났다는 거지!”

사소리는 무겁게 고개를 떨어뜨렸다.

애초에 이들은 물건을 인수자에게 전달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 인수자로부터 물건의 대금을 받고, 두둑한 사례금까지 받기로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당사자가 체포되었다니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원래 일본 폭력단, 엄밀히 말하면 도야마 미쓰루가 이끄는 협객 조직이 조종하는

이 아편 밀수단은 일본 본토와 조선·만주·중국·홍콩·동남아 일대에 걸친 대규모적인 것이었다.

이 밀수단의 봉천 책임자는 다까오(高尾)라는 일본인이었다.

일본 폭력단에도 깊숙이 가담하고 있는 실력자라는 것을 알고 있을 뿐,

사소리도 그의 인적 사항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비밀 유지가 밀수단의 생명이기 때문에, 모두 점조직(點組織)이 되어 있어,

그 횡적 연락망은 이 조직에 오래 가담해 온 사소리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다까오라는 자가 헌병대에 체포되어 없는 것이다.

다행히 아편 밀수단의 조직이 탄로되어 체포된 것이 아니라,

모종의 살인 사건에 가담되어 그렇게 됐다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되는 거야?”

김동회는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할 수 없지. 우리가 내다 팔 수밖에!”

사소리는 선선히 말했으나 마음으로부터 자신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아편의 운반 요원일 뿐 판매책은 아니며, 더군다나 그런 경험도 없었다.

다만 조선에서 생아편을 거두어들여 만주나 중국 본토에 내다 팔면

그 곱절 이상의 이득을 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조선에서 7000원어치의 아편 덩어리가 만주에서는 1만 4000원이 되는 것이다.

아니, 그 이상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다까오에게 물건을 넘겨주기만 하면 1만 4000원의 물품대와

응분의 사례금까지 받을 수 있는 것이니까,

그 실질적인 가치는 그 이상이 될 것이다.

그런 고가의 것을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만주까지 실어와서,

다시 위험을 무릅쓰고 서울까지 그대로 갖고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당연히 차지해야 할 사례금까지도 희생해야만 한다.

그 사례금 몫을 못 받으면 당장 여비까지 궁색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어떻게 해서든지 여기서 처분을 해야 한다!”

그것은 사소리의 단순한 욕심만이 아니었다.

이날 밤, 사소리는 아편 꾸러미를 여관집 앞마당 잿더미 속에 깊숙이 숨겨놓았다.

아편이 워낙 비싸고 노리는 자가 많기 때문에,

여관방에 두거나 몸에 지니고 있는 것보다 안전했기 때문인 것이다.

다음날, 아편 덩어리에서 떼어낸 견본만 가지고, 작자를 찾아 나서기로 했다.

김동회는 이제 새끼에 꿰인 돌멩이였다.

사소리가 하자는 대로 따라나설밖에 없었다.

봉천(현재의 심양)은, 마적 출신이면서도 군벌의 총영수 노릇을 한 장작림(張作霖)이

소련인 기술자를 불러다 설계해서 만들어진 동양 굴지의 도시라던가.

중장(中長)·심산(瀋山)·심길(瀋吉)·심안(瀋安)의 네 철도가 만나는 교통의 요충지이기도 하고,

인근에 중국 최대의 석탄·철광구 등이 있어 중요 공업 지구이기도 하다.

이 봉천에는 나날이 심해 가는 일본인들의 압박을 피해서 고국을 등져야 했던

조선인들이 많이 살고 있기도 했다.

이 가운데에는 각종의 폭력 행위로 경찰을 피해 도피해 온 서울의 주먹패들도 적지 않았다.

이곳에 와 있는 조선인들의 생활은 조선에서의 그것보다 대체로 나은 편이라 할 수 있었다.

조선인들이 현지의 중국인보다 부지런하고 상술이 뛰어난 때문이기도 했지만,

조선이 일본의 지배하에 있어서 일본인이 중국인보다 조선인을 두둔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심지어 조선인이면서 아예 일본인 행세를 하면서 일본 회사에 다니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

이곳의 중국인들은 제 땅에 살고 있으면서도, 같은 피지배 민족인 조선인보다

천대를 받으면서 낮은 계층의 비참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런 환경이기 때문에 집도 조선 기와집이 많았고,

일본인들이 사는 일본식 주택, 2, 3층짜리 양옥도 적지 않았다.

김동회가 여장을 푼, 밥만 사 먹으면 잠은 공짜로 재워주는 그 여인숙도 밖에서 보면

단층집이지만 안으로 들어서면 2층으로 되어 있는 조선집이었다.

2층이라 했지만, 키가 큰 김동회가 일어서면 머리가 닿을 만큼 천장이 얕았으며,

잠만 잘 수 있게끔 칸막이도 없는 넓은 방으로,

한 방에 20명, 30명씩도 수용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그야, 잠은 공짜로 재워주는 집이었으니까.

이곳에는 조선의 8도 각지에서 살다가 흘러 흘러 온 떠돌이들·장돌뱅이들,

도저히 신분을 가려낼 수 없는 조선 사람들이 한꺼번에 어울려,

아래위층 합해 4, 50명씩 득실거리듯 잠을 자며 살고 있는 것이다.

단 며칠 동안 묵고 가는 떠돌이들도 있었지만,

여기를 근거지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이 여인숙 주인은 봉천 태생이지만,

함경도 단천(端川)이 고향이라는 50대의 남자였다.

여인숙도 하면서, 일본 아편 밀수단의 하부 점조직으로 연락망 속에 가담하고 있었다.

노랑 저고리에 분홍 치마를 입은, 사소리를 맞은 예의 젊은 여자는

유녀일 수 없는 이 주인의 며느리로, 새색시였다.

이들이 아편 밀수단에 가담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하부 조직으로 연락의 일만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판매 루트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때문에 사소리나 김동회는 스스로의 힘으로 아편 판매 루트를 찾아

처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그래도 지리에 밝은 사소리가 앞장선 것은 당연했다.

그가 첫 번째로 찾아간 곳은 속칭 쇼뜰마찌(小盜町)라 부르기도 하는 석탑(石塔)이란 곳이었다.

도둑질을 해다 파는 장물 시장으로, 흡사 오늘날 남대문 시장 뒤의 도깨비 시장 같은

복잡하기 짝이 없는 시장이었다.

시장 안은 바글바글 들끓었다. 대부분이 중국 사람들이었지만,

장사꾼 가운데는 뜻밖에도 조선 사람도 많았다.

시계·구두·의류·가죽 제품·식기·일용품·식료품 등 온갖 잡다한 물건이 되는대로

무질서하게 널려 있다.

신품도 더러 있었으나 중고품이 대부분이었다.

거의가 도둑질해다가 내다 파는 장물이었으니까.

그런 만큼 값이 싸고, 값이 싸니까 사람들이 붐빌 수밖에.

“껌정이(아편)가 있는데, 어디 작자가 없겠소?”

사소리가 조선 사람 상인을 찾아가서 귀엣말처럼 묻는다.

시장 안에 조선 사람은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똑같이 장물을 내다 파는 상인들이었지만,

그 가운데는 돼지 대가리를 버젓이 내놓고 파는 순대국 장수며,

심지어 ‘함흥식 개장국집’이란 허술한 간판을 내건 보신탕 장수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상인들은 고개를 옆으로 내젓는 것이었다.

그럴싸 싶은 중국 상인을 만나서 수작을 부려보았다.

중국인은 무뚝뚝하게 고개를 내젓는 것이었다.

“요즘 단속이 심해서 작자를 만나기가 어렵겠다는군!”

사소리는 난감한 표정으로 말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판매 루트를 모른다고는 하지만 만주에서라면 쉽게 물건이 팔릴 줄 알았지만 오산이었다.

아편을 비밀리에 많이 애용을 했지만,

엄격한 통제와 취체 대상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공공연히 거래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밤이면 시내 한복판 가스가마찌 야시장으로 나갔다.

가스가마찌에는 서울 종로의 야시장보다 네다섯 배가 됨직한 대규모의 야시장이 섰다.

야시장에 아편 전문업자가 없을까 찾아다녔고,

인상적으로 아편을 취급할 것 같은 상인에게라면 중국 상인이건 조선 상인이건

가릴 것 없이 말을 건네보곤 했다.

밤늦게까지 방황하고 다녀도 허탕이었다.

그렇게 하면서 1주일 가까이 지냈다.

두 사나이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호주머니 사정도 여의치 않았다.

이렇게 날을 끌다간 오도 가도 못 하게 될 판국이었다.

그나마 싸구려 하숙집의 밥도 못 얻어먹게 될 것이다.

매일처럼 허탕만 치고 나면, 홧김에 근처 술집 아무 데나 가서

도수 높은 배갈이며 워커주를 마시며 피로를 풀었다.

그러한 어느 날, ‘미루미루깡깡’이란 술집에서였다.

이 집은 백계 러시아 여자들이 경영하는 술집으로 유곽을 겸하고 있어서

봉천에서도 아주 유명했다.

김동회와 사소리는 마주 앉아 우울한 표정으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호주머니 사정이 절박해서 여자도 사지 못했다.

옆 좌석에선 중국인 셋이서 무엇인가 열심히 소곤거리고 있었다.

중국말을 모르는 김동회는 무관심하게 흘려보냈다.

그러나 사소리의 귀가 엽견처럼 날카롭게 곤두섰다.

이들이야말로 아편의 전문업자들이었던 것이다.

“좋은 물건이 있는데 한번 보지 않겠소?”

사소리는 호주머니 안의 견본을 꺼내 보이면서 기쁜 듯이 다가가 말했다.


“도대체 이런 좋은 물건이 어디서 났소?”

“조선서 거두어 모아온 거요.”

“분량이 어느 만큼 되오?”

“이만한 덩어리가 일곱 개!”

사소리는 왼쪽 주먹 하나를 내밀어 보였다.

물론 이것은 중국어로 교환하는 대화였다.

김동회는 물론 이것을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나 눈이 휘둥그레져서 놀라는 중국인이며,

이제야 작자를 만났다고 희색이 만면한 사소리의 표정만 보고서도 대충

그 내용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럼, 그 물건을 지금 가지고 있소?”

“그런 귀중한 물건을 함부로 지니고 다닐 것 같소?

하긴, 물건을 살 임자만 나타나면 언제든지 갖고 나올 수는 있지만…….”

“하긴 그럴 거요. 그만한 덩어리가 일곱 개라면 대단한 값어치인데,

우리도 당장은 그것을 사들일 만한 돈이 없으니까.

어떻소, 내일 돈푼깨나 갖고 있는 우리 동업자와 함께 나올 테니 물건을 갖고 나오시겠소?”

“그렇게 합시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는 임자를 못 만나 방황하고 있었던 참인데.”

사소리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자기 본심을 드러내 보이고 말았다.

이러나저러나 약속은 간단하게 이루어졌다.

미루미루깡깡 바로 건너편, 진성루라는 중국 음식점 2층에서

이튿날 저녁 7시에 만나기로 하고 이들은 작별했다.

일이 이루어지려면 하찮은 계기로 뜻밖에 수월하게 이루어질 수도 있는 법이다.

사소리도 그러했지만 김동회도 일종의 흥분감마저 느꼈다.

이제 모든 일이 끝난 듯한 상쾌함으로 훨훨 날 것만 같은 기분으로 들떴다.

“야, 내일 밤이면 한밑천 두둑이 잡게 되는 거야.

우리 내일 밤에는 여기서 계집년도 하나씩 끼어 차고 진탕 놀아보자구!

중국×맛이 어떤가, 객고도 풀고 말이지. 으흐흐!”

사소리는 물건의 흥정도 끝나고,

두둑한 돈뭉치를 손아귀에 틀어쥐기나 한 것처럼 기고만장했다.

그동안의 고생이 심했던 만큼 김동회도 쉽게 사소리의 기분에 동화되었다.

이제 그 중국인이 데리고 올 거상이 누구일지는 모르지만,

몇 배의 이익을 남겨야 할까 그것만이 문제인 것이다.

다음날 오후 7시 정각, 하숙집 앞마당 잿더미 속에 숨겨놓은 아편 뭉치 7개가 들어 있는

꾸러미를 찾아들고, 김동회와 사소리는 약속 장소인 중국집 진성루로 나타났다.

일찍 저무는 늦가을의 해가 이미 지평선 너머로 기울어져 사방은 어두웠고,

찬란하게 빛나는 별들이 지평선 쪽으로 쏠려 깜박거렸다.

상대방 중국인도 어김없이 제시간에 나타났다.

어제 미루미루깡깡에서 만난 두 녀석과 제법 돈푼깨나 있어 보임직한

중후한 신사풍의 두 사나이가 함께 자리를 했다.

“우리, 배도 출출하고 목도 마른데 맥주라도 시켜가면서 흥정을 합시다!”

바야흐로 엄청난 흥정을 벌이려는데 맥주 몇 병이 문제가 아니었다.

사소리는 호기 있게 맥주와 요리를 주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