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장군의 아들

제2부 黑龍의 飛翔-혼돈 62

오늘의 쉼터 2014. 8. 27. 11:32

제2부 黑龍의 飛翔-혼돈 62 

 

 

“야, 야!”

종로꼬마가 대합실 앞을 그대로 스쳐 지나가려는 다람쥐를 불러 세웠다.

다람쥐는 반가워서 그러는 것인지,

서글퍼서 그러는 것인지 온통 일그러진 표정이 되어 있었다.

“형님, 야단났어요!”

“뭐가?”

김두한이 대신 물었다.

“순사놈들이 무옥 형님과 영철 형님,
그리고 머리 빠진 개고기를 붙들어가고 있어요.”

“뭐? 어디로?”

이번에는 종로꼬마가 허겁지겁 물었다.

“아마도 혼마찌 경찰서로 끌고 가려나 봐요.

무옥 형님이나 영철 형님은 그런 것 같지 않은데, 머리 빠진 개고기가 많이 다친 것 같아요.

길바닥에 쓰러져 있는 머리 빠진 개고기를 두 형님이 부축하고 오다가…….”

김두한은 그 뒷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용수철처럼 후닥닥 뛰쳐나가 수표교 쪽으로 되돌아가는 것이었다.

물론 붙잡혀 가는 부하들을 구출해 내기 위해서였다.

종로꼬마와 망치가 뒤쫓았다.

이날 경찰이 느닷없이 달려든 경위는 이러했다.

당시, 관수동 골목 안 현재 판 코리아가 있는 자리에 소방서가 있었다.

오늘날처럼 고층 건물이 많지 않던 그 시절, 소방서의 전망대는 최고의 고층 건물이었다.

그 전망대에서 시내를 내려다보면서 화재 발생을 감시하는 것이다.

이날 아침도 어떤 소방관이 다른 때처럼 시내를 내려다보면서 감시하고 있었다.

그러는데 예의 편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막 안개가 걷히기 시작한 이른 아침,

아침이 너무 일러 사람의 왕래도 뜸한 그 시간에 쌍방 100명에 이르는 편싸움은

보통 싸움이 아니었다.

편을 이루어 난투극이 전개되는 것은 말할 것 없고, 일본도까지 내휘두르고 있지 아니한가.

가히 결사적인 전투라 할 만했다.

기겁을 하고 놀란 소방관이 혼마찌 경찰서에 급보로 알렸다.

그렇지 않아도 일본패가 조선패에 도전장을 냈느니,

결전의 시간이 다가왔느니,

뒤숭숭한 정보가 들어오고 있어 잔뜩 긴장하여 경계 태세에 들어가 있었던 경찰은

즉시 대기 병력을 풀어 현장으로 직행케 했다.

10여 명쯤 되는 경찰이 현장에 당도했을 때는,

이미 발 빠른 쌍방의 주먹패들이 잽싸게 도망친 다음이었다.

그러나 일본패의 칼을 맞은 조선패며 다리 아래로 굴러 떨어진 부상자며,

양아치 딱부리의 자전거 체인에 얻어터진 일본패 몇몇 중상자들이 신음을 하며 나자빠져 있었다.

이를 본 김무옥과 문영철이 머리 빠진 개고기를 들쳐업고 탈출을 하려다가

그만 경찰에 붙들리고 만 것이다.

역시 경찰의 비호를 받고 있는 일본패의 부상자는 즉시 병원으로 실려갔고,

체포된 것은 오직 이들 조선패 세 사람뿐이었다.

이들을 구출하기 위해 김두한은 수표교로 되돌아 달려갔던 것이다.

 

김두한은 한달음에 수표교까지 치달려왔다.

그사이에 도망칠 자는 도망쳤고,

병원으로 실려갈 자는 실려갔고,

붙잡혀 갈 자는 붙잡혀 갔기 때문인지,

수표교 언저리는 대 편싸움이 벌어진 현장 같지 않게 조용했다.

행인들이 좀 늘어났을 뿐이었다.

근처의 상인들이며, 일찍 나선 등교길의 학생들이

자기네끼리 모여 더러 쑤군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 가운데 팥죽 할멈의 모습도 보였다.

팥죽집 앞에서 바깥을 내다보며 사색이 되어 있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노파가 그 무시무시한 편싸움을 직접 목격했으니

공포로 오금을 펼 수 없을 정도였다.

게다가 팥죽집의 단골 손님인 머리 빠진 개고기며 많은 조선 주먹패들이 부상을 당했고,

경찰에 붙들려 간 것을 보았으니 겁에 질릴 수밖에 없었다.

(김두한이 다치지나 않았는지? 경찰에 붙잡혀 가지나 않았는지?)

김두한을 아들처럼 사랑하는 노파는 무서움에 떨면서도 걱정이 되어

바깥을 내다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달려오는 김두한을 본 것이다.

노파의 표정은 반가움으로 일그러졌다.

“할머니, 우리 아이들이 붙들려 갔다면서요?”

“글쎄…… 저쪽으로…….”

이(齒)가 맞닿지 않을 정도로 떨고 있는 노파는 말도 제대로 여미지 못하고

문영철·김무옥·머리 빠진 개고기 등이 끌려간 남쪽 골목길을 손가락질했다.

김두한은 어깨에 날개가 돋친 듯 달려갔다.

그 뒤로 종로꼬마와 망치가 뒤쫓았다.

근처에 경찰이나 일본 주먹패가 남아 있는지 어떤지도 살필 겨를이 없었다.

그러다가 자기 자신들마저 붙들려 가게 될지 어떨지,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부하들을 구출해 내야 한다는 일념뿐이었다.

이들이 붙잡혀 가는 일행을 따라잡는 데는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머리 빠진 개고기가 수표다리 위에서 밑으로 내던져졌을 때 다리라도 삐었는지 절룩거리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시궁창으로 굴러 떨어졌기 때문에 흠뻑 물에 젖어 그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김무옥과 문영철이 양쪽에서 머리 빠진 개고기를 부축했다.

그들의 손에 수갑이 채워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붙들려 가는 사람 같지 않게 태연했다.

“천천히 걸어!”

김무옥이 머리 빠진 개고기의 귀에 소곤거렸다.

시간을 벌자는 수작이었다.

아이들이 자기네들이 붙들려 가는 것을 보고 달려갔으니까,

김두한이나 다른 동료들이 구출을 하기 위해 뒤쫓아올지도 모른다고 기대했기 때문이다.

이들의 뒤로 샤벨을 찬 정복의 순사가 넷,

이들을 포위하듯 앞뒤와 좌우 양쪽에서 따르고 있었다.

붙들려 가는 이들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김두한이 비호처럼 날아오고 있었고,

그 뒤로 종로꼬마와 망치가 헐레벌떡 뒤쫓아오고 있었으니까.

(알지?)

김두한은 뒤따라오는 두 부하에게 눈으로만 물었다.

더 이상 명령할 것도 없었고, 따로 복창하여 대답할 것도 없었다.

서로의 눈빛만으로도 통하는 것이었다.

순사들을 처치하되, 크게 다치게 하거나 죽여서는 안 된다는 뜻이었다.

황금정(을지로)을 가로질러,

지금의 스카라 극장과 명동 성당 쪽으로 갈라지는 네거리 앞이었다.

그들이 끌려가는 곳은 물론 혼마찌 경찰서(중부 경찰서)였다.

여기서 해치우지 않으면 너무 늦는다.

눈앞에 바로 경찰서와 직할 파출소가 있으니까.

김두한은 비호처럼 날아들면서도 고양이처럼 소리나지 않게 다가들고 있었다.

그의 신발은 그처럼 특수했던 것이다.

가죽 구두가 워낙 비싸서 흔하지도 않을 때였지만,

그는 평소에도 가죽 구두를 신지 않았다.

우선 싸움에 불편했기 때문이다.

텐트용의 천에다, 피대를 밑창으로 대어 만든 특수화(特殊靴)를 신었다.

여기에 구두약을 칠한 신발인데,

이 신발은 뛰어도 발소리가 나지 않았고, 걷어차면,

오히려 가죽 구두보다 정확하게 가격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힘이 배가(倍加)되었다.

김두한은 달려온 여세를 몰아 그대로 붕,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4명의 순사의 등을 퍽퍽 걷어찼다.

두 번을 뛰어오를 필요가 없었다.

주먹을 쓸 필요도 없었다.

한 번 뛰어오른 것만으로도 상황은 끝난 것이다.

그만큼 김두한은 공중에서의 행동이 빨랐고,

체공 시간 또한 남들보다 길었던 것이다.

뜻밖에 일격을 당한 순사들은 앞으로 고꾸라지기도 하고,

폭삭 주저앉듯 엉덩방아를 찧으며 나둥그러지기도 했다.

미리부터 순사들에게 중상을 입히거나 죽게 하지는 않겠다는 속셈이 있었기 때문에,

순사들은 비틀비틀 일어나서 대항할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종로꼬마와 망치가 뒤쫓아와서 김두한에 가세하여 싸움은

싸움 같지 않게 끝나버리고 말았다.

여기서도 중국 무술 십팔계의 기술이 발휘되었다.

이들은 순사들의 급소만을 건드려 얌전하게 길바닥에 누였을 뿐이었던 것이다.

그사이 김무옥과 문영철이 머리 빠진 개고기를 부축하면서 종로 쪽으로 도망을 쳤음은 물론이다.

김두한과 종로꼬마·망치도 잽싸게 도망은 쳤다.

그러나 종로로 가지 않았다.

일본패와 대대적인 편싸움을 벌인 데다가 정복 경찰관을 때려눕혔으니,

경찰의 검거 선풍이 불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청계천을 따라 주교(舟橋)를 건너, 동대문 시장으로 빠져 정릉(貞陵)으로 향했다.

정릉은 지금처럼 민가가 밀집한 주택가가 아니었다.

아리랑고개만 넘어서면 푸른 물결이 바위를 깨물면서 흐르는 계류를 안고 있는 명승지였다.

지금의 스카이웨이 뒤편에 있는, 은신처인 보국사로 숨어들었다.

이곳 주지 범주(凡舟) 스님은 김두한패뿐만 아니라,

일본인과 싸우고 피신해 온 사람들을 잘 숨겨주었던 것이다.


오후 3시 30분발, 봉천행 급행 열차 ‘노조미’호는 이미 평양을 지나 어둠을 가르면서

국경 도시 신의주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얼마 안 있으면 신의주에 당도하고, 압록강을 지나 이국 땅 만주의 안동에 이르게 될 것이다.

김동회는 차창 밖의 짙은 어둠만큼의 불안감을 안고 있었다.

생애 최초로 이국 땅을 밟는다는 흥분이나 호기심 따위는 처음부터 있지도 않았다.

애초부터 마음 내키지 않는 여행이었기 때문이다.

아편 밀수꾼의 앞잡이인 강원도 칠복이, 속칭 사소리의 경호 책임을 맡고

봉천을 향해 떠나는 것이다.

그는 사소리를 안전하게 호위해야만 할 뿐 아니라,

그가 지니고 있는 아편 또한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호송해야만 하는 것이다.

사소리는 지금 작은 사과 덩어리만한 생아편 일곱 덩어리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시가(時價)로 따져 7000원에 이르는 고가(高價)이다.

김동회는 두목 하야시가 무엇 때문에 아편 밀수에까지 관여하게 되었는지

그 까닭을 알지 못했다.

또 이 무섭고 어려운 임무를 왜 자기에게 맡기게 되었는지도 몰랐다.

그저 이런 임무를 맡긴 두목보다도 이런 임무를 맡게 된 자기 자신의 신세를 원망할 따름이었다.

의리에 살고 의리에 죽어야 할 야꾸자(협객)로서, 두목의 명령은

그것이 어떠한 성질의 것이든 거역할 수 없는 절대절명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같은 목적으로 국경을 몇 번씩 넘어본 일이 있는 사소리는 그래도 태연한 듯 가장하고 있었지만,

국경선이 가까워오자 어쩔 수 없이 초조해했다.

“동회, 이제 시작해야 돼!”

그는 열차가 신의주 못 미쳐 석하(石下)쯤에 이르자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국경을 넘을 준비 작업을 시작하자는 뜻이었다.

당시 조선에서 만주로 가는 열차 승객에 대한 몸 수색이나 검문은 매우 심했다.

특히 조선인에 대해서는 더욱 엄격했다.

그것이 독립 운동을 하는 지사들을 가려내기 위해서인 것은 물론이었지만,

또한 아편 밀수꾼을 색출해 내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들 두 사나이는 자그마치 사과알 크기만한 생아편을 일곱 덩이씩이나 갖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경찰의 눈을 피하거나, 경찰을 따돌려야 하는 것이다.

사소리의 말에 김동회는 잠자코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리에서 일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가슴이 뒤설레고 몸이 떨렸으나,

막상 자리에서 일어서자 협객다운 용기·대담성이 생겨서일까 차분히 마음이 가라앉는 것이었다.

그의 호주머니 속에는 문제의 아편 덩이가 숨겨져 있었다.

이것을 열차 화장실 안에 숨기려는 것이다.

화장실로 들어선 그는 우선 드라이버로 공기통을 뜯는 작업부터 시작했다.

덜컹덜컹, 질주하면서 흔들리는 열차 속에서의 작업은 그처럼 수월한 것일 수 없었다.


간신히 공기통을 뜯었다.

이 공기통 안에 아편 꾸러미를 넣은 것이다.

꾸러미는 사과를 담은 실망태였다.

요즘도 더러 볼 수 있지만,

당시에도 열차 안에서는 몇 개의 사과를 실망태에 담아 팔았다.

이 실망태에 담은 아편 꾸러미를 공기통 안에 숨긴 다음,

다시 공기통을 드라이버를 이용해서 닫는 것이다.

고개를 발랑 젖히고 천장 위에 달린 공기통을 여닫는 작업은 쉽지가 않았다.

더구나 급행 열차는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는 것이다.

화장실에 들어가 너무 오래 있으면 수상하게 여길지도 모른다.

급하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작업을 끝냈을 때,

그의 이마에는 진물 같은 땀이 흐르고 있었다.

그가 작업을 하는 동안 사소리는 화장실 밖에서 망을 보고 있었다.

수월한 일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해서 경찰의 눈을 피해 무사히 국경선을 넘을 수 있었다.

만주 땅으로 접어들어 봉천을 몇 정거장 앞두고서 다시 화장실로 들어가,

같은 방법으로 아편 꾸러미를 공기통에서 끄집어냈다.

아편 운반의 책임은 사소리인데도, 김동회가 맡아 작업을 해야만 했던 것은

그가 사소리보다 키가 컸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봉천까지 무사히 물건을 운반해 올 수 있었다.

이제는 사소리가 연락 루트를 통해 물건만 전달해 주면 김동회의 역할과 책임은 끝나는 셈이었다. 후텁지근한 한낮, 그러나 봉천 역전은 휘저어놓은 것처럼 붐비고 있었다.

7억이 넘게 득실거리는 인구가 넘치고 넘쳐서 만주 땅 봉천에까지 넘쳐흐르고 있는 것이다.

한결같이 꾀죄죄한 옷차림, 어둠침침하고 무기력한 표정,

그러면서도 말할 때만은 성이 난 사람들처럼 악을 쓴다.

흔히 시끄러우면 호떡집에 불난 것 같다고 하는데,

그 시끄러움으로 귀라도 틀어막고 싶은 정도였다.

역전에는 역마차와 인력거가 떼지어 늘어서 있었다.

삼두마차(三頭馬車)를 끄는 마부는 물론 본토의 뙈놈(이렇게 불러야 실감이 난다)들이지만,

이들은 반드시 손님을 가려서 태운다.

먼저 오고 오래 기다리고가 없이, 늦게 와도 중국 사람을 우선적으로 태운다.

다음은 백계 노인(白系露人), 그 다음이 조선 사람, 마지막으로 일본 사람의 순으로.

그만큼 대국 사상이 머리에 박혀 있기 때문이지만 만주사변·중일전쟁 이후,

중국인의 배일 감정은 사무쳐 있었다.

“쓸차! 쓸차!”

중국인이 한쪽 어깨로 메고 다니는 덴삔(天秤)이 무거운 듯 쓸차 장수가

전족(纏足)한 여인처럼 뒤뚱거리면서 다가왔다.

덴삔의 앞통에는 으레 양젖을 가공해서 만든 음료수인 쓸차가,

뒤통에는 우리의 꽈배기 과자같이 기름에 튀긴 마화가 들어 있었다.

사소리는 김동회를 이끌고 쓸차 장수에게로 다가갔다.

쓸차 한 모금 마시고 마화 한 입, 마화 한 입 베어 물고 쓸차 한 모금,

그런 대로 맛이 괜찮았다.

그러는데 다가오는 여인 하나가 있었다.

“여관 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