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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요석궁(瑤石宮)

오늘의 쉼터 2009. 6. 27. 20:59

 

4.요석궁(瑤石宮)


 원효를 보내고 나서 요석공주는 방에 돌아와 원효가 사흘 동안 입고 있던 옷을 안고 울었다.

그것은 너무도 짧은 인연이었다.

 요석공주는 전 남편 거진에 대하여서는 아직 깊은 정이 들 사이도 없었거니와

또 그러할 나이도 아니었다.

아무리 숙성한 공주라 하더라도 열다섯 살인 소녀로는 부부의 깊은 정을 알 리가 없었다.

그러나 요석공주가 원효에게 대하여는 십 년을 그리워왔다.

그뿐 아니라 승만여왕에게 원효를 빼앗길 것을 두려워하면서 십 년을 그리워해 온 것이었다.

  공주는 원효에 대한 이 사랑의 소원은 금생에는 달할 수 없는 것으로 단념하고 있었다.

원효는 도저히 여자의 정의 원을 들을 사람을 아닌 줄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공주는 아무리 하여서라도 원효에 대한 원을 달하리라고 밤낮에 생각하고

마음을 졸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공주의 이 원은 달하였다.

사흘 동안 공주는 원효를 남편으로 모실 수가 있었다.

그 기쁨,

그 고마움은 무엇에 비길 데가 없었다.

그렇지만 너무나 짧은 인연이었다.

 “ 다만 하루만이라도.”

 이렇게 빌던 공주이지만,

도저히 오랫동안 부부생활을 계속 할 수 없는 줄은 첫날부터 작정된 일이지마는,

그래도 이렇게 짧은 인연이 다하리라고 생각지는 아니 하였다.

 공주는 잠이 들었다가는 소스라쳐 놀라서 잠이 깨어 원효를 찾았다.

필시 잠든 자기를 버리고 어느덧 일어나서 산으로 갔으리라고 생각되었던 까닭이다.

그러다가 옆에 원효의 몸이 있으면 기쁘고 마음놓이는 한숨을 쉬었다.

 공주는 원효가 자기의 자색에 반한다든가,

공주라는 지위에 탐을 내인다든가 그러할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원효가 자기와 생사의 연[生死緣]을 맺는 것은 오직 자기를 제도하려는 자비심 가엾이

여기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라고 믿는다.

파계를 하여서까지라도 자기의 소원을 들어준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하기 때문에 도리어 원효가 더욱 소중하고 그리웠다.

 원효는 갔다.

 사흘 동안 극진한 사랑을 주던 남편 원효는 갔다.

뒤도 아니 돌아보고 갔다.

이제 여기 남은 것은 그가 사흘동안 궁중에서 입고 있던 옷이다.

공주는 이 옷을 안고 원효를 그리워하여서 우는 것이었다.

 칠월 칠석이 되었다.

 이해에 삼이 풍년이 되어서 삼 농사 짓는 백성들이 기뻐하였다.

다른 농사도 다 잘 되었다.

 여름 동안에는 전쟁도 없어서 백성들은 새 임금님 덕에 태평이 왔다고 칭송하였다.

 왕은 왕후와 더불어 이 날 요석궁에 거동을 하셨다.

지조공주도 부모님을 모시고 왔고 육부 六部 아손 이상의 딸들도 모였다.

 

 칠월 칠석은 딸들의 명절이었다.

 베틀어미[직녀織女], 신틀아비[견우牽牛]가 일년에 한 번 하늘 위 은하수에서 만난다는

날이다.

 하늘 임금의 공주 베틀어미는 부명을 거역한 죄로 신틀아비와 따로 떨어져 있어서

베틀어미는 서른 새 베 삼천 육백 자를 짜 놓고 신틀아비는 삼신 삼천 육백 켤레를 삼아

놓고야 칠월 칠석날 저녁에 한 번 내외가 만난다는 것이다.

 이 날 남자가 신을 삼으면 신 재주가 늘고 여자가 신을 삼거나 베를 짜거나 바느질을 하면

그 재주가 는다는 것이다.

 요석궁 큰 방에는 베틀 여섯이 놓인다.

 이 날 베틀을 들여놓으면 구월 그믐날에야 걷는 것이다.

육부 처녀들이 두 패로 나뉘고 공주 둘이 한 패마다 좌상이 되어서

이 날부터 삼삼기를 시작하여 팔월 가윗날 그 성적을 비교하여 왕후께서 친히 승부를

결하시면 진 편에서 술과 떡과 고기를 내고 회소곡會蘇曲을 부르며 풍악을 아뢰고

춤을 추며 노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튿날부터 뜰에 겻불을 피우고 풀을 쑤어 베를 맨다.

날에 푸지를 하여서 도투마리에 감는 것이다.

 이것이 끝나면 도투마리를 베틀에 걸고,

 “ 쓸어동동 베가리오. 구름 속에 잉아 걸고 바디집은 박달이오, 뱁대는 쑥이로다.”

하는 노래를 불러 가면서 베를 짜는 것이다.

 모인 여자들은 모두 칠백 년래 귀족의 딸들이었다.

유신의 집은 본래 신라가 아니요 가야국 왕족이거니와 그 나머지는 다 신라 왕실의 피를

끌고 오는 집 딸들이었다.

 자손 많고 자손 중에 인물 많이 나기로는 내물왕인데,

최근에 와서는 진흥왕도 아드님 따님이 많으셨다.

모두 그러한 왕의 피를 받아서 귀하게 길러 낸 따님들이었다.

나이로 말하면 열너댓에서 열일곱, 열여덟.

 나라가 장차 흥왕할 때라 그러한지 이때 신라에는 남녀간에 좋은 인물이 많았다.

 씩씩한 남자, 아름답고 덕 있는 여자.

 국선 화랑 國仙花郞에도 사다함, 문노, 비녕자, 유신 등 큰 인물이 많이 났거니와

여자로도 선덕, 진덕여왕 같으신 큰 인물이 나셨고,

불도로 말하면 더욱 왕성하여서 원광, 자장, 원효, 의상등 당나라에까지

 이름이 높은 승려들이 많이 났다.

 국선도는 충효로서 본을 삼은 것이었다.

이것은 결코 중국학문에서 온 사상이 아니요, 신라의 고유한 사상이었다.

김대문金大問 의 [화랑세기花郞世紀]라는 책에, “현좌충신 종차이수 양장용졸 유시이생

賢佐忠臣 從此而秀 良將勇卒 由是而生(어진 재상과 충성스런 신하가 이로부터 빼어났고

훌륭한 장군과 용감한 병졸이 이로부터 나왔다.)”이라 한 것이나,

 최치원 崔致遠의 [난랑비서 鸞郞碑序]에

 “국유현묘지도 왈풍류 설교지원 비상신사 실내포함삼교 접화군생 단여입즉효어가 출즉충어국

노사구지지야 처무위지사 행불언지교 주주사지종지 제악막작 중선봉행 축건태자지화야

國有玄妙之道 曰風流 說敎之源 備詳神史 實乃包含三敎 接化群生 단如入則孝於家 出則忠於國

魯司寇之旨也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周柱史之宗之 諸惡莫作 衆善奉行 竺乾太子之化也

(우리나라에는 현묘한 도가 있으니 이를 풍류라 한다.

이 가르침을 설치한 근원은 이미 신사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거니와 그것은 실로 유,불,선

삼교를 포함하는 것으로서 모든 생명과 접하여 이들을 감화하였다.

 또 이들은 집에서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가서는 충성을 다하니,

이는 노나라 공자의 근본 가르침이며 모든 일을 무리하게 하지 않으며 말없이 행함으로

가르치니 이는 주나라 노자의 가르침이다.

 모든 악행을 저지르지 않고 중생을 받들어 선을 행하니

이는 천축국 석가모니의 가르침이다.)” 라고 한 것이나,

다 이 신라 고신도 新羅古神道인 국선도를 말한 것이다.

‘ 설교지원 비상신사 說敎之源 備祥神史’라는 것으로 보아서

신라 건국초로부터의 사적을 적은 역사,

 즉 [신사]에 벌써 이 국선도(풍류도라고도 한다)가 생긴 연원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교는 멀리 신대에서 발한 것이다.

 

 진흥왕 삼십칠 년 봄에 ‘ 시봉원화 始奉源花’ 라고 신라사에 적혀있다.

 인물을 알아 쓰기 위하여서 이모와 준정이라는 두 미인을 간택하여 원화로 삼고 젊은 선비 삼백여 명의 무리를 모았는데 두 여자가 서로 제 아름다움을 다투며 질투하여 준정이 이모를 제 집으로 데리고 가서 술을 강권하여 취하게 한 뒤에 끌고 나가 강물에 던져 죽이자 준정은 사형을 당하고 삼백여 명 무리는 실화파산 失和罷散(화합이 깨져 흩어짐)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이‘시봉원화'에 대한 기록인데, 원화라 함은 그 두 여자를 가리킴인지,

삼백 명 무리를 가리킴인지 알 수 없다.

 다음에‘취미모남장식지 명화랑 이봉지 取美貌男粧飾之 名花郞 以奉之

(아리따운 남자들을 골라서 잘 꾸며 화랑이라 이름하고 받들게 하였다.),라 한 것을 보면

전조 前條에서 원화라 하는 것은 아름다운 두 여자를 가리킴인 듯하다.

 아름다운 남자를 택하여 장식하여 화랑이라고 이름하여 받들었다 하니

이것도 모호한 말이다.

다만 얼굴의 아름다움만으로 화랑을 삼아서 받들었을 리는 없다.

 잘생긴 사람, 잘난 사람을 골랐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기에

 ‘ 명화랑 이봉지 도중운집 혹상마이도의 혹상열이가락 유오산수 무원부지 인차지기인사정

   택기선자 천지어조

   名花郞 以奉之 徒衆雲集 或相磨以道義 或相悅以歌樂 遊娛山水 無遠不之 因此知其人邪正

   擇其善者 薦之於朝

(그리고 이름도 화랑이라고 받들어 부르게 되니 젊은이들이 구름 떼처럼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도의로서 연마했고 가락을 즐겼으며 산과 강을 넘고 건너며 유람을 즐기는 사이에 아무리

먼 곳이라도 안 가 본 데가 없을 정도였다.

이러한 그들의 행실을 관찰하여 사람 됨됨이를 파악할 수 있게 되었고 그들 중에서 착실한 젊은이들을 뽑아 조정에 신하로 천거하기도 하였다.)'라 한 것이다.

 즉, 잘난 청소년들이 모여서 도의 道義로 서로 닦고, 노래로 음악으로 서로 기쁘게 하고,

산수를 찾아 즐겨 아무리 먼 데라도 가고, 이 모양으로 수행한 것이다.

 그러면 화랑들이 ‘ 서로 닦았다 ’는 도의의 내용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귀산 貴山과 원광법사와의 문답에서 알 수가 있다.

 귀산은 사도[沙染部] 사람 무은 아간  武殷阿干의 아들이었다.

 젊어서 같은 사도 사람 비목이와 서로 친하였다.

 한번은 두 사람이 서로 말하기를“우리가 사군자 士君子와 놀려면 먼저 정심수신 正心修身을 아니

하고는 욕을 면치 못할 것이니 우리 어진 사람에게 가서 도를 묻세.” 하고 원광법사를 찾아갔다.

법사는 수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와서 가실사 加悉寺 에 있어 그때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귀산과 비목은 옷을 걷어 들고 법사의 문에 나아가 고하여 가로되,

 “속된 것이 어리석어 아무것도 모르오니 원컨대 한 말씀을 주시어 종신계 終身戒를 삼게 하옵소서.”

하였다.

 귀산과 비목의 청하는 말에 원광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불교에는 보살계라 하는 계가 있어 열 가지나 되어 너희들은 남의 신하와 아들이 되었으니 아마 지키기 어려울 것이다.

세속오계 世俗五戒가 있으니,

일왈 사군이충 事君以忠(임금을 충심으로 섬기라),

이왈 사친이효 事親以孝(어버이를 효도로 섬기라),

삼왈 교우이신 交友以信(벗을 믿음으로 사귀어라),

사왈 임전무퇴 臨戰無退(싸움에서 물러나지 마라),

오왈 살생유택 殺生有擇(죽일 때에는 가리어 하라)이니라.

너희들은 이 다섯 가지를 잘 행하되 소홀히 말렸다.”

 귀산과 비목은 가르침을 받잡고,

 “ 지금부터 가르치심을 받들어 행하여 잊어버리지 않겠나이다.”하고 맹세하였다.

 

그후 진평왕 건복 십구 년 眞平王建福十九年 팔월, 백제의 대병이 아모 阿모성을 포위하자 왕이 장군

파진찬 건품 波珍飡乾品, 무리굴 武梨屈, 이리벌 伊梨伐과 급손 무은 級飡武殷, 비리야 比梨耶 등을

보내어 막게 하실 때 귀산과 비목은 소감 少監으로 종군하였다.

무은은 귀산의 아버지다.

 백제군이 패퇴하는 것을 추격하다가 천산 泉山 못 가에서 백제 복병을 만나 이번에는 신라군이

패퇴하게 되었다.

그때 신라군의 선봉으로 분전하던 무은이 뒤떨어져 물러오다가 복병의 갈고리에 걸려 말에서 떨어져

붙들렸다.

 이에 귀산이 소리를 높여,

 “ 내 일찍 스승께 듣자오니 싸움에서 물러나지 말라 하셨으니 달아날 줄 있으랴.”

하고 말을 돌려 백제군 중에 짓쳐 들어가 적병 수십 명을 죽이고 아버지를 건져 제 말에

태워 보내고 비목과 더불어 창을 휘두르며 싸우니 신라 군사가 보고 모두 감격하여

백제군 중으로 돌격하여 백제 군사의 주검이 들에 가득하고 말 한 필, 수레 하나

돌아가지 못하게 하였다.

 귀산과 비목은 전신에 수없이 칼과 창을 맞아 돌아오다가 중도에 죽으니 왕이 군신을

거느리시고 아나들[阿那之野]에 맞아 시체 앞에서 통곡하시며 예를 갖추어 장례하시고

귀산은 나마 奈麻, 비목은 대사 大舍로 벼슬을 올리셨다.

 이것으로 보아서 풍류, 화랑, 국선, 원화가 무엇인지를 짐작할 것이다.

예로부터 내려오는 이 충효일본 忠孝一本의 정신이야말로 신라의 국맥을 천년이나 전하게

한 것이다.

 이러한 정신으로 남자들이 닦고 살고 자랑하는 더구나 삼국통일의 대업을 앞에 둔 이때의 신라에는

유신, 품석, 비녕자, 이 모양으로 화랑정신이 성하였다.

이러한 때 신라 여성의 정신도 이에 응하였다.

 그들도 충효를 숭상하였다.

충으로 말하면, 여자로는 직접 벼슬을 하거나 전장에 나가는 일이 없는 대신 어머니로는 아들을,

누이로서는 오라비를, 아내로서는 남편을 충신이 되도록 가르치고 권하고 격려하였다.

 문명이 춘추에게 시집을 간 것이나, 또 그 어머니 만명이 서현에게 시집을 가서

유신을 낳은 것이나, 또 요석공주가 원효를 사모한 것이나 다 그때 여자들 의중에

그리는 것이 남아다운 남아였던 증거다.

 이 날 요석궁에 모인 여자들도 모두 품에 칼 하나를 품었다.

 이것은 몸칼이라는 것이다. 언제나 제게 불의를 행하는 자와 싸우고,

또 제 몸이 욕되기 전에 저를 죽여 버리려는 차림차림을 가진 것이다.

 둘째로, 이 아름다운 처녀들이 가슴에 품은 것은 잘난 사내 하나였다.

 잘난 사내라면 몸도 건강하고 얼굴도 잘나고, 활 잘 쏘고, 칼과 창 잘 쓰고, 말 잘 타고, 구변 좋고,

그러고도 억강부약하는 협기 있고, 그러고도 노래 잘하고, 춤 잘 추고, 씩씩하고 시원한 사내를

가리킴이었다.

 화랑의 무리들은 이러한 사내 되기를 목표삼는 사람들이었다.

나이는 십칠팔세.

 그 다음에 당시 신라 처녀들의 사모를 받는 이는 명승이었다.

집도 부귀도 안락도 다 버리고 누더기 한 벌 지팡이 하나로 명산대천으로 방랑하는 명승이었다.

이이들도 대개 본래는 화랑도로서 궁마 弓馬와 가무 歌舞에 능하였다.

 벼슬을 할 양이면 이손, 급손 지위에 오르고 무장이 될 양이면 장군이 될 만한 사람들이

원정치의 圓頂緇衣로 중이 되는 것이었다.

 그때 신라의 명승으로 말할진대 원광법사는 궁중에 청함이 되면 임금께서 손수 찬수와 다약 茶藥을

 만들어 대접하셨고, 그가 수나라에 있을 때는 수양제 隋煬帝와 강남 백성들이 성자 聖者로 예우

하였으며, 자장율사는 선덕, 진덕 두 임금의 어우 御宇를 통하여서 일국의 정사까지도 좌우하였다.

 그밖에도 도법 높기로는 안홍법사가 있었고 파탈하기로는 대안대사가 있었고 젊으면서도

신라와 당나라에 이름난 이로는 원효와 의상이 있었다.

 의상은 아직도 당나라에 있어서 돌아오지 아니 하였으나 그가 당고종 唐高宗의 숭앙을 받는 것이나

천하 전생 선묘녀 善妙女의 사랑을 물리치고 청정한 두타행을 계속한다는 소문은

신라 처녀들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원효로 말하면 승만여왕이 십 년을 두고 사모하여도 까딱도 없었다는 것이 처녀들 간에

돌아가는 말이었다.

“의상대사가 선묘를 뿌리친 것보다 원효대사가 승만마마에게 아니 넘어간 것이 더

어려워.” 신라의 처녀들은 이렇게 말해 왔다.

요석공주가 원효를 사모한다 하는 소문은 승만여왕 승하하신 뒤로부터 들리기 시작하였다.

 “ 원효대사를 한번 파계시켜 보았으면.”

 이러한 말을 하는 처녀가 여럿이었다.

 

원효는‘잘난 사내’였다.

[송고승전 宋高僧傳 ]이라 하는 중국 사람 찬영 贊榮이 만든 책에도

‘신라국황룡사원효전 新羅國皇龍寺元曉傳’이라 하고 거기 원효의 인물을 이렇게 평하였다.

 “유처무항 용격의위 웅횡문진 흘흘연환환연 진무전겁......혹제소이강잡화 혹무금이락사우

  혹여염우숙 혹산수좌선 임의수기 도무정검

  遊處無恒 勇擊義圍 雄橫文陣 仡仡然桓桓然 進無前刦......或製疏以講雜華 或撫琴以樂祠宇

  或閭閻寓宿 或山水坐禪 任意隨機 都無定檢

(원효는 진리의 세계를 용감하게 공격하듯 파고들고, 문진을 종횡무진하여, 굳세고 당당하였는데,

 앞으로 나아갈 뿐, 물러서는 일이 없었다.

 혹은 소를 지어 화엄경을 강의하기도 하였고, 혹은 사당에서 거문고를 뜯기도 하며,

 혹은 여염집에서 잠자며, 혹은 산수에서 좌선하는 등 계기를 따라 마음대로 하되 도무지 일정한

  규범이 없었다).”

 원효는 이러한 대장부다.

전장에 나가면 용장이요, 무예를 겨루면 장원이요,

말 잘하고  글 잘하고 설법을 하면

‘칭양탄지 성비우공 稱揚彈指 聲沸于空

(그를 찬양하는 박수 소리가 법당을 가득 메웠다)’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때 나이는 서른세 살. 신라 여자들의 마음을 끄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하물며 열정에 자유분방한 그들이랴.

 이날도 그들은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이슥하도록 놀다가 육부 딸들을

두 편에 갈라서 요석공주와 지조공주가 각각 머리가 되었다.

 모임이 파한 뒤에 상감과 중궁은 요석공주를 부르셨다.

요석은 의례로 차를 올렸다.

 왕은 차를 받아 잡수시고 요석에게 이렇게 물으셨다.

 “ 그동안 원효대사의 소식을 들었느냐.”

 요석은 낯을 붉혔다.

 잠깐 고개를 숙였다가 공주는 이렇게 아뢰었다.

 “원효대사가 오월에 다녀간 뒤로는 소식이 없습니다.”

 “한참은 대안대사와 추축한다고 하더니 또 들으니 거사의 모양을 하고 뒤웅박을 들고

  조롱박을 허리에 여남은 개나 둘러차고 염불을 하며 촌락으로 다니는 양을 보았다고도 하고.”

 왕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요석공주는 놀라는 표정을 하며,

 “ 거사의 모양을 하고, 원효대사가 거사 모양을 하고.”하고 부왕을 우러러본다.

 그 눈에는 눈물이 고인다.

“ 그래, 거사의 모양을 하고 머리도 아니 깎고.”

하시는 왕의 말씀을 받아 왕후가 이렇게 말씀하셨다.

 “ 분명 거사의 모양을 하였더라고 하오.

 원효대사가 이제는 이름도 고쳐서 복성거사 卜姓居士라고 하옵고.”

하시고 한숨을 쉬신다.

 “ 복성거사”

왕도 놀라신다.

 “ 그러하오. ”

하고 왕후는 이 말을 이 자리에서 아니 하여서는 아니 된다 하는 듯이 정신을 가다듬어,

 “기원사 祈願詞 묘신니 妙信尼에게 들은 말씀이온데 원효대사가 파계를 하였노라고 말하고

  가사 장삼을 벗고 거사가 되었다 하오.

 십 년 동안 대사의 수종을 들던 심상사 審祥師더러도 내가 이제 파계승이 되었으니

 남의 공양을 받을 수 없다고 떠나가라고 하여도 심상사는 파계를 하셨거나 아니 하셨거나

 원효사마를 모신다고 굳이 따른다 하오.

 거사가 중을 부릴 수가 있느냐, 전에는 내가 네 스승이었으나 계를 깨뜨린 바에는

 네가 도리어 내 스승이라고 심상에게 절을 하였다 하오, 원효대사가.”

 왕후의 말씀에 왕은 고개를 끄덕끄덕하시며,

 “ 그래, 파계는 어떻게 한 파계라 하오, 원효대사가.”

 하시고 왕후를 보시고 물으신다.

 “ 파계를 어떻게 무슨 일로 하였다 하는 말은 없사옵고 세상 소문은 원효대사가

 삼모라는 노는 계집의 집에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하오.”

 “ 삼모.”

 왕은 또 놀라신다.

 “ 옳거니.”

 하고 왕이 웃으신다.

  “ 상감마마. 삼모를 아시오?”

 왕후의 마음에 잠깐 질투가 일어난다.

 요석의 마음에도 질투가 일어난다.

 “삼모를 모르는 사나이 어디 있나. 인물 잘나고 도고하고.”

 “노는 계집이 도고하면 얼마나 도고하오?”

 왕후의 낯에는 불쾌한 빛이 보인다.

 요석은 고개를 숙인다.

 지조만 재미있는 듯이 왕의 입을 바라본다.
“ 얼마나 도고한고 하면 춘추가 불러도 아니 오고 유신이 편지를 보내어도 답장이 없으니

  그만하면 도고하지 않소? 하하하하.”

 왕은 유쾌하게 웃으신다.

 유신이 삼모에게 편지를 보냈다는 말에 지조의 낯빛이 흐린다.

 “ 하하하하.”

 왕은 더욱 웃으시며,

 “ 유신이 원효에게 진 줄 알면 분할 것이라.”

하시고 몸을 흔들며 웃으신다.

 삼모에게 반한 것이 왕이 아니라 오라버니 유신인 줄을 알고 왕후의 분이 풀려

얼굴에 웃음이 나뜬다.

 “ 그러면 원효대사가 삼모의 손에 넘어갔을까. 삼모가 원효에게 넘어갔을까.”

 왕은 농담에 가까운 흥미를 느끼신다.

 “ 이 몸이 아뢰오리다.”

하고 요석이 고개를 든다.

 “ 삼모가 삼십이 붙어도 원효대사의 마음이 움직이지 아니 하오리다.”

 “ 네 어떻게 아느냐.”

 “ 원효대사가 삼모의 집에 갔던 말 밤에 요석궁에 왔소.

 대사가 이 몸에게 삼모의 집에 갔던 말을 하였소.”

 “ 그러면 원효대사가 요석궁에서 파계를 하였느냐.”

 “ 그러하오.”

 왕은 기대셨던 몸을 일으키시며,

 “ 그게 정말이냐. 그래 네가 소원을 이루었느냐.”

 “ 황송하오. 벌써 상감마마께 아뢰올 것을 황송하고 부끄러워서 못 아뢰었소.”

 “ 그래, 원효대사가 어떻게 요석궁엘 왔느냐.”

 “ 느릅다리로 지나갔다는 말을 듣고 군사들을 시켜서 지키게 하였소.”

 “ 군사가 지키기로 원효대사를 당할 사람이 있을까.”

 “ 군사들이 모두 물 속에 던짐을 당하였으나 요석궁 대사가 빌어서 원효대사를

    맞아들였소.”

 “ 그래.”

 “ 이 몸이 원효대사께 소원을 말하였소. 어진 아들을 하나 달라고.”

 “ 그래.”

 “ 원효대사가 사흘을 묵고 떠났소.”

 “ 그래, 그러고는 소식이 없단 말이냐.”

 “ 그러하오. 그러하오나 이 몸에 있을 것이 없사옵고 입맛이 없소.”

 이 말에 왕후가,

 “ 오, 태기로구나, 아들을 낳았으면.”하고 

 유심히 요석공주를 바라보신다.

 “ 오, 아들이 나면 어진 아들이 날 것이다.

    어진 사람이 나는 것은 나라에 복이야. 아가, 부디 몸조심하여라.”

 왕은 고개를 끄덕끄덕하셨다. 희끗희끗한 수염이 흔들린다.

 “ 그래서 파계했다는 게로군.”

 왕은 다시 이렇게 혼잣말을 하신다.

 “ 그러면 그렇지, 원효대사만한 이가 삼모 같은 계집의 유혹을 받을 리가 있사오리까.”

 왕후는 이렇게 만족한 뜻을 표하셨다.

 “ 그러기로 복성거사라니 무슨 뜻일까.”

 왕은 모든 시름을 놓으신 듯이 이런 말을 궁금하게 생각하셨다.

 “ 복 卜자는 아래 하 자 밑둥으로 하지하 下之下라는 뜻이라 하오.”

 왕후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 하지하라, 하하하하.”

 왕은 수염을 쓸으시며 웃으셨다. 눈앞에 원효의 모양이 보인 것이다.

 허리에 뒤웅박을 주룽주룽 달고 큰 뒤웅박을 돌리며 이 마을 저 마을로 염불을 하고

돌아다니는 원효의 모양이 우습게 보인 것이었다.

 그러나 공주에게는 가슴 아픈 일이었다.

저로 하여서 원효대사가 파계한 죄인 행색을 하는 것이 슬펐다.

 공주는 제가 궁중에 이렇게 편안히 있는 것이 죄송하였다.

마음 같아서는 금세 원효를 쫓아가고 싶었다.

그렇지만 뱃속에 든 아기를 낳아야 한다.

아기 밴 어머니는 귀신도 범하지 못한다고 한다.

 아기를 배고 딴 생각을 하면 큰 벼락이 내린다고 한다.

 ‘그래. 아기를 낳자. 아기를 낳아서 얼마쯤 길러서 그런 뒤에 원효를 따라가자.’

 공주는 이렇게 생각하였다.

 

 뱃속에서 아기가 자라는 것이 하루가 십 년 같았다.

입맛이 떨어지고 몸이 점점 무거웠다.

그래도 공주는 이것을 괴롭게 생각하지 아니 하였다.

뱃속에 든 아기가 반드시 큰사람일 것을 공주는 믿었다.

 공주는 관세음보살을 믿어 염주를 굴리며 염하였다.

 탐, 진, 치 貪瞋癡를 떼고, 전세의 죄업을 소멸하고,

 맑은 물과 같이 닦은 거울과 같이 깨끗한 몸이 되기를 기원하였다.

 어느 날 공주는 뱃속에 꿈틀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평생에 처음 느끼는 바였다.

 “ 아기가 논다.”

 하고 공주는 늙은 시녀에게 그 말을 하였다.

 늙은 시녀는,

 “ 이어라, 이어라사, 고마우셔라.”

 하고 소리를 하며 희색이 만면하였다.

 “ 아기가 처음 노신 날인데 당아사마를 바쳐야 하지요.”

 늙은 시녀 감낭이(간난이)는 이렇게 말하였다.

당아사마(점심)라는 것은 집안에 기쁜 일이나 슬픈 일이 있을 때에 당아에 삼이나 삼베나

그런 것을 바치는 것이다.

당아라는 것은 천년 千年 천대 千代라는 뜻으로 신을 ‘위어’하는 데다.

 “참 그렇지, 나도 지조 智조가 아기 날 적에 어마마마께서 점심 바치는 것을 보았소.

   그렇지만 근래에는 세상이 모두 변하여서 - 나도 마을(대궐, 신 모신데)에 가서

   어라하마 한 지도 오래되었어.”

 공주는 오래 잊었던 것을 생각하는 듯이 멍멍한 표정을 하였다.

부처님께 비는 것과 조상 적부터 내려오는 가미사마(신장님)께 비는 것과 어울리는지 아니 어울리는지

 공주로서는 확실하지 아니 하였다.

 이런 때에 원효대사가 곁에 있었으면 물어 보고 싶었다.

원효대사면 무엇을 물어 보아도 다 알 것 같았다.

그러나 원효대사는 지금 어디로 돌아다니나. 벌써 가을이 되었는데, 생량을 하였는데

이러한 걱정도 되었다.

 아직 겹옷을 입을 때는 아니라 하더라도 아침저녁은 산산하였다.

공주는 집에 있지도 아니 하는 남편을 위하여서 아침저녁에 상을 보아 놓고 철을 찾아서

 옷을 지어 놓았다.

그러나 상은 그래도 물리고 옷은 그대로 쟁여 두었다.

 어디 갔는지 모르는 사람에게 어느 편에 부칠 길이 없었다.

 늙은 시녀 감낭이의 말을 들으면 조상 적부터 위어 오는 신을 섬기지 아니 하는 것은

무섭기도 하였다.

 홀몸으로 있을 때에는 그렇지도 아니 하더니 소중한 사람이 둘이나 생기니 차차 겁나는

일이 많았다.

원효대사는 어찌 되셨나, 뱃속에 든 아기는 어떠한가 - 이것이 모두 근심이었다.

 원효대사는 깨달은 사람이라 하늘도, 귀신도, 사람도 어찌할 수 없는 보살인 줄은 믿으면서도

그래도 육신을 가진 사람이라 병도 날 것 같고 죽을 것도 같고 걱정 근심이 있을 것도 같았다.

제 집에 있어서도 매양 즐거운 일보다도 괴로운 일이 더 많은 이 세상에 원효대사는 집도 없이,

 지닌 것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오죽하랴.

 배고플 땐들 없으며 잠자리 불편한 땐들 없으랴. 지닌 것 없는 몸이라 도적은 무섭지 아니 하더라도

중들 미워하는, 산에 숨은 사나운 무리들을 만날 것도 염려되고 술 취한 왈패들에게 욕을 보지나 않나

하는 것도 마음 놓이지 아니 하였다.

 더욱 염려되는 것은 파계한 원효에게서는 벌써 불보살의 가피력이 떠나고 없을 것같이 생각됨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면 마음속에 글음이 드는 것같이 어두웠다.

파계를 한 원효도 원효여니와 원효를 파계시킨 공주 자신도 자신이었다.

원효와 자리를 같이한 뒤에는 관세음보살이 멀어지는 것 같았다.

솔거의 손으로 조성된 관음상의 살아 계신 듯한 모습이 빛을 잃은 것도 같았다.

그 눈어염의 자비스러우심, 입가의 금세 방긋 웃음이 필 듯한 인정다우심도 갑자기

사윈 듯하여 공주는 오싹 소름이 끼쳤다.

관음당 안에는 난데없는 찬바람이 드는 것 같아서 얼른 일어나 나온 일이 있었다.

 이렇게 꺼림칙한 생각도 날이 갈수록 좀 스러졌던 것이 오늘 아기가 놀기를 시작하고

늙은 시녀가 신에 관한 말을 하는 것을 듣자 다시 옛 무서움이 돌아왔다.

 도 닦는 승니의 계를 깨뜨리는 것이 다섯 가지 큰 죄 중 하나인 것을 공주는 생각한다.

그러면 이 뱃속에 든 아기는 어찌 될까.

 신전에서나 불전에서나 성례 成禮도 아니 하고 과부와 중의 야합으로 생긴 자식이라고

번개같이 생각이 났을 때에는 공주는 기가 막힐 듯하였다.

 “ 아뿔싸.”

 하는 신의 소리가 머리 위에서 오는 듯하였다.

 칠월 칠석날 부모께 공주가 잉태한 것을 여쭌 다음날에 왕은 요석공주가 원효와 혼인한

것을 선포하셨으니,

이제는 사람 부끄러울 일은 없지만 신과 불에 대한 무서움은 벗을 길이 없었다.

 “ 그럼 점심을 바칠까.”

 마침내 공주는 이렇게 말하였다.

 이때는 신라에 불교가 행한 지 백오십 년이 넘어서 예로부터 내려오는 신도 神道가 많이

쇠하였지만 그래도 아낙네와 일반 민간에서는 옛날 법을 지키는 이가 많았다.

 독자에게는 좀 지루할지 모르겠지만 이 기회에 우리 고신도 신앙에 관하여 약간 설명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원효와 요석공주의 이로부터의 일생을 이야기하는 데 필요한 까닭이다.

 신라 시조를 박혁거세라고 하거니와 이것은‘방아’라고 읽을 것이다.

 ‘바'는 불이다. 방아라는 것은 ‘ 불이 낳은'‘불에서 온'이라는 뜻으로 화신 火神이다.

 동물에 있어서는 병아리, 즉 닭이다. 병아리라 함은 불의 자손이라는 뜻이다.

신라 시조가 탄생한 곳을 병아리[鷄林]이라 하고 탄생하실 때에 닭이 울었다 함이 이 뜻이다.

금빛 나는 궤짝에 아기가 들었다 하는 것은 금은 ‘ 가나’라 하여 지금 말로 하나,

즉 하날이요, 하날이라 함은 곧 해가 날이어서 해는 해의 몸이요,

 날은 해의 빛을 가리킨 것이다.

해에서 온 신을 강감 또는 김금이라 하고, 날에서 온 신을 낭감이나 닝금이라고 한다.

신라 임금이 김 金이라는 성을 쓰게 된 것은 해의 자손, 즉 하늘의 자손임을 표하는 것이요,

신라의 시조가 금바가지에 담겼다는 것은 하늘의 자손이면서 불의 자손이라는 뜻이니

 불은 동물에 있어서는 병아리요,

식물에 있어서는 바가지요, 꽃이요, 기구에 있어서는 방아다. 방아는 병아리가 무엇을 쪼는 형상이다.

지금 조선에 남아 있는 흥타령이란 것은 항아(홍아)신,

즉 일신 日神을 맞이할 때 부르던 소리(소리란 원래 신께 사뢰는 말이란 뜻이다)요,

강강수월래의 강강은 강아강아로서 항아항아의 고어 古語다.

 일신의 동물에서의 대표는 강아지다. 일신의 당 앞에 개를 만들어 놓은 것이 이 때문이다.

 신라 신조가 방아이기 때문에 시조묘 始祖廟는 병아리[鷄林]에 짓고 닭을 만들어 놓고 바가지를 심어

지붕과 담에 박꽃이 피게 하고 뒤웅박과 바가지로 제기를 만들고 장식을 만들고 또 악기도 만든 것이다.

 바가지를 긁는다는 것은 화신께 마지를 올릴 때의 음악이다.

또 커다란 박을 두드리는 것이 곧 북이다. 북이란 박이라는 말이다.

 박은 해와 같이 둥글어서 열매 중에 가장 해와 비슷한 것이다.

 

조그마한 바가지는 뒤웅박, 조롱박이라 하거니와 뒤웅박이라 함은 당아방이라는 것으로

달에서 온 것이라 하는 뜻이다.

당아라는 것은 달에서 온 것,

즉 월신 月神이라는 뜻이다.

 덩글덩글, 딩굴딩굴, 당그랑당그랑은 다 바가지에서 나는 소리요,

 동시에 월신을 맞이하는 음악 소리다.

 조그마한 바가지를 속을 파내고, 입을 갸름하게 따고 그 속에 돌멩이를 넣어서 흔들면

이것이 방글방글이니 곧 방울이요, 방아신이 좋아하는 음악이다.

 방울은 또 꽃의 정령도 된다.

 방울 입은 방긋 벌리고 방울을 흔들면 방글방글하고 큰 방울이면 벙글벙글한다.

 방글방글, 벙글벙글, 빙글빙글은 방울 소리로서 방아신의 덕을 표시하는 것이다.

 신라 시조 다음에 석탈해 昔脫解라는 임금이 있다.

석가 昔哥는 ‘상아’요, 탈해는 ‘당아’다. 상아라 함은 사라(술), 즉 물에서 온이,

즉 수신 水神이라는 말이요, 당아는 달에서 온 이, 즉 월신이란 말이다.

탈해는 동해 바다로서 떠들어왔다는 것이 이 때문이다.

 해, 달,불, 다음에 물이다. 농업국에서는 물이 소중하다.

물은 곧 생명이다.

 ‘ 사’라는 것은 물이다. 사는 자로 변한다.

사사, 자자, 소소, 조조, 시시, 지지, 저저는 다 물에 관한 말이다.

  사는 물이어니와 사가 움직이면 ‘ 사라’ 가 된다. 사라가 곧 생명이요,

생명의 특징은 지식이다. 사라는 술이요, 사람이요, 소리요, 실림이요, 상아요, 복이다.

그러나 죄 있는 이에게 살이 된다. 사라 즉, 생명신 生命神에서 오는 이가 사랑아다.

 상아는 수신이요, 사랑아는 생명신이다. 상아는 생기게 하고 사랑아는 사랑도게,

즉 사랑하게 한다. 사라신은 여성이요, 사랑아는 남성이다.

 슬슬, 설설, 술술, 살살, 졸졸, 줄줄, 질질, 이러한 말들은 모두 사라신을 맞이할 때에

하는 소리요, 내는 소리요, 비는 소리다.

 상가는 꿇어앉는 것이요,

 싱거는 소금을 아니 치는 것과 무엇을 땅에 넣는 것이요,

숭글, 성글, 싱글은 다 상아신 앞에서 하는 짓으로 그 춤은 이러한 모양으로 하는 것이다.

 상아신이 동물에 있어서 송아지, 즉소다.

 상아당 즉 서낭당 앞에는 소를 만들어 놓고 또 소를 잡아 제사한다.

 사랑은 남신이기 때문에 남자를 사랑이라 하고 남자의 방을 사랑이라고 하거니와

사랑은 곧 사랑신을 위하는 당아를 모신다.

 당아는 다나도 된다. 사랑아당을 시렁이라고 부른다.

 사랑방이라 함은 사라신과 방아를 모셨다는 뜻이다.

 

 사라는 생명신이요, 수신이어서 사라신을 모신 데를 사라라고 하니

신라를 사라라고 하는 것이 이 때문이다.

사라신은 신라 서울뿐 아니라 조선 각지에 있는 사라방아(시루봉)란 것은

다 수신과 화신을 모신 당아터라는 뜻이니

지금도 가물면 시루봉에서 물빌이(기우제)를 하고 비가 너무 많이 와도 불빌이를 한다.

 “ 물 떠 놓고 불을 빌고 불 켜 놓고 물을 빌어 ” 라는 것이다.

 사랑신은 사라신에서 나고,  사라신은 망아신에서 난다. 망아신은 마신에서 나니,

마는 곧 산이요, 땅이다. 망아신은 모든 것을 만드는 것이 덕이다.

망글어라는 말은 망아라에서 온 것이다. 망아는 만물을 창조하는 신이다.

 망가는 마나가, 마나가가 줄어든 말이다.

나가라는 것은 구멍이란 뜻이요 나가[ 生, 出]라는 말도 된다.

 망아신이 동물에 있어서는 큰 구렁이다. 산멍에라는 것이다.

소나 말의 목을 메우는 멍에도 휘었다는 뜻이다.

지형에 있어서는 구멍이요, 빛으로는 거멍이요, 짐승으로는 곰이다. 망아지도 그러하다.

 구멍, 거멍, 멍어(구렁이), 곰, 가마귀. 매[?], 망아지,

이것은 우리 조상들이 열대지방으로부터 산악지대를 지나서 말 달리는 평원지대로

온 것을 설명하는 역사도 된다.

 고구려의 시조가 주몽 朱蒙이요, 동명왕 東明王이라고 하거니와 주몽이란 사망이다.

무당들이 지금도 사망이라는 말을 쓴다.

사망이란 상아망이다. 수신 水神, 지신 地神의 사존이란 뜻이다.

 동명왕의 어머니 어랑아[柳花]는 하백 河伯, 즉 수신의 딸이요,

 어랑아라는 것은 달빛의 자손이란 뜻이다. 물에 비친 달 그림자가 어렁이다.

 동명왕이 앙당물에 와서 배는 없고 적이 뒤를 따르는 것을 보고,

 “ 나는 하늘의 아들이요, 하백의 손자로다[天帝之子 河伯之孫].”

한 하늘의 아들이란 무엇인가.

 동명왕의 아버지는 동부여 東扶餘왕 금와 金蛙다.

금와는 금강아라요,

강아라는 개구리다.

옛날에는 개구리를 하늘신의 영신이라고 보고 머구리를 땅신의 영신으로 보았다.

고구려라는 말은 ‘가(해)’의 자손이라는 뜻이다.

 망아신을 모신 데는 ‘ 망아라’ 라고 하니 이것이 후세에 마라, 마울로 변한 것이다.

 마라는 사람의 몸에서 머리요, 눈이요, 입이요, 말이요, 젖이었다.

눈이란 말은 고려 왕씨 적에 생긴 말이었다.

 입을 마울이라 하고, 젖을 마마, 따라서 어머니를 마마라고 하고,

먹을 것도 마 또는 말이라고 하였다.

 닭도 말이라고 하였다. 물은 말이다.

 동네를 마라, 마알이라 하는 것은 망아라신을 모신 마울이 있기 때문이요,

임금이 계신 데나 관원이 있는 데도 마울이라 하였다.

 마울은 미야라고 하여서 지금도 깨끗한 것을 말갛다고 한다.

 미야와 같이 깨끗하단 말이다.

맑은이란 말도 여기서 온 것이니

좋은 것에는 모두 마가 붙고 높은 것에도 모두 마가 붙는다.

고구려에서는 하늘과 해를 아마라 하고 솔나무를 말나무라 하고 무릇 사람에게

소중한 것에는 다 ‘ 마’ 자를 붙였다.

그러므로 망아신은 곧 하늘신이시오, 일신이시다.

 

 신라에서는 하늘과 해를 아바라 하고 어머니를 바바, 젖도 바바라 하고 고구려의 모를 벼라 하고

맘(방)을 밤이라 하고 말머리를 발이라고 하고 말가를 발가라고 하고 모든 높은 소중한 것에다

 ‘ 바’자를 붙였다.

 고구려의 망아신은 신라에서는 방아신이 되고 백제에서는 당아신이 되었다.

같은 호랑이도 고구려에서는 멍이라 하고 백제에서는 달이라 하고 신라에서는 벙이라

하였다. 물은 고구려 말로는 망가요, 백제 말로는 달다요, 신라말로는 발다였다.

 같은 하느님을 모시면서도 세 나라는 그 건국 조신을 이렇게 망아, 방아, 당아로 달리하여서

서로 미워한 것이다.

‘ 가나다라마바사아(ㄱㄴㄷㄹㅁㅂㅅㅇ)’는 모두가 신이요.

하나, 둘 하는 셈이다. 마한 馬韓 고구려는 마신을, 변한 弁韓과 신라는 바신을, 진한 辰韓은 사신을,

 백제는 다신을 주장으로 모셨으나 다만 주장이 다르다 뿐이지 열 분 신을 다 모시기는 마찬가지였다.

 고구려는 가신 마신을 가장 높여서 ‘ 가라’ 라면 신이라는 총칭이 되고

신라는 ‘가바사’ 세 분을 가장 존숭하였고 백제는 ‘ 가나다라’를 존숭하였다.

 또 같은 나라에서도 시대를 따라서 존숭하는 신이 달라졌다.

가신 한 분만은 어느 나라에서나 어느 때에나 머리로 존숭하였으나

이것은 아신과 혹선, 혹후, 혹하로 대근원이신 까닭이었다.

 신라의 문화와 또 원효, 요석공주가 살던 시대에 가장 큰 영향을 가진 신은 사신이었다.

 사신은 원래 진한(상아강아)의 주신으로서 수신이다.

가신의 넷째 아드님으로서 가장 어린 아드님이시다.

물을 맡고 생명을 맡고 사랑을 맡는 신이시다.

생명의  물을 신라에서는 술이라고 하였다.

국물은 모두 술이었다.

오월 단오를 수리하고 하는 것은 사라신, 즉 술신의 명절인 때문이었다.

오월 단오에 높다랗게 다나(당아에서 온 말이다)를 매고 사당이라는 미남자 신관이

수리놀이를 올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월을 사다기(삿닭)라고 부르고 그때에 쓰는

제구에 사닥다리라는 것이 있다.

 이제 신라에서 존숭하던 중요한 신을 통틀어 말하면, 가나라사아다.

이것을 한꺼번에 읽으면 ‘ 거느리시와’가 된다. 거느리시와는 나라를 다스린단 말이요,

 일본어의 ‘가나라수カナラス’와 같은 말이다.

백제가 가나다, 또는 가나다라クタラ라고 하는 것과 같다.

 ‘간다 간다’라는 것은 가나다 삼신의 명호를 부른 노래다.

 부여에서는 가사바라였었고, 고구려에서는 가마나사였었고, 나중에는 가마사바였었다.

 그러므로 당에는 이때 네 분 신주를 모시었다.

그래서 손도 네 번 비비고 절도 네 번 하였다.

가신은 후세에는 모시지 아니 하였던 모양이다.

더 옛날에는 가마아 삼신을 모신 모양이나 후세에는 사신을 모신 것이었다.

 신라에서는 이 다섯 분 신 외에 아신, 즉 앙아도 모셨다. 아신은 허공신 虛空神이요,

바람신이요, 활과 살의 신이요, 모든 것을 낳는지라 잉태와 해산의 신인 동시에,

모든 것을 먹는지라 파괴와 죽음의 신이기도 하였다. 만물이 생기기 전 신이다.

 아신은 아라신이 되시니 아라는 암흑의 신이요, 질병의 신이요, 음부의 신이다.

 아신은 앙아라고 하고 아라신은 아랑아라고 한다.

또 영금, 앙금, 엉큼이라고도 한다. 후세에 영산이라고 불러 무서운 신이 되었다.

 영산도드리는 본래 이 앙아신에게 바치는 음악이다.

 이러한 신들은 곧 족보요, 역사요, 종교요, 철학이요, 문화요, 언어였다.

다만 나라에서만 이 신들을 받들고 제사할 뿐 아니라 고을에나 마을에나 개인의 집에나,

모두 직신이 있었다.

직신, 직성이라 하는 것은 지키는 신이라는 뜻이다.

 

원효의 어려서의 이름은 서당[曙幢]이요, 커서는 원효라고 하였으니 서당 원효가 곧 원효의 이름이다.

서당은 사당이니 ‘ 수신당에 매운’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수신에 빌어서 낳았다는 뜻이거니와 그 집이 사당에 매운 집이라는 뜻도 된다.

 지금 쇠똥이란 것이 이와 같은 이름이다.

 원효는 앙요다. 이것은 앙아로 허공신, 즉 풍신 風神이다.

 풍신은 풍신이 좋고 속이 넓고 말 잘하고 음악을 좋아한다.

 마침 원효가 새벽에 났기 때문에 서 曙, 효 曉자를 택한 것이다.

원효의 어머니가 상아당, 즉 수신당에 새벽에 다녀오던 결에 원효를 낳으니 사당이라고 이름을 짓고

다음에 그 풍신으로 보아서 앙요라고 부른 것이다.

 원효 자신도 불교를 배우면서부터 앙요라는 이름이 마음에 들어 중의 이름을 삼은 것이다.

 앙요, 즉 원효는 아나가, 오나가, 엉야, 잉아, 오냐, 아냐 등 여러 가지로 발음되어서 여러 가지 말이 된다.

난다는 뜻도 되고, 간다는 뜻도 되고 화살이라는 뜻도 되고 베짜는 잉아라는 뜻도 된다.

 원효는 허공이란 뜻이다. 불경에 허공장보살 虛空藏菩薩이란 것이 있다.

원효는 자기 이름을 여기 비긴 것이다. 사실 그러한 것이다.

 허공신은 잘생겼다. 어글어글하고 속이 엉큼하다. 엉큼이란 허공신을 크게 말하는 말이다.

그는 이렇게 어글어글하고 엉큼하지마는 또 앙큼하고 웅크리기도 한다.

 어흥하는 호랑이도 되지마는 야옹하는 고양이도 된다.

 웅장도 할 수 있고, 앙징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앙알, 옹알, 흥얼흥얼이 다 같은 풍신의 소리다.

 풍신은 이렇게 자유자재하다.

 요석공주의 이름인 아유다는 공월空月이란 뜻이요,

 풍석 風石 풍월 風月이라는 뜻도 된다. ‘ 아유’는 ‘ 앙요’ 와 같이 앙아란 말이요,

 다는 달이요 돌이다. 요석도 같은 뜻이다. 돌은 옥 玉이거니와 달의 아기다.

달빛이 땅이나 물에 비치어서 엉킨 것이 옥돌이라고 옛 사람들이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돌을 당망이라고 한다. 달의 아들, 땅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당망의 음편으로 돌멩이가 되고 다마가 된다.

 다마는 발톱이란 말도 된다. 달을 숭배하고 산신을 숭배하는 선조들이 다마를 소중히 여긴 것이 이 때문이다.

 한 가지 더 말하고 본 이야기로 돌아가자. 이것은 당시 신라를 설명하는 데 빼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화랑에 관하여서다.

 

 화랑은 신라 시조신을 숭배하여서 뭉친 청년 단체다.

 신라가 북에는 고구려, 서에는 백제라는 강적을 두고 이것을 막아 나가려면 큰일이었다.

 하물며 고구려나 백제가 다 삼국을 통일할 야심을 품고 있어서 신라는 하루도 편안할 날이 없었다.

 이에 신라의 영주 진흥대왕 眞興大王이 크게 나라의 힘을 떨치려고 앙아당을 짓고 거기 달아[二毛],

 상아[俊貞]라는 두 미인으로 당나라,

 즉 당굴을 삼아 천하의 젊은 남자를 모아 수련하게 한 것이다.

 ‘ 시봉원화 始奉源花’ 라는 것이 이것이다.

 그러나 상아가 달아를 질투하여 밤에 달아를 집으로 불러 술을 취하게 먹이고 죽여서 물에 던진 사건으로

 이 단체가 해산되고, 이번에는 신라 시조신인 방아신을 모시는 청소년 단체를 만들었다.

방아는 불이요, 바가지요, 병아리(닭)여니와 꽃도 방아라고 한다.

화랑이란 ‘ 방아랑아’다. 리을이 붙으면 움직임을 표하는 것이니 불이 움직이는 뜻이다.

이것을 빨리 불러 ‘ 방랑아’ 가 된다.

 당시 신라의 소년들은 다투어서 방아가 되었다.

그들의 차림과 수련하는 방법은 이러하였다.

 첫째로 머리다.

 머리를 뒤에서 갈라서 두 귀밑에 뭉쳐서 붉은 끈으로 졸라매어 호로병 모양으로 만들고 이것을 방자라고

부르고 ‘ 봉진다’ 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봉지는 머리를 방아머리라고 한다.

 그러고는 정바기에 둥근 해 모양의 금속을 단 붉은 헝겊으로 머리를 동인다.

이것을 당이라고 하니 댕기의 어원이다.

 아래는 퍼런 바지를 입고 위에는 색동저고리를 입는다.

 이것을 방오리라고 한다.

 방오리는 소매가 넓고 앞가슴이 벌어졌다

 색동은 방아, 즉 호랑이다.

 수탉의 빛을 모방한 것이다.

 허리에는 부납띠를 두르고 바가지 호로병 하나를 찬다.

 이것도 방아라고 하는데, 처음에는 속을 파내지 아니 하고 말린 것을 찼으나 나중에는 속을 파내고

그 속에 옥돌을 넣어서 다섯 개를 차고 뛰면 옥돌이 구르고 또 방울끼리 서로 마주쳐 요란하게 소리가 났다.

 열다섯 살이 되면 방아(배코)를 친다.

이것은 해를 상징한 것이다. 방아갓을 쓴다. 방갓 또는 벙거지라는 것이다.

방갓은 박꽃 모양으로 생기고 커다랗게 대 ‘ 방아’ 로 결은 것이지만 벙거지는 그보다 작게

 경편하게 결은 것이다. 차양이 위로 걷어 올라가 기운찬 모양을 보였다.

여기는 검정칠을 하고 병아리(꿩) 깃을 비스듬히 꽂았고 이마로 오는 쪽에 붉은 상모를 달았다.

 병아리의 볏을 모형한 것이다.

 그들은 사마라고 하는 선생 문하에 모여서

글을 읽고 활쏘기, 달음박질, 뜀뛰기, 말달리기, 돌팔매, 뫼타기(등산), 헤엄치기, 짐지기,

숨바꼭질 같은 것을 익힌다.

이러한 재주를 모두 바람이라고 부른다. 바람은 적국을 멸하고 조국을 크게 하는 기원이란 뜻이다.

 하루 종일 이렇게 바람을 익히다가 해 저물어 박꽃 필 때가 되면 맑은 물에 머리 감고 몸도 씻고

또 네 모금 마셔서 머시기(미역, 목욕)하고 방아신 전에 나아가 두 손을 마주대어 방울 모양을 짓고

바른편 무릎을 꿇었다가 다시 일으켜 네 번 절하고 그러고는 ‘ 방아라 방아라’를 부른다.

 여러 백 명, 여러 천 명이 ‘ 방아라 방아라’를 부르는 것은 장관이었다.

 이들은 ‘ 방글방글, 벙글벙글, 둥글둥글, 덩글덩글, 덜렁덜렁, 설렁설렁’을 수련의 목표로 삼았다.

부귀 안락 같은 것은 염두에도 두지 아니 하고 사생 영욕을 초개같이 알아서 오직 충, 효, 신, 용, 인

忠孝信勇仁으로 일생을 마치자는 것이다.

 나라에 바친 몸이라 언제라도 부르시면 간다는 것이요,

한번 전장에 나가면 살아서는 아니 돌아온다는 것이었다.

춘추도 유신도 다 화랑 출신이었다.

 

 화랑 정신은 신라 여성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화랑이 신라 여성의 사랑이 된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방글방글, 상글상글이 화랑의 배필이 될 것은 말할 것 없었다.

그들은 제 머리카락을 잘라서 화랑의 벙거지감으로 바쳤다.

 인모털 벙거지가 이리하여서 생긴 것이었다.

 그러나 선덕, 진덕 두 여왕 때에는 불교만 존승하여서 화랑이 한참 쇠하였었다.

 춘추가 등극하여서 백제와 고구려를 기어코 정복할 결심을 가졌으니

 그가 화랑을 다시 일으키려 한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민간에서도 우국지사들은

청년의 기운이 쇠하는 것을 염려하여서 화랑 부흥을 생각하는 이가 많았다.

 원효가 대안대사와 함께 구경한 그 바가지 탈춤꾼들이 다 심상한 사람들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서울에서 자취를 감춘 원효는 방랑의 길을 나섰다.

그는 커다란 방갓을 쓰고 허리에 방울을 달고 뒤웅박 하나를 들고 바랑을 짊어졌다.

 원효는 정처없는 길로 나섰으나 발은 상상주 上湘州로 향하였다.

그 곳은 원효의 고향이다. 상주는 태백산 太白山에 큰 당이 있어 거기는 방아신과 상아신을 모셨다.

신라 전국에서 태백산의 상아당이 제일 크기 때문에 고을 이름(신라말로는 이름을 부름이라고 한다.

부름이란 이렇게 되어지다, 하고 바란다는 뜻이요,

바란다는 것은 빈다는 말이다.)을 상주라고 말한 것이었다.

 원효는 그 부모가 상아신에 빌어서 낳았다.

그 이름 서동은 상아신에서 빌어서 낳았다는 뜻 외에 당아신, 즉 달의 신의 정기를 받다,

또는 달의 신의 지키심을 바란다는 뜻이 있다.

한문으로 쓰면 ‘ 수월 水月’이다. 의상대사의 상자도 그와 같은 뜻이다.

 원효는 바가지를 긁으며 동네에 들어서 밥을 빌어먹고는 아무데서나 자고,

그리고 어디서나 사람이 모이면 염불을 하였다.

 오랫동안, 십 년 동안이나 분황사에 숨어서 저술만 하고 있던 원효는

이번에야 비로소 민정을 시찰할 수가 있었다.

 끊임없는 전란에 백성들은 대단히 피폐하여 있었다.

원효가 염불법을 가르치면 백성들은 혹은,

 “ 염불을 하면 죽은 아들이 극락세계로 가오.”

이렇게 묻기도 하고 또는,

 “ 이렇게 염불을 모시면 분명히 편안한 세상에 태어나오.”

이런 소리도 하였다.

원효는 힘있게,

 “ 그렇고 말고.” 하고 대답하였다.

 백성들은 분명히 방아신과 상아신과 예로부터 믿어 오는 신에 대하여서 신앙을 잃은 듯하였다.


 동네마다 모신 당아는 다 낡아서 기둥이 찌그러지고 비가 새었다.

오직 바가지 덩굴만이 지붕에 벋어 올라가서 둥글둥글 바가지가 달렸을 뿐이었다.

 원효는 어떻게 해서라도 고구려와 백제와 신라가 한 나라가 되지 아니 하고는 세 나라 백성이 다

살 수 없어서 다 망하고야 말 것을 느꼈다.

그러하자면 신라가 강한 힘을 얻어서 두 번 큰 전쟁을 하여야 할 거라고 생각하였다.

일시에 사람이 많이 죽더라도 아주 화근을 끊어 버리지 아니 하면 세 나라 백성은 언제나

마음 놓고 살 날이 없으리라고 생각하였다.

 원효는 가는 길가에서 보는 것을 하나도 허수하게 보지 아니 하였다.

남자나 여자나 아이들 노는 짓까지도 모두 유심히 보았고 또 아이들의 얼굴 생김을 유심히 보았다.

거기서 신라의 장래를 점치자는 것이었다.

 원효가 가마새미라는 곳에 다다른 것은 유월 보름께였다. 이해에 가물어서 백성들이 물끓듯하였다.

곡식은 모두 시들고 나무들도 마를 지경이었다. 개천에도 물이 마른 데가 많았다.

 동네마다 시루봉에는 강아라불을 피우고 바위에 강아지(개)를 잡아 피를 바르고,

 “ 강강 상아라, 강강 상아라.”

를 불렀다. 강이란 가에서 온 신, 즉 천신이라는 말이요,

 상아라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물을 맡은 신이란 말이다.

 “ 바라 바라 바라.”

라고도 불렀다. 발이란 일광도 되는 동시에 비도 되었다.

비 뿌린단 말도 되었다.

 “ 마나다라, 마나다라.”

하고 ‘ 문드’ 라는 옛날 말로 물이라는 말로도 불러 보았다.

 “ 마나당아, 마나당아(문둥아)”

하고 옛날 물귀신의 이름도 불렀다.

 무엇보다도 원하는 것이 물이었다.

며칠만 더 비가 아니 오면 금년 농사는 말이 아니었다.

흉년이 들면 굶어죽는다.

 어떤 해에는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못 먹고, 어떤 해에는 비가 아니 와서 못 먹는다.

 이것은 다 신의 노여움이라고 생각한다.

 상아신이 알맞게 비를 주셔야 한다. 그러자면 강아신이 상아신께 명령을 내리셔야한다.

그렇기 때문에,

“ 강강 상아야, 강강 상아야.”

하고 백성들이 애원하는 것이다.

 가장 하늘에 가까운 산마루터기 시루봉에 올라서 비빌이를 하는 것이다.

 원효는 그러한 곳을 지날 때마다 백성들과 함께,

 “ 강강 상아라.”

하고 목청껏 불렀다.

그러할 때마다 아미타불의 극락세계를 생각하였다.

모든 것이 다 소원대로 되는 세계를 생각하였다. 
 원효는 가뭄에 우는 동포들의 정경을 보자 지금까지 분황사에서 살던 것이 너무나 황송한 것 같았다.

호강은 아니 하였으나 밥걱정 옷 걱정은 없이 살았다.

고량진미는 아니 먹었더라도 배고픈 줄은 모르고 살았다.

그러나 세상에는 얼마나 배곯는 사람이 많은가.

 원효는 풀뿌리를 캐어 먹고 퉁퉁 부은 사람을 보았다.

배가 고파서 길가에 쓰러진 사람도 보았다.

 원효는 한 바가지 두 바가지 굴 우물에 물을 길어다가 말라 죽으려는 곡식에 물을 주는 사람을 보았다.

그의 배는 등에 붙고 눈은 음쑥 들어가고 빛이 없었다.

 원효는 그 사람을 대신하여서 물을 길었다.

곡식 포기들은 물을 받아먹고 당장에 생기가 나는 것 같았다.

 “ 사랑아, 사랑아.”

하고 원효의 입에서는 저절로 사랑신을 찬미하는 노래가 나왔다.

 원효는 인생이 고해라는 것을 비로소 보고 안 것 같았다.

 ‘ 화택이다, 불붙은 집안이다.’

 원효는 이렇게 새삼스럽게 생각하였다.

 원효는 백성들이 이렇게 고생하는 것이 다 원효의 탓인 것 같이 느꼈다.

원효가 만일 공덕이 큰 사람이면 원효가 살고 있는 사방 천 리에는 기근과 질병이 없을 것이 아니냐.

천 리가 못 되면 사방 백 리에라도 백성에게 이러한 괴로움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원효는 지나간 삼십삼 년간에 먹은 밥이 알알이 소리를 지르는 것을 들었다.

 “ 이놈, 네가 무엇을 했길래 밥을 먹었어.”

 밥풀이 알알이 눈을 흘기고 덤비고 옷이 올올이 몸을 찌르는 것 같았다.

 “ 원효야,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이러한 외침에 귀가 막힐 듯 하였다.

 이러한 심경을 가지고 원효가 가마새미 산골 마을에 다다른 것은 초어스름이었다.

 원효는 다리가 아프고 배가 고팠다. 마음은 그 보다도 더 시달려 있었다.

 “ 보아라. 지나가는 거렁뱅이니 하룻밤 드새어지이다, 하여라.”

하고 원효는 어떤 집 문전에 섰다.

 마을은 큰 산으로 들어가는 동구에 있어서 개천에는 이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아니 하고 있었고

물가에는 잉아나무(버드나무)가 늘어서서 가지를 드리우고 있었다.

잉아나무는 앙아신, 앙알신의 나무요, 잉아 즉 화살나무다.

 원효의 말에 응하여 나온 이는 방아머리를 방진 소년이었다.

 “ 어디에서 오시는 손이시오.”

하고 소년은 공손하게 허리를 굽혔다. 화랑의 절이었다.

 “ 지나가는 거렁뱅이오. 날새 저물었으니 하룻밤 드새고나 가자오.”

 원효는 이렇게 말하면서 소년의 상을 보았다.

소년은 옥같이 흰 얼굴에 어글어글하는 눈이요,

우뚝한 코였다.

 “ 사랑으로 들어오시오.”

하고 소년은 사랑문을 열었다.

 원효는 섬돌을 디디고 봉당에 올라섰다.

 여기는 방아신을 모신데다.

여기 올라설 때마다 두 손을 마주대고 가운데를 불룩하게 만들어 위아래로 흔들면서,

 “ 방아라, 방아라, 방아라, 방아라.”

하고 네 번 부르는  것이다.

이것을 고구려, 백제 사람은 흉보아서 ‘ 벙어리’라고 일컫는다.

 고구려에서는 여기를 마당이라 하여,

 “ 망아라, 망아라, 망아라, 망아라.”

하고 백제에서는 도당이라 하여,

 “ 당여라, 당여라, 당여라, 당여라.” 하는 것이다.

 

 사랑방은 정결하였으나 오랫동안 사람이 거처하지 아니 한 모양이었다.

소년이 원효를 위하여 문을 열 때에는 방에서 선뜩선뜩한 바람이 나왔다.

 방 아랫목에는 사낭아신의 더그마가 있어 세 분 신의 탱이 걸리고

윗목 시렁에는 사랑신, 사당신, 상아신을 모셨다.

 신을 모신 데를 마을이라고도 하고 시로라고도 하고 당아라고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신을 모신 데는 삼노로 금줄을 늘이고 천정에 방울을 달고 방울에 당길 줄을 늘이는 것이다.

 원효는 이 집이 순전한 신라식 고가인 것을 알았다.

 더구나 시렁 밑에 거문고, 가얏고와 바라,

 북 같은 악기가 있는 것을 보아서 주인이 심상한 사람이 아닌 것을 알았다.

 원효는 소년이 시중해 주는 대로 세수하고 발을 씻고 새로이 소년과 인사를 하였다.

소년의 인사하는 범절이 깍듯하였다.

 소년의 이름은 상아사사마[湘泉]였으나 사사나오[士猛]라고도 하였다.

샘이 솟아나온다는 뜻과 어우른 것이었다.

 소년의 조부는 이 산속 가상아당에서 스승으로 있고 그 아버지는 백제와의 싸움에 전사하였다고 한다.

 소년은 조부를 따라서 가상아당에서 공부하다가 어머니의 병으로 시탕하기 위하여서 잠시 집에 돌아와

있는 것이라고 한다.

또 소년의 손윗누이 아자개 阿慈介도 가상아당에 가상아(가시나, 갓나위, 기생)로 있다는 말도 하였다.

 소년은 지금 나이 열다섯이란 것도 알았다.

이 집에는 소년의 어머니와, 누이 하나가 하인들을 데리고 사는 것도 알았다.

 원효는,

 “ 보아라, 나는 중 노릇 하다가 파계하고 거렁뱅이로 돌아다니는 사람이오.

이런 누추한 사람을 서방(사방아)이 이렇게 우대하시니 고맙소.

 부르기는 복성이라 하오. 어려서는 쇠똥이라 하였소.”

이렇게 자신을 소개하였다.

 “ 복성이라시니 무슨 자를 쓰시며 무슨 뜻이온지.”

 소년은 이렇게 물었다. 원효는 반가부좌 半跏趺坐로 앉았고 사사마는 한 무릎을 꿇고 앉았다.

 “ 알아볼 복 卜자, 받아나올 성 性자요, 바상이[?](바사기)라는 뜻이오. 하하하.”

 “ 바상이라 하시니 밧달(?月=二月)에 보신(나신)게요.”

 “ 허. 잘아시오. 생일도 밧달이거니와 또 생기기를 못생겨서 바상이라고 스스로 부르는 것이오.

허나 바상이는 몸이 작아서 나뭇잎, 풀뿌리를 뜯어먹고 바위틈에 자면 고만이지마는 이것은

몸은 크고 배도 커서 매양 다른 사람들의 폐만 끼치고 있으니 가여운 일이오.”

 원효는 이렇게 말하고 유쾌하게 웃었다.

 소년도 빙그레 웃었다. 소년은 이 사람이 필경 도인일 듯하다, 하고 마음에 존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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