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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번뇌무진(煩惱無盡)

오늘의 쉼터 2009. 6. 27. 20:20

 

2.번뇌무진(煩惱無盡)


 왕이 승하하신 것은 원효에게 큰 충동을 주었다.

 원효는 화엄경 해설에 열중하여 별로 세상일에 주의하지 아니 하였고,

또 그러할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원효는 오직 원만한 불성(佛性)만을 응시하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고구려, 백제, 당나라들과의 외교 관계가 매우 중대하였으나 원효는

그런 것을 참견하려고도 아니 하였다.

또 설사 무슨 기회에 그러한 중대한 소식을 들을 때에 일시 흥미를 느끼는 일이 있더라도

경상을 대하면 그런 것은 다 잊어버렸다.

 원효의 목표는 다만 화엄경을 주석하는 데만 있지 아니하였다.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과 화엄경 주석이 끝나면 법화, 금강 할 것 없이 중요한 대승견전에 다 주석을 내리고 싶었다.

 원효는 자기가 처음 불경을 읽었을 때 어찌나 알기 어려웠던가를 생각하고,

이것을 알기 쉽게 적더라도 이러한 경들이 어떻게 우리에게 소중하고 중요한 것인가 하는

 것만이라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다. 그래서 원효는 인생의 향락을 온통 단념하고 불경 주석의 뜻을 세운 것이었다.

“ 원효가 이 세상에 다녀간 뒤에 불도를 모르는 사람이 없게 하리라.”

 이것이 원효의 뜻이었다.

 원효는 문수보살(文殊菩薩)을 원불(願佛)로 모시고, 용수(龍樹)로 사모하는 선배를 삼았다. 문수보살이 짐짓 부처의 지위를 버리고 영원한 보살로 불도를 전하여서 모든 부처의 스승이 되신 것이 원효의 뜻에 맞았다. 자기도 문수보살의 본을 받아서 불도를 펴는 자가 되리라고 생각하였다.

 원효가 아미타경을 애독하고 또 그 주석을 쓴 것은‘제상선인구회일처’(諸上善人具會一處) 즉 착한 사람뿐이요, 악한 사람은 하나도 없는 극락정토의 최고 이상( 그것은 진실로 인생의 최고 이상이다)에 공명한 까닭고 있거니와 아미타불의 전신인 법장비구가‘누구든지 내 이름을 듣거나 부르거나, 악도에서 벗어나지 아니 한다면 나는 성불하지 아니 하겠다’하신 그 대원(大願)이 원효의 마음에 든 까닭이었다.

 그러므로 원효는 해탈도 바라지 아니하고 왕생극락(往生極樂)이나, 성불(成佛)도 바라지

아니 하였다. 그는 오직 불도를 모르는 중생이 하나도 없게 하기를 바란 것이었다.

 원효도 제행무상을 모름은 아니었다. 열반경(涅槃經)은 그가 화엄경 못지 않게 애독하는

경이었다.

그러나 승만왕(승하하시자 이 왕을 진덕여왕(眞德女王)리라 시호를 받들었다.)

 승하하심을 들은 때처럼 제행무상을 절실히 느낀 일은 없었다.

 바로 칠팔 일 전이 아니냐. 비 오는 삼월 삼짇날 원효가 어전에서 화엄경 십지품을 강한 것이 바로 칠말 일 전이 아니냐. 그날에 왕은 그 풍후하고 건강하신 몸으로 설법을 들으시지 아니 하였느냐. 그런데 그 어른은 돌아가셨다.

 왕의 한 많은 몸은 그가 평소에 즐겨하셨고, 또 마직막으로 원효의 설법을 들으시던 모 랫 도[沙染]궁 옆에 묻히셨다.

 원효는 왕이 승하하신 뒤에 궁중에 불려나갔다. 왕이 생전에 존경하시던 인연 있는 중들이 다 불렸거니와 특별히 원효는 왕의 유언으로 불린 것이었다. 그것은 왕의 유해를 관에 넣기 전에 원효 법사로 하여금 송경 설법을 하게 하여 달라신 유언이었다.

 자장율사는 이 유언에 대하여 심히 불쾌하여 원효를 부르는 것을 반대하였다. 자장은 왕에게 우바이(優婆夷)의 계를 주었고 왕으로 계신 팔 년 동안 마치 섭정처럼 모든 것을 지도하여 왔다. 진덕여왕뿐 아니라 전왕 선덕여왕 때부터도 그러하였다. 신라 궁중에 당나라 복색을 쓰게 한 것도 그러하거니와 신라의 연호를 폐하고 당나라 연호를 쓰게 한 것도 춘추보다도 자장이었다. 그뿐 아니라 춘추로 하여금 당나라를 친하게 한 것부터가 실로 자장이었다. 자장은 당나라 조정의 존경을 받는 것을 기회로 신라를 당나라와 친하게 하는 데 전력을 다하였다.

 그러하거늘 진덕여왕에 대한 마지막 불사(佛事)를 자장이 아니하고 젊은 중, 원효에게 맡긴다는 것은 자장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손 알천은 상대등의 직권으로 자장의 반대를 눌렀다.

자장은 분연히 소매를 떨치고 대궐에서 물러나와 황룡사에 돌아와 병이라 일컫고 자리에 누웠다.

 이러한 사정도 모르고 원효는 왕의 빈전에서 아미타경을 설하였다. 원효는 왕의 몸이 타서 재가 되기 전에 그 몸 곁에서 한 번 더 경을 설하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원효가 아미타경을 설한다는 것은 의외였다. 여기 모인 중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알천, 춘추, 유신 등도 의외로 여겼다. 왜 그런고 하면 그때 신라에서는 자장이나, 혜통(惠通)이나, 명랑(明朗)이나, 고승이란 고승은 대개가 밀교(密敎)파였고 그렇지 아니한 자는 원효와 같은 지식승으로서 화엄, 법화, 반야경을 존숭하였다. 정토(淨土)를 바라는 것은 무지무식한 하급 사람들의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염불보다 진언(眞言)이 숭상되었고 오직 유식한 일부에서 경론을 좋아하였다.

 그러나 원효는 이 날 왕을 위하여 아미타경을 설하기로 결심하였다. 왕이 승하하시니 극락정토에 왕생할 것밖에 들려 드리고 빌어 드릴 것이 없는 것 같았다.

 원효는 첫머리에 소리를 높여서,

“ 나무아미타불 ”

하고 고성 염불을 하였다. 원체 우렁찬 원효의 음성이지만 시체 앞의 고요한 속이라, 그 소리는 사람들을 놀라게 할만큼 컸다.

원효는 이 소리가 왕의 귀에 들리기를 바랐다. 왕의 혼이 어떻게 먼 곳에 계시더라도 지금 원효가 부른 염불 소리가 그곳에까지 울리기를 바랐다.

 신라 사람의 국선도(國仙徒)의 생각으로 보면 왕의 혼령은 하늘로 올라가셨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신(神)이 되어 산이나 바다에 계실 것이다. 그러하더라도 원효는 자기의 염불 소리에 왕의 혼령이 극락에 왕생하시기를 바랐다.

“ 나라에 지극히 높으신 몸으로서도 마침내 죽음을 면치 못하셨소. 모든 약을 써 드렸고 여러 높은 법사들이 모든 비밀법을 다 수(修)하여서 상감마마의 목숨이 늘으시기를 빌었으나 상감마마는 승하하셨소.”

 원효는 허두에 이러한 말로 무상(無常)을 설한 뒤에 아미타경문을 읽고, 극락세계의 아름다움과 아미타불의 대원을 설하였다.

 최후에 원효는 경을 덮고,

“ 십만억 불토를 지나서 서편에 있는 극락정토가 어디냐. 여기가 곧 거기다. 아비지옥(阿鼻地獄)이 어디냐. 여기가 곧 거기다. 십겁(十劫)이래 상주설법(常住說法)하시는 아미타여래의 법회에서 주야 조석으로 법을 듣는 이가 누구냐. 곧 이 회상(會上)에 모인 선남선녀(善男善女)다. 승하하옵신 대행대왕(大行大王)마마의 승연(勝緣)으로 우리 무리가 모두 이 나라에 태어나서 아미타불의 법을 듣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아직 이 나라를 극락정토라고 생각하지 아니하고, 저 수풀에 우는 새를 가릉빈가(伽陵頻迦 )라고 알지 아니 하고 까막 까치로 아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요, 지옥에 사는 까닭이니, 무릇 극락을 이룩하는 것도 우리 마음이요, 지옥을 걷는 것도 우리 마음이라, 삼계유심(三界唯心)이요, 만법유식(萬法唯識)이란 이를 두고 이른 말이오. 이제 새 임금이 높은 자리에 오르셨으니 백관과 만인이 지옥의 마음을 버리고 극락정토의 마음을 가져서 이 신라로 극락정토를 이루는 것이 대행대왕의 뜻을 잇는 일이요, 아울러 대행대왕의 명복을 비는 일이 될 것이니, 이제 산승(山僧)의 아미타경 설법쯤이 무슨 신통할 것이 있으리. 설법으로 말하면 일월성신과 산천초목과 비금주수가 상주설법을 하고 있는 것을.”

하고 말을 끊고는 다시 소리를 높여서 나무아미타불을 불렀다.

 원효는 진정으로 돌아가신 여왕이 극락에 왕생하시기를 바랐다. 왕은 대승불교를 즐겨하셨으나 결코 번뇌를 떼어 버리신 것은 아니었다.

 왕은 역시 아름답고 젊은 여성이셨다. 왕은 아내도 되고 싶으셨고 어머니도 되고 싶으셨다. 그러나 임금의 자리에 계신 몸으로서는 그것이 다 뜻같이 되지 아니하였다.

 원효는 승만왕이 자기를 생각하심을 느꼈다. 특별히 삼월 삼짇날 법회에서 그것을 깊이 느꼈다. 원효는 분명히 왕의 눈에서 번뇌의 빛을 보았다. 그 음성에서 열정을 들었고, 그 몸에서 번뇌의 향기가 발하는 것을 맡았다.

 그러나 그 당시보다도 왕이 돌아가시고, 능이 이뤄지고, 녹음이 우거질수록 원효가 왕을 생각하는 마음은 더욱 간절하였다. 그것은 다만 신자(臣子)로서 임금을 사모하는 마음만이 아니었다. 원효에게는 승만왕이 끝없이 가여우신 것 같았다. 원효는 가끔 혼자 책상을 대하여서 눈물을 떨구었다.

‘ 어, 내가 웬일인가.’

 춘추가 새로 왕위에 오르셨다. 백관은 이손 알천을 왕으로 모시려 하였으나 알천은,

“ 이 늙고 아무 덕행도 없는 것이. ”

하고 굳이 사양하고,

“ 춘추공이야말로 가위 제세영걸(濟世英傑)이시오.”

하고 힘써 주장하여 춘추가 왕위에 오르신 것이다.

이 임금이 장차 백제를 멸하실 태종무열왕이시다.

 

새 왕이 즉위하여 전왕의 자취가 차차 스러질수록 원효는 승만왕을 위하여서 슬퍼함이 더욱 간절하였다.

" 노 스님(老師主)은 평생에 슬퍼하시는 일을 못 뵈었는데 근래에는 매양 슬픈 빛을 보이시니 어찌하신 일이신지."

하고 상좌 심상도 마침내 물었다.

" 내 법력(法力)이 부족함이 설워서."

원효는 이렇게 솔직하게 대답하였다.

" 무엇이 법력이 부족하시다 하심인지."

" 대행마마께서 그날 그처럼 간절히 물으시는 것을 내가 만족 할 만한 대답을 못하여 드렸구나."

" 대행마마께옵서 그처럼 간절히 청하시는 것을 왜 그리하오리다, 하고 대답을 아니 하셨습니까. 옆에서 등골에 땀이 흘렀습니다."

" 허, 그러니까 내가 법력이 부족하단 말이다. 내게 선혜비구만한 자신이 있으면야 세세생생에 같이 하오리다 하는 허락도 하겠지만, 내가 내 속을 들여다보아도 번뇌가 가득하여 장차 무엇이 될지 모르는데 어떻게 남더러 나를 따르라 하겠느냐. 하물며 내가 세세생생에 임금으로 모시던 어른을 만일 악도(惡道)로 인도한다 하면, 그런 궁흉극악한 죄가 어디 있겠느냐. 그러니까 대답을 못 아뢴 게다."

" 그러나 그대 대행마마께서 얼마나 슬퍼하셨을는지."

" 슬퍼하셨겠지. 그렇지만 대행마마께서 나를 따르실 일이 아니라 나를 부르실 것이다."

" 어디로?"

" 어디서나, 가시는 곳마다. 나를 이 생(生)으로 부르신 것도 대행마마시니."

" 아니, 스님은 수원수생하시는 보살화신(菩薩化身)이 아니십니까."

" 보살화신으로 말하면 금수초목이 다 보살화신이 아니냐."

원효는 이렇게 말하였다.

그리고는 화엄경소를 짓던 것도 거의 전폐하다시피 하였다.

" 화엄경소는 아니 지으십니까."

하고 심상이 물으면,

" 내가 무엇을 안다고 화엄경소를 지으랴. 우선 내가 나부터 알아야 할까 보다."

이러한 대답을 하였다.

한번은 또 심상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

" 너는 무엇을 얻으려고 나를 위해서 물을 긷고 밥을 짓고 이 고생을 하느냐. 내게서 배울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 다른 데 가서 스승을 찾아라."

이런 말도 하였다.

왕이 돌아가신 지 사십구 일이 되었다.

국내 각 절에서 돌아가신 왕을 위하여서 사십구일재를 올렸다.

새 임금이신 춘추는 왕의 옛 뜻을 생각하여서 지금은 왕후이신 문명부인과 공주가 된 아유다를 분황사로 보애서 왕의 명복을 빌게 하였다.

왕후 문명부인은 요석공주(아유다)를 데리고 분황사에 듭셨다.

" 노스님. 중전마마 요석공주 행차시오."

하고 아뢰었다. 원효는 방에만 들어박혀서 근래에는 절 마당에도 나오는 일이 없었던 것이다.

" 응."

원효는 간단히 대답하고는 가만히 있었다.

" 지영(祗迎) 안 납시오?"

심상은 재촉하였다.

원효는 마지못하는 듯 가사를 걸치고 단주를 들고 나섰다.

왕후가 편전(便殿)에 듭시는 것을 먼발치서 바라보고 원효는 슬며시 제 처소로 돌아왔다."

원효는 문명부인이 왕후의 장복(章服)을 입으신 것을 처음 보았다.

요석공주가 공주로 차린 것도 물론 처음 보았다. 요석공주는 그럴듯하였다. 원효는 대행왕을 생각함이 더욱 간절하였다. 그 어른이 남기시고 돌아가신 영화를 모두를 좋아라고 나눠 가지고 즐기는 것 같아서 마음이 괴로웠다.

 

사중(寺中)에서는 원효에게 도사(導師)가 되기를 청하였으나 원효는 거절하였다. 그래서 명랑이 도사가 되기로 하였다.

 명랑도 원효와 같이 제 집을 내놓아서 절을 만든 사람이다. 그 절을 금광사(金光寺)라고도 하고 금우사(金羽寺)라고도 한다. 그의 어머니는 자장의 누이요, 아버지는 소판 무림(蘇判茂林)이라고도 하고 사간재량(沙干才良)이라고도 전하나 다 한 사람일 것이다. 그는 당나라에서 공부하고 유가(瑜伽)를 배워가지고 신라에 돌아와서 해동에 신인종(神印宗)의 초조(初祖)가 된 사람으로 후에 당나라를 물리기 위하여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지어서 양법(禳法)을 처음 쓴 고승이다.

 명랑법사는 사람을 보내어 원효에게 경을 설하기를 청하였으나 그것도 거절하였다.

 명랑법사는 원효보다 훨씬 선배이지만 몸소 원효를 그 방으로 찾았다. 금색이 찬란한 가사를 멘 명랑법사와 쪽 모은 베 가사를 걸친 원효와는 이상한 대조였다. 두 사람은 종파가 다른 관계로 평거에는 서로 내왕이 적었던 것이다.

 “ 스님은 왜 설법을 거절하시오?”

 명랑법사는 수인사 끝에 이렇게 원효를 향하여 말하였다.

“ 소승이 어디 설할 법이 있소.”

원효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 대행대왕께서 재세시에 스님을 대단히 믿으셨고, 또 들으니 삼월 삼짇날에 어전에서 십지경을 설하셨다 하니 이번 칠칠재에도 스님이 법을 설하시는 것이 영가(靈駕)에 공덕이 될 것 같소.”

 이렇게 명랑법사는 간청하였으니 원효는 두어 번 고개를 흔들면서,

“ 대행대왕께서 생존하실 때에 법을 설하여서도 아무 이익도 못 드린 소승이 이제 다시 무슨 설법을 하겠습니까.”

 이렇게 대답하여서 거절한 것이었다.

 이번에 필시 원효법사의 설법이 있으리라 하던 일반인들은 의외로 생각하였다.

 원효는 대중 가운데 섞여 있었다.

 법사 끝에 대중이 불탑을 싸고돌며 창명염불을 할 때에도 원효는 대중 속에 섞여 있었다. 이것은 원효로서는 흔히 아니 하던 일이었다. 그래서 심상은 물론이어니와 다른 사람들도 수상하게 생각하였다.

그나 그 뿐인가. 원효는 소리를 높여서,

“ 나무아미타불.”을 불렀다. 심상은 더욱 수상하게 생각하였다.

요석공주도 원효의 뒤를 따르며 염불을 하였다.

원효는 거의 정신없는 사람 모양으로 소리 높여 염불을 하였다. 원체 우렁찬 소리라, 원효의 염불 소리는 누구나 다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요석공주는 행렬이 모퉁이를 돌 때마다 한 사람씩 지나 앞서서 원효의 바로 뒤에 왔다. 공주는 남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것도 잊어버렸다. 공주의 마음에는 열정이 솟아올랐다.

 승만왕이 돌아가시고, 이제 사십구일재까지도 거의 끝이 가까워서 닭 울 때가 되었다. 승만마마의 중음신(中陰身)은 벌써 가실데로 가셨을 것이다. 극락으로 가셨거나 천상이나 인간에게 몸을 바꾸어 태어나시기로 되어 어느 어머니의 배에 드셨거나, 어찌하였으나 벌써 승만마마이시던 기억은 버리셨을 것이다. 이제 요석공주는 승만마마를 모시는 아유다가 아니었다. 이제는 혼자서 원효를 마음대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팔 년 동안이나 눌러온 정열을 아무 꺼림 없이 쏟아 놓을 수가 있는 것이었다.

 요석공주는 원효의 뒤에 바싹 다가서서 그가 밟고 지나간 발자국을 밟았다. 하나도 아니 남기고 밟았다. 원효의 큰 발자국 속에 자기의 작은 발이 폭폭 파묻히는 것 같았다.

 공주는 어디까지나 원효를 따라가리라 하였다. 원효가 뿌리친다면 그 장삼자락에 매어달려서라도 따라가리라 하였다.

 공주의 귀에는 원효의 염불 소리뿐이었다. 그 우렁찬 소리뿐이었다. 다른 소리는 아무것도 아니 들렸다.

 언제 따라왔는지 공주의 동생 되는 지조공주(智照公主)가 요석공주의 뒤에 와서 살짝 요석공주의 소매를 끌었다. 지조공주는 아직도 열다섯 살밖에 아니 된 처녀였다.

 요석공주는 갑자기 정신이 들어서 일시 얼굴이 화끈함을 깨달아 한 걸음 멈칫하였으나 다시 걸음을 크게 옮겨놓아 한 걸음 더 멀리 앞선 원효를 따라잡았다.

 이 동안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나 쇠가 울어서 대중은 염불과 돌기를 그치고 차례차례 제자리에 돌아왔다. 요석공주는 지조공주와 함께 어머니 문명부인 곁으로 돌아왔다.

 왕후 문명부인은 요석을 한 번 노려보셨다.


 원효는 파재 후에 무애당으로 돌아왔다.

“ 스님 염불하시는 것을 오늘 처음 뵈었습니다.”

심상이 원효의 가사 장삼을 받아 걸며 이렇게 말하였다.

“ 대행마마를 위하여 공양할 것이 그것밖에 없었구나.”

원효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 스님 뒤에 요석공주가 따르신 것을 아셨습니까. ”

“ 알았다.”

원효는 한숨을 쉬었다.

“ 소승은 지조공주를 오늘 처음 뵈었습니다.”

심상은 또 이런 말을 하였다. 심상은 지조의 꽃같이 아름다운 양을 눈앞에 그려보았다.

“ 모두 번뇌무진이다.”

원효는 이런 말을 하였다.

“ 스님 마음에도 번뇌가 일어납니까.”

 심상은 걱정 들을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 모양으로 원효의 눈을 우러러보았다. 큼직한 원효의 눈에는 불길이 이는 것 같아서 심상은 고개를 숙였다. 그것이 원효의 눈에는 자기가 상상하였던 것과는 다른 빛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눈은 여전히 중마(衆魔)를 항복받고 만다는 보살의 눈이었다.

 요석의 아름다운 용모에 마음이 흔들리는 그러한 눈은 아니라고 심상은 생각하고 한껏 부끄러운 동시에 한껏 마음이 놓이기도 하였다.

 역시 원효는 의지할 만한 스승이라고 믿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원효의 마음은 심상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반드시 평정하지는 아니하였다.

 그 후부터 승만마마의 유언대로 원효의 치다꺼리는 요석궁께서 하였다. 요석궁 시녀가 맨 처음으로 가지고 온 것은 원효의 여름옷이었다. 스무 새 베라면 그때에는 가장 알아주는 귀물이었다.

 이 베는 공주의 옷감으로 위로서 하사하신 것이었다. 왕은 이 따님이 소년에 과부가 된 것을 불쌍히 여기셔서 좋은 옷감이나 맛진 음식이 있으면 반드시 공주를 생각하셨다.

 공주는 이 가는 베를 받을 때에 곧 그것으로 원효의 옷을 지을 것을 생각하였다.

 이제는 공주의 몸이라 손에 침선(針線-바늘과 실)을 잡을 일도 없었으나 요석공주는 손수 마르고 손수 지었다. 거룩한 이의 옷이라 하여 공주는 요석궁에도 후원에 있는 별당을 바느질방으로 정하고 목욕재계하고 방에는 향불을 피우고 가위나 바늘이나 실이나 일체를 새것으로 장만하여 한 땀 한 땀에 지극한 정성을 넣어서 한 솔기 한 솔기 호고 박고 감쳤다.

 때는 오월. 아리냇가의 느릅나무와 버드나무는 녹음이 우거지고 끊임없이 꾀꼬리가 울었다. 요석궁은 아리내의 느릅나무 다리를 건너서 서쪽 천변에 있었다.

 이 요석궁은 대대로 공주가 거처하던 곳이다. 시집가기 전 공주거나 과부 된 공주거나 이 요석궁에 거처하였다. 순교자 이차돈(異次頓)을 사모하여서 평생을 홀로 염불로 늙은 평양공주도 여기 있었다.

 이사부(異斯夫)가 우삿나라(于山國-지금 鬱陵島)를 멸하자 그 왕의 딸 별님(星主)이 이사부에게 잡혀와서도 잠시 요석궁에서 공주를 모셨고 사다함이 가야국을 멸하고 그 왕의 일족을 포로로 잡아왔을때 금관국 공주도 이 궁에 종으로 있었고 선덕여왕이 진평대왕(眞平大王)의 공주로 계실 때에도 이 궁에 계셨다.

 이러하기 때문에 요석궁은 외간 남자의 출입이 없는 곳이었다.

공주와 수인의 궁녀와 그리고는 지키는 군사 몇 사람과 하인들 뿐이었다.

 깨끗하고 조용한 곳이었다.

 뜰과 후원에는 화단이 있고 정원이 있었다. 백제 서울과 같이 아름다운 경치를 가지지 못한 신라의 수도 서라벌에서는 인공으로 아름다운 경치를 만들지 아니 할 수 없었다. 안압지(雁鴨池)도 그것이어니와 월성(月城)에서 달내(月川)에 일월교를 놓고 남산의 기슭을 빌어서 수목과 화초를 심고 석가산을 만들고 물을 끌어서 실개천과 못을 만들었다.

 민가에서도 그것을 만들게 되었다.

 

요석궁은 덕만공주(뒤에 선덕여왕이 되신)가 당나라 학문과 문화를 잘 아시고 또 불경도 잘 아시기 때문에 요석궁 앞뒤뜰에 힘써서 정원을 만드셨다. 아버님 되시는 진평대왕도 이 외따님이 하시는 일이면 무엇이나 뜻대로 하게 하셨고, 오십사 년이나 임금의 자리에 계신 진평왕은 가끔 따님이 계신 요석궁에 납시어서 공주가 정성들여 만들어 놓은 화원을 보시기를 즐겨하셨다.

 첫째는 아리내 물을 끌어들여서 뜰에다가 팔공덕수(八功德水)라는 못을 만든 것이다. 팔공덕수는 아미타경에 있는 극락정토의 못으로서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고 지극히 맑아서 금모래 금자갈 위에 흐른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못가에 꽃피는 여러 가지 나무와 풀을 심고 남산의 옥돌이며 동해의 바닷모래와 돌로 모양을 내었다.

 둘째는 모란화다.

 당나라에서 모란 씨와 모란 그림이 왔을 때에 공주는 그 그림의 꽃에 벌과 나비가 없는 것을 보시고 이 꽃에는 필시 향기가 없으리라 하여 부왕과 여러 신하들을 놀라게 한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공주는 요석궁에 모란을 가꾸어 화단을 만드셨다.

 덕만공주는 왕이 되셔서 요석궁을 떠나셨다. 이 어른이 십육년 왕으로 계시다가 돌아가시고, 승만마마가 왕이 되셔서 또 팔년 만에 돌아가셨다. 그래서 이십삼 년 동안이나 요석궁이 비어있다가 이제 새 주인 아유다 공주를 만난 것이었다.

 주인 없는 요석궁은 퇴락도 하고 거칠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대신 나무는 자라고 바윗돌에는 이끼가 앉고 팔공덕수나 석가산이나 사람이 만들어 놓은 흔적이 스러지고 천연스럽게 되었다.

 모란도 이제는 삼십여 년이나 넘어서 나무가 늙어 더욱 운치를 보였다. 이상한 것은 당나라에서 향기 없던 모란이 신라에 와서는 향기를 발하는 일이었다. 요석공주가 홀로 원효대사의 베옷을 짓고 있노라면 모란 향기가 바람결에 불려서 들어왔다. 요석공주가 이 집에 주인이 된 지도 벌써 일 년이 넘었다. 공주는 이뜰에 피는 모란을 두 번째 보았다.

 정원도 깨끗이 정리되고 팔공덕수도 새로 자갈과 모래를 깔았다. 그러나 언덕에 나는 풀은 건드리지 말라 하였고 거기서 노는 개구리도 건드리지 말라고 하였다.

 ‘ 더는 못해도.’

하고 요석공주는 생각하였다.

‘ 이 요석궁 안에서나 짐승이 제 마음대로 살게 하자.’

이러한 속에 요석공주가 손수 지은 여름옷을 마야라는 시녀를 시켜서 분황사의 원효에게 보낸 것이었다.

시녀는 몸종을 데리고 갔다.

“ 스님. 요석궁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원효가 책상에 대하여 앉아서 남산을 바라보고 있을 때에 심상이 이렇게 아뢰었다.

“ 요석궁에서?”

원효는 명상의 줄을 끊고 심상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 예. 요석공주의 글월과 물건을 가지고 시녀가 왔습니다.”

하고 심상은 일봉 서간을 원효의 앞에 놓았다.

원효는 서간을 보고 잠시 말이 없다가 마침내 그것을 들어서 떼었다.

백제 종이에,

“ 목단일타 포의일습(牧丹一朶 布衣一襲 모란 한 가지 포의 한 벌).”

이라 쓰고 그 옆에 좀더 작은 글씨로,

“ 오월 단양일제자 요석공주 합장근정(五月 端陽日弟子 遙昔公主 合掌謹呈- 단양절에 제자 요석공주가 두 손 모아 삼가 바칩니다).”

이라 하였을 뿐이다. 그밖에는 아무 말도 없다.

“ 음 ”

하고 원효는 고개를 끄덕하였다.

 심상은 시녀를 안내하였다. 시녀는 모란을 수놓은 보를 들고 몸종은 고구려 화병에 꽂은 모란을 들고 원효의 방으로 들어왔다.

 시녀는 원효의 앞에 오른편 무릎을 꿇고 앉아 먼저 옷보를 원효의 앞에 놓고 그리고는 다시 일어나서 오체투지(五體投地)의 예를 하였다. 불전에서 하는 예와 꼭같으니 스승에게 대한 예다. 종도 상전의 뒤에서 그와 같은 예를 하였다. 시녀는 붉은 옷을 입고 종은 푸른 옷을 입었다.

 원효는 앉아서 까닭없이 이 절을 받았다. 답례를 아니 하는 것은 절하는 자의 공덕을 감손하지 말자는 뜻이다.

 “ 이 꽃은 요석궁 화단에 핀 꽃 중에 가장 아름다운 꽃이옵고, 이 옷은 공주마마 손수 말라 지으신 옷이오. 날이 차차 더워 오니 노스님 여름옷으로 올립니다, 여쭈라 하옵신 공주마마 분부받고 왔소.”

 시녀는 이렇게 궁성 말로 원효에게 전갈하였다.

 원효는 먼저 모란꽃을 머리보다 높이 들어 책상 위에 놓고 다음에 옷보를 들었다가 다시 놓으며, “ 근념하여 주시니 황송하오.” 하였다.

 시녀는 원효가 무슨 묻는 말이 있을까 하였으나 아무 말도 없고, 또 답장이 있을까 하였으나 아무 처분도 없었다. 원효는 모든 것을 잊어버린 듯 다시 지붕 위로 보이는 남산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시녀는 기다리다 못하여, “ 이 몸 물러가오.” 하고 일어나 절하였다.

 원효는 시녀의 절을 못 본 체하였다.

역시 시녀가 삼보(三寶)에 절하는 공덕을 아니 깨뜨리려 함이었다.

 요석궁 시녀가 물러간 뒤에도 원효는 날이 저물도록 남산을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모란꽃과 옷보는 그냥 그 자리에 있었다.

“ 스님. 이 옷을 어찌하시렵니까.”

심상은 마침내 원효에게 물었다.

“ 무얼?”

 원효는 남산을 바라보는 채 대답하였다.

“ 이 옷 말씀이오. 모처럼 요석공주께서 지어 보내신 것이니 갈아입으시지요.”

“ 네나 입어라.”

“ 그래도 공주마마께서 스님 위해 손수 지으신 것인데.”

하며 심상은 진덕여왕 칠칠재날 밤에 요석공주가 원효의 뒤를 따르던 양을 생각하였다.

“ 내 옷은 아직 성해. 네 옷이 떨어지고 더러워졌으니 네나 입어라.”

“ 그러면 공주마마 섭섭하게 생각하시지요. 스님께 드리려고 지으신 옷을.”

하고 심상은 보를 끌렀다. 가사 한 벌, 장삼 한 벌, 고의 한 벌, 적삼 한 벌, 버선 한 켤레, 띠 하나 고깔 하나가 들어 있었다. 스무새 베는 비단보다도 고왔다.

“ 스님. 이 한 땀 한 땀에 가득 찬 정성을 모른체 하십니까. 스님, 이것을 좀 보십시오.”

하고 심상은 옷을 들어서 원효의 앞으로 내어 밀었다.

 코를 받치는 베 냄새, 향내, 원효는 그 누르스름한 빛과 희끗희끗한 실밥을 보았다. 그것을 보면 더욱 베 냄새, 모란 냄새, 무슨 향내가 코를 찔렀다. 그것은 원효에게 무슨 큰 불길한 것을 예고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불길한 것을 도저히 원효의 힘으로는 저항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 옷의 실밥마다에 요석공주의 손이 보였다. 몸이 보였다.

‘ 이것은 분명히 마경(魔境)이다!’

 원효는 속으로 이렇게 외쳤다.

‘ 번뇌다, 번뇌다. 나는 이것을 이겨야 한다. 그런데 내게는 이것을 이길 힘이 없는 것 같다.’

 원효는 아랫배에 힘을 주었다.

“ 어서 네가 갈아입으라니까.”

 원효는 어성을 높이며 심상을 노려보았다.

“ 이것을 정말 소승이 입습니까?”

 심상은 눈을 크게 떴다.

“ 글쎄 입으라니까 그러네. 금방 갈아입어라.”

 원효는 더욱 엄격한 소리로 호령하였다.

 심상은 황송하여서 절하고 옷보를 들고 다음 방으로 물러나왔다.

 심상은 원효의 말대로 요석공주가 원효에게 지어 보낸 옷을 갈아입었다. 장삼, 가사까지 걸치고 다시 원효의 앞으로 왔다.

“ 스님. 소승이 이렇게 입었습니다.”

 심상은 남산을 바라보는 원효의 등뒤에 와 서서 이렇게 말하였다.

“ 응, 맞는구나.”

 원효는 이렇게 말하고 빙그레 웃었다.

“ 이 옷을 갈아입었으니 어찌하오리까.”

 심상이 걱정인 듯이 물었다.

“ 그 옷이 누가 지은 옷이냐?”

 원효는 이렇게 물었다.

“ 요석공주마마가 스님을 위해서 손수 지으신 옷이오.”

 심상은 이렇게 대답했다.

 “ 어떤 중생이 어떤 중생을 위하여 지은 옷으로 알고 입어라. ”

“ 소승은 그렇게 알고 입을 수가 없습니다.”

“ 어찌해서?”

“ 높으시고 젊으신, 아름다우신 공주마마께서 손수 지으신 옷이라는 것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이 옷을 입고 나니 어째 황송한것도 같고 꿈속 같기도 하옵니다. 이것이 만일 소승을 위하여서 지으신 것이라 하오면 소승은 천겁에 지옥고를 받더라도 한이 없을 것 같습니다.”

 심상은 심히 흥분된 어조였다. 소리가 떨렸다.

 심상이 흥분하는 양을 보고 원효는 빙그레 웃었다.

 “너 중 고만두고 요석궁 부마가 되라면 어찌할 테냐.”

원효는 이렇게 물었다.

“ 소승은 나라님의 스승이 될지언정, 요석궁 부마는 아니 될까 합니다.”

심상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 그래, 너는 나라님의 스승이 될 것이다.”

 원효는 이렇게 말하였거니와 심상은 이 말대로 나중에 나라(?良)에 가서 천황 앞에서 화엄경을 설하여서 일본 화엄종의 초조(華嚴宗初祖)가 되었다.

“ 너 새옷도 입었으니 문수사(文殊寺)에 다녀오너라.”

원효는 돌연히 이런 분부를 하였다.

“ 문수사엘 댕겨옵니까.”

심상은 이상한 듯이 물었다.

“ 그래, 문수사에 내가 있을 처소를 하나 정하고 오너라.”

“ 노스님께서 문수사에 가시렵니까.”

“ 그렇다. ”

“ 여기는 어찌 하시고?”

“ 여기는 누군가 다른 사람이 와서 있겠지.”

심상은 몇 시간 걸리지 아니하여 문수사에 다녀왔다.

문수사는 남산에 있는 작은 암자였다.

 

 원효는 보던 책과 지필묵도 다 두고 입던 옷 한 벌과 바리때를 바랑에 넣어 지고, 그날 즉시 분황사를 떠났다.

“ 스님. 십 년이나 계시던 분황사를 떠나시니, 섭섭하지 아니하십니까.”

“ 십 년 살던 절을 떠나는 것이 섭섭하면, 평생 살던 몸을 떠날때에는 어찌하게.”

“ 하하하하.”

  심상은 가슴이 툭 트이는 듯이 웃었다. 자기가 보던 것, 만지던 것, 가꾸던 나무와 꽃들, 심상은 이것을 다 애착하는 마음 없이 떠날 수가 있었다.

  심상은 꾀꼬리 빛깔 같은 베옷을 입고 원효는 여러 물 빤 굵은 베옷을 입은 것이 눈에 띄어서 심상은 또 웃었다.

“ 왜 웃느냐. ”

원효가 물었다.

“ 소승이 좋은 옷을 입고 노스님이 낡은 옷을 입으시니 거꾸로 되었습니다.”

  심상은 또 웃었다.

  두 사람이 남으로 걸어서 계림(鷄林)을 지날 때,

“ 핫핫핫핫 흐앗, 흐앗, 흐앗핫.”

하고 웃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 대안법사(大安法師)십니다.”

하는 심상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누더기를 입고 껍질 있는 지팡이 - 지팡이라기보다는 작대기를 짚고 한 손에는 커다란 방울을든 노인이 활개를 훨훨 치며 걸어왔다. 떨어진 누더기 소매가 너덜너덜 흔들렸다. 나뭇단을 묶었던 듯한 새끼로 띠를 하였다. 머리는 대머리가 되어서 가장자리에만 허연 머리카락이 두어 치나 자라서 너풀너풀하였다. 수염은 자박수염이었다. 이는 빠져 있었다.

  노승은 원효 일행에 가까이 오자 이편에서 인사를 하기 전에 먼저 딸랑딸랑 방울을 흔들면서,

“ 대안 대안(大安大安), 어허 대안 대안.”

하고 합장하여서 흔들었다. 그 손은 크고 손가락은 굵었다. 발은 벗었다. 눈썹이 뿔과 같이 길다랗게 뻗치고 커다란 귀에는 허연 귀털이 쭉쭉 뻗었다. 움쑥 들어간 눈은 유난히 빛났다.

“ 스님. 안녕하십니까. 오래간만입니다.”

원효는 공손하게 합장하였다.

심상도 합장하고 허리를 굽혔다.

“ 어, 원효스님. 대안 대안. 모두 대안 대안.”

대안대사는 대단히 기쁜 듯이 얼굴 전체가 웃음이 된다.

“ 당나라 군사가 고구려를 쳐들어왔다니 천하가 대안은 못 됩니다.”

원효는 이런 말을 하였다. 당태종이 영주도독 정명진(營州都督程名振) 좌우위중랑장 소정방(左右衛中郞將蘇定方)을 보내어서 고구려를 침범한 것이 금년 삼월부터였다.

“ 허, 싸움이야 언제나 없나? 대안 대안. 핫핫핫핫.”

대안대사는 콧물이 나오도록 웃었다.

“ 그런데 스님은 어디를 가시오.”

대안이 웃음을 그치고 원효에게 물었다. 웃음을 그친 때에는 엄연한 노대사였다.

“ 소승은 문수사로 갑니다.”

“ 문수사?”

“ 네.”

“ 문수사에는 귀신 쫓는 중들이 있는 걸.”

대안은 이런 말을 한다.

귀신 쫓는 중이란 밀본법사였다. 밀본법사는 선덕왕의 오랜 병을 약사경(藥師經)을 읽어서 고쳤다는 이다. 그때 법사의 육환철장(六環鐵杖)이 왕의 침전으로 날아 들어가서 늙은 여우 한 마리와 흥륜사(興輪寺) 중 법창(法暢)을 꿰어 뜰로 내리쳤다는 것이다. 이렇게 도술이 높다는 소문이 났기 때문에 그러한 도술을 배우려는 중과 거사들이 많이 그를 따르는 것이었다.

“ 귀신 쫓는 중이 있기로 어떠합니까.”

원효는 웃었다.

“ 에이, 하늘 귀신 인간 귀신이 들끓어서 조용하지를 못하지, 하하하하.”

대안은 이런 말을 하였다.

“ 스님, 오늘은 술을 안 잡수셨습니까.”

심상이 이렇게 대안에게 물었다.

“ 응, 지금 일어나 나오는 길이야. 너 새옷 입었구나. 그 옷 나허구 바꾸자.”

대안은 방울을 지팡이 든 손으로 옮겨 들고 심상의 옷을 손으로 만졌다.

“ 스님도 이런 새옷을 보시면 탐심이 나십니까.”

심상은 이렇게 묻고 웃었다.

“ 그래. 이 옷을 갖다가 잡히면 열흘은 술을 먹겠다.”

대안은 시치미를 떼고 이런 소리를 하였다.

“ 그럼ㄹ 바꾸어 드리오리까.”

심상은 바랑을 벗었다.

 

 “ 어, 대안 대안. 나무아미타불. 그러기로 백주 대로상에서야 옷을 벗을 수가 있나. 우리 집으로 가자. 원효스님 우리 집으로 갑시다. 가서 차나 한잔 자시고 이갸기나 하다 가시오.”

 대안은 앞을 서서 터덜거리고 아까 오던 길을 도로 걸었다. 원효와 심상은 뒤를 따랐다. 계림 늙은 나무에서 석양의 새들이 울었다. 까치가 짖고 까마귀가 울었다. 대안이 지팡이를 옮길 때마다 큰 방울이 떨렁떨렁 울렸다. 대안은 바라를 들고 다니면서 해가 낮이 되면 이 집 저 집 문전에서,

“ 에에, 대안 대안이오. 대안. ”

하며 바라를 울렸다. 그러면 서라벌 백성들은 대안대사가 온 줄을 알고 밥을 내다주었다. 대안은 한 끼 먹을 밥만 얻으면 다른 집에는 아니 갔고, 일곱 집을 돌아다녀도 밥이 아니 생기면 비인 바리때를 들고 그냥 돌아왔다.

 대안이라는 중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궁중에까지도 대안의 이름은 들렸다. 그러나 대안이 어떠한 사람인지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대안대사를 한 우스꽝스러운 늙은 거지로 알았고, 젊은이들도 좋은 놀림감으로 알았으며, 늙은이들은 똑 알맞은 심심파적거리로 알아서 어디를 가나 대안대사는 대접은 못 받아도 환영은 받았다. 그러나 대안대사가 경론에도 깊은 학자요, 도와 행이 높은 도승인 것을 아는 이는 적었다.

 그렇지만 대안을 대하는 사람은 누구나 마음이 기뻐지고 부드러워졌다. 아무리 근심 걱정이 있는 사람이라도 대안을 보면 그것을 다 잊고 웃었다.대안은 가끔 동냥하여 얻은 것을 가지고 술집에 들르거니와 주막에서 술취한 사람들이 왁자지껄하고 싸우다가도 대안의  바라 소리나 방울 소리가 들리면 벌써 싸움을 그치고 대안이 쑥 들어서며,

“ 다들 평안하시오. 대안이야 대안. ”

하면 모두 경사나 난 듯이 웃었다. 그리고 싸움하던 것은 다 잊어 버리고 대안에게 술을 권하였다. 대안이 거나하게 술이 취하여서 바라를 울리고 나가면 사람들은 또 한번 유쾌하게 웃었다. 그러면 마음속에 있던 성난 것 미운 것 불평한 것이 모두 사라지는 것 같았다.

 대안은 원효와 심상을 끌고 길도 없는 수풀 속으로 남산 서쪽 기슭을 올랐다.

“ 스님 계신 데가 대관절 어딥니까.”

원효는 물었다.

“ 하하하. 내 여기 있지 않소?”

원효는 한 방망이 맞은 듯함을 느꼈다.

“ 아니, 유숙하시는 데 말씀이오.”

대안은 방울 든 손으로 제 가슴을 두어 번 두들겼다.

“ 밤에 그 몸을 누이는 곳.”

원효는 이렇게 응하였다.

“ 하하하하. 흥륜사 곁에 내가 겨울을 난 움이 있는데, 하루는 돌아오니까 다른 거지가 와 있단 말야. 하하하하. 그래 그것은 그 사람을 주고, 알영우물[閼英井]위에 있는 굴에서 얼마를 지냈는데 굴이 썩 좋단 말야. 낮에는 볕이 잘 들고, 밤에는 달이 잘 들고. 이만하면 평생 살 만도 하다 했더니, 어젯저녁에 가 보니까 새끼 달린 너구리가 와 있더군. 그래서 그 굴은 너구리를 주고, 갑자기 먼 데도 갈 수가 없어서 바로 이 위에 조그만 굴이 있길래 거기서 어제 밤새도록, 오늘도 낮이 기울도록 잤소. 하핫하핫.”

 대안은 제 집 길을 잊은 모양이어서, 이리로 두어 걸음 저리로 두어 걸음 해매는 모양이었다. 그러다가 어떤 바위 앞에 우뚝 서며,

“ 아, 여기 좋은 집이 있지 아니한가. 자아 여기 앉읍시다.”

하고 무슨 좋은 것이나 찾은 듯이 싱글벙글하였다. 바위가 앞으로 푹 숙어서 그 밑에서 두어 사람은 비를 피할 만 하였다.

“ 자, 여기 앉으시오.”

대안이 먼저 앉았다. 원효도 그 곁에 앉았다.

심상은 새옷이 더럽혀질 것이 염려되어 옆에 서 있었다.

“ 허, 사람은 어디 가고 베옷 한 벌이 거기 있군. 하핫하핫.”

대안은 심상을 보고 웃었다. 심상은 대단히 무색하여서 앉을자리를 찾아 엉거주춤하였다.

“ 허, 새옷에 흙이 묻지 않나, 이 사람아.”

대안은 성내는 모양을 보였다.

심상은 앉지도 서지도 못하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 에잉.”

원효는 심상을 노려보았다.

심상은 이 옷을 지어 보낸 요석공주를 원망하고 싶었다.

“ 스님이면 이런 경우에 어찌하시겠습니까. ”

심상은 대안에게 대어들었다.

“ 대안 대안. ” 하고 대안은 웃었다.

원효도 심상도 웃었다.

 

  이야기하기에 말이 저물었다. 대안대사는 끊임없이 두 사람을 웃길 이야기를 하였다. 그것은 모두 실없는 이야기 같으나, 실없으면서 모두 실이 있었다. 대안은 여항(閭巷)으로 시정(市井)으로 아니 다니는 데가 없기 때문에, 인정세태에 관한 이야기가 수없이 있었다. 가령 내외싸움이라든지, 욕심꾸러기의 실패담이라든지, 아이들의 장난과 싸움이라든지, 그러한 이야기였다. 더구나 서라벌에 장난꾼 아이치고 대안이 모르는 아이는 없었다. 대안은 아이들이 모여서 노는 곳을 보면 그대로 지나가지를 못하였다. 그는 반드시 한몫 끼어들었다. 바라를 치거나, 방울을 흔들면서 누더기 소매를 펄렁거리고 덩실덩실 춤을 추면 아이들은 더할나위 없이 좋아하였고 어른들까지도 갈 길을 잊고 서서 구경을 하였다.

 이러다가 해가 저물어서 아이들이 다 부모에게 불려서 밥먹으러 집으로 돌아간 뒤에야 대안은 어슬렁어슬렁 남산굴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이러기를 수십 년 하였으니, 그와 같이 놀던 아이들이 어른이 되고 그들의 아들들하고 또 놀게 된 것이었다.

 대안대사는 중이면서도 좀체로 절에는 안 들어갔다. 대안대사는 젊은 시절에 벌써 이름이 높았었다. 그는 원광(圓光)의 문인으로 당나라에도 다녀왔고 선덕여왕 초년에는 궁중에서도 설법을 하여서 여왕의 존숭하심을 받았다.

 대안이 원광법사에게 가르침을 받은 것은 수(隨)시대에 오(吳)의 호구산(虎丘山)에서였다. 그때에 원광법사는 신라 중으로 중국에서 이름이 높았었다. 원광은 호구산(지금 蘇州에 있음)에서 반야경(般若經)을 설함으로 천하의 신망을 얻은 때였다. 거기서 대안은 원광에게서 반야경을 배웠고, 지공(誌公) 혜가(慧可)도 만나 달마(達磨)의 설법도 들었다.

 대안은 또 안홍법사(安弘法師)에게서 진언밀교도 배웠다. 안홍법사는 당나라 임금의 존경을 받은 이로서 북천축오장국(北天竺烏蔣國)중 비마라진체(毘摩羅眞諦) 농가타(農伽陀)와 마두라(摩豆羅-지금 자바의 수라바야 앞에 있는 섬)나라 불타승 가야(佛陀僧伽倻)를 데리고 신라로 돌아와서 황룡사에 있어서 전단향화성광묘녀경(栓檀香火星光妙女經)을 번역한 사람이다. 안홍법사는 물결 위에 자리를 깔고 서방으로 향하여 갔다는 말을 남길만큼 도술이 높아서 공중과 물을 평지와 같이 다녔다고도 전한다.

 대안도 이러한 대법사들의 가르침을 받고 또 촉망함을 받았으나 그는 일조에 종적을 감추었다.

 세상에서는 그의 본명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오직 동냥중 대안이라고 아는 것이었다.

 

   원효도 대안이 비범한 인물인 줄은 짐작하나 그가 원광법사의 고제 원공(圓空)인 줄은 몰랐다. 그래서 원광의 법사(法嗣)로 원안(圓安)은 전하나 원공은 전하는 것이 없다. 원공은 세상에서 잊혀져서 대안이 된 것이었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게 되자 원효는,

 “ 소승은 물러가겠습니다.”
하고 대안에게 절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만 있으오. 화엄종주(華嚴宗主) 원효대사가 내 집에 오셨다가 저녁도 안 자시고 가실 법이 있소.”

하고 대안이 원효를 붙들었다.

  원효를 화엄종주라고 대안이 처음 부른 것이다. 이것이 예언이었다.

 “돌아보아야 아무것도 먹을 것이 없는데 무얼 주시렵니까.”

  원효는 뿌시시 일어나는 대안을 보았다.

  “원효스님일랑 잠깐 여기서 기다리시오. 그러고 심상스님은 나하고 저녁 가지러 갑시다.”

  대안은 심상을 데리고 골짜기로 내려갔다.

  원효는 혼자 앉아 있었다. 법써 오월 초승달이 서쪽에 얼굴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낙조의 불그스레한 빛이 하늘과 산에 있고 골짜기에는 자주빛 어스름이 들기 시작하였다.

  다람쥐 두 마리가 달려오다가 원효를 보고 멈칫 서더니 약간 방향을 바꾸어서 바윗등으로 기어올라갔다. 풀 냄새가 새삼스럽게 코에 들어왔다.

  서라벌의 수없는 절에서 저녁 쇠북이 은은히 울렸다.

  원효는 이 깊숙하고 고요한 속에서 자기의 하잘것없음을 느꼈다.

  “일체무애인 일도출생사(一切無碍人 一道出生死, 모든 것에 걸림이 없는 사람은 단번에 생사를 벗어나리라).”

  원효는 자기가 아직 생사에서 떠나지 못함을 느꼈다. 대안이야말로 무애가 아닌가 생각하였다.

  ‘아는 것과 되는 것.’

  원효는 이 두 가지에 큰 차별이 있고 큰 계급이 있음을 깨달았다. 원효는 화엄경을 잘 안다. 그러나 화엄경이 되어 버리지 못하였음을 느꼈다. 이렇게 생각하면 원효는 일종의 슬픔을 느꼈다.

  ‘아직 멀었다. 덜 되었다.’

  원효는 또 한번 한숨을 쉬었다. 스스로 제불보살의 호념(護念)하심을 받고 인천(人天, 사람과 하늘에 사는 신들)의 공양을 받을 만하다고 믿던 원효의 믿음이 흔들림을 느꼈다.

  만일 대안법사가 원효에게 분황사를 떠나는 이유를 물으면 무엇이라고 대답할까, 하고 원효는 아까부터 마음을 졸였다.

  “요석공주가 무서워서 피난가오.”

  이렇게 대답하지 아니 하면 아니 될 지경이었다. 그러나 땅을 바꿈으로 요석공주에 대한 애착을 뗄 수가 있을까.

  “관신여실상 일체개적멸 이아비아착 시피정묘업(觀身如實相 一切皆寂滅 離我非我着 是彼淨妙業, 몸의 실상을 바로 보시고 모두 사라져 없어져 나를 떠나 나에 대한 집착이 없으시니 이와 같은 업을 응당 지을지어다).”

  원효는 화엄경의 여래광명각품 문수사리게(如來光明覺品 文殊師利偈)를 생각하였다. 있다고 보는 이 몸이 기실은 허깨비요, 그 본성은 새로 생기는 것도 아니요, 없어지는 것도 아니라 함을 이치로는 알면서도 그 헛것을 참으로 있는 것으로 보아서 거기 착(着)하는 범부심(凡夫心)을 아직 못 떠난 듯한 것이 원효를 괴롭게 하였다.

  원효는 생각을 계속한다.

  일향신여래 기심불퇴전 막사염제불 시피정묘업(一向身如來 其心不退轉 莫捨念諸佛 是彼淨妙業, 마음에 항상 부처님을 믿어 그 마음 물러나지 않고 모든 여래를 가까이 하시니 이와같은 업을 응당 지을지어다).“

  여래를 믿는 마음을 변하지 말고 항상 부처님네를 염하라 ㅡ 원효는 이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자기는 아직도 되어가는 사람이요, 되기 시작한 사람이다. 된 사람은 아니다. 이따금 다 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마(魔)다.

  “이제인천중 상행대자비 구호제군생 시피정묘업(離諸人天衆 常行大慈悲 救護諸群生 是彼淨妙業, 큰 자비심을 일으키사 모든 중생들을 구호하여 길이 인간과 천상의 무리에서 벗어나게 하시니 이와같은 업을 응당 지을지어다).”

  그렇다. 나 한 몸의 고락을 떠나서 한 걸음 한 걸음 하루하루 자비심을 가지고 자비행을 하면서 삼아승지겁(三阿僧祗劫)에 오십삼위(五十三位)를 오르는 것이, 부처님의 경계는 말할 수 없고 보일 수 없고 분별로 깨달아 알 수 없는 것이다. 팔만대장경을 다 따로 훤히 왼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부처님의 경계를 아는 것이 아니다.

금강장보살의 말씀과 같이 우리 지식으로 부처님의 경계를 해석하려 하는 것은 허공에 그림을 그리기와 바람을 잡는 것과 같은 것이다.

 

   “ 발원행자비 점차구제지(發願行慈悲 漸次具諸地)”

   내가 부처가 되리라, 중생을 건지리라 하는 대원을 발하고 한 가지 한 가지 자비를 행하는 동안

조금씩 조금씩 부처님의 경계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하여서 마침내,

  “ 무량불토진 일진위일불 실능지기수 시피정묘업

    無量佛土塵 一塵爲一佛 悉能知其數 是彼淨妙業.

   (끝없는 불토의 티끌등 중 한 티끌을 부처 삼아 그 수를 능히 아시니

    이와 같은 업을 응당 지을지어다.)”의 경계에 들어갈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자 원효는 비로소 위로가 되고 또 새로운 자신이 생겼다.

아직도 자라가는 어린 몸이라고 생각할 때 현재의 불완전이 슬픔이 되지 아니하고

도리어 영원한 장래의 희망이 되는 것이었다. 동시에 삼아승지겁이 곧 일찰나요,

일찰나가 곧 삼아승지겁이라는 것도 원효는 잊지 아니하였고, 적멸한 본성에 있어서는

불이니 보살이니 중생이니 하는 것이 본래 없다는 것도 잊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무차별, 평등 중에 또 불, 보살, 중생이 분명히 있어서 엄연한 차별세계를

이루는 것도 잊지 아니하였다.

  원효가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대안이 손에 무엇을 들고 돌아오고 심상도 뒤를 따랐다.

  “ 스님 시장하시겠소.”

  대안은 바리때를 원효의 앞에 놓았다. 그 속에 물에 깨끗이 씻은 칡(葛) 몇 뿌리가 있었다.

  심상은 물을 떠가지고 돌아왔다.

  “ 자, 잡수시오. 요새 남산에 산도야지가 몇 마리 들어와서 칡뿌리도 흔치가 않아. 하핫하핫.”

  대안은 이렇게 말하고 원효에게 칡뿌리를 권하였다.

  “ 스님은 안 잡수십니까.”

  원효는 대안에게 권하였다.

  “ 나는 늙은이라 하루 한 때만 무엇을 먹으면 족하오마는 손님만 잡수시라기가 무엇하니,

    나도 먹으리다. 자 이것을 드시오. 이것이 굵직한 게 연할 것 같소. 자 심상스님도 드오.”

  대안은 이렇게 원효와 심상에게 권하고 자기도 하나 들어서 입에 물었다.

  “ 이가 없어서, 잇몸으로만 씹으려니 잘 안 씹히지요.”

  대안은 이렇게 말하면서 칡뿌리를 물고 입을 우물거렸다.

  원효는 칡뿌리를 씹었다. 달콤한 물이 나왔다.

원효도 화랑으로 산으로 다닐 때에 칡뿌리도 캐어 먹고 도토리와 잣도 주워 먹고 송기도 벗겨 먹으며

 며칠씩 지낸 일이 있었다.

 화랑도들은 십오륙세가 되면 어깨에 활과 전통, 허리에 칼 하나를 차고 집을 떠났다.

적어도 일년 사철을 산에 들어 수행을 아니하고는 화랑이 못 되는 것이었다.

원효는 태백산, 개골산을 두루 돌아 고구려의 삼각산, 낭림산까지 돌아왔다.

그러는 동안에 담력을 기르고 산신께 기원하여서 큰 뜻을 맹세하는 것이었다.

춘추며 유신이 백제와 고구려를 쳐서 삼국을 통일할 것을 맹세하고 기원한 것도 함박[太白山]에서

 백일기도를 할 때였다.

그들의 나이도 다 십오륙 세였다.

 산에 드는 화랑도들은 곰을 만나면 곰과 싸우고 범을 만나면 범을 잡고야 말았다.

바위 밑에서 자고 시냇물에 몸을 씻고 산신당에서 기동하였다.

그때에는 산에 아직 절이 많지 아니하였다. 오직 삼신(三神)을 위하는 당이 있을 뿐이었다.

  칡뿌리를 먹고 냉수를 마시고 별을 바라보고 밤새 소리를 들으며 이야기를 하다가

세 사람은 바위 밑에 누웠다.

원효는 심상이 구해 주는 돌로 베개를 삼았으나 대안은 제 팔굽이를 베고 오른편 옆구리를

땅에 붙이고 누워서 곧 잠이 들었다. 지팡이와 바랑이 머리맡에 있었다.

  오월 일기가 낮에는 땀이 날 만해도 밤에는 선선하였다.

  맨 땅 바닥은 더욱 찼다.

  원효는 얼른 잠이 들지 아니 하였다.

  하늘에는 별이 총총하였다. 쑥덕새, 부엉새가 울었다.

  원효는 십여 년 동안 너무 호강을 하였다고 생각하였다.

  의상과 같이 당나라에 갈 무렵에는 원효도 두타행(頭陀行)을 하였다.

  무덤 사이에서 자기도 하였다.

사람들이 버린 헝겊을 주워다가 개흙을 묻혀 물을 들여서 손수 옷을 지어 입기도 하였고 절에서

중들의 개수통 찌끼를 끓여서 먹기도 하였다.

그러나 최근 십여 년래로는 분황사 무애당에서 위에서 내리시는 양식과 의복으로 편안한 생활을

하였다.

그것이 버릇이 되어 한뎃잠이 잘 들지 아니하는 것이 원효는 부끄러웠다.

 

    원효는 지금부터 십 년 전 의상과 함께 당나라에 가던 일을 생각하였다.

그때 원효는 스물세 살, 의상은 스무 살이었다.

  두 사람은 양주(楊洲)까지 배를 타고 가서 낙양을 향하여 걸었다.

  낮에는 민가에서 밥을 얻어먹고, 밤이면 무덤 속에서 잤다.

그 쪽 무덤은 박석으로 방을 만들고 그 속에 시체를 관에 넣어 놓는다.

그래서 그 속에 사람이 들어가 누울 수가 있었다.

길을 가다가 날이 저물면 백양목(白楊木)이 둘러선 묘지를 찾아 들어가는 것이었다.

  밤에 무덤 속에서 자노라면 귀신의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고 꿈자리도 사나웠다.

고총이면 자기가 편안하나 새 무덤이면 더욱 무서웠다.

  양자강 벌판에는 산이 없는 곳이 많아서 어떤 도읍에는 외딴 곳에 집을 지어 놓고

그 속에 관을 수없이 갖다 놓는다.

이것이 공동묘지다.

  하루는 원효와 의상이 밤에 비를 피하여서 이 속에 들어가 잤다.

 거기는 새로 들여놓은 관이 있고 새로운 지전(紙錢)이 널려 있고,

 새로운 모란등에 불이 켜 있고 관 앞에는 음식을 차려놓은 대로 있었다.

지방(紙榜)을 보니 여자의 주검이었다.

  원효와 의상은 관 앞에 차려놓은 음식을 먹었다.

 시장하였던 것이다.

 관에서는 바람결에 송장 썩는 냄새가 풍겼다.

  음식을 먹고 나니 물이 먹고 싶으나 물이 없었다.

원효는 공기를 들고 밖으로 나섰다.

부실부실 여름비는 내리는데 캄캄한 밤이라 지척을 분별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발에 걸치는 것은 고총들뿐이었다.

  원효는 가까스로 물 고인 웅덩이를 찾아서 물 한 그릇을 떠 먹고,

또 한 그릇을 떠 들고 시체들 있는 방으로 돌아왔다.

  의상도 물을 먹었다.

  그리고는 관을 침대를 삼아서 드러누웠다.

  가물가물하던 모란등에 초도 꺼지고 캄캄하게 되었다.

  원효는 꿈에 그 새로운 관 속에 든 여자가 나와서,

  “ 나 먹을 음식은 왜 먹었어. 먹었거든 나하고 같이 우리 집으로 가. ”

하고 원효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원효는 무서워하는 동안에 꿈을 깨었다.

  아침에 그 여자의 관 앞에서 반야심경을 읽어 주고

  그 혼이 삼악도를 벗어나서 무상보리(無上菩提)를 이루기를 빌고 그 죽은 사람들이 처소에서 나왔다.

  원효는 어젯밤에 달게 먹은 물맛을 생각하고 세수도 하고 한 번 더 물을 마시고 길을 떠날 양으로

  물 엉덩이를 찾았다.

  원효는 깜짝 놀랐다.

 그 웅덩이에는 사람의 해골이 있었다.

 길다란 이빨이 그냥 남아 있는 두골이며 손발이며 정강이며 이것을 보자 원효는 구역이 났다.

 이 물을 마셨거니 생각하면 오장이 다 뒤집히는 듯하였다.

  원효는 이것을 보고 두어 걸음 물러섰다가, 다시 엎드려 그 웅덩이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 모든 것이 다 마음으로 되는 것이다.’

 하고 원효는 낙양에 갈 필요가 없다 하여 그 길로 신라로 돌아오고 의상만 혼자 낙양으로 갔다.

 원효는 더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원효는 이런 옛 기억을 생각하였다.

  원효는 이러한 생각을 하다가 하늘에 빛나는 별들을 보며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는지 모르거니와 무슨 대단히 우렁찬 소리에 잠이 깨었다.

  그것은 염불하는 소리였다.

  하늘에는 아직도 성두가 찬란하여서 밤중인 것 같았다.

  그런데 사람은 보이지 아니 하고,

   ‘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하는 염불 소리만 울려 왔다.

그 소리는 매우 맑고도 힘이 있었다.

원효도 일어났다.

 옆에는 대안이 없었다.

 염불하는 것은 필시 대안이다.

  원효는 귀를 기울여서 대안의 염불 소리를 들었다.

언제까지나 듣고 싶은 소리였다.

 원효는 세상에서 이러한 맑은 소리를 처음 들은 것 같았다.

모든 번뇌를 다 여읜 소리였다.

 경건하고 자비스럽고도 한가스럽고도 웅장하였다.

정말 대안대사의 음성일까. 원효는 의심하지 아니 할 수 없었다.

 왜 그런고 하면 평소에 말하던 음성과는 다르기 때문이었다.

그 우습고 익살스럽고, 어찌 보면 능글능글하기조차 한 대안의 속에서 저러한 소리가 나올 수가 있을까, 원효는 이렇게 생각하였다.

  원효는 그 염불 소리의 주인을 찾고 싶었다.

원효가 장삼을 입고 가사를 걸치는 것을 보고 심상도 벌떡 일어났다.

  “ 노스님, 어디 가십니까.”

  심상도 분주히 장삼을 입었다.

  “ 너 저 소리 듣느냐.”

  “ 네. 아까부터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 ”

  “ 저 소리 난 지가 얼마나 되었느냐.”

  “ 얼마나 되었는지 모릅니다 소승도 저 염불 소리에 깨었습니다. ”

  “ 저게 뉘 소릴까. 대안스님의 음성일까.”

  “ 글쎄요. 소승도 뉘 소린가 하고 있습니다.”

  원효는 염불 소리 나는 데를 향하고 걷기 시작하였다.

 심상도 뒤를 따랐다.

인기척을 내는 것이 염불하는 이에게 장애가 될 것을 염려하여서 원효는 발자국 소리를 삼갔다.

 심상도 그 뜻을 알았다.

  꽤 높이 올라갔다. 염불 소리는 차차 가까워졌다.

 가까워질수록 그 소리는 더욱 힘이 있고 더욱 엄숙하였다.

  “ 저기다.”

  원효는 우뚝 섰다.

  조그마한 봉우리

 봉우리라기보다는 약간 두드러진 코에 움직이는 사람의 모양이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하여

 검은 그림자 모양으로 보였다.

 방울 소리도 들렸다.

  그 그림자는 수없이 절하는 그림자였다. 염불 한마디에 한번씩 절을 하는 것이었다.

  원효는 더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마치 발이 땅에 붙은 것 같았다.

 언제 하였는지 모르게 원효는 불전에서 선 모양으로 합장하고 서 있었다.

  “ 나무아미타불 南無阿彌陀佛. ”

  “ 나무무량수불 南無無量壽佛,”

  “ 나무무량광불 南無無量光佛.”

  “ 나무무애광불 南無無碍光佛.”

  “ 나무무변광불 南無無邊光佛.”

  “ 나무무진광불 南無無盡光佛.”

  “ 나무무량원불 南無無量願佛.”

  이 모양으로 아미타불의 별호를 불러서 무량원에 이르러서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세 번이나 반복하고 네 번째는,

  “ 나무대자대비서방극락세무량원불.”

하고 불렀다.

  염불을 듣고 있는 동안에 원효는 대안의 염불을 모시는 본의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은 삼계육도에 끊임없는 생사고(生死苦)속에 헤매고 있는 중생의 정경을 차마 보지 못하여서

사십 팔원(四十八願)을 세우고 조재영겁(兆載永劫)에 무궁무진한 난행 고행을 하신 아미타불의

대자비원을 대안이 자기의 원으로 삼는 것이라 함이었다.

  지옥 속에 있는 무리도 아미타불의 명호(名號)만 들으면 이고득락(離苦得樂)을 한다는 것이다.

명종시(命終時)에 아미타불을 단 열 번만 염하여도 극락왕생을 한다는 것이다. 평생 한번만 정성으로 아미타불을 불렀어도 반드시 악도에 떨어지지 아니 하고 극락왕생의 기연을 짓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아미타불의 대원력이시다.

  그러하건만 악업을 많이 쌓아서 업장이 두터운 중생의 귀에는

이 고마우신 불명호가 들리지 아니 하는 것이다.

옆에서 날마다 시시각각으로 아미타불을 부르는 소리가 나더라도,

업장이 귀를 막는 사람에게는 아니 들리는 것이다.

음란하고 허망한 소리에는 귀가 밝아도, 진리의 소리는 못 듣는 것이다.

  지금 저렇게 부르는 대안의 염불 소리를 어느 중생이, 몇 중생이나 듣고 있는가.

  원효는 대안이 수없이 절하며 수없이 부르는 염불 소리를 들을때,

 마음속에 새로운 따뜻함과 새로운 밝음이 비추임을 깨달았다.

 이것이 아미타불의 빛이로구나 하였다.

 

  원효는 승만여왕의 빈전에서 아미타경을 설하였다.

정성도 들였고, 또 말도 잘하였다고 믿었다.

 설하는 원효만 그런 것이 아니라, 듣는 대중 중에도 그 설법에 감격한 이도 있었다.

그러나 원효는 생각하였다.

 천만언의 설법보다도 지금 듣는 대안의 염불 한마디가 얼마나 더 이익(利益 종교적 감동이라는

 불교의말)이 컸을까.

  그러나 저러한 염불 소리는 저마다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치 같은 가얏고라도 우륵(于勒 금관국 사람으로서 가장 가얏고를 잘 탄 사람)이

내는 소리를 다른 사람은 내지 못하는 것이다. 같은 줄이지만 타는 손가락이 다른 것이다.

 높은 천품과 수십 년의 정성된 공부를 겪지 아니하고는 우륵의 가얏고 소리는 내지 못하는 것이다.

  지금 대안의 염불 소리는 곧 대안 전체다.

칠십 평생에 닦고 닦은 그의 도가 온통으로 발하여서 소리가 된 것이었다.

  ' 나도 저런 소리를 발해 보았으면.'

  원효는 대안이 있는 쪽을 향하여서 합장하고 고개를 숙였다.

지명(智明)도, 자장도, 안홍(安弘)도 다 스승으로 알지 아니 한 원효는

이때 대안을 스승으로 생각하였다.

대안이 어젯밤에 여러 가지 우스운 이야기로 자기를 만류하여서 여기서 하룻밤을 자게 한 것이

 다 자기를 제도하려는 자비심의 방편인 것 같았다.

  어떠한 웅변으로도,

천언만어의 설명으로도 원효가 지금 대안의 염불에서 받은 감동을 전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이 자리에 있는 사람만이 받을 수 있는 감동이었다.

 대안만한 도력(道力)이 없이는 아니 될 것이었다.

다른 사람이 여기서 염불을  하기로 사람에게 그러한 환희심을 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 도력, 법력(法力). 그렇다. 도력이요, 법력이다.'

  원효는 이렇게 자탄하였다.

  공중을 날고 물위로 걷기를 평지같이 하였다는 안홍법사나,

 수나라 군사에게 결박을 당하게 되었을 때 환하게 방광(放光 빛을 발함)하였다는 원광법사나,

귀신을 부리고 귀신을 쫓는다는 밀본법사나, 탄지일성(彈指一聲)에 앞에 선 인혜법사(因惠法師)를

공중으로 날려 거꾸로 땅에 내려와서 머리가 땅에 붙고 발이 공중에 뻗은채,

밤을 지내게 하였다는 모거사(居師)나 다 법력이 있다고 하기로니 그것은 다 소소한 외도요, 요술이다. 진실로 사람의 마음속에 닦고 닦은 무량겁의 업장을 깨뜨려서 부처의 빛을 받게 하는 그 도력이야말로 정말 도력이다.

  원효는 이렇게 생각하였다.

  대안의 염불 일성에 원효는 지금까지 가지고 오던 모든 자존심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 지나간 십 년에 내가 한 것이 무엇이냐.'

  원효는 반성하였다.

  과연 원효의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라든지,

화엄경소(華嚴經疏)라든지, 오시사교(五時四敎)의 설이라든지는

신라, 백제, 고구려에서보다도 멀리 당나라에서 추존을 받아서 불교 해석의 새 길을 연 것은 사실이다.

  ' 그러나 나는 그것으로 누구를 건졌는가.

대관절 나 스스로를 건졌는가.

내가 쓴 글을 읽고 과연 어느 중생이 지금 내가 대안대사의 염불 소리에서 받은 환희를 받았는가.

내가 십 년 동안에 쓴 글이 종이에 먹을 묻혀 놓은 것뿐이 아닌가.'

  원효는 학문이나 지식이라는 것이 사람의 혼을 움직이기에 얼마나 가치가 적은가를 깨달았다.

약왕보살(藥王菩薩)이 제 몸에 불을 붙여 불전에 공양하는 촛불을 삼은 것이나,

상불경보살(常不輕菩薩)이 사람들의 치소를 받으면서도 평생에 만나는 사람마다,

  " 나는 너를 가볍게 안 본다, 너는 부처가 될 사람이다."

하는 한마디를 외치고 돌아다닌 것이나 다 알아지는 것 같았다.

 " 행(行)이다. 행이다. 오직 행만이 값이 있는 것이다."

  원효는 새삼스럽게, 새삼스럽게 깊이 느겼다.

 

   훤하게 동이 텄다. 하늘에 잔별들이 숨어 버렸다. 굵은 별만이 더욱 빛났다.

  “ 하핫하핫. 대안 대안, 대안이야대안.”

  염불을 끝내고 내려오는 대안은 원효를 보고 예전 대안이 되었다.

  원효는 땅바닥에 오체투지로 대안의 앞에 절을 하였다.

  심상은 영문을 몰랐다.

일찍 누구의 앞에서도 무릎을 굽혀 본 일이 없는 원효대사이기 때문이다.

 원효가 받은 감동을 심상은 받지 아니 한 것이었다.

경(境)은 같지만 근(根)과 기(機)가 다른 것이었다.

  “ 하핫하핫. 대안 대안.”

  대안은 원효가 절하는 것을 보고 유쾌하게 웃었다.

 대안은 원효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큰 변동을 고맙게 생각한 것이었다.

부처님의 위신력(威神力)의 움직임을 본 것이었다.

  대안은 원효의 절에 답례하지 아니 하였다.

그것은 원효의 공덕을 깍지 아니 하려는 자비심에서였다.

 원효의 절은 부처님께로 돌릴 절이었다.

 대안이 그 절을 받을 것이라고 대안(?)은 생각지 아니 하였다.

 그것을 모르는 심상은 원효의 오체투지의 예에 놀라는 이상으로 그 절을 서서 받는 대안의

 교만 무례함에 더욱 놀라지 아니 할 수 없었다.

  더구나 심상은 화엄경을 배우는 사람이어서 서방정토나 극락세계니 하는 것을 우습게 생각하였다.

 그러한 타력(他力)이니 아미타불의 본원이니 하는 것을 우습게 생각하고 그런 것은 무식한 무리를

 위한 법문(法門)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심상은 경을 많이 읽어서 지식을 많이 얻는 것으로 보살이 되고 불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른바 학승(學僧)이었다.그가 원효를 사모하는 것도 원효가 그중 높은 학승이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대안과 작별하고 문수사로 갔다.

  원효는 문수사에 와서 그 조용함이 마음에 들었다.

 물소리는 없으나 새소리는 들을 수가 있었다.

 여름에 비만 오면 물소리도 앉아서 들을 수 있는 방이었다.

 밀본법사는 원효를 위하여서 자기가 거처하던 방을 내어준 것이었다.

창 밖에는 그리 넓지 아니 한 뜰이 있고 뜰에 모란과 작약이 있었다.

분백의 단장에 일각문이 있어 그것을 나서면, 시내가 흐르는 골짜기였다.

경상 앞에 앉으면 산과 법당의 박궁 옆이 보였다.

  뜰은 깨끗이 쓸어서 빗자국이 있었고 아침저녁이면 다람쥐가 와 다녔다.

  방에는 감실 속에 문수보살상이 있었다.

백제 승 혜총(惠聰)이 조성하였다는 유명한 불상이다.

혜총은 고구려의 혜자(惠慈)와 함께 성덕태자(聖德太子)를 도와서 불법을 일으켜 법륭사(法隆寺),

사천왕사(四天王寺)등 크고 아름다운 절을 지은 사람이었다.

이때에는 신라에서도 절이나 불상은 백제나 고구려 중의 손을 많이 빌었다.

 미술 공예가 더 발달되었기 때문이었다.

문수사의 법당에 모신 석가모니불과 벽화는 고구려 승 담징(曇徵)의 손으로 된 것이었다.

담징도 후에 성덕태자를 도와서 불법을 폈다.

 법륭사의 벽화를 그린 것도 담징이었다.

 원효는 이 뜰에 대를 심으리라 이런 생각도 하였다.

 

  원효가 문수사에 온 지 사흘 후 위에서 원효가 쓸 물건 일습을 보내셨다.

경상, 금침, 의복, 지필묵, 기름, 향, 향로, 차, 화로 등 이었다. 이것은 모두 궁중에 있던 것이었다.

 요석궁 시녀가 분황사에 모란꽃을 가지고 갔다가 원효가 떠난 것을 보고 요석공주에게 아뢰었다.

요석공주는 얼른 그것이 제가 지어 보낸 옷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심히 부끄러웠다.

솔기솔기 땀땀이 박혔을 여자의 정열이 원효에게 통하지 아니 하였을 리가 없다고 공주는 생각하였다.

  ‘ 그렇지만 어디까지라도 따라가 볼 걸.’

하고 공주는 입술을 꼭 물었다.

  ‘ 승만마마의 유언이 계시니.’

  공주는 이렇게 저를 변호하여 보았으나 역시 그것은 핑계에 지나지 아니하였다.

  공주는 어머니이신 왕후께 여쭈어 요석궁 모란을 보시기를 청하였고 문명왕후는

  또 왕께 여쭈어서 두 분이 요석궁에 첫 거동을 하셨다.

 임금이 되시고 왕후가 되시면 비록 친자녀의 집에라도 가시기가 어려웠다.

  왕은 왕후와 유신과 또 태자 법민은 빼고 문왕, 기타 왕자 몇 분과 막내 공주 지소를 데리시고

 월성대궁(月城大宮)을 납시어 아리내의 요석궁에 듭셨다.

  왕은 즉위하신 후에, 양암(諒闇)으로 신궁(神宮) 제의도 아직 못 지내셨으므로 아무데도

  거동이 없으셨다.

  그러나 대행대왕의 칠칠재도 지났으므로 길복으로 요석궁에 납신 것이었다.

  연도 백성은 새 왕의 거동을 우러러뵈옵느라고 길 좌우에 자리를 펴고 꿇어앉아 있었다.

  비록 미행이라 하더라도 왕의 위의는 갖추지 아니 할 수 없었다.

  왕이 타신 수레는 자단(紫檀)과 침향(沈香)으로 만들고 난간은 대모와 금, 은, 옥으로 꾸미고

  누른 비단으로 양장을 삼고 붉은 비단으로 휘장을 삼아 말 네 필을 메웠다.

  왕은 이 날 당나라 옷을 입지 아니 하시고 예로부터 내려오는 신라 옷을 입으시고

  왕후와 왕자도 그러하였다.

  수레에는 왕과 왕후가 가지런히 방석 위에 앉으시고 둘째 수레에는 왕의 아드님으로

  오래 당나라에 태종의 사랑을 받고 국자감에서 공부하던 문왕이 이손의 금관(錦冠)을 쓰고 앉았고

  또 그 뒤에는 왕의 가장 어린 아드님인 지경(智鏡)과 개원(慨元)이 역시 금관을 쓰고 앉았다.

  그들도 왕자로서 이손의 작을 받은 것이었다.

  다음 수레에는 대각손 유신(大角飡庾信)이 예부령 이손 한기(禮部令伊飡韓岐)와 같이 탔고,

  맨 뒤에는 병부령 이손 나미(兵部令伊飡奈彌)가 타고 행차의 앞뒤에는 대감(大監) 일인,

  대당(大幢), 귀당(貴幢)각 이인이 말탄 군사, 걷는 군사, 백 오십 명을 거느리고 호위하였다.

  군사들은 지위를 따라서, 혹 머리에 붉은 수건을 동이고 붉은 깃단 전복을 입고, 혹은 누른,

  혹은 푸른, 이 모양으로 색이 달랐다.

  왕의 행차가 요석궁에 다다르자 궁에서는 일시에 풍악이 일어났다.

 처음 일어난 풍악은 주라춤(茄舞監)이었다.

 주라 두 쌍이 앞으로 갈라서서 불면서 춤치[舞尺: 춤추는 사람] 한 쌍이 춤을 추어서 왕의 행차를

 안으로 인도하는 것이었다.

  요석궁도 선덕여왕이 공주로 계실 때에,

  그 아바마마 진평왕의 거동을 맞은 뒤로는 이것이 처음이었다.

  왕과 왕후는 문전에서 수레를 내려, 새로 깔아놓은 황토를 밟으시며 문을 들어서셨다.

  모란의 향기가 오월의 요석궁에 차 있었다.

  공주는 서른 새 베옷에 누른 비단 활옷을 걸치고 검은 머리를 목을 잘라 등뒤에 풀어 늘이고

  부모님이신 왕과 왕후를 지영하였다.

  “ 어, 모란이 만발이로군.”

  왕은 뜰의 모란을 보시며 기뻐하셨다. 요석공주는 왕이 사랑하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따님이었다.

  왕이 앉으신 자리는 평소에는 쓰시지 아니 하는 전각으로서,

  혹시 왕이 오실 때 편전으로 쓰기 위하여 지어 놓은 것이었다. 진평왕이 가끔 오신 곳도 여기였다.

  전내에 모란 무늬 놓은 돗자리에 역시 모란 무늬 있는 비단 보료를 깔았다.

  왕후와 왕자와 유신과 대신들은 이 자리에 오르고 벼슬 낮은 무리들은 중문 밖 행각에서 주식을

  먹게 하였다.

  왕이 좌정하신 뒤에 요석공주는 다시 부모의 앞에 나아와 공손히 절하고 오른편 무릎을 꿇고 왼편

 무릎을 세우며 한켠에 비켜 앉았다.

 바른 듯 만 듯 분을 바른 공주의 얼굴은 누가 보아도 서른 살이 넘은 과부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달과 같이 둥그스름한 얼굴, 가는 눈썹 밑에 한일자로 보이는 가느스름한 눈, 빼어난 코, 불그레한

 입술, 옥으로 깎은 듯한 목, 왼편 무릎에 얹은 희고 가는 손가락, 아무리 보아도 새로 핀 연꽃송이와

 같았다.

 다만 그 의젓한 품이 나이 먹음을 보인다면 보인다 할 것이다.

 더구나 삼십 새 구름결 같은 베옷을 입은 모양이 수수하고도 아담하고도 고결한 맛이 있었다.


 왕은 이러한 따님을 보시는 것이 괴로우셨다.

 저렇게 젊고 아름다운 사람으로서 홀로 요석궁에서 늙게 하는 것이 슬프셨다.

 공주가 어머님께 올린 글에,

  “ 목단이노록음농 목丹已老祿蔭濃.”

이라고 한 공주의 글을 보고 왕은 요석궁에 납실 결심을 하신 것이었다.

  모란이 늙었다. 며칠 안 보면 다시 못 보게 될는지도 모른다.

만일 이 날 밤에 한 풍우가 지난다면 내일 아침에는 벌써 없을 것이다.

왕은 이렇게 느끼신 것이었다.

  왕은 이 날 실컷 놀면서 공주를 기쁘게 해주려 하셨다.

 그리고 될 수 있으면 공주의 뜻을 알아서 새로 남편을 구하여 주시려고 하셨다.

  해가 낮이 되었다.

  배반이 들어왔다.

 왕이 미리 육전사지(肉典舍知)에게 명하여서 준비케 하신 것이었다.

왕은 백제와 고구려를 멸한다는 맹세가 계시므로 모든 사치를 금하시는 동시에 당신의 생활도

극히 검소하게 하셨다.

몸에 베옷을 입으시고 짚신을 신으셨다.

  그러나 아무리 검소하다 하더라도 왕의 상이었다.

 동해의 어별과 토함의 산도야지와 태백의 삼과 꿀과 이런 것은 상에 오르지 아니 할 리가 없었다.

요석공주가 먼저 술을 따라 왕과 왕후에게 받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푸른 옷 입은 시녀들이 술을 따랐다.

  “ 자, 한불손. 술자시오. 오늘은 취합시다.”

  왕은 큰 옥잔에 공주가 따른 술을 마시고 나서 그 잔을 유신에게 주었다.

  “ 상감마마 황송하오.”

  유신은 이마를 방바닥에 대었다.

  “ 한불손. 우리 오늘은 군신지분(君臣之分)을 잊고 옛날 문노선생 문하에서 한솥밥을 먹고

     한자리 잠을 자던 춘추와 유신으로 돌아갑니다.”

  왕은 손수 고구려 자기 술병을 들어서 유신의 잔에 술이 넘도록 부었다.

  “ 황송하오. 그러하오나 군신지분은 군신지분이라 한 시각인들 잊을 수 있사오리까.

    과람하옵신 분부시오.”

  유신은 무릎을 꿇고 잔을 받아서 마셨다.

  “ 한불손. 잔을 내게 돌리오.”

  왕은 쾌활하게 팔을 내어밀으셨다.

  유신은 엎드려서 술잔을 들어 왕께 올렸다.

 그리고 손수 병을 들어 왕의 잔에 술을 부었다.

백설 같은 옥잔에 황금물 같은 술이었다.

  왕은 단숨에 그 잔을 들이마셨다.

왕은 요석공주에게 잔을 주시며,

  “ 아가, 한불손께 술을 부어라.”

하셨다.

 왕은 요석공주를 유신에게 시집보낼 뜻을 품으신 것이었다.

유신은 그때 마야부인이 죽고 홀아비였었다.

  요석공주는 잠깐 주저하다가 부명이요,

왕명이라 마지못하여서 잔을 유신에게 보내었다.

  “ 외숙께 드리는 술잔이오.”

  요석공주는 분명히 이런 말을 하였다.

  유신은 그 술잔을 받았으나 요석의 말을 의심하였다.

  왕도 그 말에는 놀랐다.

  왜 그런고 하면 왕은 이 날 늦도록 술을 마시고 놀다가 유신이 취하면

  요석궁에서 공주와 함께 자게하려 하였기 때문이다.

  왕에게는 유신은 지극히 소중한 사람이었다.

  왕은 이찬 용춘장군(伊飡龍春將軍)의 아들이다.

  내물왕의 혈통을 끈 것은 사실이지만 반드시 왕위에 오를 혈통은 아니었다.

  왕이 즉위하자 그 아버지 용춘을 문흥대왕(文興大王)으로 추봉하였지만

 그 아버지 용춘은 갈문왕(葛文王)도 못 되는 것이다.

 당나라에 대해서는 진덕여왕의 몇 촌 아우라고 말하였으나 기실은 성골(聖骨)은 못 되는 것이었다.

 지나간 진덕(승만)여왕까지는 성골이었으나 춘추부터는 성골이라고 일컬을 수가 없었다.

 겨우 진골(眞骨)이었다.

 그러므로 혈통을 심히 소중하게 보는 신라에서 왕은 안심하기 어려운 지위에 계셨다.

 오직 믿는 것이 무공으로 일국의 병권을 잡고 신뢰를 받는 유신과, 당나라 조정의 신임이었다.

  그런데 당나라 조정에서 춘추가 신임을 받게 된 것은 진덕여왕과 자장율사 때문이었다.

  자장율사는 용춘장군과 가까웠다.

 그리고 중이면서도 무척 정치적인 인물이었고 또 친당주의자였다.

 이 점에서 용춘과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어서 춘추와 그 아들 법민을 극력 당나라 조정에

추천한 것이요,

또 선덕여왕의 유훈으로, 진덕여왕은 내심으로는 원효를 사모하면서도 정치에 있어서

자장의 말을 아니 들을 수 없었다.

이러하여서 춘추는 국내에서나 당나라에서 이름을 낸 것이었다.

  이러한 사정인데, 왕은 장차 백제와 고구려를 멸하여 삼국을 통일하려는 큰 야심을 가지고 있었고

이 일은 오직 유신이 있어야만 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왕위를 보존하는 데나 삼국을 통일하는 데나 유신이 필요하므로 그에게 딸을 주고 싶었다.

  요석공주나 지조공주나 유신에게는 생질이다.

 그러나 옛날에는 그것이 혼인에 거리끼는 것이 아니었다.

 이러한 뜻으로 왕은 요석공주를 시켜서 유신에게 술을 권케 한 것이었다.

 그런데 요석공주의 태도는 분명히 거절하는 표시였다.

  왕은 “ 아뿔싸!” 하였으나 곧 그것은 잊어버린 듯이 음악을 아뢰라 명하셨다.


  처음에는 삼죽삼현(三竹三絃), 백판대고(伯板大鼓)의 음틀에 맞추어서 두 사람이 춤을 추는 것이었다. 삼현이란 것은 거문고, 가얏고, 비파요, 삼죽이란 것은 대금, 중금, 소금이었다.

  첫 곡조는 옥보고(玉寶高)의 작곡 중에 봄아침[春朝曲]이었다.

그것은 느리고 부드러운 춤이었다.

춤추는 사람(춤치라고부른다)은 머리에 뿔난 박두(樸頭)를 쓰고 소매 넓은 자주 옷을 입고 난홍정,

도금과 요대, 오피헤의 차림이었다.

  신열춤(辛熱舞), 한기춤(韓岐舞), 이 모양으로 곡조가 갈림을 따라서, 혹은 세 사람,

 혹은 여섯 사람 악공과 춤추는 사람 수효가 달랐다.

또 춤추는 이의 옷도 붉은 옷, 푸른 옷, 이 모양으로 달랐다.

  금환(金丸)춤이란 것은 금으로 만든 만든 공을 놀리는 것이다.

그 공이 혹은 높이, 혹은 낮게 오를 때 달도 같고 별도 같았다.

  금 도금한 탈을 쓴 대면(大面)춤에는 손에 산호 채찍을 들고 귀신을 쫓는 형용이요,

소두(束毒)춤은 봉두난발하고 남빛 탈을 쓰고 북을 둥둥 두드리며 추는 것이요,

사자춤은 털 빠진 늙은 사자가 머리를 흔들고 꼬리를 두르는 웅장한 춤이었다.

  “ 그 어디 고구려 춤을 추어 보아라.”

  왕은 술이 거나하게 취하셨다.

  고구려 악대가 나왔다.

  붉은 깁모자에 새깃을 꽂아 쓰고 소매 넓은 누른 옷에 통 넓은 바지, 붉은 갓신을 신었다.

 네 사람이 오색치승무(五色緇繩舞)를 추는데 상투는 붉은 끈으로 졸라 뒤로 젖히고

이마에는 금당(金鐺)을 붙였다. 그중 두 사람은 누른 저고리, 붉누른 바지, 다른 두 사람은

붉누른 저고리에 붉누른 바지를 입었는데 소매가 대단히 길다. 검은 갓신을 신었다.

이 네 사람이 쌍쌍이 늘어서서 춤을 추는 것이다.

악기는 탄쟁(彈箏)하나, 국쟁(掬箏)하나, 와공후(臥箜ꟲ), 수공후(竪箜候), 각각 하나씩,

비파(琵琶)하나, 오현(五絃)하나, 의취적(義嘴笛)하나, 생(笙)하나, 횡적(橫笛)하나, 소피리 하나,

대피리 하나, 도피피리 하나, 요고(腰鼓)하나, 재고(齋鼓)하나, 담고(擔鼓)하나, 구(?)하나,

이렇게 타고 뜯고 불고 치고 하였다.

그 가락에 맞추어서 네 사람이 춤을 추는 것이었다.

  “ 참 좋다. 장하다.”

  왕은 무릎을 치시며 이렇게 찬탄하셨다.

비록 적국의 음악이지만 대단히 장하다고 생각하셨다.

한(漢)나라 때부터 당나라에 이르기까지 고구려 음악은 중국 조정에서도 딴 방을 두었고

신라 조정에서는 우방악(右房樂)을 삼으셨다.

  “ 여보 한불손.”

  왕은 유신을 불렀다.

  “ 네에.”

  유신도 고구려악에 감흥이 많은 중이었다.

  “ 평양에서 고구려악을 볼 날이 있겠지?”

  왕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 네. 반드시 그날이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고구려왕을 결박하여 계하에 꿇리고 반드시 그날에 오색치승무를 보시게 하오리다.”

  유신은 몸을 한번 흔들고 어깨를 한번 떨었다.

  그 눈에서는 불이 이는 것 같았다.

  유신이 이리하는 양을 보시고 왕도 입을 다물고 크게 한번 숨을 내어쉬셨다.

   좌석에는 살기가 등등하였다.

  “ 지조야. 너 유신장군께 술 한잔을 부어라.”

  왕은 호령하였다.

  “ 네.”

  지조공주는 금잔 가득 술을 부어서 유신에게 받들어 드렸다.

  유신은 부복하여 사은하고 두 손을 들어 공주의 손에서 잔을 받았다.

  유신이 잔을 받아 든 때에 악공(樂工)은 웅장한 강천성곡(降天聲曲)을 울렸다.

  모두 다 머리가 쭈뼛하도록 비장함을 느꼈다.


  유신은 강천성곡이 끝날 때까지 술잔을 들고 있었다.

그러다가 곡이 끝나자 잔을 입에 대어 고개를 뒤로 젖히며 들이마셨다.

그의 반백이나 된 수염이 주인의 비장한 뜻을 아는 듯 흔들렸다.

  “ 한 잔 더.”

  왕은 유신에게 다시 술을 권하였다. 지조공주는 연하여 석 잔을 따랐다.

유신의 손에 잔이 들리는 대로 노인곡(老人曲), 오사식곡(五沙息曲)이 울렸다.

  유신은 연하여 석 잔을 받아 마시고, 다시 부복하여서 잔을 왕께 올리며,

  “ 신이 비록 늙었사오나 백제나 고구려를 격멸하여 의자(義慈), 보장(寶藏)을

    폐하께 묶어 바치기까지는 결코 죽지 아니 하겠소.”

하고 아뢰었다.

  “ 좋다. 장하다.”

  왕은 공주의 손에서 술을 받아 마시셨다.

  “ 또 부어라.”

  왕도 석 잔을 들이마셨다.

 그동안 왕은 악공에게 가라도(加羅都) 곡을 아뢰라 하셨다.

 가라도곡은 우륵이 지은 가야금 곡으로서 상가라도(上加羅都) 하가라도(下加羅都) 둘이 있어서

 진평왕 때 장군 이사부가 가라를 평정한 것을 찬송한 곡이다.

 화랑 사다함이 열일곱 살에 대공을 세운 전쟁이다.

  “ 이 몸이 검무를 아뢰오리다. 어떠할오지.”

  유신이 왕의 뜻을 물었다.

  “ 그러오.”

  왕은 희색이 만면하셨다.

 금시에 의자왕, 보장왕의 결박을 받아서 계하로 끌고 오는 것 같아 장쾌하였다.

  유신은 일어나 칼을 빼었다. 오동자루에 금으로 장식한 고구려 칼이었다.

  칼은 고구려 칼이 좋았던 것이다.

  삼죽(三竹)이 울었다. 유신은 칼을 들고 처음에는 무엇을 생각하는 듯하였다.

 차차 칼은 유신의 머리 위에 높이 올랐다.

 유신의 몸이 한번 꿈틀하며 칼이 허공을 한번 돌았다.

 한 줄기 번개가 일었다. 첫소리는 평조로부터 황종조(黃鐘調)로 옮았다.

  유신의 발은 점점 힘있게 소리를 내고, 칼은 점점 빠르게 움직였다.

  음악은 이아조(二雅調), 월조(越調), 반섭조(般涉調)로 차차 자아쳐(?) 출조(出調)를 거쳐

 준조(俊調)에 오르자 소리는 더욱 높고 격하였다.

 이것을 따라서 유신의 칼은 마치 질풍과 같이 번개와 같이 유신의 몸을 싸서 유신이 온통 칼빛이

 되어 버렸다.

  음악은 격한 데서 점점 떨어져 다시 순탄한 평조로 돌아가는 듯 끊기고 말았다.

 유신도 처음과 같이 조용한 자세로 돌아왔다.

 고요하기가 폭풍우 지나간 뒤의 수풀과 같았다.

 아무 일도 없는 듯 하였다.

  전각은 고요하였다.

 풍경 소리가 딸랑딸랑 울렸다.

 모란꽃 향기가 풍겨 들어왔다.

 유신은 칼을 칼집에 꽂고 왕 앞에 한 번 절 하였다.

 왕 이하로 다 눈물이 터질 듯한 슬픔에 찼다.

 그중에서도 더욱 감동한 것은 지조공주였다.

 유신은 사람이 아니요, 천신인 것 같았다.


  유신은 본래는 신라 사람이 아니다.

그는 가야국(가라, 금관)사람이다.

가야가 장군 이사부의 정복을 받아 신라와 합한 것은 진흥왕 때였다.

  때는 진흥왕 이십삼 년 구월, 가야왕 구해(仇亥)가 신라에 대하여 반기를 들었다.

 진흥왕은 병부령 이사부를 보내어서 가야를 쳤다.

 이때 화랑 사다함이 낭도 오천 명을 거느리고 종군하여서,

 자원하여 선봉이 되어서 가야의 전단문(栴檀門)에 돌입하여서 문위에 백기(白旗)를 달았다.

 성중에 있는 가야국 장병들은 이 백기를 보고 어찌할 줄 모르는 동안 이사부가 대군을 끌고

 무혈 입성을 한 것이었다.

  이 공로로 왕은 가야국왕 이하 포로 전부를 사다함에게 주었으나 사다함은 그들을 다 놓아

 신라에 충성하게 하였다.

 그러한 지 약 백 년이다.

  구해는 유신에게는 증조였다. 구해의 아들 무력은 신주도행군총관(新州道行軍總管)이 되어

 백제왕을 잡고 장수 넷과 군사 만명을 베어서 큰 공을 세웠고, 그 아버지 서현(舒玄)은

 소판(蘇判)까지 올라서 대량주도독(大梁州道督)이 되었다.

 서현이 아직 젊었을 때에 갈문왕 선마로[立宗]의 아들 숙흘마로[肅訖宗]의 딸 만명(萬明)과

 서로 사랑하여, 대문에 벼락이 떨어져 소란한 틈을 타 만명이 집에서 도망하여 만노군 태수

(萬弩郡太守)인 남편을 따라가서 유신을 낳은 것이다.

  유신은 열다섯 살에 문노의 문인으로 화랑이 되어서 용화향도(龍華香徒)라고 일컬었다.

 용화라 함은 다음에 오실 미륵불(彌勒佛)의 세계를 가리킨 것인데,

이것은 유신이 미륵불을 원불로 삼는 까닭이지만 또한 삼국을 통일하여서

용화회상과 같은 좋은 나라를 이루리라는 뜻도 있는 것이었다.

  때는 마침 고구려와 백제와 말갈이 끊임없이 신라를 침노할 때 라,

 유신은 백제와 고구려와 말갈을 평정하여서 신라를 빛내리라는 큰 뜻을 품고,

열일곱 살에 중악석굴(中岳石窟)에 들어서 맹세하였다.

  “ 적국이 무도하여 우리나라를 침노하여 편안한 날이 없사오니

이 몸은 한낱 작은 신하이나 힘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이 화란을 맑게 하려 하오니,

 하늘이여 내려보시어 이 몸에게 힘을 주소서.”

  이렇게 빌었다.

  유신은 쌀과 새옹만을 가지고 가서 제 손으로 메(밥)을 지어서 새옹채로 바위 위에 놓고

 산신과 제불보살 께 바쳤다.

  유신은 밤이 깊어도 잠을 안 잤다.

  수풀 속에서는 호랑이 소리도 들리고 곰의 소리도 들렸다.

그러나 유신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폭포에 목욕하고는 잡념을 제하고 검님의 계시를 기다렸다.

  굴에는 왼새끼를 늘이고 서리화(종이를 오려서 막대기에 감아 너슬너슬하게 한 것)를 달았다.

 그리고 정한 황토를 파다가 굴 속에 깔고 솔가지를 문에 세웠다.

  유신이 촛불을 켜고 가만히 앉았노라니, 천정에서 선뜩선뜩 물방울도 떨어지고 촛불 그늘에는

 여러 가지 모양으로 생긴 귀신이 보였다.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지났다.

  “ 검님. 백제와 고구려를 멸할 힘을 얻기까지는 이 자리에서 아니 일어나리다.”

 하고 유신은 힘을 얻거나 그렇지 아니 하면 이대로 죽기로 결심하였다.


  나흘째다. 나흘째, 해도 다 져갈 때에 난데없이 노인이 굴 앞에 나타났다.

 칡베 옷을 입고 칡베 건을 썼다.

  “ 여기 독한 벌레도 있고 무서운 짐승도 있는 곳에 어떤 도령이온데 이렇게 혼자 있는고.”

하였다.

 노인은 수염과 눈썹이 눈과 같이 희었다.

“ 어르신은 어디에서 오시며 존함은 누구시오니까.”

하고 유신은 공손히 노인에게 물었다.

 “ 나는 집이 없는 사람이야. 인연 따라서 가기도 하고 머물기도하지. 내 이름은 난승(難勝)이고.”

  노인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난승이란 보살십지(菩薩十地)중에 제 오지(第五地)다.

 초발심환희지(初發心歡喜地)에 때를 벗는 이구지(離坵地), 명지(明地), 염지(焰地)를 지나서

 업장은 다 벗고 알 것은 다 알고나서 이로부터 법사가 되어 법을 설하여 중생을 이익하는 경계다.

 항상 행하는 일은 보시(布施), 애어(愛語), 이익(利益), 동사(同事)요,

 항상 염하는 것은 불과 법이요,

 항상 뜻하는 것은,

 “ 아당어일체중생위수위승(我當於一切衆生爲首爲勝),

   내지어일체중생위의지자(乃至於一切衆生爲依止者).”라는 것이다.

   이것이 난승지보살의 경계다.

  유신은 이 노인이 난승지의 보살인 것을 알자, 곧 두 번 절하고 이렇게 말하였다.

  “ 이 몸은 신라 사람이옵거니와 나라의 원수를 보니

마음이 아파서 여기 와서 천우신조(天佑神助)를 기다리고 있사오니

 복걸 장자(長者)는 이 몸의 정성을 어여삐 여기시와 무슨 방술(方術)을 주시옵소서.”

하고 간청하였다.

  그래도 노인은 잠자코 있었다.

  유신은 눈물을 흘리며 또 두 번 절하고, 또 한 번 같은 말을 하였다.

  그래도 노인은  말이 없었다.

  유신은 또 절하고 또 빌기를 일곱 번 하자, 그제야 노인이 입을 열어,

“ 오. 나이 어린 사람이 삼국을 병합할 뜻을 품으니 장하다.”

하고 비법을 전한 뒤에,

  “ 삼가 함부로 이 비법을 전하지 말렸다.

    만일 불의한 일에 이 비법을 쓰면 도리어 앙화가 제 몸에 돌아올 걸.”

하고 말을 마치고는 가버렸다.

  유신은 노인의 뒤를 따라 이 리쯤이나 갔으나,

  노인은 간 데 없고 오직 산상에 환한 빛이 있을 뿐이었다.

  유신은 그 다음해에 백제가 자주 침노하는 것을 보고 더욱 격분하여서, 보검(寶劍)을 가지고

 연박산(연薄山)에 들어가 깊은 골짜기 속에 제단을 차려놓고 오순향을 피우고

 지난해 중악에서 빌던 말과 같이 빈 뒤에, 보검을 빼어 제단에 놓고,

  “ 이 칼에 하늘빛과 영(靈)을 내리시옵소서.”

하고 빌기를 사흘 동안이나 하였다.

  사흘이 끝나는 밤이 거의 다한 때에 허성(虛星)과 각성(角星) 두 별빛이 칼 위에 내려

  칼이 스스로 움직이고 스스릉 하고 울었다.

  이 칼을 가지고 하루도 쉬임 없이 병사와 전술을 익히기 십칠년만에 용춘장군의 군대에

  그 아버지 소판 서현과 같이 종군하여 중당 당주(中幢幢主)로 싸웠다.

 이것이 유명한 낭비성(娘臂城)싸움으로서 유신에게는 첫 번째 전공을 세운 싸움이었다.

 

  때는 팔월. 오랫동안 신라와 고구려 양군이 일승 일패로 낭비성 쟁탈전을 하던 끝에

 신라가 일단 우세였으나 어스름한 달밤에 고구려군이 대거 역습하여 와서 신라병이

 수없이 전사하고 마침내 총퇴각을 아니 하면 아니 될 형세였다.

  이때 유신은 아버지 앞에 나아가 투구를 벗고 이렇게 아뢰었다.

  “ 이제 우리 군사가 패배하였으니 소자가 평생을 충효로써 스스로 기약하였사오니

    싸움에 임하여 용기를 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

    듣건대 깃을 떨면 옷이 바로 서고 벼리를 들면 그물이 펴진다 하오니

    이 몸이 깃이 되고 벼리가 되려 하나이다.”

하고 말에 올라 칼을 들고 적진 중으로 직접 들어가 적장의 목을 베어 들고 돌아오자 신라 군사들이

 모두 감격하고 분격하여 적병 오천 명을 베고 천 명을 사로잡았다.

  유신은 이 공으로 압량주 군주(押梁州軍主)가 되니, 압량주는 원효의 고향이었다.

 인재를 구하기가 간절했던 유신은 소년 화랑 원효를 장래가 있는 사람으로 알고 선덕여왕께

 천한 것이었다.

 유신은 원효가 정치가나 군인이 되기를 바랐으나 원효는 중이 된 것이었다.

  그다음 선덕왕 일 년에 백제군이 대량주(大梁州)에 쳐들어와 춘추의 딸 고조다의 남편 품석이

 전사하고 고조다는 백제에 잡혀가서 옥중에서 자살한 일이 있었다.

 이에 춘추는 고구려에 청병하여 백제의 원수를 갚자 하고 왕께 자청하여 고구려로 가게 되었다.

 길을 떠나기 전에 춘추는 유신을 보고 이렇게 말하였다.

  “ 공과 나는 한몸으로 나라에 고굉이 되었으니,

    내 이제 고구려에 들어가 만일 죽고 돌아오지 못한다면 공인들 어찌 무심하겠소.”

  이 말에 유신은,

  “ 공이 만일 고구려에 갔다가 돌아오지 아니 하면, 내 발굽이 반드시 고구려와 백제

    왕정(王廷)을 밟을 것이오. 그렇지 못하면 내가 무슨 면목으로 국인(國人)을 대하겠소.”

하고 대답하였다.

  춘추는 이 말에 감격하여 유신과 더불어 손가락을 씹어서 피를 내어 서로 나눠 마시고

  이렇게 맹약하였다.

  “ 내 육십 일만에 꼭 돌아올 테니

    만일 육십일이 넘어도 내가 아니 돌아오거든 다시 못 만날 줄 아시오.”

  그러나 고구려왕은 춘추의 기상이 비범한 것을 보고 죽이려하여,

  “ 삼나무고개[痲木?], 대재[竹嶺] 이북은 본래 고구려 땅이니

    그것을 돌려준다면 너를 놓아 보내려니와 그렇지 아니 하면 돌아가지 못하리라.”

하고 춘추를 감금하였다.

  유신은 춘추가 육십 일이 되어도,

 아니 돌아오는 것을 보고 전국에서 결사의 용사 삼천 명을 뽑았다.

 유신은 용사들을 나을신궁(奈乙神宮) 앞에 모아 놓고 이렇게 말하였다.

  “ 위태한 것을 보면 목숨을 바치고 어려운 일에 임하여 몸을 잊는 것은

    우리네 화랑도(花郞徒)의 뜻이오. 대대 한 사람이 죽으면 백 사람을 당하고,

    백 사람이 죽으면 만 사람을 당하는 것이니,

    이제 우리 삼천 명이 죽기를 기약하면 횡행천하를 할 것이오.

    이제 우리나라 어진 재상이 타국에 잡혔으니,

    우리가 죽기로 구하지 않을 수 없소. 다들 뜻이 어떻소?”

  유신의 이 말에 삼천 용사는 일제히,

“ 죽더라도 장군의 명을 들으리이다.”

하고 무릎을 꿇고 손을 들어 맹세하였다.

  유신이 삼천 명 용사를 끌고 고구려로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고구려 왕정에 보고한 것은

  고구려 간첩 덕창(德昌)이라는 중이었다.

  고구려 보장왕은 이 첩보를 듣고 놀라 춘추를 예로써 후대하여 돌려보내었다.

  춘추가 유신의 삼천 명 결사대를 만난 것은 바로 한산주(漢山州 지금서울)에서 였다.

  춘추는 유신의 신의를 뼈에 새기며 고맙게 생각하였다.

  이에 춘추는 더욱 유신을 믿었다. 춘추의 부인 문명이 유신의 누이인 것은 벌써 말하였다.

  이러한 유신은 그동안에도 백제군의 침입을 여러 번 막아서 대공을 세웠다.

  지금은 유신이 선대에 가야국 사람이라 하여서 그 충성을 의심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춘추가 왕이 되신 뒤에 믿는 곳이 둘이 있었다.

  하나는 당태종이요, 하나는 유신이었다.

  이러한 유신이다.

  유신의 검무를 다 보고 난 왕은,

  “ 장군은 아직 안 늙었소.”하고 칭찬하셨다.


  석양이 되었다. 술도 취하고 흥도 겨웠다.

  주연이 파하고 왕은 유신과 나란히 요석궁 정원을 거닐었다.

요석공주의 말과 같이 모란은 늙고 녹음은 무르녹았다.

 연당가의 늙은 실버들이 석양 바람에 가지 그림자로 물을 저었다.

 풀 속의 개구리가 왕의 발자국에 놀라서 못 속으로 뛰어들었다.

 텀벙하는 소리가 왕과 유신의 눈을 못 위로 끌었다. 실물결이 둥글게 수없이 일어났다.

  “ 당병이 또 안시성에서 패하였다니 이를 어찌하오?”

  왕은 이런 걱정을 하셨다.

  “ 상감마마. 차라리 고구려와 백제와 합하여서 당을 쳐버리면 어떠하올지.”

  유신은 이런 말을 하였다.

  왕은 놀라는 모양으로 걸음을 멈추고 유신을 돌아보셨다. 왕과 유신의 눈이 마주쳤다.

 이윽히 마주 볼 뿐이요, 말이 없었다.

  이때 요석공주는 왕후와 지조를 공주가 일상에 거처하는 승만당(勝曼堂)으로 인도하였다.

 반년 동안이나 그리던 어머니와 동생과 오래 막힌 정담을 하려는 것이다.

 왕후도 오래간만에 가족적인 회합을 하게 됨을 기뻐하셨다.

 왕후가 되면 예전 모양으로 자식을 자식으로 사랑하기도 어려우셨다.

  “ 예전, 너희가 어려서 서형산(西兄山) 밑 집에 있을 때 모양으로 어미와 딸로 한 시각을 보내자.”

  문명왕후는 두 따님을 보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한 나라의 어머니로 계시면 내 자식만을 자식으로 사랑하기가 어려우셨다.

  “ 아바마마도 이리로 모시리까.”

  요석은 이렇게 모후께 아뢰었다.

  “ 그러자. 상감마마께오서도 너희들을 몽매에 못 잊으시지만 군국만기(軍國萬機)를

    친재(親裁)하시는 몸이 되시니, 어디 처자와 정담인들 하실 사이가 있느냐.

    그러면 아유다, 술을 한잔 따뜻하게 마련하고 차나 달이고 상감마마께 여쭈어라.

    상감께서 아마 네가 여쭙기를 기다리실 것이다.”

  이러한 모후의 분부를 듣잡고 요석은 심히 기뻐서 곧 청의(靑衣 궁의시녀)를 불러서

  주안을 마련할 것을 분부하고 손수 차를 달이기 시작하였다.

  “ 당차(唐茶)로 하오리까, 지리산 향차(鄕茶)로 하오리까.”

  찻장을 열고 이렇게 모후께 아뢰었다.

  “ 향차를 달여라. 당차는 언제나 잡수시지 아니하시느냐. 지리산 작설(雀舌)을 좀 진하게 달여라.”

  “ 네 지리산 작설.”

하고 요석공주는 고구려 자기로 된 다합(茶盒)을 내어서 뚜껑을 열어 보았다.

 다합은 포류운학문(蒲柳雲鶴紋)을 아로새긴 청자였다.

 이름은 합이라 하나 항아리였다.

  철화로에 태백산 백탄숯이 빨갛게 피었다.

 백제 차 가마가 그 위에 놓여서 뽀뽀뽀뽀 김을 내고 물이 끓었다.

  요석은 다연(茶硏)에 파르스름한 작설을 넣고 사기 공이로 갈았다

 차는 바스락바스락 소리를 내면서 갈렸다.

  “ 언니, 내가 갈까.”

  지조가 옆에서 말하였다.

  “ 아냐 내가 갈게. 너는 술 데워지는 것을 봐.

    네나 내나 딸이 되어서는 부모님께 효도할 기회가 적다.이런 때에나 우리 정성껏 해보자.”

  요석은 이렇게 지조에게 말하였다.

 

   왕은 유신과 함께 승만당으로 오셨다.

  따님 요석이 어떠한 생활을 하고 있나 하고 왕이 궁금하게 생각하신 것은 물론이다.

  역시 뜰은 정하게 쓸리고 섬돌에는 물을 뿌렸다. 마루에는 분합이 걷어올리우고

  버들 무늬가 놓인 주렴이 달려 있었다. 계하의 모란은 벌써 반이나 이울어 있었다.

  시녀가 주렴을 들자 왕은 마루로 오르셨다.

  정면에 커다란 동경(銅鏡)이 화류대 위에 서고 청자 향로에는 지리산 백단향이 피어 올랐다.

  왕은 잠시 거울을 바라보시고 나을신궁을 염하셨다.

 나을신궁은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가 탄강하신 닭의 숲[鷄林]에 모신 신궁이다.

 유신도 왕의 뒤를 따랐다.

  왕은 요석공주의 인도로 서쪽 방에 듭셔서 아랫목에 좌정하시고 유신은 목을 꺾어 동향하여 앉았다.

  은병, 금잔에 술이 나왔다.

이번에는 요석이 손수 술을 부었다.

 안주는 밤과 감과 대추였다.

  왕은 나라 일도 일시 다 잊어버리고 따님 요석을 생각하셧다.

  왕은 먼저 방을 돌아보셨다.

북쪽 벽에 걸린 솔거(率去)의 노송고작도(老松孤鵲圖)가 눈에 띄었다.

 솔거의 황룡사 벽화의 소나무에는 새들이 산 소나무로 알고 와서 앉으려다가

 미끌어진다 하거니와 이 노송고작도도 참으로 핍진하엿다.

 우무저리진 늙은 소나무에 까치 한 마리가 금방 날아가려는 듯 앉은 그림이었다.

  왕은 솔가지에 앉은 외로운 까치가 요석공주인 듯싶어서 슬프셨다.

 그래서 눈을 돌리셨다.

  다음에 왕의 눈에 띄인 것은 벽에 걸린 가얏고였다 가얏고를 보면 가야국을 생각하지 아니할

 수 없고, 가야국을 생각하면 유신을 아니 돌아볼 수 없었다.

  서쪽에는 관음상을 모셨다. 그리고는 방에는 침향목 책상이 있고 자개 반짇고리가 있었다.

  그런 것이 왕의 눈에는 모두 청승스럽고 가엾게 보이셨다.

 왕도 불교의 수련이 없으심이 아니나 역시 중생은 쌍쌍으로 즐겨서 생생(生生)할 것이라고

 생각하셨다.

  “ 아가.”

하고 왕은 요석이 받들어 올리는 찻잔을 받아 한 모금 마시고 손에 드신 채로 요석을 부르셨다.

  “ 무슨 처분이시온지.”

  요석은 두 손으로 왼편 무릎을 안고 고개를 들어서 부왕의 반백 된 수염을 쳐다보았다.

  “ 너 지금 소원이 무엇이냐.”

  왕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 별 소원이 없사옵고, 오직 하나 소원은 상감마마께오서 만세 만세하심이옵니다.”

  요석은 이렇게 아뢰었다.

  “ 아니다. 네 효성은 이 몸이 안다마는 네 몸의 소원이 또 있을것인즉 거리낌없이 말해라.

    아비가 임금이 되었으니 네 소원 하나를 못 들어 주랴. 무엇이나 네가 원하는 바를 말하여 보아라.”

  “ 이뤄질 소원도 아니옵니다.”

  요석은 고개를 수그렸다.

  “ 이 세상에서 이 아비를 두고 이루지 못할 소원이 어디 있단 말이냐.

    하늘에 올라가서 별을 따오라 하면 그것은 못 이룰지 모르거니와.”

  “ 이 몸의 소원은 하늘에 올라가 별을 따기보다도 더 어려운 소원이옵니다.”

  왕은 차를 마시고 찻종을 요석에게 내어 주시며,

  “ 어디 네 소원 들어 보자. 이 아비가 못 이루어 줄 소원이 어디있겠느냐.”

하시고 왕후와 유신을 돌아보셨다.

 왕은 당신의 힘으로 될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것이 견딜 수 없는 욕인 것 같았다.

 일종의 분노까지도 느끼셨다.

  요석은 말이 없이 차를 만들고 있었다.

  “ 바로 아뢰어라.”

  왕후도 옆에서 재촉하셨다. 요석은 차를 만들던 손을 쉬고,

  “ 이 몸의 소원은 천하에 으뜸 가는 남자와 배필을 지어서 상감마마 다음에 으뜸 가는

아들을 낳아서 나라에 바치고 싶습니다.”

  이렇게 아뢰었다. 왕은 처음에는 귀를 의심하는 듯이 눈을 크게 뜨시더니,

곧 얼굴 가득 웃음을 띠우시며,

  “ 좋다. 네 뜻이 좋다. 그러면 네 의중(意中)에 사람이 있느냐.

 네 소원대로 이뤄 줄 터이니 말해 보아라.”

하시고 왕후와 유신을 돌아보셨다.

  왕후도 웃으시고 유신도 웃었다.

  요석공주는 잠깐 낯을 붉히더니,

  “ 의중에 사람이 있기는 하오나 하늘의 별과 같아서 손이 닿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아뢰었다. 왕은 웃음을 거두시며,

“ 웬말이냐. 이 나라 안에 있는 사람으로서 네 배필이 되라면 마다할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이냐.

  부끄러워 말고 바로 말해 보아라.”

하시고 위엄을 보이셨다. 요석은 새로 만든 차를 왕께 올리며,

  “ 그 사람은 하늘의 별이오니 혼자 생각만 하고, 일생을 보낼까 하옵니다.”

하고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쉰다.

  “ 그 사람이 누군데 그렇게 도저하단 말이냐.”

하시고 왕은 눈에 빛을 내이시며,

  “ 이 나라에서 내 말을 거역할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이냐. 설사 백제나 고구려라 하더라도

    네가 원하면 군사를 보내어 싸워서라도 네 원을 달하게 할 것이니 네 바로 말하여라.”

하시는 왕의 기색에는 분노하신 빛까지 있었다.

  요석은 차를 다 올리고 제자리에 물러와 앉으며 아뢰었다.

  “ 이 몸이 일념에 먹은 사람은 원효대사입니다.”

  “ 원효대사?”

  왕도 아니 놀랄 수 없으셨다.

  왕은 원효와 친교는 없었다.

  유신에게서 원효의 말을 들었고, 또 비녕자와 요석의 남편 거진의 시체와 그 종 합절의 시체까지도

  적진 중에 들어가서 가져왔단 말을 듣고 한번 치사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왕도 원효대사가 비범한 인물인 줄은 알고 있으셨다.

  “ 그래. 원효대사가 네가 원하는 사람이란 말이지?”

  왕은 그것이 될 일일까, 하고 약간 불안을 품으면서 물으셨다.

  “ 네.”

  요석은 옷깃을 여미며 대답하였다.

  “ 어떻겠소? 원효대사가 말을 들을 것 같소?”

  왕은 유신에게 물으셨다. 유신은 잠깐 생각하는 모양으로 고개를 숙이더니, 번쩍 들며 아뢰었다.

  “ 그러하올세, 원효대사는 계율을 고집하는 사람이 아니라 술을 주면 술도 마시고 고기를 주면

     고기도 먹는 것은 보았소만, 혼인에 이르러서는 어떠하올지.”

  “ 그, 어디 말해 보시오. 한불손은 예로부터 원효대사와 친교가 있지 않소?

     요석이 다시 혼인을 한다는 것이 경사가 아니오? 평생 내 가슴에 못이 되었으니.”

  왕은 이렇게 말씀하시고 요석을 보신다.

  왕후도 간청하는 눈으로 유신을 본다.

  “ 분부대로 원효대사를 만나서 말씀은 하오리다마는 되고 안되는 것은 장담할 수 없소.

    원효란 제 마음이 나면 무슨 일이라도 하겠지만 제 마음에 없는 일은 하늘이 명하셔도

    안 들을 위인이오.”

  “ 그렇게 도저하오?”

  왕은 찬탄하신다.

  “ 아직 젊은 중이지만 아마 천추에 이름을 전할 명승이리다.”

  “ 그런 사람이 우리나라에도 좀 많이 났으면 좋겠소. 그저 사람이야, 사람의 힘이야.”

 하시고 잠깐 말을 끊으시고 일을 경영하시는 왕은 하늘이 이 나라에 큰 사람을 많이 내리시기를

 염하신 뒤에,

  “ 아무려나 한불손이 한번 원효대사를 만나 보시오. 그래서 안되면 다른 수를 쓸 테니.”

  왕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러한 일이 있어서 왕은 문수사에 원효가 쓸 물건을 보내신것이었다.

  왕은 따님 요석공주의 원도 풀 겸, 원효를 시험도 할 겸 이 일에 대하여서 많은 흥미를

  가지시게 되었다.

  왕은 원효가 당신과 일종의 씨름을 하시는 것 같이 생각하였다.

  원효대사는 왕이 보내신 물건을 받고는 혼자 빙그레 웃었다.

  자기 몸에 장차 큰 시험이 올 것을 예기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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