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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대사/1. 제행무상(諸行無常)

오늘의 쉼터 2009. 6. 27. 20:00

 

1. 제행무상(諸行無常)


 때는 일천 이백여 년 전. 신라(新羅) 서울 서라벌.

꽃구경하는 삼월 보름도 지났다.

 아리냇가의 버들과 느릅나무에 연한 잎이 나불나불 봄볕을 받을 때다.

십칠만 호라는 서라벌 후원의 뜰 가와 담 밑의 살구, 복숭아, 이스랏꽃도 졌다.

 달잣(月城) 대궐 숲속에서 이른 꾀꼬리 소리도 울려나올 때인데 서른한 살 되시는

여왕 승만(勝曼)마마의 병환으로 서라벌의 봄은 수심에 잠겨 있었다.

스물네 살의 처녀의 몸으로 신라의 임금이 되신 승만마마는 백성들의 사모함을 받으셨다.

 키가 훌쩍 크시고, 얼굴이 달 같으시고, 팔이 길어 무릎까지 내려오고,

어려서부터 불도를 존숭하셔서 혼인도 아니 하신 것이며, 즉위하시는 길로 전 임금이시자

사촌 언니인 선덕여왕(善德女王)을 폐하려고 모반하였던 상대등 비담(上大等毗曇), 염종(廉宗)이하

삼십 명에게 단연히 사형의 처분을 내리신 것이며, 즉위하신 첫해 겨울에 무산(茂山), 감물(甘勿),

동잠(桐岑), 싸움에 유신(庾信)을 보내시어 백제군을 대파하고 삼천여 급을 벤 것이며,

또 이듬해 봄에는 백제 명장 의직(義直)의 군사를 요거(腰車)에서 참멸한 것이며, 이러한 일들이

젊은 여왕은 선덕여왕보다도 더 힘차고 나라를 빛낼 임금이 되시리라 백성들이 촉망한 것이었다.

 더구나 즉위 오 년에 조원전(朝元殿)에 높이 앉으셔서 백관의 정초 하례를 받으실 때에는,

 누구나 그를 스물여덟 살의 여자라고 생각할 수 없으리만큼 위엄이 있으셨다.

 비담이 선덕여왕을 폐하려 한 것은 왕이 여자이기 때문에 이웃 나라에서도 만만히 보고,

또 국내에서도 위령이 행하지 못한다는 까닭이었으나 승만마마의 정사 하는 것을 보고는 아무도

그가 여왕이라 하여 만만히 볼 수가 없었다.

 왕도 그이 이름이 승만인 것과 같이 승만부인을 본받으려 하셨다.

 승만이란 승만경에 나오는 주인공이다.

석가 세존 시대에 파사닉(波斯匿)왕의 따님으로서 아유사(阿踰舍)국 왕에게 시집을 간 이다.

파사닉 왕이 마리부인과 더불어 세존의 가르침을 받아 불법에 귀의하매,

그 따님 승만부인에게 편지를 보내어 불법을 믿으라 권하고, 승만부인은

아버님 어머님의 편지를 받자 곧 불법에 귀의할 마음을 발하여서 세존을 아유사국으로 모셔다가

불법을 들었으니,

그 설법을 적은 것이 승만경이다.

 승만부인은 세존의 설법을 듣고는 환희심을 발하여서 삼대원 십대수(三大願十大守)를 발하였다.

삼대원이란,

첫째, 내 몸이 바른 법의 지혜를 얻고,

둘째, 남에게 이 바른 법을 설하고,

셋째, 바른 법을 호지(護持-쇠하지 않도록 지킨다는 뜻)하리라 함이오.

십대수(十大守)라는 것은,

일, 부처님 계(戒)를 범치 아니하리라.

이, 높은 이에게 대하여 교만한 생각을 일으키지 아니하리라.

삼, 중생(衆生)에대하여 성내지 아니하리라.

사, 남을 미워하지 아니하리라.

오, 탐내지 아니하리라.

육, 나를 위하여 재물을 쌓지 아니하리라.

칠, 일체중생을 건지리라.

팔, 외롭거나 갇히거나 병나거나 하여 고난 받는 중생을 안온하게 하리라.

구, 옳은 일에 반항하는 중생들은 절복(折伏)하고, 순종하는 자는 섭수(攝受)하리라.

십, 바른 법을 받아 잊지 아니하리라, 하는 것이다.

왕은 승만부인의 이 삼대원 십대수의 정신으로 나라를 다스려보리라고 젊은 여자의 생각으로

굳게 결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왕은 병환이 심중하셨다.

아직 마음에 먹으신 뜻을 펴기 시작하기도 전에 병이 드신 것이었다.

서라벌 어느 절에서는 여왕 승만마마의 어평복을 기원하지 아니 하였으랴.

더욱이 왕의 스승이요,

지도자인 자장율사(慈裝律師)는 대궐에서 물러나오지도 아니하고 있는 비밀법을 다하여서

왕의 병마를 쫒으려 하였다.

 

원효(元曉)가 팔 년째나 화엄경소(華嚴經疏)를 쓰고 있는 분황사에도 이 아낌받는 여왕의

어평복 기원이 날마다 있었다.

지난밤에도 밀본대사(密本大師)가 도사가 되어서 호마(護摩)를 수(修)하였다.

진언비밀법(眞言秘密法)이다.

원효는 이것을 즐겨하지 아니하였으나, 임금을 위한 기원의 자리인지라 정성스럽게 참예하였다.

일찍이 선덕여왕이 병환으로 계실 때에 밀본이라는 중이 약사경(藥師經)을 읽어서

귀신을 쫒아버려서 여왕의 병환이 나으신 일이 있다고 하여서 당시에는 진언비밀의 법이

성행하였던 것이다.

밀본법사의 호마가 끝나자 원효는 잠자코 처소인 무애당(無碍當)으로 돌아왔다.

무애당은 분황사 법당 동북쪽으로 따로 떨어져있는 한 채로서 일찍이 지명대사(智明大師)가

거처하던 곳이다.

 원효는 처음 화엄을 배우기를 지명대사에게서 하였다.

그러한 인연도 있고 또 조용한 품이 저술하기에 합당도 하여서 원효는 주실(籌室)도 마다하고

이 외딴 곳에 거처하는 것이었다.

무애당은 방 셋으로 된 작은 채였다. 한 방에는 문수보살(文殊菩薩)상과 화엄경을 모시고,

한 방에는 원효가 거처하고, 또 한 방에는 원효를 시봉하는 상좌 심상(審詳)이 거처하였다.

무애당이라는 당호는 원효 자신이 지어서 자필로 써서 문미 위에 붙인 것으로 화엄경의

‘ 일체무애인 일도출생사’ 一切無碍人 一道出生死

(모든 것에 걸림이 없는 사람은 단번에 생사를 벗어나리라)라는 데서 따서 쓴 것이니

 무엇에나 거칠 것이 없어야 나고 죽는 데서 벗어난다는 뜻이다.

원효는 이 ‘ 무애’ 라는 말을 즐겨하였고 자기도 ‘ 무애 ’를 수행의 목표로 삼았다.

방안에는 가무스름한 감나무 경상 하나와 차를 끓이는 질그릇 화로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경상 위에는 지필묵뿐, 그리고 등경.

심상은 원효의 가사와 장삼을 받아서 걸고 자리를 깔고는,

“ 스님, 안녕히 주무시오.”

하고 합장례를 하고 물러나갔다.

원효는 자리에 누웠다. 원효는 마지막으로 왕께 뵈온 때를 생각하였다.

그것은 지난 삼월 삼짇날. 왕은 칙사를 분황사에 보내시어 원효를 청하였다.

화엄경 십지품(十地品)의 법회를 연 것이었다.

그날은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원효는 위에서 보내신 흰 소를 메운 수레를 타고 사도대궐로 들어갔다.

왕은 침전에 계셨다. 법회라 하여도 모인 사람은 너댓 명뿐이었다.

 왕의 생모 되시는 월명부인月明夫人, 춘추공의 부인인 문명부인文明夫人, 춘추공의 며느님이요,

장차 문무왕文武王의 왕후가 되실 자의부인慈儀夫人, 유신의 부인, 문명부인의 따님이요,

장차 요석공주瑤石公主라고 일컬어질 아유다부인 등이었다.

춘추공은 장차 태종 무열왕(太宗武烈王)이 되실 이로,

유신공과 함께 당시 신라의 두 기둥이었다.

춘추공의 부인인 문명부인은 유신의 누이로서 그 어머니 만명(萬眀)과 함께

미인으로 이름이 높은 이였고, 그의 따님인 아유다도 그 어머님의 아름다움을 닮아서

전국에 이름이 높은 미인이었다.

춘추공의 아름다운 따님 아유다가 당시 화랑들의 사모의 표적이 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중에 충, 효, 신, 용, 인(忠孝信勇仁 )화랑 오교(花郞五敎)를 겸전하였다는

거진랑(擧眞郞)과 관창랑(官昌郞)이 아유다의 배필로 경쟁자가 되었다가,

마침내 거진랑이 이겨서 아름다운 아유다를 아내로 삼게 된 것이 팔 년 전이었다.

그러나 거진은 무산 싸움에서 백제군과 싸워서 그 아버지 비녕자(丕寧子)와 함께

장렬하게 전사하여 신라군의 사기를 격발함으로서 마침내 백제군을 깨뜨린 기운을 지은 것이다.

그때의 공을 왕께 여쭈어서 왕은 이 부자를 위하여 우시고,

그 때문에 아유다를 더욱 어여삐 여기시고 친따님같이 사랑하셔서 언제나 곁에 두신 것이었다.

이러한 모임은 실로 흔히 볼 수 없는 아름다운 모임이었다.

 당시 신라의 미인이 한자리에 모인 셈이었다.

 

원효가 심상을 뒤에 세우고 들어서자

왕도 옥좌에서 일어나 합장하며 법사에게 경의를 표하셨다.

문명부인 이하는 모두 합장하고 법사를 향하여 배례하였다.

임금님과 부모와 스승을 높이는 것이다.

원효는 미리 준비하여 놓은 법사의 자리에 앉았다.

그때에는 왕은 조금도 병색이 없으셨다.

보름달과 같이 둥그스름한 얼굴, 훌쩍 크신 키, 드리우면 무릎까지 내려오는 팔,

어글어글하고도 가느스름한 눈, 불그레한 입술, 부드럽고도 힘 있는 음성,

왕은 그중에서 가장 아름다우셨다.

그러나 한 송아리 금방 핀 아침 연꽃 같은 이는 아유다였다.

나이도 그중 젊거니와, 그 눈썹과 눈은 같은 여성으로도 마음을 아니 움직일 수 없었다.

게다가 그 어머니 문명과 외조모 만명의 열정을 받은 사람이다.

그 외할머니 만명은 갈문왕 입종(葛文王立宗)의 손녀로서 조부를 뵈러 온

화랑 서현(舒玄)을 길에서 한번 보고 사랑이 생겼다.

이 서현이라는 이가 유신의 아버지다.

그때에 서현이 만노군 태수(萬弩郡太守)가 되어 서라벌을 떠나게 된 때에

비로소 만명이 서현과 연애하는 일이 발각되어 만명은

그 아버지 숙흘마로[肅訖宗]의 노염을 받아서 별제(別第)에 갇히고

사람의 지킴을 받았으나 만명은 수챗구멍으로 빠져 도망하여 애인 서현을 따라갔다.

이리하여 유신과 문명의 어머니가 된 것이었다.

또 문명부인이 춘추와 혼인한 것은 이러하였다.

같이 문노(文弩)의 문인으로 춘추와 유신이 화랑의 수행(修行)을 할때에

하루는 둘이서 무예를 익히다가 유신이 춘추의 옷을 밟아터지자

유신은 춘추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서 누이 문명을 불러서 그 터진 옷을 깁게 한 것이었다.

이때에 서로 보고 사랑하여서 문명은 춘추에게 시집을 가게 된 것이요,

이 사랑하는 부부의 사이에서 난 이가 장차 신라의 가장 전성시대의 왕이 되실

법민(法敏)과 요석공주 아유다였다.

이러한 피를 받은 아유다다.

아유다의 언니 고조다는 남편 품석(品釋)을 따라 동잠성을 지키다가 백제군과 싸워

죽을 때에 함께 죽었다.

이러한 피를 받은 아유다다.

게다가 아유다가 전몰한 용사의 과부라는 것이 더욱 아름다움을 더하는 것 같았다.

원효는 심상이 받들어 올린 화엄경 제이십이권, 십지품을 펴 놓았다.

“ 그때에 세존이 타화자재천왕궁 마니보전(他化自在天王宮摩尼寶殿)에 계시며

   대보살중과 함께 하시더니.”

하는 십지품 첫 구절이 눈에 띄었다.

원효는 이 자리가 마니보전인가 하였다.

신라 왕궁에서, 왕의 앞에서 십지품을 설하는 것은 큰 인연이라고 원효는 생각하였다.

원효는 합장 명목하고 세존과 금강장보살(金剛藏菩薩)을 염하였다.

경상 앞의 향로에서는 향연이 올랐다. 방안에는 향기가 가득 찼다.

“ 무상심심미묘법 백천만겁난조우 아금문견득수지 원해여래진실의

  無上甚深微妙法 百千萬劫難遭遇 我今聞見得受持 願解如來眞實意

(높고 깊은 이 법을 만겁 간들 만나리 보고 듣고 받으니 참뜻 알게 하소서).”

원효의 입을 따라서 왕 이하 모두 정성스럽게 개경게(開經偈)를 외웠다.

“ 십주(十住), 십행(十行), 십회향(十回向)의 삼현위(三賢位)를 선하여

가행방편(加行方便)을 끝내었으니 본회에서는 입증성과(立證成果)의 뜻을 밝히는 것이오.”

하고 원효의 설법이 시작되었다.

초발심(初發心)으로 이기적 개인적 좁은 욕심을 버리고 동포를 사랑하는

대비심(大悲心)을 발하는 데서 중생은 범부지(凡夫地), 즉 보통 사람의 경계를 떠나서

보살위- 즉 중생을 위하여 사는 깨달은 자의 자리에 오르는 것이다.

“ 대비심이 머리가 되고 직심(直心)과 심심(深心),

  즉 곧은 마음과 깊은 마음으로만 살아갈 때에 우리 힘은 부처님의 힘과 같은 것이오.

  곧은 마음이란 거짓 없고 속임 없는 마음이오.

  깊은 마음이란 언제까지나 변함도 없고 다함도 없는 마음이란 말이오.

  이 세가지 마음으로 하여서 우리는 여래종(如來種), 즉 부처의 씨가 되는 것이오.

이리하여서 한 번 여래종에 들면,

육도만행(六度萬行)을 닦아서 필경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 阿뇩多羅三藐三菩提=無上正覺을 얻어서 성불,

즉 내 몸이 부처가 되는 것이니,

이렇게 마음을 발할 때에 우리는 환희지歡喜地 라는 자리에 올라서 보살이 되는 것이오.

어찌하여 환희지인가.

보살이 환희지에 거하면 기쁨이 많고, 믿음이 많고, 깨끗함이 많고, 즐거움이 많고, 유함이 많고,

참고 견딤이 많고, 다투기를 즐겨하지 아니하고 늘 생각하는 것이 부처님네들이오.

부처님네의 가르치신 법이오. 부처님네의 높은 제자들이니 기쁘고,

범부의 지저분한 경계를 벗어나서 지혜지에 가까우니 기쁘고,

모든 악도를 끊고 일체중생의 의지(依支)가 되니 기쁘고, 항상 부처님네를 뵈오니 기쁘고,

제 마음에 부처님네의 경계가 나타나니 기쁘고, 모든 보살의 수에 드니 기쁘고,

살아가기 어렵다는 무서움[不活畏), 천대받는 무서움[惡名畏], 죽는 무서움[死畏],

악도에 떨어지는 무서움(墮惡道畏], 대중을 두려워하는 무서움[大衆威德畏]을

모두 멀리 떠날 수가 있는 것이오.”

하고 원효는 일단 소리를 높여서,

“ 보살이 이미 내라, 내 것이라 하는 생각을 떠났거니 세상에 탐낼 것이 무엇이며

무서워할 것이 무엇이랴. 내라는 생각을 멀리 떠났으면 죽음은 다 무엇일꼬.

설사 이 몸이 죽는다 하더라도 내 이미 아상(我相)을 끊었으니 태어나는 곳마다

재불보살과 함께 할 것이니 죽는 것이 무슨 걱정이랴.

또 보살의 대원이 고작 높은 원이거니 세상에 누구를 무서워하랴.

천하게 내어놓아도 내 원같이 높고 바른 원은 없을 것이라,

그러한 말씀이오.”

하고 환희지의 경문을 읽어 가며 해석한 뒤에,

원효는 경을 덮어놓고 왕과 대중을 바라보며, ...

 

“ 그러므로 우리 중생을 얽매는 것이 오직 아상이란 말이오.

 내라 내것이라 하는 생각이 우리를 얽어매어서 날마다,

시각마다 생로병사(生老病死)의 모든 괴로움을 되풀이한단 말씀이오.

한번 우리가 아상을 떠나서 중생을, 동포를 사랑하는 마음을 발할 때에

우리는 벌써 삼계(三界)에 거칠 것이 없는 보살이 되는 것이오.

이런 경계를 일러서 환희지라 하고 여래종이라 하는 것이오.

 이때 부터는 내가 하는 모든 일이 육도만행의 보살행이라,

 나를 위하여서 하는 일이 아니라 중생을 위하여서 하는 일이기 때문에

거기는 벌써 걱정, 근심, 두려움, 무서움이 없고 사는 것도 없고 죽는 것도 없는 것이란 말이오.

이런 것을 일러서 일체무애인(一切無碍人)이 일도출생사(一道出生死)라 하는 것이오.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 시생멸법(是生滅法)이니

생멸멸이(生滅滅已)하면 적멸위락(寂滅爲樂)이란 것도 이를 두고 이른 말씀이오.

적멸이란 저를 위한 모든 욕심이 스러져서 다시 아니 일어나는 것을 이른 것이오.

이렇게 되고나서 비로소 충도 하고 효도 하고 부부도 되고 붕우도 되고 용사도 되는 것이라,

저라는 생각이 있는 충효가 어디 있으며, 신의는 어디 있으리.

그러므로 불법이 흥하면 나라가 흥하고, 불법이 쇠하면 나라가 망한다 한 것이오.

가령 거진랑의 충의로 보더라도 그러한 것이오.”

 할 때에 아유다는 꿈에서 깬 것같이 죽은 남편을 생각하였다.

남편이라야 진실로 짧은 인연이었다.

혼인한 지 사흘 만에 거진은 유신의 휘하로 그 아버지 비녕자를 따라서 출정한 것이었다.

 왕과 문명부인의 눈도 아유다에게로 쏠렸다.

 원효도 아유다를 보았다.

거진랑이나 관창랑이나 다 화랑시대에는 원효와 함께 문노(文弩)의 문인이었다.

 더구나 동잠성 싸움에는 원효도 거진과 함께 출정하였었다.

 원효도 거진 부자의 장렬한 광경을 목격한 사람 중 하나였다.

거진 부자와 그의 종 합절(合節)이 전사한 곡절은 이러하였다.

 왕이 즉위하신 첫해 정미년 시월에 백제 병사가 무산, 감물, 동잠 세 성을 포위하였다.

왕은 유신을 보내어서 보병, 기병 합하여 일만 명으로 이것을 막게 하셨다.

그런데 백제 병사의 세력이 강하였다. 의직, 계백(階伯)같은 명장이 있었던 것이다.

 신라군은 많은 손해를 당하고 패퇴하지 아니하면 아니 될 경우를 당하였다.

 신라병은 싸울 뜻을 잃었다.

 유신은 원효에게 이 국면을 타개할 만한 인물을 물었다. 원효는 비녕자를 천하였다.

 유신은 비녕자를 여러 막료들이 있는 자리로 불러서,

“ 지금 일이 급하오. 그대가 아니고야 뉘 있어 좋은 계교를 내어서 군사의 마음을 격려하겠소.”

하고 술을 권하였다.

 비녕자는 유신의 말을 듣고 일어나 두 번 절하고, 이렇게 말하였다.

“ 다른 사람이 많이 있건만 홀로 내게 이 일을 부탁하시니

   나를 알아 주신 것이라 죽음으로써 이 지기의 은을 갚사오리다.”

 이렇게 유신에게 말하고 장영에서 물러나와 그의 종 합절을 불러,

“ 내가 오늘 위로는 나라를 위하고, 아래로는 지기를 위하여 죽을 터이다.

막위(幕尉) 거진이 비록 나이 어리나 충효의 뜻이 장하니 필시 아비를 따라서 죽으려 할 것이니,

 만일 부자가 다 죽으면 가족이 누구를 의지하겠느냐.

그러니 너는 거진과 더불어 내 해골을 거두어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서 늙으신 부인마마의

마음이나 위로하게 하여라.”

하고 말이 끝나자 창을 비껴들고 적진으로 달려들어가 적병 수명을 죽이고 전사하였다.

 합절은 이것을 보던 거진의 말고삐를 붙들고 말렸다.

 “ 화랑님, 안 되십니다.

   선장군마마께서 소인께 분부하시기를 화랑님을 모시고 돌아가

   노부인마마를 위로하시게 하여 드리라 하셨습니다.

   아들로서 엄명을 어기고 노부인의 사랑을 저버리심이 효도라 하오리까.”

하고 말고삐를 놓지 아니하였다.

거진은,

“ 아비 죽음을 보고도 구구히 살면 효도라 하겠느냐.”

하고 칼을 빼어 합절의 팔을 끊고 적군 중으로 달려 들어가 싸워 죽었다.

이것을 보고 합절은,

“ 두 상전이 돌아가셨으니 내 살아 무엇하랴.”

하고 또한 적진으로 달려나가서 한 팔로 싸우다 죽었다.

 신라 군사는 이 세 사람이 죽는 것을 보고 감격하여서 서로 앞을 다투어 적진으로

달려들어가서 마침내 크게 백제군을 깨뜨리고 적병 삼천여 급을 베었다.

 유신은 크게 애통하여서 세 사람의 시체를 거두어 후히 장사하고

여왕 승만마마는 이 말을 들으시자 눈물을 흘리시고

세 시체를 반지산(反知山)에 합장케 하시고 비녕자의 처자와 구족(九族)에게

큰 상을 내리시었다.

이것이 거진의 사적이다.

 그러므로 원효가 거진의 말을 할 때에 왕이나 문명부인이나,

또 아유다나 다 팔 년 전 일을 회상한 것이었다.

 

원효는 한참이나 잠자코 있다가,

“ 원래 불도의 진면목은 아상, 즉 저라고 하는 것을 버리는 데 있는 것이오.

저란 무엇인가. 이 늙을 몸이요, 병들 몸이요, 죽을 몸이요, 썩어버릴 몸이오.

이것을 아무리 비단으로 싸고 고량진미로 기르더라도 이몸은 조만간 스러질 몸이오.

그러나 그뿐인가, 이 몸의 오욕(五慾)으로 하여서 저를 괴롭게 하고 중생을 괴롭게 하는

온갖 죄를 지어서는 무량겁에 지옥, 아귀, 축생의 보(報)를 받는 것이오.

그러면 이 몸을 무엇에나 쓸 것인가.

임금께 충성하기에, 부모께 효도하기에, 불쌍한 중생을 돕기에 쓸 것이란 말씀이오.

마치 기름으로 불을 켜서 어두운 세상을 밝히기에 쓰는 것과 같은 것이오.

서방정토 극락세계에 왕생(往生)하기를 바라는 것이 만일 저 한 몸의 안락을 위하는 것이라 하면

그것은 사도(邪道)요, 불도가 아니오. 저 한 몸의 안락을 바라는 자가 돌아갈 곳이 있으니

그것은 곧 삼악도요.”

 여기 이르러 왕의 눈이 빛났다. 원효는 법설을 그치고,

“ 중생무변서원도 번뇌무진서원단 법문무량서원학 불도무상서원성”

  衆生無邊誓願度 煩惱無盡誓願斷 法門無量誓願學 佛道無上誓願成

 (중생을 다 건지오리다. 번뇌를 다 끊으오리다. 법문을 다 배우오리다. 불도를 다 이루오리다.)

하는 사홍서원(四弘誓願)을 외웠다. 왕과 일동도 따라 외웠다.

“ 대사의 설법을 듣잡고 참으로 미증유한 환희를 얻었소.”

하고 왕은 합장하고 다른 이들은 이마를 방바닥에 붙이도록 원효에게 고마워하는 절을 하였다.

 팔 년 전 승만마마가 처음 왕이 되신 때에,

원효가 승만경을 설 할 때보다 원효도 노성하였거니와 왕도 노성하셨다.

 왕은 아직 나이로 말하면 서른을 얼마 아니 넘으셨건마는 원채 숙성하신데다가

오래 국왕의 자리에 계신 것이 더욱 그를 노성 하시게 한 것이었다.

왕은 차를 내오고 당나라에서 온 밀전당과 같은 것을 원효에게 권하셨다.

“ 다들 자시오. 아유다도 먹어라.”

이렇게 왕은 당신이 왕이신 것을 잠시 잊은 듯 일일이 권하셨다.

“ 이 차는 한다(漢多)요.”

 왕은 이런 말씀도 하셨다. 이때에 당나라와 사이에 해마다 사신이 내왕하고

유학생과 상고들의 왕반이 빈번하여서 당나라에 있는 것이면 없는 것이 없었다.

더구나 당나라 조정에서도 해마다 여러 가지 진품의 선물이 있었던 것이다.

 차를 마시고 사람들의 기분이 적이 풀렸다.

법설을 듣기에 지극히 엄숙하였던 것이 풀려서 다시 남자는 남자로 여자는 여자로,

사람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 자주 대사의 가르치심을 받을 마음은 간절하나 만기(萬機) 매양 바쁘고,

또 비록 대사는 스승이시고 나는 임금이라 하더라도 남녀의 별이 있어서

꺼리는 바가 없지 아니하였소.

그러하던 차에 오늘은 웬일인지 꼭 대사를 뵈어야만 될 것 같아서 이렇게 오시기를 청하였더니,

대사의 법설을 듣고 나니 사대육진(四大六塵)이 모두 청정하여지는 것 같소.

모두 불보살님의 위신력이요, 대사의 도력이시오.”

 이런 말씀을 하시는 왕의 얼굴에는 여성다운 수줍음조차 있었다.

“ 상감마마 은덕으로 이 몸들도.”

하고 문명부인이 엎드려 절하고, 상감을 우러러보았다. 부인의 머리에는 희끗희끗 백발이 보였다.

 원효는 눈을 내리깔고 듣기만 하고 있었다.

또 한 순차가 돌았다. 비는 더욱 내리고 바람도 불어 풍경 소리가 어지러웠다.

“ 어, 비바람이 대단하군.”

왕이 고개를 남창 쪽으로 돌리실 때에 당나라 복색을 입은 궁녀가 상감의 뜻을 알아서 창을 열었다.

 일동의 눈은 내려 들이치는 빗발과 그로 하여서 뽀얗게 희미하게 보이는 남산으로 향하였다.

 왕은 이윽히 바람에 비끼는 비를 바라보고 어지러운 비바람 소리에 귀을 기울이시더니

빙그레 웃으시며,

“ 가지 끝에 지다 남은 꽃송이들도 이 날 하루 비바람에 다 지고 말겠구나.”

하고 한탄하셨다. 왕은 다정다감하신 시인이기도 하셨다.

왕이 당태종(唐太宗)에게 보낸 시는 당나라에서도 유명하였다.

“ 그러니 제행무상이지요.”

왕의 말씀에 문명부인이 화하였다. 문명부인도 노래를 짓고 부르고 풍류를 아는 이였다.

그 남편 춘추공이나 오라버니 유신공이나 다 한다 하는 화랑이었다.

화랑의 수양 과목 중에 노래, 음악, 춤 같은 풍류도 주요한 것이었다.

오라비나 남편이 흥에 겨워서 춤을 추려 할 때에 거문고로 장단을 맞추어 주는 것쯤은

누이나 아내가 으레 하는 일이었다. 원효도 물론 본래는 화랑으로서 그만한 풍류는 알았다.

“ 선선하다. 창을 닫아라.”

왕은 이렇게 명하셨다.

왕은 이상하게 몸이 오싹하고 마음이 설렘을 느꼈다.

 

왕은 더운 차를 한 잔 더 따르라 하여 마셨다.

그래도 속이 떨리는 것이 가라앉지를 아니 하였다.

“ 신기가 불편하시오니까.”

문명부인이 왕께 이렇게 여쭐 만큼 왕의 안색이 변하였다.

원효가 보기에도 왕은 무슨 고통을 당하는 것 같았다.

몸의 고통보다도 마음의 고통을 당하는 것 같았다.

그 괴로워하는 얼굴에는 더욱 여성다움이 보였다.

 그 고통의 원인은 무엇인가. 끊임없이 엄습하여 오는 백제군인가.

백제왕은 근년에 주색에 침면하여 놀기만 한다고 하지만

그래도 그는 범상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 밑에는 성충(成忠), 흥수(興首)같은 문무에 빼어난 좌평(佐平)이 있었고,

의직, 계백과 같은 명장이 있었다. 더구나 계백은 신라 군사들의 두려움이었다.

 춘추와 유신 같은 큰 기둥이 신라에 있으나 백제는 신라에 있어서는 무서운 존재였다.

한 해에도 몇 차례씩 백제군은 신라에 쳐들어왔다.

 백제에 염탐하러 갔던 중 도옥(道玉)의 보고에 의하면 백제에서는

성충과 흥수가 합작하여서 굉장히 군사를 모아서 훈련하고 또 병기를 만들고 있다고 하였다.

 성충과 흥수는 춘추와 유신이 비범한 인물인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그들이 세력을 크게 이루기 전에 신라를 쳐 멸하여서 영원히 화근을 끊으려 하였다.

 도옥의 보고에 의하면,

신라가 당나라와 맺어서 당병을 청하여다가 백제를 침범하려 한 것과,

신라가 제 연호를 폐하고 당나라 연호를 쓴 것과 왕 이하로 당나라 관복을 입게 된 것 등을

대단히 불쾌하게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승만마마가 임금이 되시자 안으로는 자장율사가 모든 것을 당을 본받고

당에 의지할 것을 주장하였고, 춘추도 백제를 누르려면

당의 힘을 빌지 아니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왕 이년 삼월에, 즉 거진 부자가 용장하게 싸워 죽은 이듬해에 백제군이 또 쳐들어왔다.

 유신은 이것을 쳐물렸으나 백제가 반드시 더욱 큰 힘을 가지고 습격하여 올 것을 기다리게 되었다.

그래서 춘추와 그 작은아들 문왕(文王)이 당나라에 청병하러 갔다.

 당태종은 고구려를 치다가 안시성(安市城)싸움에 양만춘(楊萬春)에게 대패하여

화살을 맞아 한쪽 눈이 애꾸가 되었으나 그 야심은 줄지 아니하였다.

마침 신라의 종실이요,

중심 인물인 춘추가 오는 기회를 타서 먼저 신라를 제 손에 넣으려 하였다.

그래서 춘추 부자를 우대하였다. 광록경 유형(光祿卿柳亨)을 십 리 밖에 마중 보내어서 춘추 일행을

 영접케 하고 태종이 자기가 손수 지은 온탕(溫湯)을 대접하고, 또 금과 비단을 선사하였다.

 춘추의 청병은 성공하였다.

그 대신 춘추는 태화(太和)라는 신라의 연호를 폐하고 당나라 연호를 쓸 것,

궁중 관복을 당제로 고칠 것을 약속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춘추는 그 아들 칠형제를 모두 당나라에 보내어 국자감(國子監)에서 공부를 시킬 것

까지 약속하였다.

 이리하여 당나라 서울 장안을 떠날 때에,

당 태종은 조서를 내려서 삼품(三品) 이상 관이 총출석하여 대연회에 배석하여 춘추를 전송케 하였다.

당나라 역사에도 우례 심비(優禮甚備)라고 적을 지경이었다.

 이 소문을 들은 고구려는 수군으로 하여금 춘추가 타고 돌아오는 배를 습격하여 춘추를

잡아 죽이게 하였다.

춘추의 수원(隨員)인 온군(溫君)이 춘추의 의관을 입고 배 위에 앉았다가 대신 잡혀 죽고

춘추는 살아 돌아왔다.

그러나 춘추의 이번 길의 성공(?)은 다만 고구려를 격분케 할뿐 아니라,

 백제도 크게 자극하였다.

백제는 일본에 가 있는 왕자 풍(豊)에게 은솔(恩率) 벼슬을 가진 복신(福信)을 보내어

천황께 신라와 당이 연합하여서 백제를 범하려 한다는 연유를 상주하여 구원을 청하게 하였다.

 이런 소문 저런 소문이 모두 다 왕의 근심이 아니 될 수 없었다.

왕은 잠시 원효의 법설을 들어 모든 것을 잊으셨다가 불현듯 나라의 위태함을 생각하셨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욱 왕의 마음을 불편케 하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곧 춘추의 일이다.

 춘추의 세력이 점점 커질수록 왕의 위신이 떨어졌다.

춘추는 신라의 명맥이 제 손에 달린 것으로 생각하고 근년에 와서는 차차 왕을 누르는 기색을 보였다.

 더구나 법흥왕(法興王) 때부터 써오던 신라의 연호를 폐하고 당나라의 정삭(正朔)을 받는 일은

신라를 당나라의 속국을 만드는 일이거늘 춘추가 자의로 당태종과 약속을 하였고,

또 그와 함께 당태종이 내린 면복(冕服)을 왕더러 입으라고 강청하였다.

그때 왕은 모든 신하가 있는 자리에서 춘추를 향하여,

“ 경은 이번에 당나라에 특진(特進)이 되었다더니 이제는 내 신하가 아니고 당나라 신하냐.”

하고 어성을 높이셨다 하는 말이 항간에까지 들렸다.

그러나 춘추의 세력은 움직일 수가 없었다.

“ 여왕으로는 안 된다.”

“ 춘추공이 왕이 된다.”

이러한 소리가 동요 모양으로 돌아다녔다.

오늘도 낮이 넘도록 왕에게 정사를 품하는 대신도 없었다.

“ 신라는 기울어진다.”

왕의 가슴에는 이러한 아픔이 있었다.

원효는 일어나 물러나오려 하였으나 왕은,

“ 대사를 다시 청해 뵈옵기도 어려우니, 좀더 나를 가르치고 가오.”

하고 만류하였다.

원효도 왕에게 대하여 차마 떠날 수 없는 듯한 무엇을 느꼈다.

왕은 술을 내오라 하였다.

“ 대사, 허물 마시오. 이 몸이 술이 먹고 싶으오.

  술을 먹으면 계를 깨뜨리는 것이지만 허물만 안 지으면 상관 없겠지.

  마침 오늘은 자장대사도 안 계시니 한잔 먹읍시다.”

술이 나왔다.

 물론 고기 안주는 아니 나왔다. 대추나 밤뿐이었다.

원효도 술을 마셨다.

 서너 순배 돌아가자, 사람들의 마음이 더욱 풀렸다.

왕의 낯에도 발갛게 화색이 돌았다.

“ 아유다, 거문고를 한 가락 타라.”

왕은 이러한 분부를 내리셨다.

“ 가얏고가 어떠하올지.”

아유다가 아뢰었다.

“ 가얏고? 가얏고도 좋지.”

하시고 노랫조로,

“ 열두 줄은 열두 달 셋째 줄이 삼월인가 삼월이라 삼짇날 꽃 날리는 비바라.”

하시더니 가볍게 무릎을 치시며,

“ 그래 가얏고를 타라. 사다함(斯多含)이 어떨고? ”

하시고 희고 가는 손가락으로 줄을 고르는 아유다를 보셨다.

“ 사다함을 타오리다.”

가얏고 줄 고르는 소리에 사람들의 마음은 지금까지 눌렸던 무거운 감정에서 해방된 것 같았다.

‘ 사다함’ 이란 가락은 화랑 사다함을 읊은 것이다.

사다함은 내물왕(奈勿王)의 칠세손이요, 급손 구리지(級飡 仇梨知)의 아들이다.

귀한 집 아들로 어려서부터 불도를 배우고 또 화랑이 되어서 그 나이 열일곱에 벌써 천여 명의

문도(門徒)가 있었다. 그 문도들은 다 사다함에 심복하였다.

진흥왕이 이손 이사부(伊飡異斯夫)에게 명하여 가라(加羅)국을 치게 할 때에 사다함은 종군을

청하였으나 왕은 사다함이 아직 나이 어리다 하여 허락치 아니하였다.

그러나 사다함의 청함이 더욱 간절함을 보신 왕은 마지못하여 사다함으로

귀당비장(貴幢裨將)을 삼으셨다.

이에 사다함은 문도 천여 명을 거느리고 가라 국경에 다달아,

먼저 가 있던 원수(元帥) 이사부에게 청하여 그 군사를 얻어 선봉이 되어

전단도라는 문으로 쳐들어가서 가라국을 점령하고 말았다.

개선하여 돌아오자 왕은 사다함의 공을 크게 여겨 가라인 포로 삼백 명을 주셨으나

사다함은 이를 다 놓아주고 말았고 땅을 주셨으나 받지 아니하다가 굳이 받으라 하시자

아리내 냇가 불모지를 자청하여서 받았다.

 그리고는 죽기로써 사귄 벗 무관랑(武官郞)이 병으로 죽자,

 슬피 울다가 칠일 만에 따라 죽었다.

사다함이라 하는 금곡은 사다함이 제 벗이 죽은 것을 슬퍼하여서 가얏고를 울리며 울었다

하는 것이었다.

아유다는 줄 고르기를 마치고 사다함 곡을 타기 시작하였다.

첫 줄, 둘째 줄, 셋째 줄의 웅장한 소리를 기조로 하여셔

열한번 째, 열두번 째의 창자를 끊는 소리를 섞었다.

“ 충의 용사의 참된 우성.”

그 소리는 듣는 자의 눈에 눈물이 고이게 하였다.

아유다는 그 가락을 끝내고 가얏고를 무릎에서 내려놓았다.

그리고 소매로 그 상기한 낯을 가리웠다.

눈물이 흐르는 것이었다.

‘ 사다함은 벗을 위하여 죽었는데 이 몸은 남편의 뒤도 못 따르고.’

아유다는 느꼈다.

“ 아유다 ”

하고 왕이 부르셨다.

“ 네. ”

“ 울지마라.”

“ 황송하옵니다.”

“ 대사, 아유다는 돌아간 남편 거진랑을 생각하고 눈물을 흘리고 있소.

   거진랑은 사다함에 비길 사람이 아니오?”

하고 원효를 바라보았다.

“ 그러하오. 거진랑과 소승과는 문노 문하에서 같이 병법을 배웠소. 거진은 창을 잘 썼소.

  거진랑이 감물에서 싸운 양은 참으로 용장하여서 귀신을 울릴 만하였소.”

 원효는 아유다를 위로하는 모양으로 거진을 찬송하는 말을 하였다.

“ 들으니 대사께서도 그때 용맹스럽게 싸우셨다 하오.”

이것은 문명부인의 말이었다.

“ 무얼요, 소승은 다만 친구 거진랑 부자의 시체를 안아 왔을 뿐이오 . 무슨 공이 있겠소.”

원효는 이렇게 말하였다.

이 말에 왕은 원효를 보시며,

“ 창검이 별 같고 시석(矢石)이 빗발 같은 전장에 단신으로 세 번 이나 달려들어가

  친구의 시체를 안아오는 것은 적병을 죽이기보다도 더욱 어려운 일이오.”

하고 여러 사람의 동의를 구하는 듯이 자리를 돌아보았다.

“ 그러하오. 적병을 죽이는 것은 공명이나 되지마는.”

문명부인이 말하였다.

원효는 거진을 안고 올 때에 거진의 몸이 아직도 부드럽고 그 눈이 아직도 빛나던 것을 생각하였다.

 그리고 창을 맞은 앞가슴에 빨갛게 피가 솟아서 군복이 젖었던 것을 생각하였다.

원효나 거진이나 피차에 열여덟 살의 소년이었다.

 여러 사람의 마음에는 반지산(反知山)의 세 무덤이 떠올랐다.

비녕자와 거진과 합절의 무덤이다.

충신과 효자와 충복의 무덤이었다.

 

비는 그치지 아니 하고 바람도 불었다.

석양이 되자 방안은 어두워졌다.

 문명부인과 다른 이들은 물러나가고, 왕은 아유다와 원효만을 머물게 하였다.

 심상이 원효를 모시고 있을 뿐이었다.

“ 이 몸이 대사께 물을 말씀이 있어서.”

하고 왕이 원효를 만류한 까닭이었다.

“ 벼르고 벼른 오늘이오.”

다른 사람들이 다 물러난 뒤에 왕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 아유다는 이 몸의 유일한 벗이오.

  이 몸이 아유다의 뜻을 알고 아유다가 이 몸의 뜻을 아오. 아유다 안 그런가?”

왕은 아유다를 향하여 빙그레 웃으셨다.

“ 상감마마 황송하옵니다. ”

아유다는 합장하였다.

“ 대사, 이 몸이 외로운 사람이 아니오?”

왕의 음성에는 애조가 있었다.

“ 무슨 뜻이온지?”

원효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 외롭소. 이 몸은 외롭소.”

왕은 당신이 왕인 것도 잊은 듯이 이렇게 한탄하셨다.

“ 사람은 자리가 높을수록 외로운 줄로 아오.

  부처님의 자리는 가장 외로운 자리가 아니오니까.

  그러므로 고고(孤高)라 하오.

  상감마마도 이 나라에 지존(至尊)이시니 외로우심이 당연하신가 하오.”

원효는 이렇게 아뢰었다.

“ 지당한 말씀이오. 그러나 대사. ”

하고 왕은 잠깐 주저하다가,

“ 이 몸이 이 자리에 있을 만한 사람이 못 되는가. 외로워, 외로워.”

 왕은 한 번 더 한숨을 지으셨다.

 왕은 원효의 대답을 기다리는 듯이 원효를 바라보셨다.

그 눈에 여성의 애원하는 빛이 보였다.

 원효는 왕의 뜻을 똑바로 알 수는 없었다.

 왕은 왕으로서의 외로움, 즉 나라 일을 위하여서의 외로움을 말씀하심인지,

 또 한낱 사람으로서의 외로움, 여자로서의 외로움을 말씀하심인지 원효에게는 분명치 아니하였다.

 왕으로서의 외로움도 있을 법하였다. 또 사람으로서의 외로움도 있을 법하였다.

 그러나 원효는 더 물을 수는 없었다. 그러면서 대답하지 아니 할 수도 없었다.

 원효는 자기의 대답이 이 괴로워하는 여왕에게 기쁨을 드리고 새로운 신념을 드리기를 바라면서

 잠시 명목하고 부처님을 염하였다.

옛날 세존께서 왕 부인께 경을 설하시던 것을 생각하였다.

 ‘ 그러나 내게 그러한 법력이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니 원효는 적막하였다.

 지금 어떤 번뇌를 끓고 있는 젊으신 여왕을 제도할 만한 힘이 원효 자신에게는 없는 것 같았다.

 원효는 불보살의 위신력(威神力)의 가지(加持)를 바라면서 입을 열었다.

“ 상감마마. 그러한 말씀은 아니 하실 말씀인가 하오.

십선(十善)이 구족하시어 임금으로 나시는 것은 이 나라 백성을 다스리라

하시는 비원력(悲願力)이시라,

이 나라 백성이 먹고 마시고 사는 것이 모두 다 상감마마 복력이시니,

 예서 더 큰 보살행이 어디 있사오리까.”

“ 이 몸도, 이 몸도 이 나라에 임금 될 연이 있어 임금 된 줄은 아오마는 국보(國步)는 날로

 간난(艱難)하고, 백성도 편안할 날 없으니 모두 이 몸의 악업인 듯 생각할수록 가슴이 아프오.

이 몸이 한 목숨을 버려서 나라가 편안하리라 하겠지만, 그것을 아낄 이 몸도 아니건만 번뇌로

뭉쳐진 이 몸을 버리기로 무슨 공덕이 되겠소.

약왕보살(藥王菩薩)모양으로 이 몸을 태워 빛이 되고 향이 될 수가 있기만 하면야.”

왕은 잠시 눈을 감으시고 침음하시다가 한숨을 쉬시며,

“ 그러나 이 몸에 가득 찬 것이 번뇌, 업장, 만일 이 몸을 태운다면 악취만 날 것이오.

그러한 몸이 임금의 자리에 있으니 나라가 편안할 리도 없을 것 같아서.”

왕은 또 말을 끊으셨다가,

“ 이 몸이 임금다운 임금이 되리라고 퍽 애도 썼소마는 그리 아니 되오. 업장이지요.”

“ 그렇게 매양 몸소 부족하심을 깨달으심이 거룩하신 어른의 본색이시오.”

“ 아니, 아니. 대사는 이 몸에게 똑바로 말씀하시오. 이 몸을 한 여자로 보시고 똑바로 말씀하시오.”

“ 똑바로 아뢰온 말씀이오.”

“ 아니, 아니. 대사의 밝으신 법안(法眼)으로 이 몸의 마음속을 아니 보실 리가 있소?

  이 몸의 가슴속에 무슨 번뇌가 불타고 있는 가를 모르실 리가 없소.

  대사는 그것을 다 아시면서 이 몸의 업장이 미진함을 보시고

  이 몸을 제도하시려 아니 하시는 것이오. 반드시 그렇소.”

원효는 왕의 참뜻을 안 것 같았다.

“ 번뇌로 말씀하오면 사람의 몸을 쓰고 있는 동안 그 몸에 붙은 번뇌가 없지 아니 할 것이오.

  생로병사를 면할 수 없으니.”

“ 덕이 높은 보살도 번뇌가 있소?”

“ 이 육신을 벗기까지는.”

“ 소승 같은 젊은 무리는 말씀할 것도 없사옵고.”

“ 겸사시오.”

하고 웃으시면서,

“ 그러나 대사께서 아직 중생의 번뇌가 남아 있다 하면 도리어 반가운 일이오.

   이 몸과 가까운 듯해서. 대사는 이미 모든 번뇌를 벗으셨으리라 하면 너무 높아서 무시무시하오.

   대사도 아직 번뇌가 남았다면 한편 실망도 되나, 한편 반갑기도 하오. 그런데 대사께서는.”

왕은 주저주저하더니,

“ 그런데 대사는 무슨 번뇌가 아직 남았소?”

하고 원효를 본다. 아유다도 원효를 본다.

 

원효는 눈을 감았으나 왕과 아유다의 시선이 제게 쏠렸음을 느꼈다.

그리고 원효는 지금 당한 처지가 심히 중대한 것을 느꼈다. 원효는 제 마음을 들여다보았다.

 아까 화엄경을 설할 때에는 법사 원효였으나 지금은 그렇게 청정한 마음이 아닌 것을 깨달았다.

  제 몸이 젊고 아름다운 두 여자의 곁에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음을 깨달았다.

원효의 마음의 하늘은 결코 가을 새벽 하늘과 같이 새말간 하늘이 아니요,

봄꽃 필 때 하늘처럼 아지랑이 낀 하늘임을 깨달았다.

 그 아지랑이는 서른세 살 된 남자 원효의 번뇌였다.

  “ 번뇌무진서원단이라 하였으니 번뇌가 다할 날이 없으나 다만 끊기를 서원할 뿐이오.”

  원효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러나 이 몸이 뵈옵기에는 대사의 얼굴이나 눈에나 음성에나 번뇌가 남아 있을 곳이 없는 것만

   같소. 오직 맑고, 깨끗하고 대사의 몸에는 때 하나 먼지 하나 붙을 자리가 없는 것만 같건마는

   그래도 대사에게도 번뇌가 남아 있다 하니 겸사신가. 우리와 같은 범부지(凡夫地)에 있는 중생을

   제도하시려고 일부러 중생의 번뇌를 나누심인가.”

 왕은 혼잣말처럼 하며 원효의 눈을 보신다. 그 눈에는 젊은 여자다운 수줍음을 보이시면서,

  “ 대사는 어느 때가 되면 그 번뇌를 마저 버리시려요?”

하고 엄숙한 표정을 보이신다.

  “ 무변중생을 다 제도할 때까지는 이 번뇌도 아니 버려지리라하오.”

  “ 그럼 성불은?”

  “ 중생을 다 건진 뒤에.”

  “ 그러면 영겁(永劫)에 생사해(生死海)에 출몰(出沒)하시려 하오?”

  “ 그러하오 ”

  “ 대사, 그것이 보살의 대원이시오?”

  “ 한 사람 원효의 원이오.”

  “ 그러면 삼악도(三惡道)에도 들어가시려오? 지옥(地獄)에도, 아귀도(餓鬼道)에도?”

  “ 그럴 일만 있으면 축생도(畜生道)에라도.”

  “ 축생보(畜生報)를 받으셔도 뉘우치지 아니 하시려오?”

  “ 비록 한 중생을 위해서라도.”

  “ 고마우셔라. ”

  왕은 힘을 주어서 합장하신다.

  자리에는 이상한 기운이 돈다.

  아유다도 그 아름다운 눈으로 수줍음도 없이 원효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눈을 돌리려고도 아니하였다.

  이때 원효의 눈앞에는, 위로는 불보살의 경계로부터 삼계육도(三界六道)가 보였다.

  뱀과 여우와 개와 벌레와 유황불 일고 기름가마 끓는 지옥과 한없이 쾌락이 있는 천상(天上)과

  아미타여래의 극락정토와 피흘리는 모든 귀신들과 인간과. 그러나 이 모든 세계는 다 마음이

  일러 놓은 것이었다.

  ‘ 심여공화사(心如工畵師’

  마음은 재주 있는 환쟁이와 같다. 그의 업은 난사의(難思議)다. 못하는 일이 없다.

천당을 지어 놓고 그 위에서 즐기기도 하고, 지옥을 만들어 놓고 그 속에 들어가서 울기도 한다.

이 인간 세상도 제가 지어 놓고는 제가 못 벗어나서 애를 쓰고 있다.

  원효는 제 마음이 또 한 세계를 짓고 있구나 하고 놀란다.

  이때 왕은 지금까지도 합장하고 있던 손을 내리시며,

  “ 대사, 이 몸의 청을 들어주시겠소?”

하는 소리가 떨렸다.

  “ 소승에게 무슨 청이오니까.”

  “ 앞으로 어느 세상에 가서 나시든지, 이 몸도 따라가서 나게 하시겠소?

    이 몸이 등조왕(燈照王)궁의 청의녀(靑衣女)가 되게 하시겠소?

    이 자리에서 무슨 말씀은 못 하리.

    이 몸은 칠 년 전 대사께 승만경을 들은 이래로 대사를 사모하였소.

    대사를 곁에 모시고 싶었소.

    그러나 이 몸은 여자요,

    또 이나라의 임금이므로 참고 참고 있었거니와, 대사는 보살의 화신이시라

    다시는 중생의 몸을 쓰실까 싶지도 아니 하여 차생 내생에 내 원은 못 다다를 것으로 알고 있었소.

    그러나 만일 대사가 다시 인간의 생을 받으시면 선혜선인(善惠仙人)이 청의녀를 이끌어

    세세생생에 부부가 되듯이 이 몸도 세세생생에 대사를 따르게 하여 주시오.”

 왕의 눈에는 불이 이는 듯하였다.

 원효는 놀랐다.

왕의 말씀은 실로 대담하고도 간절한 말씀이었다.

그러나 원효는 이 말씀에 무엇으로 대답할 바를 몰랐다.

선혜선인은 보광불(普光佛)께 공양할 청련화 다섯 송이를 얻기 위하여서

등조왕궁의 청의녀에게 세세생생에 부부 될 것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원효는 그러하오리다 하는 대답을 할 용기가 없었다.

용기가 없었다는 것보다는 마음이 혼란하여짐을 어찌할 수 없었다.

 “ 상감마마, 마음을 진정하시지요.”

원효는 겨우 이런 대답을 하였다.

“ 진정하라고?

  이 몸더러 이 몸의 마음을 진정하라고 하시오?

  이 몸의 맺힌 한 마음이 천 겁을 간들 풀릴 줄 아시오?

  이 몸의 이 원을 풀기 전에 이 몸이 성불할 줄 아시오.

  이 몸이 스스로 최후신(最後身)인 줄만 알고, 다시는 생사해에 들지 아니할 줄 알았으나

  두고두고 생각할수록 이 몸에는 미진한 인연이 많고 다다르지 못한 원이 수미산과 같소.

  선혜와 청의는 삼십육반(三十六返)으로 석가 세존과 아수다라부인이 되었거니와,

  이 몸은 대사의 법력이 아니면 억천만번을 하여도 생사를 벗어날 길이 없소.

  이 몸이 수없이 아내가 되고 어미가 되고 하기 전에는 이 미진한 인연을 끊을 수가 없는가 하오.

  대사 이 몸을 불쌍히 여겨서 거두어 주시오.”

 왕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왕은 다시 말을 이어서,

“ 이 몸과 저 아유다와는 지나간 칠 년 동안 대사를 바라고 살았소.

  아유다가 대사를 사모함을 볼 때 이 몸은 때로 질투를 느낀일도 있었으나 그도 다 인연이오.

  사랑도 인연, 미워함도 인연.”

하고 아유다를 보았다.

아유다는 고개를 더욱 깊이 숙이고 들지 못하면서,

“ 이 몸이야말로 세세생생 상감마마의 몸종이 되어서 마마를 받드오리다.

  상감마마께옵서 대사님 곁에 계시오면 이 몸은 마마 뒷그늘에 숨어 뫼시오리다.”

“ 상감마마 ”

원효는 소리를 가다듬었다.

“ 대사, 말씀하시오. 그리하여 주마는 허락을 하시오.”

왕은 이렇게 보챘다.

“ 상감마마. 모두 마음의 장난이오.

  이미 날이 저물었으니 이 이야기를 끊어야 할 것같이 영겁의 윤회에 지치셨으니

  그만 인연의 줄을 끊으시오.

  업보수생(業報受生)의 줄을 끊어 이번 생을 최후생으로 하시고 대비심으로

  수원수생(隨願受生)하는 보살의 길을 닦으시오.”

이렇게 말하고 원효는 대궐에서 물러나왔다.

궐문 밖에는 수레가 기다리고 있었으나 원효는 그것을 타기를 사양하고 비를 맞으며 걸었다.

“ 스님, 비가 오는데.”

심상은 원효에게 수레에 오르기를 권하였으나 원효는,

“ 걸어가자.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바람이 불면 바람에 불리면서 걸어가자. 번뇌에 달은 몸을 식히자.”

하고 뚜벅뚜벅 걸음을 옮겼다.

“ 스님의 마음에도 번뇌가 일어났습니까.”

심상은 한 걸음 원효의 곁으로 오면서 물었다.

“ 네 마음에도 번뇌가 일어났느냐.”

“ 소승은 대궐에 있는 동안이 꿈 같아서 무엇을 보았는지 무엇을 들었는지 정신이 없소.”

“ 비를 맞으면서 그 정신이 간 곳을 찾아라.”

이렇게 문답하면서 분황사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 후 며칠이 못 되어 왕이 승하하셨다.

 

원효가 왕이 빈천(賓天)하셨다는 말을 조보(朝報)로 들을 때

원효의 마음에는 이 모든 기억이 살아나온 것이었다.

 왕은 어떠한 마음으로 세상을 떠나셨을까.

 모든 것이 공(空)인 줄을 깨닫고 공중에 떴던 구름장이 슬 듯이,

불이 다 타고 재만 남듯이 돌아가셨을까.

그렇지 아니하면 왕이 그날 말씀하신 모양으로 세세생생에 원효의 곁을

떠나지 아니 할 것을 맹세하고 돌아가셨을까.

 원효는 멀거니 생각하고 있다.

 원효를 보내신 왕은 한참이나 두 손으로 낯을 가리우고 울으셨다.

“ 상감마마, 상감마마.”

 아유다는 감히 왕의 몸에 손을 대지는 못하고 부르기만 하였다.

그러는 아유다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아유다는 왕을 동정하였다.

왕은 호랑이와 같은 춘추공이나 유신공을 대하실 때에는 왕의 위엄을 잃지 아니 하셨다.

“ 경은 이 나라의 신하냐, 당나라의 신하냐.”

하고 소리를 높이실 때에는 춘추도 고개를 들지 못하였다.

 그러나 왕은 역시 여자이셨다.

 아유다와 단둘이 있을 때에는, 왕은 아내 될 사람이요,

 어머니 될 사람이었다.

“ 아유다, 부부의 정이 어떠하더냐.”

“ 사흘 동안에 무슨 부부의 정을 압니까.”

“ 그래도 남편이 세상에 제일 가깝고 소중하고 그립지 아니하더냐.”

“ 사흘만에 남편을 전장에 내보낼 때에는 서러웁디다.

그리고 잠이 아니 오고 바람결에 나뭇잎이 굴러도 남편이 돌아오는가하고 귀가 솔깃하옵디다.”

“ 그럴 게다. 이 몸은 부부의 정을 몰라.”

“ 만나는 기쁨이 없으니 떠나는 슬픔도 없지 아니 하옵니까.”

“ 떠날 때에 가슴이 터져도 좋으니 만나는 기쁨을 가지고 싶다.”

왕은 이러한 말씀을 하신 뒤에,

“ 아유다, 너도 어미 정은 모르는구나.”

하고 아유다의 손을 잡으시며,

“ 너는 남편이 있고 싶으냐.”

하고 물으시기도 하였다.

그날 밤에 상감은 아유다가 그 숙소로 돌아가기를 허락 치 아니 하시고,

“ 오늘은 내 곁에서 자거라.”

하여서 자리를 가지런히 펴게 하셨다.

“ 황송하오.”

하고 아유다는 왕명을 거역하지 아니 하였다.

 왕은 잠이 아니 드시는 모양이라고 아유다는 생각하였다.

 왕은 수없이 돌아누우셨다.

그러할 때마다 이불 소리와 함께 왕의 한숨이 들렸다.

 아유다도 잠이 들지 아니 하였다.

 상감 곁에서 잔다는 것만도 어려운 일이었으나 여러 가지로 마음이 설레었다.

더구나 원효에게 대한 사모하는 마음은 영원히 이루어지지 못할 원이었다.

왕께서 그처럼 간절히 청하시는 말씀에도 대답을 아니 한 원효가 제 것이 될리는 없다고

아유다는 생각하였다.

 왕은 내생에 원효의 곁에 있게 하여 달라고 청하셨건만 원효는 허락지 아니 하였다.

그렇다면 금생에는 더욱 가망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아유다는 의상대사와 선묘(善妙)의 이야기를 생각하였다.

의상이 당나라에 가는 길에(원효도 함께 떠났으나 원효는 해골에 고인 물을 마시고는 모든 것이

마음의 조작이라는 것을 깨닫고 장안에 갈 필요가 없다하여 중도에서 본국으로 돌아왔다)

선묘라는 여자에게 사랑을 청함을 받았으나 거절하였다.

그러나 선묘는 그 후에도 의상을 생각하고 십 년이 넘도록 의상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의상을 위하여 빌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 선묘는 당나라 양가 여자로 지극히 미인이라고 한다.

 아유다는 자기도 선묘와 같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자기는 선묘보다는 행복하다고 생각하였다.

선묘는 사랑하는 의상과 수천리를 떠나 있지만 아유다는 같은 서라벌에 있어서 만나려면

만날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또 한편 생각하면 아유다가 선묘보다도 불행하였다.

그것은 사랑하는 이를 지척에 두고도 만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유다는 죽은 남편 거진을 생각해야 될 몸인 줄을 잘 안다.

그러나 아유다는 제 마음이 원효에게로 쏠리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다만 원효의 법력에 대한 사모인 줄 알았으나 칠년이나 그 생각을

계속하는 동안에 아유다는 원효 없이는 살 수 없는 몸이 되고 말았다.

 아유다는 오늘 본 원효를 마음에 그릴 때에 피가 끓어오름을 느끼면서

이불 소리가 아니 나도록 돌아누웠다.

제 높은 숨소리가 상감의 귀에 들리기를 두려워함이었다.

 아유다는 더욱 숨이 차고 머리가 띵함을 깨달았다. 이때,

“ 아유다. 자느냐.”

하고 상감이 아유다 쪽으로 돌아누우셨다.

“ 네. 아직 안 잡니다.”

“ 왜? 너 원효대사를 생각하고 잠을 못 이루냐.”

“ 황송하옵니다.”

“ 역시 그렇구나”

하시고 왕은 팔을 내어밀어서 아유다의 손을 잡으신다.

아유다는 왕의 뜻을 알고 제 손을 들어서 왕의 손에 놓아 드렸다.

왕의 손길은 불 같았다.

“ 상감마마. 손이 더우시오.”

“ 몸이 아프다.”

“ 전의(典醫)를 부르오리까.”

“ 아니, 밝은 날에.”

“ 아까 바람을 쏘이시고 춥다 하시더니.”

아유다는 몸을 자리에서 일으킨다.

“ 별일 없겠지.”

“ 눈이 붉으십니다.”

“ 눈이 붉으냐.”

“ 네.”

“ 내가 울었다.”

왕은 빙그레 웃으신다.

“ 왜 우셨습니까.”

“ 아유다. 내 손을 한번 꼭 쥐어 다오.”

“ 황송하여라.”

“ 더 힘껏.”

 아유다는 꿇어앉아서 두 손으로 공손하게 왕의 손을 꼭 쥐었다.

왕의 손은 보드라와 뼈가 없는 것 같았다.

가늘고 길고 흰 손가락. 평생에 더러운 것을 만져 본 일 없는 손이라고 아유다는 생각하였다.

“ 고맙다. 그렇게 손을 꼭 쥐어 주니 외로움이 풀리는 것 같다.”

“ 상감마마. 오늘은 왜 그리 비감하신 말씀을 하십니까.”

“ 악하던 사람이 마음이 깨끗해지면 눈물이 흘러. 여자의 눈물이 원망할 때에 많이 흐른다

하거니와 지금 내 눈물은 원망의 눈물은 아니다. 참회의 눈물이다.

이 참회의 눈물이 마르기 전에 내가 죽으면 악도에는 아니 빠질 것이다.

임금의 눈물은 나라와 백성을 위하여서만 흘릴 것이지만 지금은 우리나라와 내 눈물과는

아무 상관이 없어. 설사 지금 내가 죽는다 하더라도 나를 위하여 울어 줄 사람이 누구냐.”

“ 신라 백성이 모두 울지 아니 하겠습니까.”

“ 신라 백성 중에 울어 줄 사람도 있겠지.

그러나 내가 임금이 된 지 팔 년에 잘한 일이 하나도 없어.

 백제와 싸워서 두 번 이겼으나 백제의 후환을 끊지 못하고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도

아직 빼앗지 못하고, 조상 적부터 내려오던 법을 폐하고 당나라 앞에 무릎을 꿇고.

생각하면 모두 잘못한 것뿐이다.

더구나 당나라 개국 축하로 보낸 내 태평송(太平頌)은 후세에 두고두고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그것도 다 자장(慈藏律師)때문이지. 너의 아버지 때문이고.

 아차 내가 또 남을 원망하는 생각을 하는구나. 이것이 계집의 마음이야.

내가 임금이니 모두가 내 일이지.

왜 남을 원망하느냐.

 아무리 자장이기로 또 너의 아버지기로 임금인 내가 못한다면 고만이었겠지.

그렇지 아니 하냐.

내 말은 다만 이게다.

그 태평송 첫머리는 내가 지은 것이야.

 그거야 당연하지 아니 하냐.

그 나라가 새로 생겼으니까,

그만한 덕담은 해도 괜찮은 게지. 그렇지만

‘외이위명자 번복피천앙’ 外夷違命者 飜覆被天殃

(오랑캐로서 황제의 영을 어기는 자는 칼날에 엎어져 천벌을 받으리라)이라든지,

 ‘ 오삼성일덕 조아황가당’ 五三成一德 조我皇家唐

(오황 삼제의 덕을 한 덩어리로하여 우리 당나라 임금을 밝게 하네)이라든지,

그런 소리야 내가 했을 리가 있느냐.

 ‘ 사시화옥촉 칠요순만방’ 四時和玉燭 七曜巡萬方

(사시는 옥촉과 같이 고르고 칠요는 널리 만방에 돌아다닌다.

 칠요; 일월과 화. 수. 목. 금. 토)까지는 모르겠다마는

‘ 외이위명자 조아황가당 ’ 外夷違命者 조我 이니 이거야 할 소리냐.

그때 내가 아직 나이가 어리고, 그래서 웃음을 천추에 남겼지.

그런데 너의 아버지는 이제는 신라 사람인지 당나라 사람인지 모르게 되었으니

나만 죽으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

 너의 아버지는 필시 내가 어서 죽기를 기다릴 것이다만.”

“ 상감마마 ”

 아유다는 무어라고 아뢰올 바를 몰랐다.

 

 왕은 병환이 날로 침중하셨다.

 왕은 돌아가실 것을 결심하신 듯 전의가 드리는 약도 안 잡수시고 거의 식음을 전폐하셨다.

 왕의 곁에는 궁녀 이외에 아유다가 모셨다.

왕은 자장에 대하여서는 분명히 불쾌한 빛을 보이셨다.

자장은 벌써 칠십이 넘은 노승이었다.

 자장은 그러나 매일 예궐하였다.

 불행히 승하하시는 경우에는 대통(大統)을 이을 이가 누구냐 하는 것이

궁중, 부중(宮中府中)은 물론이요, 일반 민간에서도 의문이었다.

 왕은 아무런 의사 표시도 없으셨다. 알천장군(閼川將軍)일까 춘추공일까,

또는 춘추의 아들 법민(法敏)일까.

 이 세 사람이 가장 유력한 후보자였다.

관창랑의 아버지 품일이손(品日伊飡)을 말하는 자도 없지 아니 하였으나

그는 인망으로나 세력으로나 도저히 춘추와 비길 수는 없었다.

 알천은 아리내라고 불렀다.

그는 훈공으로나 연배로나 당시에 가장 높은 지위에 있었다.

그는 유신의 아버지 용수(龍樹)장군과 더불어 진평왕(眞平王)의 유신으로 선덕왕 오년에

독산성(獨山城)싸움에서 백제군을 크게 파하고, 동 칠년 칠중성(七重城)싸움에서

 고구려군을 깨뜨려서 일국의 신임을 받았다.

더구나 알천은 사욕이 없고 품격이 높아서 백성들이 그의 덕을 사모함이 컸다.

승만왕도 알천을 신임하셔서 즉위 초에 그로 상대등(上大等)을 삼아서 정사를 총리하게 하였다.

 그러나 알천은 다만 덕망이 있는 명장일 뿐이요, 정치가는 아니었다.

그래서 춘추가 하는 대로 방임하였다.

 왕은 상대등 알천을 침전으로 부르셨다.

 알천은 백발 동안이었다.

 알천은 왕의 옆에 부복하고는 고개를 들지 못하였다.

 그처럼 그는 임금께 대한 충성이 지극하였다.

“ 이 몸이 일어나지 못할 듯하오. 이 몸이 이 세상을 떠날 날이 멀지 아니 한 듯하오.”

 왕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알천은 눈물이 좔좔좔 소리를 내어서 자리에 떨어지고 그의 머리에 쓴 관이 떨렸다.

느껴 우는 것이었다.

 평생을 충의 일념으로 살아온 알천은 임금의 병환이 중하시다는 말을 들은 때로부터

 아침마다 목욕하고 산에 올라 선왕(仙王)님께 임금의 병환이 평복하시기를 기원하였다.

“ 이 늙은 목숨으로 상감마마의 수명을 대신하게 하소서.”

하고 빌었고, 밤에도 옷을 끄르지 아니 하였다.

 이제 눈앞에 왕의 병환이 침중하심을 뵙고 또 돌아가실 날이 멀지 아니 하다 하시는 말슴을 들으니,

알천은 가슴이 미어지는 듯하여 눈물을 걷잡을 수 없는 것이었다.

“ 상감마마, 마음을 든든히 하시오.”

 알천은 떨리는 소리로 이렇게 아뢰었다.

 “ 아니. 이 몸의 갈 날이 이르렀소. 이 몸이 철없는 어린 여자의 몸으로 임금이 된 지 팔 년 동안

 큰 허물이 없이 지낸 것은 다 알천 상대등의 충의의힘이오. 이 몸이 죽은 뒤의 일은 다 알아서 하시오.”

 왕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알천은 무어라고 아뢸 바를 몰라서 다만 머리를 조아릴 뿐이었다.

 왕은 다시 말을 이으시며,

“ 고구려와 백제가 다 우리나라를 엿보고 있으니 앞으로 나라에 어려운 일이 많을 것 같소. 

 춘추는 당나라의 힘을 빌어 백제와 고구려를 멸하려 하나, 이것은 외인을 불러서 형제를 피려 함과

 같으므로 이 몸이 허락지 아니하였으니, 차라리 백제와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서 서로 화친할 것을

 말하고 세 나라가 한 곳에 모여 서로 맹약함이 좋을까 하오. 행여 당병을 이 땅에 끌어들이는 마오.”

하시는 유칙이 계시었다.

“ 지당하신 분부시오. 그러하오나 상감마마 만세의 후에는 대통은 어찌하올지?”

 알천은 가장 중심문제인 왕위 계승에 대하여서 여쭈었다. 알천의 물음에 대하여서 왕은,

“ 이 몸이 아들이 없고 딸도 없으니,

  진골(眞骨)중에 가장 덕이 높은 이를 골라 나라를 잇게 하시오.

  다 알천 이손이 좋도록 알아서 하시오.”

 왕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왕의 희망으로는 알천에게 왕위을 전하고 싶었다.

그러나 왕은 알천이 듣지 아니 할 것을 알았다.

그것은 알천이 겸손하기 때문이었다.

또 한편으로는 춘추가 어떻게 하여서라도 제가 왕위에 오르려 할 것이었다.

만일 왕이 알천에게 위를 전하신다 하면 필시 피 흐르는 이이 일어날 것을 왕은 짐작하셨다.

춘추는 무력을 써서라도 왕이 되고야 말 것이었다.

왕은 이렇게 생각하시므로 알천에게 선위하실 생각을 끊으셨다.

그 대신 알천 이하 여러 대신을 부르시고는,

 “ 이 몸의 병이 언제 나을지 모르니, 그동안은 이손 알천으로 섭정(攝政)케 하겠소.”

하는 분부를 내리셨다. 이것은 춘추로 하여금 알천의 말을 듣게 하려 하심이었다.

이 모양으로 왕은 정사에 대한 책임을 벗어 버리시니, 몸이 가벼워지신 것 같았다.

그리고는 아유다와 단둘이 계실 때가 많았다.

 

하루는 왕은 아유다와 이러한 담화를 하셨다.

“ 아유다.”

“ 네. ”

“ 너의 아버지 언제 뵈었느냐.”

“ 어저께도 만났습니다.”

“ 어떠시든?”

“ 상감마마 어떠하시온지 늘 근심하고 있습니다.

 어저께도 목욕재계하고 신궁에 들어가 상감마마 어서 병환이

나으시게 하소서하고 빌었다 하옵니다.

이 몸의 어미는 분황사에 가서 불공을 드리셨습니다.”

“ 분황사에? ”

“ 네.”

“ 너도 갔던가.”

“ 네. ”

“ 고마워라. 원효대사도 뵈었는가.”

“ 아무 말씀도 없었습니다.

이 몸의 어미와 이 몸을 보고 다만 합장할 뿐이었습니다.”

“ 대사는 어떤 옷을 입으셨던가.”

“ 검은 장삼에 자주 가사를 메고-.”

“ 손에는?”

“ 손은 차수(叉手)하고 있었습니다.”

왕은 원효의 모양을 보시는 듯이 눈을 가느스름하게 하시고

두손을 가슴 위에 들어 합장하셨다.

아유다는 설움이 북받침을 깨달았다.

왕은 이윽히 가만히 계시더니,

“ 아유다.”

하시고 고개를 숙이고 앉았는 아유다를 부르셨다.

“ 네.”

하고 아유다는 옷소매로 눈물을 씻었다.

“ 내가 죽은 뒤에는 네가 대사의 뒤를 돌보아 드려라.”

“ 이 몸이 무슨 힘으로.”

“ 옷과 양식과 기름과 차와 종이와 먹과 붓과 과일과, 그것이지. ”

“ 그리하오리다. ”

“ 선지식(善知識)의 얼굴을 한 번 대하는 것만 해도 큰 인연, 큰 복이라고 하지 않느냐.

하물며 큰 선지식을 공양(供養)하는 것은 여간 큰 복이 아니다.

가난해서 공양할 물건이 없으면 선지식이 가는 길을 쓸어만 드려도 큰 공덕이라는 거야.

어디 그러한 인연이 저마다 있나?

 옛날 선혜비구는 보광불이 지나시는 길에 부처님 발에 진흙이 묻을까 저어하며

 제 머리카락을 길에 깔아 드렸다 아니 하느냐.

이 선혜비구가 그 공덕으로 석가모니불이 되셨다고 아니 하느냐.

세상 은혜 중에 정법(正法)을 가르쳐 주시는 스승의 은혜가 가장 크지 아니 하냐.”

“ 네. 인과경(因果經)에 그렇게 씌어 있습니다. ”

“ 그런데 너는 앞으로 오래 대사를 공양할 수 있으니 그런 복이 어디 있느냐. ”

“ 황송하옵니다. 만일 이 몸이 무슨 공덕을 짓사오면 모두 상감마마께 회향하겠습니다. ”

“ 불도에 회향하지, 중생에 회향할까.

 ‘ 원이차공덕 보급어일체 아등여중생 개공성불도’

  願以此功德 普及於一切 我等與衆生 皆共成佛道

( 이 공덕이 일체 중생에게 널리 미쳐 나와 뭇 중생이 모두 불도를 이루기를 원합니다.)

라고 하지 않았느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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