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强者의 아들들
연개소문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장자인 남생이 그의 뒤를 이어 막리지가 되었다.
그는 일찍이 나이 아홉 살 때에 그 부친의 소임인 선인(先人)이 되었다가 중리소형(中裏小兄)이
되었다가 다시 중리대형(中裏大兄)으로 국정에 참여하게 되었다.
남생은 또 그 성품이 순후하고 사람을 대하면 말을 잘했다고 한다.
그는 처음에는 새 권력자로서 국정을 살피려고 전국 각처를 돌아다녔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일반이 생각하는 것처럼 변변치 못한 인간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결국 그가 나라를 망친 것은 의심이 많고 아우들을 포용하는 힘이 부족한 때문이었다고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남생은 국정을 살피러 떠날 때 그 아우 남건(男建)과 남산(男産)에게 국사를 맡겼다.
이럴 경우 흔히 간사한 무리들이 도당을 만들고 형제간을 이간시키는 수가 많다.
남생이 평양을 떠나자 남건과 남산에게 아첨하는 무리들은 이런 말을 소근거렸다.
“조심들 하십시오. 막리지 어른은 당신들이 자가를 핍박하려 한다고 몹시 두려워하고 계신 모양입니다.
그러니 그 분이 장차 돌아오시면 당신들은 큰 화를 입을 것인 즉 하루 속히 보신책을 강구하도록 하십시오.”
물론 남건과 남산은 처음엔 그 말을 곧이 듣지 않았다.
한편 남생에게 아첨하는 무리들도 은밀히 그에게 소곤거렸다.
“막리지 어른께서 두 아우님께 국사를 맡기신 건 큰 잘못으로 압니다.”
“아니 형이 아우들에게 일을 맡기는 것이 어째서 잘못이란 말인가?”
“모르시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형제지간이라도 권력에 탐이 나면 서로 죽여 가면서가지 빼앗는 것이 예로부터
흔히 있는 일인데 장차 서울에 돌아가셔서 맡겼던 권력을 다시 찾으신다면 아우들이
어찌 가만히 있겠습니까?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리지 어른이 서울에 돌아가시는 걸 막으로 할 것입니다.”
남생은 그 말을 전적으로 믿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 의혹의 검은 구름이 이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그는 은밀히 심복을 평양에 보내어 두 아우의 동정을 살피게 했다.
그러나 그 사실이 그만 두 아우에게 탄로되고 말았다.
처음엔 아첨하는 무리의 속삭임으로 귀담아 듣지 않았던 두 아우도 형이 자기들을 의심하고
염탐꾼을 보내어 동정을 살피는 것을 알자 크게 분개했다.
“형이 이렇게 나온다면 우리도 살기 위해서 무슨 수를 써야 하지 않느냐?”
“그렇구 말구요.”
두 아우는 의논한 끝에 남생이 보낸 염탐꾼을 잡아 가두는 한편 왕명이라 칭하고 남생을 평양으로 소환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아우는 형을 해칠 생각까지는 없었다.
다만 형을 불러 흑백을 가려 보자는 생각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의심 많은 남생은 아우들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평양에 가기만 하면 아우들에게 잡혀 죽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형이 끝까지 자기들을 의심하는 태도로 나오자 두 아우는 마침내 분통이 터지고 말았다.
특히 남건은 스스로 막리지가 되어 군사를 이끌고 남생을 토벌하러 길을 떠났다.
이 소식을 듣자 남생은 국내성으로 들어가서 남건을 맞아 싸울 준비를 하는 한편
그 아들 헌성(獻誠)을 당에 보내어 구원을 청했다. 아우와 싸우는데 외세를 빌리려 한 셈이었다.
당고종은 즉시 남생의 아들 헌성을 우무위장군(右武衛將軍)으로 삼고 계필하력(溪苾何力)에게
군사를 주어 구원케 했으므로 남생은 겨우 목숨을 건지고 당에 항복했다.
그러지 않아도 고구려를 멸망시킬 생각이 간절하던 당고종은 그 실권자의 하나인
남생이 투항했으므로 대단히 기뻤다.
즉시 남생을 평양도행군대총관겸 지절안무대사(平壤道行軍大總管兼 持節安撫大使)를 삼는 한편
당나라 서울에 저택까지 주는 후대를 베풀었다.
고구려 실권자 형제의 내분과 그 하나인 남생의 투항은 당으로서는
고구려를 징벌할 절호의 명분과 기회를 얻은 셈이었다.
당고종은 즉시 이세적(李世勣)을 주장으로 삼아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치게 했다.
이때 고구려의 내막은 남생 형제의 내분만 있었을 뿐 아니라
개소문의 아우인 연정토(淵淨土)가 배반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즉 연정토는 고구려가 멀지 않아 멸망할 것을 예견하고 十二성 七백六十三호 三천五백四十三명을
거느리고 신라에 투항했던 것이다.
이러한 내분 속에서도 국권을 쥔 남건은 당군의 침공을 막아 보려고 있는 힘을 다 기울였으나
당의 대군은 파죽지세로 침공해 왔다.
이세적은 보장왕 二十六년 고구려의 서쪽 요새인 신성(新城=지금의 奉天東北)을 공취했고,
二十七년에는 부여성(扶餘城)을 비롯해서 요동방면의 여러성을 함락시킨 후 압록강을 건너
평양성을 포위했다.
그 뿐이 아니었다.
이때 이미 당나라와 동맹을 맺은 신라에서는 왕제 김인문(金仁問)을 시켜 대군을 거느리고
평양으로 가서 당군과 합류하게 했다.
나당(羅唐) 연합군에게 포위된 평양성은 완전히 고립되어 위급하게 되자
보장왕은 남산 등을 시켜 당진(唐陣)에 항복할 뜻을 전했다.
그러나 실질적인 권력자였던 남건은 끝내 굽히지 않고 최후까지 항전할 것을 기도했다.
당군의 공격은 더욱 치열해졌다.
당병은 마침내 성 위에까지 기어 올라와 성문과 누각에 불을 지르니
불길은 삽시간에 퍼져 궁전과 역대의 보물들을 모조리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다.
이 광경을 본 남건은 이제 더 아무런 소망도 없음을 깨닫고 자결하려 했으나
재빨리 침입한 당병에게 잡히어 왕과 왕족 그밖의 중신들과 함께 당나라 서울로 압송되었다.
보장왕二十七년 (西紀 六六八) 九월이었다.
이렇게 되어 고주몽이 건국한지 七백五년 二十八대의 왕을 거쳐 고구려는 마침내 멸망하고 말았으니
그 멸망의 원인을 남생 형제들의 암투로 보는 측도 있기는 하지만 결국은 신라를 중심으로 한
국토통일의 시대적 기운이 그러한 결과를 초래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 후 남생은 조국을 배반했음에도 불고하고 당의 벼슬을 받아 四十六세로 죽을 때까지
무사히 지냈지만 그의 아들 헌성은 당인들의 모략을 받아 역모(逆謀)를 했다는 죄명을 뒤집어 쓰고
이국(異國)땅에서 죽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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