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한국의 野史

17. 名將 乙支文德

오늘의 쉼터 2019. 1. 8. 19:05

 17. 名將 乙支文德



이 무렵부터 고구려는 전성기를 한 고개 넘긴 셈이었다.

 
남으로는 신라가 국력을 길러 북상할 기세를 보였고 그에 따라 백제 역시 자주 침공하여
괴롭히고 있는데 한편 서쪽으로는 수(隋)라는 강대한 세력이 대두되었던 것이다.
 
중국 대륙은 삼국(三國), 위(魏), 진(晋) 이래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이 서로 뒤섞여 싸우는가하면
남북조(南北朝)의 대립으로 분열과 혼란이 극심하더니
서기 589년(平原王 31년) 수에 의해서 완전히 통일되었다.
 
이렇게 되니 고구려와 수나라는 서로 인접하게 되었고, 강대한 이웃나라와 접한 고구려는
항상 불안에 떨게 되었다.
그래서 만일의 경우를 염려한 고구려에서는 병마와 군량을 비축하고 적침에 대비하다가
온달의 처남 격인 영양왕이 즉위한지 아홉 해 되던 해 왕은 친히 말갈(靺鞨)의 군사 1만 여명을
거느리고 요서(遼西=滿洲錦州省地方) 지방을 침공했다.
 
그러나 영주총관 위충(營州總管 韋沖)의 역습을 받아 퇴군하고 말았는데 이것이 고구려 사상
큰 국난인 동시에 최후의 국위를 떨치기도 한 여(麗) 수(隨) 충돌의 발단이 된 것이다.
 
고구려의 요서 침공으로 크게 노한 수문제(隨文帝)는 자기의 넷째 아들인 한왕양(漢王陽)에게
수륙 三十만 대군을 주어 고구려를 정복하도록 명했다.
그러나 한왕양은 임유관(臨o關)으로 나와 진군하다가 홍수를 만나 군량을 운반하지 못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병사들이 뜻하지 않은 질병으로 쓰러지게 되어 그 해 九월 군사를 거두어
퇴군하고 말았는데 이때 거의 전부의 군사가 죽었다고 한다.
 
고구려로서는 뜻하지 않게 큰 화를 모면한 셈이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실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천재지변으로 요행을 만난 것이었다.
그러므로 수나라의 비위를 그 이상 거슬렀다가 다시 침공을 받는 날에는 어떠한 참화를 겪을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자기 실력을 배양하는데 날까지는 수의 미움을 사지 않게 하자는 국책을 세우고
사신을 파견하여 사죄하는 글을 보냈는데 그 글 속에 [요동기토신모(遼東冀土臣某)]라는
말까지 넣을 정도로 자기를 낮추었다.
 
수문제는 그 글을 보자 크게 만족하여 이로부터 얼마 동안 여수 양국의 관계는 소강상태를 유지했다.
그러나 문제의 아들 양제(陽帝) 때가 되자 다시 두 나라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영양왕 18년, 양제는 계민(啓民)의 장막에 행차한 일이 있었다. 이때 마침 고구려의 사자가
계민의 처소에 와 있는 것을 보고 양제와 그의 종자들은 고구려의 충성심을 의심하게 되었다.
 
특히 수의 황문시랑 배구(黃門侍郞裴矩)는 양제에게 자주 말했다.
 
“고구려는 원래 한(漢) 진(晋)때부터 한낱 군현으로 우리 중국의 지배를 받아 왔습니다마는
근자에는 우리의 신하가 아니라 따로 독립된 이역으로 행세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선제께서는 이를 정벌코자 하셨다가 천재지변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으니
폐하께서 마땅히 공략하시어 귀속시키심이 옳을 줄로 압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 고구려의 사자는 계민이 나라를 들어 우리를 받들게 되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는 모양입니다.
 이때를 타서 대국의 위업을 보인다면 먹고 입조(入朝)할 줄로 압니다.”
 
양제는 그 말을 옳게 여겨 고구려의 사자를 불러 위협했다.
 
“짐은 계민이 충성을 다하므로 친히 그의 장막까지 왔거니와 그대도 귀국하거든
그대의 왕에게 입조(入朝)하여 의심을 사지 말도록 하라고 전해라.
만약 내조(來朝)치 않는다면 계민을 거느리고 그대의 국토를 침공하리라.”
 
그러나 고구려측에서는 이때 이미 어느 정도 수나라와 맞설 자신이 생겼던지
또는 양제의 말을 한낱 위협으로만 보았던지 그 말을 흘려듣고 오히려 남으로
백제의 송산성(松山城)을 공격하고 신라의 우명산성(牛鳴山城)을 공격하는 등
국토확장에 힘을 기울일 뿐이었다.
 
이렇게 되자 수양제는 영양왕 23년 정월, 고구려 정벌의 조서를 내리고
그 다음 달인 2월 친히 백여만 대군을 거느리고 수륙 양면으로 침공하게 되었다.
이때 수양제의 군사는 요수(遼水)에 이르러 물가에 진을 쳤는데 고구려군이
요수를 막고 항전하므로 건너올 수가 없었다.
 
양제는 하는 수 없이 공부상서 우문술(工部尙書 宇文述)에게 명하여 부교를 내 갈래로 만들고
요수의 서쪽 강변으로 건너가게 놓으려고 했으나 그 부교를 강 건너까지 걸쳐놓아 보니
강변에서 장여(丈餘)나 모자랐다.
 
그래서 그 대책을 강구하고 있는데 이 틈을 타서 고구려 군이 싸움을 걸어왔다.
이것을 보자 수나라 군사 중에 효용을 자처하는 자들이 앞을 다투어 물로 뛰어들어 접전했다.
그러나 고구려군은 높은 곳에 위치하여 유리한 지세로 대전하므로 수나라 군사는
강변에 오르지도 못하고 물 속에서 무수히 참살되고 말았다.
이렇게 되니 양제는 하는 수 없이 군사를 거두고 부교를 서쪽 강변으로 끌어올린 다음
다시 소부감 하조(小府監 河稠)에게 다리를 잇도록 명했다.
 
하조는 이틀만에 부교를 완성하고 동쪽 강변까지 건너 놓는데 성공했다.
이렇게 되니 수나라 대군은 노도처럼 부교를 건너 요수 동쪽 강변으로 진격하고
고구려 군은 그만 대패하여 1만 여명의 사상자를 냈다.
 
적군은 승세를 타서 요동성으로 진격하고 성을 포위했다.
그러나 석 달이 지나도록 요동성은 함락되지 않았다.
이에 양제는 여러 장군을 모아놓고 마침내 짜증을 부리게 되었다.
 
“공 등은 스스로 벼슬의 높음과 가세만 믿고 나를 업수히 여기는 것이냐?
내 공 등에게 묻거니와 패전의 책임을 지고 죽기를 원할 것이냐?
그렇지 않으면 힘을 다해서 싸울 것이냐?”

그러나 아무리 수하 장졸들을 위협해도 전세는 유리하게 전개되지 않았다.
 
한편 좌익위대장군 내호아(左翊衛大將軍 來護兒)는 수군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패수(浿水)로 들어왔다.
그리고 평양에서 60리 되는 지경에 이르자 고구려 군을 만나 이를 격파하고
그 승세를 타서 곧장 평양성으로 향하려 했다.
 
이때 부총관 주법(副摠官 周法)은 다른 군대를 기다려 합세하여 진격할 것을 진언했지만
초전에 승전을 거두어 기고만장해진 내호아는 그 진언을 듣지 않고 정병 수만명을 뽑아
스스로 거느리고 평양성 밑에까지 이르렀다.
 
이때 평양성을 수비하던 고구려 군은 나곽내(羅郭內)의 공사(空寺)에 군사를 숨겨두었다가
그들의 일부를 내어 거짓으로 패주시키니 내호아는 그들을 쫓아 성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우선 성중의 재물들을 약탈하느라고 대오를 갖출 겨를이 없었다.
 
이것을 보자 고구려 군은 달리 숨겨두었던 군사들을 일제히 일으켜 적군을 격파하니
내호아는 대패하여 겨우 목숨만 건지고 주법 등이 지키고 있는 진영으로 돌아왔는데
이때 수만 정병 중에서 살아간 자가 수천 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고구려측은 용병(用兵)의 묘를 발휘하여 적군을 괴롭혔으나
적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주지 않고서는 전란을 종식시킬 수가 없었다.
그러나 적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주자면 적군의 동태를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그러므로 영양왕은 대신 을지문덕(乙支文德)을 불러 적진에 거짓 항복하는 체하고
그 동태를 살펴 오라고 명했다.
을지문덕은 성품이 침착 대담하고 지략이 뛰어난 인물로서 대신으로 나라의 대사(大事)를
도맡고 있는 터라 그의 이름은 멀리 수나라에게까지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양제는 원정 초부터 휘하장군들에게
“고구려왕이나 을지문덕을 만나면 불문곡직하고 잡아 가둔 다음 보고하도록 하라”
하고 엄명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을지문덕이 진중에 이르러 항복을 청한다는 말을 듣자 우중문(宇仲文)은
즉시 잡아 가두려 하였다.
 
그러나 위무사 유사룡(慰撫使 劉士龍)이 그의 직책상 “이미 항복한 적장을 학대한다는 것은
대국의 도리가 아니오”하고 굳이 말이므로 우중문도 그 말에 귀가 솔깃해서 을지문덕을
그대로 방임하고 말았다.
 
이렇게 되니 을지문덕은 적의 진중을 마음대로 돌아다니며 정세를 파악할 수 있었다.
적군의 형세는 을지문덕이 상상하던 것보다도 훨씬 더 허약했다.
군량은 부족하고 군졸들은 원로에 극도로 피로해 있었다.
 
적의 형세가 이러하다면 승리는 우리의 것이 될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한 을지문덕은
핑계를 대어 적진을 물러 나왔다.
을지문덕이 진영 바깥으로 나가자 적장 우중문은 그제야 크게 뉘우쳤다.
그리고 양제의 엄명도 생각났다.
그래서 급히 사람을 보내어 을지문덕의 뒤를 쫓게 하고
“급히 의논할 일이 있으니 속히 돌아와 주기 바라오”라고 말을 전하게 했다.
 
그러나 을지문덕은 그것이 적의 뒤늦은 술책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돌아보지 않고 압록강을 건너 고구려 진영으로 귀환했다.
을지문덕을 돌려보내자 누구보다 더 불안에 쌓인 것은 적장 우문술(宇文述)이었다.
우문술은 이미 군량이 떨어지게 된 데다가 군사들은 피로하고 또 그런 약점을
을지문덕이 남김없이 보고 갔으니 어떤 기습을 당할는지도 모를 일이므로 회군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의견을 냈다.
 
그러나 우중문은 반대했다.
 
“우리 10만 대군을 가지고 조그만 적군을 격파하지 못한다면 무슨 낯으로 황제를 대할 수 있겠소?”

을지문덕을 놓아 준 책임도 느껴서 그랬을 것이다.
우중문의 반대에 우문술도 더 회군을 주장할 근거가 없어서 그 말을 좇게 되었고
그리하여 마침내 적군은 압록강을 건너 고구려 군을 공격하게 되었다.
 
적군이 굶주림과 피로에 시달리게 된 것을 잘 알게 된 을지문덕은 적군을 더욱 더 피로하게 하여
기진맥진했을 때 한번에 섬멸하려는 전술을 세웠다.
그래서 적군을 만나면 한참 싸우다가 일부러 패한 척 도망을 치기를 일곱 번이나 거듭했다.
 
이렇게 되니 한때 회군을 주장하던 우문술도 전승에 도취되어
“소국은 역시 별 수 없는 일이외다. 전력을 기울여 적군의 숨통을 끊어버립시다.”
이렇게 양언하고는 마침내 살수(撒水=淸川江)를 건너 평양성 三十리되는 지경에
산을 의지해서 진을 쳤다.
 
이렇게 되자 을지문덕은 다시 한번 적을 농락하는 술책을 썼다.
즉 시 한수를 지어 적장 우중문에게 보냈다.
 
  神策克天文,
  妙算窮地理.
  戰勝功旣高,
  知足願云之.
  (신과 같은 계책은 천문을 다하고,
  기묘한 헤아림은 지리에 통달했도다.
  싸움에 이겨 공이 이미 높으시니,
  바라건대 족함을 알고 그치시오.)

을지문덕의 시를 받아든 우중문은 기고만장해서 너그러운 답서를 써서 고구려 진영으로 보냈다.
 
그러자 을지문덕은 다시 사자를 파견하여 거짓으로 항복하는 체하며 이번에는 우문술에게 청했다.
 
‘만일 이대로 회군하신다면 즉시 우리 왕과 함께 황제의 행재소(行在所)를 찾아가 뵙겠습니다.‘

이러한 청을 받고 우문술이 피아(彼我)의 군세를 돌아보니
자기 군졸들은 극도의 굶주림과 피로로 말미암아 이 이상 더 싸울 것 같지 않고
한편 고구려의 평양성은 험하고 견고해서 함락시키기 어려울 것 같다.
 
그러므로 마침내 을지문덕이 항복을 청한 것을 다행이라 여기고 군사를 돌려 퇴군하기 시작했다. 
이것을 보자 을지문덕은 태도를 돌변하여 미리 퇴로에 숨겨두었던 복병을 일으켜 사방으로 요격했다.
 
우문술 등은 또다시 을지문덕에게 속았다는 것을 알고 격분했지만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피로한 군졸을 이끌고 패주를 거듭하여 그해 七월에 겨우 살수에 이르렀다.
 
수군이 살수를 반쯤 건넜을 때였다. 고구려 군은 최후의 맹격을 가한 결과 적의 우군위장군 신세웅
(辛世雄)을 전사시켰다.
이로 말미암아 적군은 수습할 길 없이 혼란하여 더 싸울 기력도 없이 앞을 다투어 도망했는데
어찌나 급히 패주 했던지 하룻밤 동안에 四백 五십리를 달려 압록강에 이르렀으며
다시 압록강을 건너 요동 땅에 이르렀을 때에는 처음에 三十만 五천이나 되던 대군이
二천七백 명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고구려 원정의 실패는 수나라로서는 결정적인 타격이었다.
그때 입은 손실로 말미암아 국세는 피폐하고 백성들은 동요하여 도적들은 사방에서 일어나고
군웅은 각지에서 봉기하였다. 
그래도 양제는 고구려 침공을 단념 못하고 여러 차례 군사를 일으켜 보았으나 번번히 실패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정으로 국내가 어지러워진 틈을 타서 일어난 이세민(李世民)부자에게
천하를 빼앗기고 마침내 양제는 그의 부하에게 피살되었으니 수나라에 대한 고구려의 항쟁은
결국 수나라를 멸망시켜 중국 역사를 뒤엎는 결과를 초래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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