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한국의 野史

[백제 궁중비사] 1. 沸流와 溫祚

오늘의 쉼터 2019. 1. 8. 19:47

[백제 궁중비사]



1. 沸流와 溫祚



백제(百濟)의 건국은 왕자들의 암투가 빚어낸 결과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고구려(高句麗) 시조 고주몽(高朱蒙)은 북부여(北扶餘)에 있을 때 맞이한 예씨부인(禮氏夫人)의
몸에서 유리(類利)라는 아들을 낳은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 후 주몽이 북부여를 탈출해서 졸본부여(卒本扶餘)로 망명했을 때 예씨와 유리를 두고
그냥 떠났다.
 
졸본부여로 망명한 주몽은 그 곳 사람들의 후원을 받아 새 나라를 세우는 한편
다시 아내를 두었는데 장자는 비류(沸流)라 하고 차자는 온조(溫祚)라 했다.
 
주몽의 후처와 그 소생인 두 아들에 대해서 몇 가지 설이 있기는 하지만
그 중에 가장 자세한 것을 취하면 이렇다.
 
주몽의 후처는 졸본사람 연타발(延 勃)의 딸(또는 졸본 부여왕의 둘째 딸)로서
이름을 소서노(召西奴)라고 했는데 처음에는 우대(優台)란 사람에게 출가하여
비류와 온조 두 아들을 낳았다가 우대가 죽은 후 두 아들을 데리고 주몽의 후처가 되었다.
 
주몽이 나라를 건국하는데 있어서 소서노와 그의 친정의 협력이 대단히 컸다.
그러므로 주몽은 왕위에 오르자 소서노를 비로 삼고 지극히 총애하는 한편 비류와 온조도
자기 아들처럼 대했다.
그러다가 주몽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西紀前 十九), 북부여에서 예씨 소생의 유리가 찾아오자
그를 세워 태자로 삼고 왕위를 계승하게 했다.
 
이와 같은 일이 아버지 다른 두 왕자 비류와 온조에게는 큰 불평거리가 되었다.
 
어느날 비류는 아우 온조에게 넌지시 말했다.
 
“처음에 대왕이 북부여에서 도망해 왔을 때 우리 어머니와 외가에서는 모든 힘을 다 기울여
그 분을 도왔고 나라를 세우는데도 큰 공이 있는데 지금 와서 자기 친아들이 찾아왔다고
나라를 그에게 물려주려고 하니 이런 섭섭한 일이 어디 있겠느냐?“
 
온조는 원래 침착하고 신중한 인물이었다.
자기로서도 생각은 있었지만 형이 이런 불평을 말하자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그러니까 차라리 달리 생각을 하는 게 좋을 줄로 안다.”
 
비류의 말이 여기까지 이르자 온조는 비로소 입을 떼었다.
 
“달리 생각하다니 어떻게 하는 거죠?”
 
“여기를 떠나는 거다. 공연히 여기서 머뭇거리다간 설움만 받을 뿐 아니라
태자가 우리를 의심하고 미워하게 되면 부질없이 목숨이나 잃을 게 아니냐.
그러니 일찌감치 남쪽으로 내려가서 좋은 땅을 찾아 따로 나라를 세우는 게 좋을 것 같다.”
 
온조도 그 의견에는 동감이었다. 그래서 두 형제는 오간(烏干) 등 열명의 신하들과 함께
남쪽을 향해 길을 떠났다.
그리고 전부터 두 왕자를 흠모하던 백성들도 많이 그 뒤를 따랐다. 
따르는 사람이 뜻밖에 많으니 좋은 터전만 장만하면 한 나라를 이룩할 수 있으리라고
두 왕자는 생각했다.
 
남으로 향한 두 왕자와 그들을 따르는 여러 백성들은 마침내 한산(漢山)에 이르렀다.
한산에는 부아악(負兒嶽)이란 산이 있었다.
 
“이렇게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기만 할 것이 아니라,
저 산에 올라가서 사방을 두루 살펴보는 것이 좋을까 합니다.”
 
신하의 한 사람인 오간(烏干)이 제의하자
여러 사람이 거기 찬동하므로 모두들 부아악으로 올라가 보았다.
내려다보니 그 고장의 지세(地勢)는 북으로는 한수(漢水)를 끼고 동으로 높은 산이 가로 막히고
남으로 기름진 벌판이 펼쳐 있고 서편으로 큰 바닷가 있다.
그야말로 천험(天險)의 지리(地利)를 이루고 있다.
 
“이 고장이 매우 좋군.”
 
온조가 이렇게 말하자 신하들도 곧 거기 찬동했지만 비류는 몹시 못마땅했다.
그래서 그곳에 도읍할 것을 극구 반대했으나 비류의 의견을 따르는 자는 몇몇 백성들에 불과했다.
 
그러나 비류는“나는 도저히 이 고장에 도읍할 생각이 없다.
따로 좋은 곳을 찾아갈 테니 나를 따를 사람은 따르고 여기 머물러 있고 싶은 사람은
마음대로 머물러 있거라.”
소리치고는 걸음을 돌려 서쪽 미추홀(彌鄒忽)로 향했다.
그러나 그를 따른 사람은 역시 몇몇 백성 뿐이었다.
 
오간을 비롯한 열 사람의 신하와 백성들의 대부분이 온조 곁에 남게 되어
온조는 하남 위례성(河南慰禮城)에 도읍을 정한 후 열 사람 신하로서 보익(輔翼)케 하고,
국호를 십제(十濟)라 했는데 바로 서기전 十八년의 일이었다.
 
한편 서쪽으로 향한 비류와 그 일행은 막상 미추홀에 당도해 보고는 크게 실망했다.
바닷가인데다가 지대가 낮은 까닭으로 땅이 습해서 궁궐은 고사하고 민가 하나 제대로 지을 수가 없다. 그리고 어디를 파보나 물이 짜서 식수(食水) 한 모금 제대로 구할 길이 없다.
 
온조와 갈라져 올 때에는 그래도 새 터전을 잡아서 궁궐을 짓고 나라를 세우겠다는 그들이었지만
이제는 당장 목을 축일 물 한 모금을 얻기에 바빴고 비와 이슬을 피할 나무 그늘이나 바위 틈을
찾기에 분주한 가련한 신세가 되었다.
 
비류는 백성들과 함께 바위 틈에서 밤을 지내고 날이 새기도 전부터 각처를 싸돌아 다녔다.
어떻게 해서든지 도읍할 터전을 구해서 방황하는 백성들을 안정시키자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아무리 돌아다녀 보았자 바다를 낀 고장치고 온조가 택한 하남 위례성만한 곳은 없었다. 
아니 설혹 그보다도 못하더라도 우선 백성들이 머물러 살 수 있을 만한 곳이라도 있으면 좋겠는데
그런 곳조차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니 백성들은 차차 비류를 원망하게 되었다.
 
‘나 때문에 공연히 죄 없는 사람들이 고생을 하고 있구나. 너무 고집을 부리지 말자.’
 
비류는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아우가 택한 그 땅으로 돌아가 보자.’
 
비류는 백성들 몰래 온조가 도읍을 정한 위례성으로 돌아갔다. 온조는 형을 반겨 맞아주었다.
 
“형님 잘 오셨소. 그러지 않아도 미추홀은 땅이 좋지 못해서 형님과 백성들의 고생이 심하다는
말을 듣고 여간 염려하지 않았습니다.”
 
온조는 크게 잔치를 베풀어 형을 환대했다.
열 사람의 신하들과 많은 백성들도 비류를 극진히 공대했다.
잔치는 여러 날을 두고 계속되었다.
 
“형님, 이젠 그런 메마른 고장에 가셔서 고생하시지 말고 여기서 함께 삽시다.”
 
온조는 이런 말도 해주었다.
 
“그렇게 하십시오. 그렇게 하신다면 저희들도 여간 마음이 든든하지 않겠습니다.”
 
열 사람의 신하들도 온조를 따라 권했다.
그러나 비류는 그러한 환대나 권유가 조금도 달갑지 않았다.
환대를 받을수록 비류는 자기가 만사에 얼마나 어리석었으며 만사를 얼마나 수월하게 생각해 왔는가,
하며 뼈저리게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내가 설 땅은 아무데도 없다.’고 비류는 생각했다.
미추홀로 가야 굶주림과 고생만이 기다리고 있다.
그렇다고 이곳에 이 이상 머물러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그야 너그럽고 현명한 온조는 아마 자기가 이곳에 머물러 있겠다면 끝끝내 형으로서의
대접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편안하고 안락한 길을 택하려면 그 이상 더 좋은 방법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나면서부터 왕자(王者)의 자리만을 바라 보며 살아온 비류였다.
부왕(父王=朱蒙) 밑에 있을 때만 해도 응당 다음 왕위를 계승할 자는 자기라 생각하고
임금으로서 부끄럽지 않을 만한 모든 힘을 기르기에 골몰했다.
그러자 유리왕자가 나타나서 그의 이러한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지만….
 
아우 온조와 함께 고국을 등지고 남으로 내려 올 때에도 비류는 응당 자기가
왕이 되리라는 꿈을 안고 만사를 그러한 심사에서 처리해 왔었다.
그러나 이제 모든 형세를 살펴보니 이번에도 왕이 될 꿈은 깨지고 만 것이다.
 
이제 아우 온조가 왕위에 오르면 자기는 그 밑에서 굽실거려야만 한다.
 
온조가 형 비류를 위해서 크게 잔치를 베푼 지 며칠 후였다.
비류가 아무도 모르게 종적을 감추었다.
 
위례성은 발칵 뒤집혔다.
 
온조는 여러 사람을 풀어 형 비류가 간 곳을 찾게 했다.
얼마 후에 바로 부아악 정상에서 비류를 찾기는 했다.
그러나 그것은 칼을 물고 쓰러진 싸늘한 시체였다.
 
부아악은 비유와 온조가 도읍할 곳을 찾으려고 올라갔던 뫼였다.
그리고 그 뫼에서 내려다 
보았을 때 옳은 지역을 택한 온조는 지금과 같은 부강을 이룩했고 판단을 그르친 비류는
실의와 비분 속에 잠기게 된 것이다.
짐작컨대 비류는 지난날의 어리석음을 새삼 뉘우치고 절망한 나머지 추억 어린 그 곳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것이다.
 
비류가 자결하자 그가 거느리던 백성들은 모두 위례성으로 모여들었다.
뿐만 아니라 인근 주민들이 온조의 덕망을 흠모하며 날로 모여들었으므로
국호를 다시 백제(百濟)라고 고쳤다.
 
나라의 기틀이 차츰 잡혀가자 무엇보다도 염려되는 것은 인접국가의 침입이었다.
그 당시는 특히 나라와 나라의 관계는 힘과 힘의 대결이었다.
강한 자는 흥하고 약한 자는 강한 자에게 먹히기 마련이었다.
특히 신생국가 백제의 위협이 되는 세력은 북쪽에 있는 말갈(靺鞨)이었다.
 
“말갈은 사람들이 날래고 꾀가 많으니 마땅히 군사를 정비하고 양곡을 저장하여
그들의 침입을 막는 방도를 세워야 하겠다.”
 
왕은 신하들을 모아놓고 이런 말을 했다.
그러나 막상 적군이 침입했을 때 나라의 안팎 일을 도맡아 처리할 우수한 보필자가 아쉬웠다.
그래서 여러 신하들에게 마땅한 사람을 천거하라고 했더니 여러 신하들은 입을 모아
족부 을음(族父 乙音)이야말로 지식이 풍부하고 담력이 강대해서 그런 대사를 맡기에 족할 줄로
아오.”이렇게 진언했다.
 
왕은 곧 신하들의 진언을 따라 을음에게 우보(右輔=右相에 해당되는官職)라는 벼슬을 주고
병마국사(兵馬國事)를 맡겼다.
 
온조의 예견은 들어맞았다. 그 이듬해(溫祚祖三년) 九월 마침내 말갈이 북변(北邊)을 침공했다.
이에 왕은 날쌘 군사를 거느리고 적을 기습하니 적은 대패하고 그 중에 살아 돌아간 자가
열에 하나밖에 못되었다.
그 후에도 말갈은 자주 침공했지만 백제측의 방위가 견고하므로 번번히 패하여 물러갔다.
 
온조는 외적의 침공에 대비하는 한편 내정(內政)에도 힘을 기울였다.
 
온조왕 十三년에 이르자 괴상한 일이 연거푸 일어났다.
그 해 三월에는 위례성내(慰禮城內)에 살던 노파가 갑자기 남자로 변하는 일이 생기는가 하면
백주에 호랑이 다섯 마리가 도성 안으로 들어와서 거리를 누비며 다녔다.
또 왕모 서소노가 비록 六十一세란 고령이긴 했지만 별로 앓아 보지도 못하고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아직 나라의 기틀이 제대로 굳지 못하고 민심이 완전히 안정되지 못한 터에 이런 괴변이
뒤이어 일어나니 도성 안은 몹시 슬렁거렸다.
 
물론 냉철하게 판단할 때 이런 일은 모두 우연히 일어난 괴변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술렁거리는 민심을 버려 둘 수는 없었다. 어떤 획기적인 대책을 강구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그 해 五월, 왕은 여러 신하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했다.
 
“우리 도성은 동쪽에 치우쳐 있고 북에는 말갈이 있어 항상 강역을 침공하므로 조금도
펴안한 날이 없다. 그 뿐 아니라 이즈음 요망한 징조가 여러 번 나타나고 국모가 세상을 버리시는
일까지 있어서 민심이 몹시 어지러우니 차라리 도읍을 옮기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왕의 말에 여러 신하들도 모두 찬동했다. 그러나 문제는 새로 도읍을 옮길 후보지였다.
그래서 모두 수근거리고 있는데 왕은 다시 말을 이었다.
 
“내 지난날 한수(漢水) 남쪽으로 가서 본즉 땅이 대단히 기름지고 백성들이 살기에 족할 것 같으니
그 곳으로 도읍을 옮겨 오래 오래 편히 살 수 있는 계획을 도모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래서 그 해 七월 한산(漢山=廣州) 밑으로 가서 성을 쌓고 위례성의 민호를 옮기는 한편
그해 八월에는 이웃나라 마한(馬韓)에 사자를 파견하여 천도를 알리는 한편 나라의 경계를 확정했다.
즉 북쪽은 패하(浿河)를 경계로 삼고 남쪽은 웅천(熊川)을 경계로 하고 서쪽은 바다까지 뻗히고
동쪽은 주양(走壤=平康)을 경계로 삼았다.
 
이로써 새 도성과 강토를 확정하여 하나의 국가로서의 틀을 완전히 잡은 셈이었다.
 
온조는 원래 검박한 인물이었다. 천도한 수 二년 동안이나 가궁(假宮)에서 살다가 十五년 정월에
비로소 궁궐을 세웠는데 검소하면서도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면서도 사치스럽지 않았다고 한다.
 
온조왕은 재위 四十六년 동안 새나라의 기틀을 잡기에 온갖 노력을 다했다. 十八년에는
낙랑(樂浪)의 침입을 막아 새나라의 위기를 모면했으며 二十四년에는 마한(馬韓)과 싸워
국토를 확장했다가 二十七년에는 마한을 멸망시켜 그 국토를 병합했다.
 
온조왕 四十六년 왕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원자인 다루(多婁)가 왕위를 이었으니
바로 제二대 다루왕(多婁王)이다.
 
다루왕은 성품이 너그럽고 덕망이 있어서 선왕의 위업을 계승하고 국력을 강서케 하는데 힘을 기울이다다 재위 五十년 만에 세상을 떠나고 그 뒤를 그의 원자 기루왕(己婁王)이 계승했다.
 
기루왕 역시 식견이 넓고 작은 일에는 마음을 쓰지 않는 인물이었으므로 재위 오십이년 동안
대사를 그르침이 없이 사직을 지키고 세상을 떠나자 그 뒤를 그의 아들 개루(蓋婁)가 계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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