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한국의 野史

14. 幸運의 王孫

오늘의 쉼터 2018. 12. 18. 19:49

[고구려 궁중비사]


14. 幸運의 王孫



중천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이는 제13대 서천왕(西川王)이다.

 
서천왕은 이름을 약로(藥盧)라고 했는데 중천왕의 둘째 아들로서 성품이 어질고 총명하므로
나라 사람들은 모두 그를 경애하여 마지않았다.
그는 나라 안으로는 백성들을 극진히 사랑하고 밖으로는 숙신(肅愼) 등의 침입을 격퇴하여
고구려의 사직을 한층 더 공고히 하고 23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서천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것이 제14대 봉상왕(烽上王)인데,
이 임금은 실로 고구려 역대 임금 중에서 가장 포악하고 잔인한 임금중의 하나였다.
어려서부터 교만하고 의심이 많으며 겁이 많은 왕은 즉위하자
맨 먼저 한 일이 자기 숙부이자 나라의 큰 공신인 안국군 달매(安國君 達買)를 죽인 일이었다.
 
달매는 일찍이 서천왕 때 숙신이 침입하자 왕의 명을 받고 기병(騎兵)으로 적을 공격해서
그 추장을 죽이고 백성들을 귀속시킨 큰 공을 세웠다.
그래서 백성들은 모두 그를 흠모해 마지않았는데 이것이 의심 많고 소견 좁은 봉상왕에게는
무엇보다도 못마땅했던 것이다.
아무리 신하이지만 숙부가 되는데다가 인망 높은 공신이 가까이 있으니
사사건건(事事件件) 자기를 압박하는 것같이 느껴졌던 것이다.
 
봉상왕이 죄 없는 안국군을 죽이자 백성들은 땅을 치고 통곡하며 나라의 앞일을 슬퍼했다.
백성들의 우려는 한해도 못 가서 사실로 나타났다.
봉상왕 8년 8월 연(燕)의 모용외(慕容 )가 침입했다.
 
연은 오호선비국(五胡鮮卑國)의 일족으로 모용씨를 우두머리로하여 외( ) 때에
요하(遼河) 상류에서 일어나 西紀 185년에는 북부여를 침공하고, 요서(遼西)를 공략하고,
194년에는 지금의 금주(錦州) 부근에 도읍을 정했으니 고구려에 침입한 것은
바로 도읍을 정하기 전 해였다.
 
포악하지만 겁이 많은 봉상왕이었다.
신흥강국이 대군을 몰아 침입하니까
적을 맞아 격퇴할 생각은 하지 않고 자기 한 몸의 안전만을 꾀한 나머지
신성(新城)으로 피신하고자 곡림(鵠林)까지 도망했다.
 
그러나 적군은 이것을 재빠르게 탐지하고 맹렬히 추격했다.
왕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저 우왕좌왕하고 있는데 신성을 지키고 있던 북부소형(北部小兄) 고노자(高奴子)가
5백기를 거느리고 마주 나와 적군을 격퇴시키고 왕을 구출해서 겨우 목숨만은 건질 수 있었다.
 
이렇듯 외적에게는 비겁한 왕이었지만 동족이나 혈친에게는 지극히 잔인했다.
모용외를 물리쳐서 겨우 신변이 안전해지자 이번에는 자기 주변이 불안스러워졌다.
즉 아우 돌고(突固)가 딴 마음을 품고 자기를 몰아내려 하지 않나 의심하게 되었다.
그래서 없는 죄를 만들어 돌고를 죽여 버렸다.
이때 돌고에겐 을불(乙弗)이란 아들이 있었다.
그는 자기 부친이 죄 없이 죽는 것을 보자 자기에게도 화가 미칠 것을 염려하고
멀리 외진 시골로 도망쳐 버렸다.
 
이것은 안 봉상왕은 훗날 을불이 부친의 원수를 갚을까 염려되어
백방으로 사람을 놓아 찾아보았으나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이렇게 자기 권력의 유지를 위해서는 혈친들까지 잔인하게 참살한 왕은
한편 향락을 위해서는 백성들의 고통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봉상왕이 즉위한지 아홉 해 되던 해.
봄부터 가을이 되도록 도무지 비가 오지 않아서
논은 갈라지고 밭에 심은 채소까지 모조리 말라 죽었다.
백성들은 굶주림에 견디지 못해 서로 잡아먹기라도 할 형편이었다.
이렇게 백성들이 고생을 하고 있는데도 그 해 8월,
임금은 궁궐을 크게 고치려고 15세 이상 되는 남녀는 모조리 징발해서 일을 시켰다.
이런 나라 형편을 크게 우려한 국상 창조리(創助利)는 임금을 뵙고 단단히 간했다.
 
“가물로 굶주린 백성에게 다시 고된 역사를 시키시다니,
어찌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불쌍히 여기시는 처사라 하겠습니까?
듣자니 견디다 못해 이웃나라로 도망치는 백성도 많다고 합니다.
이 틈을 타서 이웃나라들이 쳐들어오면 장차 어떻게 나라를 지키시려고 그러십니까?”
 
창조리의 말에 임금은 크게 노했다.
 
“무슨 소리냐? 임금은 백성이 우러러 보도록 해야 하는 법아라.
만약 임금이 거처하는 궁궐이 초라하면 백성들이 임금을 가벼이 여길게 아닌가?”
 
창조리는 이 이상 더 간해도 소용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봉상왕을 폐하고 새 임금을 세울 생각으로 전부터
가깝게 지내오던 동부(東部)의 소우(蕭友)를 은밀히 불러 의논해 본 끝에 물었다.

“그런데 어느 분을 새 임금으로 모시면 좋을까?”
 
“그야 전에 임금에게 쫓겨난 을불 어른이 제일 마땅하지요.
그 어른으로 말할 것 같으면 어질고 인자하기로 왕족 중에 으뜸이니
반드시 백성이 바라는 좋은 임금이 되실 겝니다.”
 
이리하여 소우는 나라 안 각처로 을불을 찾아다니게 되었다.
 
한편 부친 돌고가 죽을 때 시골로 피난한 을불은 수실촌(水室村)이란
벽촌으로 흘러가서 음모(陰牟)란 사람의 집 머슴이 되었다.
음모는 물론 을불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지 못했으므로 그를 심하게 부려  먹었다.
 
유달리 무더운 여름 밤이었다.
성미가 지극히 각박한데다가 몹시 조급한 음모는 아까부터 짜증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런데 때마침 담 너머 연못에서는 개구리들이 요란스럽게 울기 시작했다.
 
“아 저놈의 개구리는 왜 저리 운담! 얘, 을불아! 너 가서 저 개구리가 울지 못하도록 해라!”
 
을불은 주인의 명령이니 어쩔 수 없이 연못으로 갔다.
그는 돌을 하나 집어 연못에 던졌다.
 개구리들은 울음은 뚝 그쳤다.
 
얼마 후 개구리가 또 울기 시작하면 을불은 또 돌을 던졌다.
이렇게 하면서 밤새도록 돌을 던져 개구리 우는 소리를 막았다.
그 덕택으로 주인 음모는 편히 잘 잤겠지만 을불은 한잠도 잘 틈이 없었다.
 
이튿날, 을불은 곰곰 생각해 보았다.
 
‘이렇게 인정이 없는 주인, 자기 혼자 편히 자려고 다른 사람이야 어찌되었든
마구 부려 먹는 주인 밑에서 일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을불은 마침내 음모의 집을 뛰쳐나왔다.
그리고 정처없이 길을 가다가 재모(再牟)라는 사람을 만났다.
 
“어디 가는 길인가?”
 
“갈 데가 없어서 그저 정처 없이 어슬렁거리고 있는 거지.”
 
“그럼 나하고 같이 장사나 시작해 보지 않겠나?”
 
“무슨 장사를 한담?”
 
“요즘 소금장사가 괜찮다더군.”
 
이렇게 해서 을불은 재모와 함께 소금장사를 시작했다.
 
그날부터 여기저기 소금을 팔러 다니다가 하루는 날이 저물어 강동(江東)의 어느 시골집에
머물게 되었는데 숙박료로 을불은 소금 한 말을 퍼 주었다.
그러나 그 노파는 굉장한 욕심쟁이였던 모양이다.
 
“겨우 한 말만 주우? 한 말만 더 주구려.”
 
사람 좋은 을불도 염치없는 노파의 욕심에 비위가 상했다.
 
“그거 너무 하십니다. 어떻게 그렇게 까지 할 수가 있어요?”
 
을불이 거절하니까 주인 노파는 앙심을 품었다.
 
그날 밤이었다.
을불이 깊이 잠든 틈을 타서 노파는 몰래 을불의 소금섬에 무엇인가 처넣고 급히 몸을 피했다.
그 이튿날 아무것도 모르는 을불은 다시 소금짐을 짊어지고 거리로 나섰다.
큰길을 얼마쯤 갔을 때였다.
별안간 등 뒤에서 “도둑이야!”하고 외치면서
어제 묵었던 집 노파가 쫓아오더니 을불의 소금섬을 움켜잡았다.
 
“이제 잡았다. 이 도둑놈!”
 
“도둑놈요? 내가요?”
 
을불은 눈이 휘둥그래졌다.
 
“아, 멀쩡하게… 어 어젯밤에 내 신을 훔쳤지? 어서 내놔! 그 소금섬 좀 보자!”
 
을불은 전혀 애매한 소리라 선선히 소금섬을 열어 보였다.
그랬더니 소금섬 속에는 바로 노파의 신이 들어 있지 않은가?
앙심을 품은 노파는 어젯밤에 자기 손으로 신을 집어넣고 이렇게 야단을 떠는 것이었다.
 
을불은 대단히 난처했다.
자기 소금섬에 틀림없이 신이 나왔으니 변명의 여지조차 없었다.
이때였다.
둘러서서 구경하던 사람들 틈에서 한 점잖은 사나이가 나섰다.
 
“여보 노파 그 젊은이 신수를 보니 도둑질을 하거나 그럴 사람은 아닌 것 같구료.
뭐 잘못돼서 그런 모양이니 그만두슈.”
 
그러면서 그 점잖은 사나이는 몰래 노파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리고는 그 손에 금전 한푼을 쥐어 주었다.
원래 욕심 많은 노파라 곡절을 알 수 없지만 공짜로 큰 돈이 생겼으니 이내 입이 딱 벌어졌다.
이때까지 붙잡고 야료하던 을불을 내버려 두고 덜레덜레 사라졌다.
 
겨우 창피한 꼴을 모면한 을불이 공손히 절을 하며 그사나이에게 치하하니까
사나이는 나즈막한 소리로 “조용히 여쭐 말씀이 있으니 같이 가십시다”했다.
그리고는 어느 조용한 강가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땅에 엎드려 공손히 절을 하는 것이었다.
 
“아니 왜 이러십니까?”
 
을불이 당황히 그 사람의 손을 잡아 일으키려니까
 
“신하로서 임금되실 분에게 절을 하는 것을 어찌 틀리다 하시겠습니까?”
 
그 사람은 바로 을불을 찾아 헤매던 소우였던 것이다.
 
“지금 나라 임금이 무도해서 국상 창조리가 여러 신하들과 의논하고 왕을 폐하기로 의논했습니다. 
그러나 대통을 이을 분이 마땅치 않아 염려하던 차에 왕손께서 조행이 바르시고
성품이 인자하시므로 대통을 이의기에 가장 적합한 분이라는데 뜻이 합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신이 이렇게 모시러 왔으니 나라와 백성을 위해서 환궁해 주십시오.”
 
을불에겐 봉상왕은 부친의 원수다.
이제 원수를 갚게 될 뿐만 아니라 영예로운 그 자리에 대신 앉게 된다는 것은
더 바랄 나위 없이 기쁜 일이었다.
그러나 소우의 말이 너무나 뜻밖이여 또 봉상왕이 보낸 자객이
감언이설(甘言利說)로 꼬이는 것이 아닌가 의심도 들었다.
 
“아니 날더러 왕손이라니 당치도 않은 말씀이오. 나는 보시는 바와 같이 천한 소금장이외다.”

딱 잡아떼어 보았다.
그러나 소우는 진정으로 을불을 찾아 헤맨 일을 낱낱이 이야기하므로 더 의심할 여지가 없어
마침내 그가 마련해 온 가마에 올랐다.
그러나 아직도 봉상왕이 권세를 쥐고 있는 세상이었다.
을불이 나타났다는 것을 알면 당장에 화가 미칠 것이다.
창조리는 오맥남(烏陌南)이란 심복의 집에 을불을 감추고 거사할 기회만 가다렸다.
 
그 해 9월 봉상왕은 후산(候山) 숲 속에서 크게 사냥을 하게 되었다.
기다리던 기회였다.
사냥을 좋아하는 왕은 짐승을 쫓아 홀로 숲 속 깊숙이 들어갔다.
이 틈을 타서 창조리는 여러 신하들에게 외쳤다.
 
“지금 임금은 무도하기 이를 데 없어 방방곡곡(坊坊曲曲) 백성들의 원성으로 가득하오.
나 창조리는 백성들과 나라를 위해서 무도한 임금을 몰아낼 생각이오.
나와 뜻을 같이 하는 분은 그 표적으로 다 나하는 대로 하시오.”
 
말을 마치자 창조리는 갈잎을 꺾어 머리에 꽃았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이 다 갈잎을 꺾어 머리에 꽃는 것이었다.
 
“이제 우리들의 뜻이 다 같다는 게 밝혀졌소. 자, 그럼 정의의 칼을 뽑읍시다.”
 
창조리가 칼을 뽑고 앞장을 서서 임금을 쫓으니
다른 사람들도 다 손에 칼을 뽑아들고 그 뒤를 따랐다.
봉상왕은 창조리와 여러 신하들에게 사로잡혀 감금되었다.
왕은 그래도 여러 가지로 계교를 써서 도망치려고 애써 보았지만
누구 하나 자기편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누구나 다 냉정한 눈초리를 보낼 뿐이었다.
 
‘모든 것이 다 끝났구나!’
 
모질고 악독하던 왕도 두 줄기 눈물을 흘리고 허리에 매었던 띠를 풀어 목을 매어 죽었다.
그 소식이 전해지자 그의 두 아들도 부친을 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창조리는 곧 죽은 왕의 시체를 봉산(烽山) 언덕에 고이 장사지내고 마침내 을불을 왕위에 오르게 했다.
 
그가 곧 제 15대 미천왕(美川王)이다.
상하의 신망을 한 몸에 지니고 왕위에 오른 미천왕은 과연 내치(內治), 외교(外交),
국방(國防)에 많은 치적을 남겼다.
 
3년 9월에는 군사 3만명을 친히 거느리고 현도군을 쳐서 그 고장 사람 8천명을 사로잡아
평양으로 데려왔으며 12년 8월에는 요동 서안평(西安平)을 침공했으며 14년 10월에는
낙랑군을 공략해서 남녀 2천여명을 귀순시켰다.
 
이렇게 국력의 부강에 온갖 정력을 기울이던 미천왕이
즉위 32년 되던 해(西紀 331년) 2월에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 사유(斯由)가 왕위를 이었다.
즉 제16대 고국원왕(故國原王)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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