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한국의 野史

15. 小國의 君主

오늘의 쉼터 2018. 12. 29. 19:58

15. 小國의 君主



고국원왕은 어느 의미로 보면 부왕이 지나치게 판도를 벌린 뒷수습을 하다가 희생된

비극의 왕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왕은 즉위하자 부왕이 지나치게 자극해 놓은 이웃나라들과 화친을 맺으려고 애를 썼다.

 
그러므로 10년에는 세자를 연왕(燕王)에게 보내어 그 비위를 맞추려고 했지만
그 다음 다음 해인 12년 11월 연왕 모용황(慕容o)은 입위장군(立威將軍) 모용한(慕容翰)의
계책을 받아들여 스스로 정병 四만을 거느리고 남쪽으로부터 쳐들어왔다.
그리고 따로 장사 왕우(王寓) 등을 시켜 군사 1만5천으로 북도(北道)로 침입하였으니
고구려는 남북으로 협공을 당한 셈이었다.
 
이때 고국원왕은 아우 무(武)에게 정병 五만을 주어 북도를 막게 하고 왕 자신은
따로 군사를 거느리고 남도를 방비했다.
그러나 모용황, 모용한 등의 군세가 너무 강성해서 왕이 거느린 고구려군은 대패하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적군의 좌장사 한수(韓壽)는 고구려 장군 아불화도가(阿佛和度加)를 죽이고
승세를 타서 환도성에까지 침입했다.
 
고국원왕은 하는 수 없이 단기로 피신하여 단웅곡(斷熊谷)으로 들어갔는데
이때 적군은 왕모 주씨(王母 周氏)와 왕비를 사로잡아 가지고 돌아갔다.
 
한편 남도를 지키던 왕군과는 반대로 북도를 지키던 왕제 무의 군대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렇게 되자 모용황은 더 깊이 추격할 것을 단념하고 왕을 초청하였으나
왕은 단웅곡에 숨어 나오지 않았다.
북에 갔던 무의 군대가 내려오면 합세해서 적군을 섬멸할 기세였다.
 
그래서 모용황은 하는 수 없이 그대로 물러가려 하는데 좌장사 한수가 진언했다.

“모처럼 원정을 나왔다가 그대로 돌아가면 아무 소득이 없지 않습니까?
마침 왕모와 왕비가 우리에게 잡혔으니 그들을 볼모로 데리고 가는
한편 고구려왕의 아비의 시체를 파서 가지고 돌아가는 것이 좋을까 합니다.”
 
아무리 적이기로 그렇게 끔찍한 짓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모용황이 망설이니 한수는 다시 말했다.
 
부질없이 잔악한 짓을 일삼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면 고구려왕은 생모와 비와 망부의 시체를 도로 찾기 위해서도
끝내 항거 할 것을 단념하고 우리에게 항복할 것이 아닙니까?“

모용황은 한수의 진언을 받아들여 미천왕묘에서 그 시체를 파서 싣고
부고(府庫)에 있던 가지가지 보물을 거둔 후 고구려 백성 五만명을 포로로 하고
궁실을 불태워 환도성을 헐어 놓은 다음에야 철군했다.
 
실로 고구려의 건국 이후 가장 혹독한 참화였지만
한수의 계책은 그들을 위해서는 효과적인 계책이었다.
 
그 이듬해 고국원왕은 아우를 연으로 파견해서 조공을 하는 한편 지난 일을 깊이 사과했다.
그랬더니 연왕 모용황은 미천왕의 시체는 돌려보냈으나 왕모만은 그대로 잡아 두고 볼모로 삼았다.
 
그 후부터 고구려는 철저히 연나라의 눈치를 살피고 그 비위를 맞추기에 애썼다.
19년에는 전에 동이호군(東夷護軍)으로 있던 송황(宋晃)을 연으로 보내어 사과하게 하니
연왕은 그를 용서하고 이름을 활(活)이라 고치게 했다.
 
25년 12월에는 다시 사자를 연으로 보내어 조공하는 한편 왕모를 돌려보내 달라고 청했다.
그랬더니 연왕은 그것을 승낙하고 왕모 주씨를 귀국시키는 한편 왕을 정동대장군영주자사
(征東大將軍營州刺史)로 삼고 낙랑공(樂浪公)을 봉하니 고구려는 한때 연나라에 속국이 된 셈이었다.
 
이로부터 10여년 간은 평온한 세월을 보낼 수 있었으며 이동안 고구려는
안으로 국력을 배양하기에 힘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대륙과의 관계가 소강상태를 유지하는 틈을 타서 왕은 군사 2만을 거느리고
남으로 백제를 침공했다.
그러나 이것은 큰 오산이었다.
치양(稚壤=原州)땅 전투에서 패배의 쓴 잔을 마시고 말았다.
 
이동안 대륙의 형세도 급변했다.
 41년 10월 고구려의 상전 노릇을 하던 연나라가 진나라의 공격을 받고 멸망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되자 연나라의 태부(太父) 모용평(慕容評)은 고구려로 도망 와 망명할 것을 청했으나
왕은 그를 잡아 진나라로 보냈다.
신흥세력 진의 비위를 거스르는 것을 염려한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오래도록 시달림을 받은
연나라에 대한 일종의 복수이기도 했을 것이다.
 
41년 11월, 백제는 지난번 고구려가 침공한 복수전으로 군사 3만으로 침입하여 평양성을 공격했다.
이때 고국원왕은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서 백제군을 맞아 싸우다가 화살에 맞아 이달 23일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가 즉위한 햇수는 비록 41년 동안이란 긴 세월이었지만 그동안 끊임없는 외침(外侵)에 시달렸고
마침내 진중에서 횡사까지 한 것을 생각하면 고국원왕은 전형적인 소국의 슬픈 군주였다고
아니할 수 없다.
 
이러한 시련을 겪기는 했으나 이후부터 고구려는 바야흐로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제17대 소수림왕(小獸林王)과 제18대 고국양왕(故國壤王)을 거쳐 제19대 광개토왕(廣開土王)이
즉위하게 되자 고구려는 크게 약진하여 일대 제국을 건설하기에 이른 것이다.
 
광개토왕은 서기 392년에 즉위하여 414년에 승하할 때까지 재위 불과 22년이며
수(壽)를 누리기 겨우 39세였지만 국가와 부강을 위해서 세운 공적은 실로 위대했다고 할 수 있다.
나면서부터 사람됨이 영명하고 호협한 왕은 포부가 원대하고 군사를 부리는 힘이 신과 같았다고 한다.
 
그가 즉위할 때엔 불과 10대 소년이었지만 동서남북으로 이웃을 정벌하여 싸우면 반드시
승리를 거두었고 공격하면 반드시 전취(戰取)하고 말았다.
그러므로 고구려 국토는 날로 광대해 졌다.
즉위한 해 7월에는 남으로 백제를 정벌하여 10성을 빼앗았으며 9월에는 북으로 글안을 공격하여
남녀 5백구(口)를 포로로 하고 민가 1만구를 귀순케 했다.
 
그 후에도 백제와 여러 번 싸워 완전히 기를 꺾어 버렸으며 서쪽으로는 한 번 멸망했던
모용씨가 다시 일으킨 후연(後燕)을 쳐서 오랫동안 다투어 오던 현토 요동 땅을 완전히 공취(攻取)했다. 또 동으로는 동예(東濊)를 평정하여 동해안 지역을 장악하고 나중에는 신라와 동맹을 맺고
남쪽으로 멀리 임나(任那), 가라(加羅)에까지 군사를 보냈다.
 
광개토왕이 재위 22년 동안에 이룩한 공업(功業)을 보면 공취한 성이 64성이며,
귀속시킨 부락이 1천4백여 촌이었고 한다.
광개토왕의 뒤를 이은 것은 그의 아들 장수왕(長壽王)이었다.
그도 부친 못지않은 영걸(英傑)이었을 뿐 아니라 98세까지 장수했으므로
국력을 강성케 하는데 세운 업적이 또한 적지 않았다.
 
그는 도읍을 기름진 대동강유역 평양으로 옮기어 민심을 집중시켰으며
특히 그 곳을 발판으로 하여 남방경략에 힘을 기울였다.
 
63년에는 백제 제20대 개로왕(蓋鹵王)을 모략으로 속여 잡아 죽임으로써 지난날
고국원왕의 원수를 갚는 한편 백제로 하여금 남쪽 웅진(熊津)으로 천도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이로 말미암아 고구려의 판도는 남으로 자꾸 뻗어 내려가서 그 경계가 아산만(牙山灣)에서
죽령(竹嶺)에까지 이르렀으며 서북으로는 요하(遼河)로부터 지금의 만주 대부분을 포함한
일대 제국을 건설하기에 이르렀다.
 
그 후 제21대 문자왕(文咨王), 제22대 안장왕(安藏王), 제23대 안원왕(安原王)을 거쳐
제24대 양원왕(陽原王) 시대에 이르자
강대한 국가의 기틀은 완전히 잡혔고 모든 제도도 차츰 완비되어 갔다.
 
그러나 고구려 민족다운 강건한 정신과 소박한 인정은 아직도 잃지 않고 있었으니
그것을 엿보게 하는 일화가 바로 온달(溫達)과 평강공주(平岡公主)의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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