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한국의 野史

12. 亂中의 烈士

오늘의 쉼터 2018. 12. 9. 18:35

12. 亂中의 烈士



그 당시 중국 땅에는 위(魏)를 비롯하여 오(吳), 촉(蜀)이 정립(鼎立)되어 자웅을 겨루고 있었다.

바로 소설 <삼국지(三國志)>에 묘사된 그 시대였다.

그리고 위는 우리의 강토에 설치된 군현(郡縣)을 지배하고 있던 공손씨(公孫氏)를 멸하고

그 군현을 장악하게 되자 그와 이웃한 고구려 땅을 엿보게 되었다.

그것은 고구려가 동방의 여러 나라 중에서 가장 강성하므로 그 힘을 꺾어야만

동방을 지배하기 수월한 때문이기도 했다.

 
한편 고구려 역시 중국의 지배를 받고 있는 요동(遼東), 현도(玄?), 낙랑(樂浪) 삼국의 존재가
서쪽과 남쪽으로 뻗는 힘을 가로막는 장해물이었다.
이때 압록강 유역에 있는 여(麗),  위(魏) 두 나라의 경계는 압록강 하류의 한 지류(支流)인
안평하(安平河)방면이었는데 고구려로서는 이 경계를 뚫고 나가야 강토의 확장을 꾀할 수 있었다.
 
그래서 동천왕 16년, 왕은 요동의 서안평(西安平)을 습격한 일이 있었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 동천왕 20년 8월,
위나라에서는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丘儉)을 시켜 군사 만명으로 현도를 거쳐
고구려를 침공케 했는데 동천왕은 적군의 배가 되는 2만 대군을 거느리고 마주 싸워
비류수(沸流水)에서 크게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고구려군은 적군 3천여명을 몰살시켰다.
 
이런 대승리에 동천왕은 지나친 자신을 가진 모양이었다.
여러 장수를 모아놓고 큰소리를 쳤다.
 
“위의 장졸이 강하다는 말을 들었으나 우리 장졸 앞에는 감히 대적하지를 못하고
적장 관구검은 명장이란 말을 들었지만 그의 목숨이 이제 내 손아귀에 들어 있지 않은가?”
 
그런 다음 철기(鐵騎) 5천기를 거느리고 관구검을 멸하고자 돌진했다.
그러나 관구검은 철통같은 방어진을 펴는 한편 교묘한 전술로 역습을 감행해서
전세는 역전되고 고구려군은 마침내 1만8천명이나 전사하는 참패를 당했다.
 
동천왕은 하는 수 없이 겨우 1천여기를 거느리고 압록원(鴨綠原)으로 도주했는데
그 해 10월, 관구검은 다시 환도성(丸都城)을 공격해서 함락시키고 장군 왕기를 보내어
동천왕을 추격케 했다,
 
왕은 하는 수 없이 다시 남옥저(南沃沮)를 향해서 도망하다가 죽령(竹嶺)에 이르렀는데
이때 수하 장졸들은 거의 다 흩어지고 곁에는 겨우 동부 사람 밀우(密友)가 따를 뿐이었다.
 
왕의 신변이 심히 위태롭게 되자 밀우는 왕을 향해서
“지금 적병의 추격이 매우 다급해서 이대로는 빠져나갈 것 같지 않습니다.
신이 결사대를 이끌고 잠시 적군을 막고 있겠사오니
그 동안에 대왕께서는 속히 피신하시는 것이 좋을까 합니다.”
이렇게 말한 다음 곧 결사대를 조직하고 적군을 가로막아 분투했다.
 
밀우 등이 분투하는 틈을 타서 왕은 겨우 그 곳을 빠져나가 산골로 피신한 다음
여기저기 흩어진 장졸을 모아 겨우 신변을 호위하게 했다.
그러나 위기를 모면하고 나니 염려되는 것은 밀우의 운명이었다.
왕은 좌우에 모인 장졸들을 향해서 물었다.
 
“그대들 중에 밀우를 구해 오는 사람이 있으면 후한 상을 주겠다. 누구, 나설 용사는 없느냐?”

그랬더니 하부(下部) 사람 유옥구(劉屋句)가 앞으로 나오며 “신이 가겠습니다.”
 
말하고는 즉시 달려가서 분투하다 쓰러진 밀우를 찾아 업고 돌아왔다.
그때까지도 밀우는 심한 상처와 피로로 말미암아 정신을 잃고 있었다.
 
“나를 위해서 그대가 이 지경이 되었구나.”
 
왕은 밀우의 머리를 친히 자기 무릎에 눕히고 정성껏 간호하니 밀우는 겨우 소생할 수 있었다.
한때 위기를 모면했다고는 하지만 적군의 추격은 집요하게 계속되었다.
왕은 다시 적군의 손아귀를 벗어나기 어려운 곤경에 빠졌다.
그래서 장졸들을 향해 대책을 물으니 동부 사람 유유(紐由)가 한 계책을 진언한다.
 
“신에게 어리석은 계책이 있사옵니다.”
 
“어떤 계책인가?”
 
“신이 음식을 차린 다음 위군 진영을 찾아가서 질탕히 먹이며 기회를 엿보다가
적의 주장(主將)을 찔러 죽이겠사오니 신의 계책이 성공했다는 기별을 받으시거든
대왕께서는 적이 어지러운 틈을 타서 기습하시기 바랍니다.”
 
유유의 계책은 자기 한몸을 던지고 나라를 구하겠다는 결사적인 계책이었다.
왕은 눈물을 흘리며 그 계책을 허락했다.
 
위군 진중을 찾아간 유유는 거짓 항복하며 말했다.
 
“우리 임금이 대국에 죄를 짓고 이렇게 바닷가로 도망해 왔습니다만
이제 힘은 다하고 계책은 궁해서 하는 수 없이 장군께 항복하고자
소신에게 먼저 변변치 못한 물건을 보냈사오니 여러 장졸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십시오.”
 
“그래? 고구려왕이 항복한다면 어찌 더 싸울 필요가 있겠는가?”
 
위장은 크게 기뻐하고 유유가 차려 가지고 온 음식을 여러 장졸에게 나누어 주며
크게 잔치를 베풀었다.
이때 유유는 적장에게 음식을 권하는 척하며 그릇을 받들고 다가가서 갑자기
그 그릇 속에 감추어 두었던 비수를 뽑아 적장의 가슴을 찌르고 자기도 자결해 버렸다.
 
적장이 죽고 나니 유유가 예견했던바와 같이 적군은 크게 어지러워졌다.
우왕좌왕 소란을 피우는 틈을 타서 동천왕은 휘하 장졸을 세 길로 나누어 급히 공격했다.
그런즉 위군은 미처 진영을 갖추지 못하고 낙랑 땅을 거쳐 도망해 버렸다.
 
이 난을 겪고 나서 국권을 회복하자 왕은 밀우와 유유의 공로를 일등으로 삼았는데
밀우에게는 거곡(巨谷), 청목곡(靑木谷)을 식읍(食邑)으로 주고,
유유를 추종하여 구사자(九使者)란 벼슬을 주었으며
유유의 아들 다우(多優)를 대사자(大使者)로 삼았다.
 
국권을 회복하기는 했으나 환도성은 적군에게 짓밟혀 다시 왕도로 삼을 여지가 없었을 뿐 아니라
백성들도 환도성에 돌아가기를 원치 않았다.
그래서 그 이듬해인 21년 2월,
평양성(平壤城)을 쌓고 백성들과 종묘사직(宗廟社稷)을 그리로 옮겼다.
 
심한 전란으로 말미암아 심신이 소모될 대로 소모되었던지
동천왕은 평양성에 천도한 이듬해인 22년 9월, 세상을 떠났는데
상하가 모두 다 왕의 승하를 슬퍼해 마지않았으며 군신들 중에는
왕의 무덤 앞에서 자살하는 자가 많았다.
 
그래서 나라 사람들은 나무를 베어 그 시체를 덮어 주었는데
그 때문에 그 곳 이름을 시원(柴原)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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