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한국의 野史

9. 山中에 숨은 王子들

오늘의 쉼터 2018. 12. 9. 10:35

9. 山中에 숨은 王子들



차대왕에게는 추안(鄒安)이란 태자가 있었다.

 
차대왕이 죽었으니 왕위를 계승할 자는 바로 태자 추안이었지만
그는 부왕이 죽은 이상 자기의 신변이 안전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고 깊이 산중으로 도망해 버렸다.
그리고 태조왕과 차대왕의 아우 백고(百固)도 일찍이 차대왕의 절제 없는 생활을 충고 했다가
오히려 미움을 사게 되었으므로 산중에 숨어 살고 있었다.
그러나 차대왕이 피살되자 백고의 거처만은 자연히 여러 사람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혁명의 주동이 된 명림답부는 좌보 어지류를 비롯한 여러 대신들과 의논한 끝에 백고를
새임금으로 삼을 것을 결정하고 사람을 보내어 그를 궁중으로 맞아들였다.
백고가 궁중에 돌아오자 어지류는 여러 대신을 대표해서 국새를 바치며 간곡히 말했다.
 
“선군께서 나라를 버리고 또 비록 왕자가 있으나 종적을 감추어 나라 일을 맡아볼 수 없게 됐습니다.
무릇 인심은 어진 분에게 돌아가는 것이므로 삼가 절하며 청하는 것이오니 대위를 계승하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백고는 엎드려 세 번 사양한 다음 대답했다.
 
“내 왕족으로 태어났으나 아우로서 원래 덕이 없고 형이 두 분이나 왕위에 있었으나
아우로서 제대로 보필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일신의 화를 두려워하고 멀리 숨어 있었으니
그것만으로도 대위를 계승하기에는 부족한 자이외다.
그러나 백성들이 나를 추대하고 공들이 굳이 권하니
나라의 앞날을 위해서 스스로 마음을 고치고 힘을 다하도록 하겠소.”
 
이렇게 말한 다음 마침내 즉위하였으니
그가 바로 제8대 신대왕(新大王)이며 그때 그의 나이가 77세였다.
역시 연로한 임금이었다.
 
신대왕은 즉위하는 즉시로 국내에 대사령을 내렸다.
그런즉 백성들은 크게 기뻐하며 새임금의 덕을 칭송했을 뿐만 아니라
산중으로 도망했던 차대왕의 태자 추안까지도 스스로 궁중에 나타났다.
 
“전에 나라에 재화가 있었을 때(차대왕이 피살되었을 때) 두려운 나머지 산속 깊이 숨어있었습니다만
대왕께서 어진 정사를 베푸신다는 말을 듣고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대왕께서 인자하신 덕으로 목숨만 살려 주시고 멀리 놓아 주신다면
더 바랄 나위 없이 고마운 일이겠습니다만 어찌 감히 그것을 바라겠습니까?”
 
말하자면 대사령을 듣고 자수했으니 목숨만은 살려 달라는 것이었다.
신대왕은 곧 그를 양국군(讓國君)으로 봉하여 여생을 편안하게 했다.
 
왕은 누구보다도 명림답부에게 크게 보답했다.
즉 그를 국상(國相)으로 삼았으니 좌우보(左右輔)를 고쳐 국상으로 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다시 가작(加爵)하여 패자(沛者)로 삼고 내외병마(內外兵馬)를 맡아보게 하는 한편
양맥부락(梁貊部落)을 겸영(兼領)하게 했다.
명림답부는 혁명의 공신일 뿐 아니라 능력 있는 현신이기도 했다.
 
신대왕 8년(西紀 172년) 11월, 한(漢)의 현도군 태수(玄 君太守) 경림(耿臨)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고구려를 침공하리라는 정보가 들어 왔다.
그래서 왕은 여러 신하들을 모아 놓고 국경으로 마주 나가서 싸울 것이냐,
그렇지 않으면 농성을 하고 수비할 것이냐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다른 신하들의 의견은 공격쪽이었다.
 
“한나라의 군사는 그 수가 많은 것을 믿고 우리를 거볍게 여기고 있습니다.
만약 나가서 마주 싸우지 않는다면 그들은 우리에게 용기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자주 쳐들어와 시끄럽게 굴 것입니다.
비록 나가서 싸운다 하더라도 우리의 지세는 산이 험하고 길이 좁으므로
적은 군사로 대군을 맞아 싸우기에 적합하다니 조금도 두려워할 것이 없을 줄로 압니다.”
 
그러나 명림답부만은 홀로 수비(守備)를 주장했다.
 
“적군은 그 수가 많은 데다 지금 사기충천한 기세이므로 마주 싸운다면 그 예봉을 당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또 자기편이 우세하면 나아가 싸우고 열세하면 물러서서 지키는 것이 병가의 상사입니다.”
 
“그렇지만 농성을 한다고 언제까지나 하겠소?
적군이 끝내 우리를 에워싸고 물러나지 않으면 나중에는 우리가 항복할 수밖에 없지 않소?”
 
한 신하가 이렇게 반문하자 명림답부는 거기에 대한 견해를 거침없이 밝혔다.
 
“그 점도 과히 염려할 것은 없을 줄로 아오.
지금 한병은 천릿길에 군량을 운반해야 되므로 오래도록 버티고 지키기만 하면
마침내 군량이 떨어져서 회군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오.”

“우리가 버틸 수 있는 방책은?”
 
“높은 보루를 쌓고 깊은 구렁을 판 다음 양식과 백성들을 모두 다 보루 속으로 들여 놓는 거요.
그렇게 되면 적군은 곡식 한 알 구할 길 없으니 어떻게 오래 우리를 포위하겠소?”
 
명림답부의 전략은 가장 사리에 맞고 현실적인 것이었다.
왕은 그 전략을 채택하고 농성을 단행했더니
적군은 명림답부가 예언한대로 굶주림을 이기지 못해서 마침내 회군하기 시작했다.
이것을 보자 명림답부는 날쌘 군사 수천을 거느리고 적의 퇴로를 맹렬히 공격하니
적군은 당황실색해 모조리 섬멸되고 필마도 돌아가지 못했다고 한다.
 
신대왕 50년(西紀 179년) 국상 명림답부가 세상을 떠났다.
왕에게는 오른 팔을 잃은 것이나 다름  없는 슬픔이었다.
왕은 스스로 그 영구를 얼싸안고 통곡했는데 그 슬픔이 원인이 되었던지
90이 넘은 고령 때문이었던지 그 해 겨울 12월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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