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한국의 野史

10. 妖花 于太后

오늘의 쉼터 2018. 12. 9. 11:13

10. 妖花 于太后



신대왕에게는 발기(拔奇), 남무(男武), 연우(延優)등 세 아들이 있었는데

왕은 생전부터 장자 발기보다도 그의 아우 남무를 더 사랑했다.

 
그러므로 신대왕 12년 3월에는 형을 제쳐두고 남무로서 태자를 삼았던 것이다.
 
선왕의 뜻이 이러했을 뿐만 아니라 신하들이 보기에도 왕위 계승자로서
어느 모로 보나 남무가 훨씬 뛰어났다.
웅위한 자표(姿表), 큰 가마솥을 혼자 들을 만치 강한 완력, 어진 사람의 말은 잘 듣고
옳고 그름을 똑바로 판단하며 과감히 싸울 줄 아는 용맹, 남무는 왕으로서
더 바랄 수 없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되어 즉위한 남무가 바로 제9대 고국천왕(故國川王)이다.
왕은 즉위한 이듬해 2월 우씨(于氏)를 세워 왕후를 삼았는데
우씨는 제나부 우소(提那部 于素)의 딸이다.
 
왕은 왕후 우씨를 극진히 사랑했다.
그러므로 우씨의 연척들은 그것을 믿고 세도를 잡아 나라 일을 심히 어지럽혔다.
특히 좌가려(左可廬) 등 몇몇 친척은 왕후의 권세를 믿고 사치한 생활을 했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자녀를 약탈하고 토지와 집을 빼앗으므로 백성들은 격분한 나머지
왕에게 호소하기에 이르렀다.
 
아무리 우씨를 사랑한다지만 그 친척들의 횡포를 그대로 버려둘 왕은 아니었다.
크게 노한 왕은 즉시 좌가려 등을 잡아 처단하려 했다.
이 눈치를 알아 챈 좌가려 등은 이왕 죽을 바에야 한 번 싸워보고 죽겠다는 생각이 들었던지
13년 4월 무리를 모아가지고 왕성을 침범했다.
 
이에 왕은 노하여 기내(畿內)의 병마를 징집해거 좌가려 등을 모조리 토벌해 버렸다.
그리고 그 기회에 왕은 크게 반성을 하게 되었다.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은 모두 내가 어진 신하를 쓰지 않고 인재에 적합한 관직을 주지 않은 때문이다.
그러므로 널리 어질고 유능한 사람을 등용하겠으니 사부(四部)에서는 마땅한 인물을 천거하도록 하라.”
 
이렇게 영을 내렸다.
그랬더니 사부에서는 다함께 동부(東部)의 안류(晏留)를 천거했다.
그래서 왕은 안류를 불러 국정을 맡기려 했으나 안류는 굳이 사양하며 이렇게 진언한다.
 
“보잘 것 없는 신은 성품이 용렬해서 국정을 맡기엔 너무나 적합지 않습니다.
서쪽 압록곡(鴨綠谷) 좌물촌(左物村)에 을파소(乙巴素)란 사람이 있사옵는데
그 사람이야 말로 이 나라를 바로 잡기에 적합한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을파소란 어떠한 인물이기에 그렇듯 칭찬하는 거요?”
 
“을파소는 유리왕 때의 대신 을소(乙素)의 후손이온데 성품이 강직하고 지려(智慮)가 심원하건만
세상에서 알아주지 못하고 쓰지 않으므로 시골에 파묻혀 농사에 힘쓰고 있사오니
대왕께서 등용하심이 가한 줄로 압니다.”
 
왕은 곧 사람을 보내어 예를 두텁게 하고 을파소를 궁중으로 맞아들였다.
그리고는 중외대부(中畏大夫)에 우대(于台)를 가작(加爵)하는 극진한 대우를 한 다음 말했다.
 
“내가 외람되어 선업(先業)을 계승해서 왕위에 올랐으나 덕이 박하고 재주가 부족해서
국정을 보살피는데 부족함이 많소.
그러므로 어진 인물을 심히 갈구해 왔는데 공이 이렇듯 기꺼이 와 주니
내 기쁨일 뿐 아니라 나라와 백성들의 복이라고 할 수 있소.
공의 가르침이라면 어떠한 일이든지 기쁘게 받겠으니 정성을 다해 주기 바라오.”
 
왕은 간곡히 부탁했다.
을파소도 이와 같은 왕의 뜻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국정을 과감히 쇄신하려면 그가 받는 벼슬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그대로 솔직히 말할 수도 없는 일이고 해서 슬쩍 이런 말로 자기 뜻을 비쳐보았다.
 
“신은 원래 불민하므로 그와 같이 큰일을 감당할 수 없사오니
달리 어진 사람을 뽑아 높은 벼슬을 주고 대업을 이룩하시는 것이 좋을 줄로 압니다.”
 
현명한 왕은 을파소의 뜻을 당장 알아차렸다.
즉시 그에게 최고관직인 국상(國相)을 제수하고 나라 일을 맡아보도록 했다.
이렇게 되니 역대 조신들과 왕족들은 불만이 대단했다.
시골에 파묻혀 있던 촌부가 하루 아침에 자기네들보다 윗자리에 앉게 된 것이 못마땅했던 것이다.
그래서 여러 가지로 왕에게 참소하여 을파소를 몰아내려고 했지만
왕은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구신(舊臣)들에게 강경한 태도로 나왔다.
 
“제 아무리 관직이 높은 자라도 국상에게 복종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그 당자를 즉시 처단 할 뿐 아니라 일가 친척까지 모조리 멸해 버리겠다.”
 
이 말로 미루어 왕이 을파소의 인물을 얼마나 높이 평가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왕이 이와 같이 강경한 태도를 보인 후부터는 을파소는 자기 능력껏 정치를 할 수 있데 되었다.
 
정교(政敎)를 밝히고 상벌을 삼가고 백성들을 배부르고 편안케 하는 데만 힘을 기울였다.
이렇게 되니 나라 안이 태평해졌을 뿐만 아니라 그 소문이 외국에까지 퍼지어
그때 마침 전란으로 시달리던 한인(漢人)들까지도 뒤를 이어 피란올 정도였다고 한다.
 
19년 5월, 현신 을파소의 보필을 받아 각 방면으로 치적을 남긴 왕이 뜻밖에도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왕이 세상을 떠난 것은 한밤중, 왕후 우씨와 동침하던 중이었다.
그러므로 왕이 죽었다는 사실은 우씨 이외에 아는 사람이 없었다.
왕이 죽은 것을 보자 우씨는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급히 단장을 하더니
시체는 그냥 두고 몰래 침전을 빠져 나갔다.
 
우씨가 간 곳은 왕의 형 발기(發岐)의 집이었다.
발기는 고지식한 사람이었다. 그
는 한밤중에 왕후가 찾아온 것을 보고 그저 놀라며 책망하듯 말했다.
 
“어쩐 일이시오? 이런 이슥한 밤중에 갑자기 찾아 주시니 무슨 큰일이라도 생겼나요?”
 
왕후는 한참 동안 발기의 얼굴을 건너다보다가 겨우 말을 꺼냈다.
 
“대왕의 뒤를 이을 사람에 대해서 의논하려 왔소.”
 
“대왕의 뒤를 이을 사람이라니요?”
 
“아시다시피 대왕께서는 후사(後嗣)가 없소.
내 생각으로는 그대가 대왕의 뒤를 잇는 것이 마땅할까 하오.”
 
한밤중에 찾아와서 이런 말을 하니
웬만한 사람이면 왕의 신변에 이변이 생겼음을 짐작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을 듣자 우둔한 발기는 오히려 훈계하듯 말했다.
 
“하늘의 역수(曆數)는 스스로 그 이치를 따라 돌아가는 법이외다.
어찌 가벼이 의논할 일이겠소? 오늘밤 왕후의 처사는 실로 아름답지 못하오.
여인된 몸으로 한밤중에 남자를 찾아다니며, 그런 일을 의논하다니 예의에 어긋나는 일로 아오.”
 
왕후가 임금의 죽음을 숨기고 한밤중에 찾아와서 왕위의 계승을 의논한 것은
새 임금이 될 자에게 그만한 성의를 베풂으로써 서로 정을 두텁게 하고
훗날 이(利)를 보려는 마음에서였다.
그러니 이렇게 정면으로 따지자면 떳떳한 일이 못되었다.
그런 만큼 발기의 책망을 받자 왕후는 부끄러웠다.
 
왕후는 그길로 발기의 아우 연우(延優)의 집을 찾아갔다.
연우의 성격은 고지식한 발기의 성격과는 딴판이었다.
사람들을 대하는데도 지극히 부드러워 많은 사람이 따랐다.
왕후가 문을 두드리자 그는 급히 의관을 갖추고 문까지 뛰어 나와 맞아 주었다.
 
“귀하신 몸으로 이런 누추한 델 찾아주시니… 자 어서 들어오십시오.”
 
연우는 왕후를 안으로 모셔 들이고, 한밤중인데도 있는 음식을 다 차려내어 후대했다.
발기의 푸대접을 받다가 연우의 극진한 대접을 받으니
고맙고 흐뭇한 마음에 왕후는 모든 일을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대왕께서 세상을 떠나시다니요?”
 
연우는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래서 발기 왕제를 찾아가지 않았겠소?
그랬더니 마치 내가 딴 마음이라도 품고 있는 듯이 말하고 그 대하는 폼이 무례하기 짝이 없구료.
그런 옹졸한 사람과 어떻게 왕위 계승의 큰일을 의논하겠소.”
 
“그래서 저를 찾아주신 거군요. 황송합니다.”
 
연우는 기뻤다.
왕후의 말투로 보아 왕위를 자기가 계승할 수 있도록 힘써 줄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리따운 왕후 우씨와의 거리가 가까워진 게 기뻤다.
나라의 왕후이며 형수인 까닭으로 먼 발치에서 우러러 보기만 하던 꽃송이,
이제 그 꽃송이가 자기 손에 꺾이려 한다.
 
그는 상을 차리는데도 하인을 시키지 않고 손수 차렸는데 고기 한 덩이를 들고 오더니
손수 칼을 들어 저몄다.
서투른 솜씨지만 그 모양을 왕후는 흐뭇한 미소로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너무 신이 나서 그랬던지 손을 베었다.
 연우의 손가락에서는 붉은 피가 번져 나왔다.
왕후는 밥술을 던지고 연우에게로 다가와서 피나는 손가락을 잡았다.
그리고는 자기 옷자락을 찢어 동여매어 주었다.
 
“황송 합니다.”
 
연우가 정중히 사례하는데 첫닭이 울었다. 왕후는 황급히 일어서며 말했다.
 
“궁으로 돌아가야겠는데, 도중에 무슨 일이 생길는지 알 수 없으니 바래다주오.”
 
“그저 분부를 따를 뿐입니다.”
 
연우는 기꺼이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두 사람은 손을 마주잡은 채 궁으로 들어갔다.
 
이튿날 왕후는 임금의 죽음을 밝혔다.
그리고 선왕의 유언이니 연우에게 왕위를 계승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선왕의 유언이라고 하니 반대할 자가 있을 수 없다.
마침내 연우는 그 자리에서 왕위에 오르니 이가 10대 산상왕(山上王)이다.
 
연우가 왕위를 계승했다는 말을 듣자 발기는 노발대발했다.
곧 군사를 모앙 궁성을 포위했다.
그리고는 성 안을 향해 소리 소리 질렀다.
 
“연우놈아. 듣거라. 세상을 떠난 왕에게 아들이 없으면 다음 아우나
형이 마땅히 왕위를 계승해야 할 것인데 네놈은 무례하게 차례를 건너 왕위를 빼앗으니
그 죄가 이루 비길 데 없이 크다.
당장 왕위를 내놓고 나오면 목숨만은 살려 주겠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네 목숨은 없을 줄로 알아라.”
 
그러나 연우는 성문을 굳게 닫고 대꾸도 하지 않았다.
발기의 발악은 아무런 효과도 거두지 못했다.
 
신하들과 백성들은 모두 연우를 지지하고 수하 장졸들도 하나, 둘 도망쳐 새 임금에게 투항했다.
발기는 하는 수 없이 처자를 거느리고 요동(遼東)으로 도망가 태수 공손탁(公孫度)을 만나 애걸했다.
 
“고구려왕 남무(男武)가 세상을 떠났소만 뒤를 이을 아들이 없음을 기화로 아우 연우가
형수 우씨와 더불어 모반하여 나를 제쳐놓고 왕위를 빼앗았소.
이는 곧 천륜에 어긋나는 짓으로서 나는 그에 분격하여 상국(上國)에 달려온 것이외다.
태수께서 군사 3만만 빌려주시면 그 자를 쳐서 평정할까 하오.”
 
공손탁은 그전부터 고구려를 칠 야망이 있었다.
그래서 발기의 청을 들어 주는 체하고 군사를 냈다.
발기가 요동태수와 합세해서 쳐들어온다는 보고를 받자
연우는 곧 아우 계수( 須)에게 군사를 주어 맞아 싸우도록 했다.
 
계수는 날래고 슬기로운 장수였다.
몸소 선봉이 되어 한병(漢兵)을 공격하니 적의 3만 대군은 여지없이 대패했다.
이때 한병과 함께 도망치던 발기는 그만 고구려군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아우 계수 앞에 끌려오자 발기는 애걸복걸했다.
 
“이제 늙은 형이 싸우다 이롭지 못해 이렇게 사로잡혔지만
우리는 같은 핏줄을 타고난 동기가 아니냐. 그래도 너는 감히 나를 죽이려 드느냐?”
 
그 말을 듣자 계수는 가슴이 메어지는 듯 아팠다.
군률로서는 마땅히 죽여야 하겠지만 형제의 의리로서는 차마 해칠 수가 없었다.
 
“작은 형님이 차례를 어기고 즉위한 것은 비록 의리가 아니라 하더라도
큰 형님은 한때의 분을 못참고 외세(外勢)를 빌어 고국을 멸망시키려 하셨으니
이 무슨 처사시오? 이토록 나라를 배반하는 처사를 하였으니
죽은 후에 무슨 면목으로 선인(先人)을 뵙겠소?”
 
이렇게 책망하니 발기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군률로서는 엄히 다스려야 하겠소만 동기의 정으로 차마 해칠 수는 없소.
형님 좋을 대로 아무데나 가시오.”
 
계수가 말 한 필을 내어 주니 발기는 말에 올라 정신 없이 달렸다.
어느덧 배천(裵川)에 당도했다. 말도 지치고 임자도 지쳤다.
발기는 떨어지듯 말에서 내려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한 때 아우에게 포로가 되었을 때에는 구차한 목숨이라도 살아보려고 애걸도 했지만
막상 이렇게 몸둘 곳도 없이 되고 보니 생에 대한 애착도 남지 않았다.
 
그는 마침내 스스로 칼을 뽑아 목을 찌르고 자결하였다.
발기가 자결했다는 기별을 받자 계수는 그리고 급히 달려갔다.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형을 보자
한참 통곡을 한 다음 시체를 거두어 묻고 왕성(王城)으로 돌아갔다.
 
계수의 개선(凱旋)을 맞아들인 연우는 처음에는 크게 잔치도 베풀고 후대했지만
그 심중은 결코 편치 않았다.
술자리가 한창 무르익자 연우는 책망하는 듯한 말을 꺼냈다.
 
“나라를 배반하고 다른 나라에 군사를 청한 발기의 죄는 지극히 크다.
그대는 비록 그를 쳐서 이겼지만 죽이지 않고 목숨을 살려 준 것만도 과한데
그가 자살한 것을 슬퍼하고 그 시체를 묻어 주기까지 했으니
그 말을 들은 백성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골육지정(骨肉之情)도 모르는 잔인한 인간으로 알 것이 아니냐?”
 
그러자 계수는 그 자리에 꿇어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신은 이제 한마디만 아뢰고 죽기를 바랍니다.”
 
“무슨 말이냐?”
 
왕은 물었다.
 
“왕후께서 비록 선왕의 유명(遺命)으로 대왕을 세웠다고는 합니다만
그 때 대왕께서 마땅히 예로써 사양하시었어야 옳은 줄로 압니다. 그
런데 그렇게 하지 아니하셨으니
곧 형제 간에 우애가 없다고 해도 할 말이 없을 겝니다.
신이 시체를 거둔 것은 오직 대왕을 위하는 뜻에서였는데
이렇게 노여움을 살줄이야 미처 몰랐습니다.”
 
“나를 위해서 그런 처사를 했다구?”
 
“그렇습니다. 신은 대왕의 아우이며 신은 분부를 받들어 발기를 치러 간 장수입니다.
신이 형의 시체를 거두고 묻어 주는 것을 볼 때 그 누가 계수 한 사람의 소행으로 보겠습니까?
곧 대왕의 분부로 알 것이니 신의 소행에서 우애를 느낀다면 대왕에게도 우애를 느낄게 아닙니까?”

말을 마치자 계수는 다시 엎드려 절한다.
 
“이제 아뢰고 싶은 말 다 아뢰었습니다. 비록 죽더라도 속이 후련합니다.”
 
그제야 왕의 노기는 가시었다.
왕은 다가 앉이 아우의 손을 잡고 말했다.
 
“내 어리석어 공연히 너를 의심했구나.
지금 네 말을 들으니 진실로 내 허물을 알겠다.”
 
그리고는 왕과 신하로서가 아니라 다정한 형제로서의 하루를 지냈다.
자기 허물을 뉘우친 왕은 그해 9월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발기의 영구를 영봉하고
왕례(王禮)로써 배령(裵嶺)에 장사지냈다.
 
연우에게는 원래 처자가 있었지만 발기가 반군을 일으켰을 때 희생이 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마땅히 새로 왕후를 세워야 했다.
왕족과 중신들은 많은 여인을 후보자로 천거했다.
 
그러나 왕은 어느 여인에게도 마음이 가지 않았다.
오직 마음이 기우는 것은 우씨뿐이었다.
오랜 세월을 두고 사모해 온 여인이었다.
오늘의 영광 된 자리를 마련해 준 여인이기도 하다.
그는 모든 반대를 물리치고 우씨를 왕후로 삼았다.
 
왕이 즉위하고 우씨를 비로 맞은 지도 7년이나 지났다.
그러나 우씨에게는 소생이 없었다.
그래서 그 해 3월, 왕은 참다못해 아들을 점지해 달라고 산천(山川)에 기도했다.
그랬더니 이달 보름날 왕은 한 꿈을 꾸었다.
 
문득 하늘에서 소리가 있어 말하기를
“내 너의 소후(小后)로 하여금 생남(生男)하게 할 것이니 과히 염려하지 말아라.”하는 것이었다.
꿈에서 들은 하늘의 말을 왕은 혼자 새기기 어려워 국상 을파소(乙巴素)에게  의논해 보았다.
 
“소후로 하여금 생남토록 한다고 하지만 내게는 소후가 없으니 어찌 그것을 바라겠소…”
 
“하늘의 뜻은 인간으로서 헤아릴 수 없사오니 그저 모든 것을 하늘에 맡기고 기다려 보십시요.”

이렇게 말했다.
그 해 8월, 국상 을파소는 병을 얻어 상하가 슬퍼하는 속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로부터 5년이 지난 후 그의 예견은 적중되었다.
 
산상왕 12년 11월,
들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려고 묶어 놓았던 멧돼지 한 마리가 줄을 끊고 도망쳤다.
그 일을 맡아보던 사람은 대단히 당황해서 그 뒤를 쫓아갔더니
멧돼지는 주통촌(酒桶村)이라는 마을로 도망쳐 들어갔으나 이리저리 피하며 도저히 잡히지 않았다.
 
이 때 마침 20세 가량 되는 한 처녀가 지나가다가 방긋이 웃으며 손을 들어 막았다.
그랬더니 그때까지 그렇게 도망치던 멧돼지가 어쩐 까닭인지 잘 길이 든 개처럼
처녀의 발 아래 넙죽이 엎드려 버렸다.
그래서 그 멧돼지를 쫓던 사람은 다시 그것을 묶고 돌아가서 이 일을 왕에게 보고했다.
 
“네가 잡지 못하던 멧돼지를 그 처녀가 잡았다?”
 
왕은 그 처녀가 보통처녀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야릇한 호기심을 느끼고 어느날 기회를 보아 그 처녀의 집을 찾아갔다.
처녀와 가족들은 뜻하지 않게 찾아온 왕을 맞이하자 크게 놀랐다.
그러나 그 사람들보다 더 놀란 것은 왕이었다.
 
그저 신기한 처녀거니 생각하고 찾아갔는데 그 처녀의 용모가 너무나 아름답고
그 언동이 너무나 매혹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왕후 우씨 이외의 다른 여자는 거의 모르던 왕도 그 처녀를 보자 몹시 마음이 동했다.
 
‘저런 처녀에게서 아기를 낳는다면 얼마나 영특한 왕자가 될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
왕은 시신을 시켜 그 처녀를 가까이 하겠다는 뜻을 그 부모에게 넌지시 전했다.
처녀의 부모들은 대단히 기뻐했다.
일찍이 처녀의 모친이 처녀를 낳았을 때 한 무당이 “얘는 반드시 왕후가 될 거요.”라고 말하므로
이름을 후녀(后女)라 지었는데 그 예언이 이제 들어맞은 셈이었다.
 
부모들은 즉시 왕과 처녀가 동침할 자리를 베풀었다.
그러나 후녀는 부모들처럼 덮어놓고 왕의 명을 따르지는 않았다.
 
“이 나라 누구를 가릴 것 없이 죽이고자 하시면 죽일 수 있고 살리고자 하시면 살릴 수 있으신
대왕의 분부이니 어찌 감히 어기겠습니까마는 한 가지 간청할 말씀이 있습니다.”
 
“어떠한 청이냐? 네 청이라면 못들어 줄 것이 어디 있겠느냐?”
 
이미 후녀에게 마음을 다 빼앗긴 왕이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이렇게 말하자 후녀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만약 아기가 생기는 날에는 저를 버리지 말아 주십사 하는 것이 단 한 가지 청이옵니다.”

“아기가 생기면 버리지 말라?
아기는 바로 내가 무엇보다도 바라는 바인데 어찌 아기의 어미를 버리겠느냐?”
 
왕이 단단히 약속하자 후녀는 비로소 몸을 허락했다.
그러나 왕은 그 집에서 밤을 새우지는 못했다.
우씨가 두려웠던 것이다.
 
왕은 날이 밝기도 기다리지 않고 밤중에 그 집을 떠나 왕궁으로 돌아갔다.
총총히 돌아가는 왕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후녀는 어쩐지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저렇듯 왕후의 눈초리를 살피는 왕의 사랑을 받는다고 과연 자기의 앞날이 평탄할까
의심스러웠기 때문이었다.
 
후녀의 예감은 들어맞았다.
그 이듬해 3월 왕후 우씨는 왕이 주통촌 후녀와 관계한 것을 알게 되었다.
남달리 성격이 강한 우씨가 그냥 있을 리 없었다.
질투에 불탄 나머지 몰래 군사를 내어 후녀를 죽이려 했다.
이 소식이 후녀의 귀에 들어갔다.
후녀는 급히 남장(男裝)을 하고 자기 집에서 도망치려 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서 군사들의 추격을 받아 잡히고 말았다.
 
“그년을 잡거든 불문곡직하고 죽여 버려라.”
 
군사들은 왕후로부터 이런 명령을 받고 있었다.
그러므로 후녀를 잡자 당장 칼을 뽑아 목을 치려했다.
그러나 영리한 후녀는 호락호락하게 그 칼을 받지는 않았다.
 
“너희들이 누구의 명령으로 나를 죽이려 하느냐?”
 
후녀는 매서운 눈초리로 군사들을 쏘아보며 소리쳤다.
 
“대왕의 명령이냐? 왕후의 명령이냐?”
 
군사들은 잠깐 그 기세에 눌렸으나 왕후가 골라 보낸 심복들이었다.
언제까지나 망설이고만 있지는 않았다.
 
“누구의 명령이면 어떠냐?
우리는 웃어른의 명령을 받고 너를 죽이러 온 것이니 아무소리 말고 이 칼을 받아라.”
 
“그럴 수는 없다.
나는 죽어도 좋지만 내 뱃속에 들은 아이까지 죽일 수는 없다.
이 아기는 바로 대왕의 아기다.
장차 왕위를 계승할 왕자마저 너희들은 죽이겠단 말이냐?”
 
이 말을 듣자 군사들은 그 이상 더 칼질을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되돌아가 왕후에게 그대로 보고했더니
왕후는 더욱 노하며 후녀를 죽이려 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주통촌 후녀가 아기를 잉태했다는 말을 듣고 왕이 급히 손을 쓴 것이다.
왕은 사람을 보내 후녀의 신변을 보호하는 한편 기회를 타서 친히 그 집을 찾아갔다.
 
“네가 지금 아기를 가졌다고 하는데 그것은 누구의 아이냐?”
 
왕은 물었다.
 
“대왕, 어쩌면 그런 것을 다 물으시오.”
 
후녀는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왕을 쏘아 보았다.
 
“저는 평소엔 남자 형제와도 한 자리에 않고 몸을 지켜왔어요.
그런데 어찌 다른 남자와 가까이 하겠어요.
하늘에 맹서하겠습니다만 지금 밴 아이는 바로 대왕의 아기입니다.”
 
후녀의 말을 듣자 왕은 대단히 기뻐했다.
좋은 말로 위로한 다음 후한 선물을 주고 왕궁으로 돌아갔다.
아무리 우왕후를 사랑하고 두려워하는 왕이었지만
10여년 동안이나 기다리던 아기를 낳게 된 이상 그 아기만은 고이 낳아 키워야 했다.
왕은 왕후에게 그 사실을 솔직히 말한 이렇게 못을 박았다.
 
“만일 생남하면 내 뒤를 이을 왕자이니 왕후도 특히 애호하도록 하오.”
 
그러니 아무리 사나운 우씨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 해 9월, 후녀는 마침내 옥동자를 낳았다.
바라고 바라던 후사를 얻은 왕의 기쁨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하늘이 무심치 않아 나에게 후사를 베풀어 주셨으니 이보다 더 기쁜 일이 어디 있겠느냐?”

그리고는 곧 왕자의 생모 후녀를 소후(小后)로 삼았고,
그 후 왕자가 나이 다섯 살이 되자 즉시 왕태자로 삼았다.
그리고 그 경사를 계기로 민심을 일신하는 뜻에서 왕도(王都)를 환도(丸都)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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