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한국의 野史

7. 樂浪宮中의 悲戀

오늘의 쉼터 2018. 12. 8. 17:35

7. 樂浪宮中의 悲戀



새 나라의 기틀이 잡혀 외환의 우려가 적어지면 안으로 그 권력을 계승하는 자들 간에

암투가 벌어지는 것은 가장 흔히 보는 불상사이다.

 
고구려의 경우 역시 이 무렵부터 상서롭지 못한 싹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대무신왕에게는 원비(元妃) 소생의 해우왕자(解憂王子)와 차비(次妃) 소생의
호동왕자(好童王子)가 있었다.
 
원비 소생의 해우왕자는 아직 나이가 어릴 뿐 아니라 성격이 사납고 거칠었다.
그와 반대로 차비 소생의 호동은 용모가 수려하고 기상이 씩씩하고 마음이 착하므로
왕은 항상 호동을 사랑하고 그에게 기대를 걸어왔다.
 
원비는 그것이 못마땅했다.
혹시나 자기 소생의 해우를 제쳐놓고 호동을 태자로 삼을까 불안스러웠다. 
그래서 기회가 있을 적마다 호동을 학대했다.
원비의 학대를 받으니 호동은 궁중에 있기를 싫어했고 항상 외지로 여행하기를 일삼았다.
 
이때 고구려의 이웃나라 중에서 가장 방해가 된 것은 낙랑(樂浪)이었다.
낙랑은 한사군의 하나로서 이때 호수(戶數)가 61,492호였다고 하니
고구려보다는 비록 국세가 약한 편이었으나 도저히 그것을 정벌할 수가 없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낙랑군이 다른 나라에게 정벌되지 않는 까닭은
적병이 국경에 쳐들어오기만 하면 스스로 울리는 북이 있어 이내 그 정보를 알게 되고
따라서 신속한 임전태세를 갖출 수 있는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 전설을 그대로 믿는다면 오늘날 적기(敵機)의 침입을 알려 주는 레이다 같은 것이
발달되었을 리는 만무하다.
상식적으로 판단한다면 신속한 정보망이 발달되었다고나 할까.
 
어쨌든 그 ‘스스로 우는 북(自鳴鼓)’에 얽히어 호동왕자와 낙랑태수 최리(崔理)의 딸과의
비극이 벌어진 것이다.
 
대무신왕 15년 4월, 사방을 유랑하던 왕자 호동은 옥저(沃沮=城南地方)땅에 이르러
마침 그 곳에 사냥을 나온 낙랑태수 최리와 만났다.
최리는 남달리 준수한 호동의 용모를 이윽히 바라보더니 물었다.
 
“그대의 얼굴을 보니 보통사람 같지 않은데
혹시 북국(北國=高句麗) 신왕(神王=大武神王)의 자제가 아니오?”

호동이 그렇다고 대답하니까 최리는 고구려와 화친하는 뜻에서 후히 대접하고 싶으니
낙랑으로 가자고 권했다.
호동은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이 기회에 낙랑의 비밀무기인 자명고의 정체를 알아낸다면
자기 나라에 크게 이로울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호동의 그런 속셈도 모르는 최리는 낙랑 궁중으로 돌아가자 융숭히 대접했다.
그리고는 마침내 자기 딸과 혼인까지 시켰다.
 
최리의 딸과 혼인을 하고 나자 호동은 일단 혼자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최리와 공주에게는 부왕의 허락 없이 혼인을 했으므로 먼저 돌아가서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핑계를 댔지만 속셈은 자명고의 비밀을 보고하기 위해서였다.
 
자기 나라에 돌아간 호동은 부왕에게 낙랑에는 자명고가 있다는 것과 그 자명고는
무고(武庫) 깊숙이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을 보고했다.
 
“그렇다면 그 자명고를 없애버릴 방도는 없느냐?”
 
왕은 호동의 보고를 받자 이렇게 되물었다.
그러나 호동으로서는 별다른 묘책이 생각나지 않았다.
 
“이렇게 하면 어떨까?”
 
한참만에 왕은 한 가지 계교를 말했다.
 
“네가 최리의 딸과 혼인을 했다니 최리의 딸은 비록 지난날엔 낙랑의 공주였지만
지금은 어엿한 고구려의 왕비이다.
마땅히 고구려를 위해서 충성을 다해야 할 것이니
네 아내에게 사람을 보내어 자명고를 찢어버리도록 일러라.”
 
나라 전체의 이익을 생각하는 왕으로선 당연한 말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호동에게는 괴로운 명령이었다.
 
아무 의심도 하지 않고 자기만 기다리고 있는 공주에게 자명고를 없애 버리라고 요구하는 것은
결국 죽으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공주가 무슨 방법을 써서든지 자명고를 없애버린다면 그것은 낙랑으로서는
최고의 반역 행위이므로 아무리 공주라도 가혹한 형벌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호동이 망설이고 있으려니까
호동을 미워해 온 원비는 그것을 미끼 삼아 다시 왕에게 참소했다.

“호동이 아무래도 딴 뜻을 품은 모양이에요.
그러기에 자명고를 없애는데 주저하는 게 아니겠어요?”

이렇게 되자 호동은 어찌 할 수가 없었다.
마음 속으로 공주에게 사과하며 괴로운 붓을 들었다.
 
<그대가 만약 자명고를 없애버린다면 충실한 아내로 알고 맞아올 것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남편과 남편의 나라에 대한 정성이 없는 것으로 알고 남이 되겠다.>
 
호동의 편지를 받은 공주는 역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남편의 뜻을 좇자니 부친을 배반하는 것이 되고 부친을 배반하지 않으려면
남편과 영 이별을 해야 한다.
그러나 공주의 애정은 부친보다도 남편에게 더 강했다.
밤이 이슥하기를 기다려서 비수를 품고 무고(武庫) 속에 숨어 들어간 공주는
마침내 자명고를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그리고 그 사연을 비밀히 고구려땅에 있는 호동에게 전했다.
 
자명고가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는 보고를 받자 대무신왕은 곧 군사를 일으켜 낙랑을 습격했다.
 
고구려군이 노도처럼 낙랑 땅에 쳐들어 갈 때까지 낙랑에서는 자명고가 찢어진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러므로 아무 대책도 없이 고구려군을 맞아 도성이 포위되자
겨우 이상히 여기어 무고를 조사해 보고 비로소 자명고가 찢어진 것을 알았다.
 
낙랑태수 최리는 그 범인을 추궁해 보니 뜻밖에도 자기 딸이 모든 것을 자백했다.
 
“예끼, 이 어리석은 것아!”
 
최리는 비통하게 부르짖고 한칼에 딸을 죽인 다음 고구려군에게 항복했다.
 
이렇게 되니 호동의 마음은 몹시 괴로웠지만 어쨌든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셈이었다.
왕은 그 공을 크게 칭찬하며 전보다도 한층 더 왕자를 사랑하게 되었다.
왕의 총애가 기울면 기울수록 원비는 호동을 두려워하고 미워할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로 호동을 태자로 삼고 자기 소생인 해우는 불우한 처지가 될 것이 확실할 것 같다.
 
원비는 여러 가지로 궁리한 끝에 한 가지 간교를 생각해 냈다.
 
“대왕,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어요?”
 
어느 날 밤, 왕의 거처로 달려가서 눈물을 뿌리며 말했다.
 
“무슨 일인데 그러오?”
 
“호동이 아무리 친자식이 아니라도 저를 어미로 대접하지 않으니 이럴 수가 있겠어요?”
 
“어떤 태도를 취했기에 그러는 거요?”
 
“말하기조차 부끄러운 일이어요.
대왕이 계시지 않을 때면 여러 가지 말로 유인하며 저를 범하려고 하지 않겠어요?”
 
“뭐라구? 설마 호동이…”
 
왕은 비의 말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비는 호동이 자기 소생이 아니라고 모함하는 것은 아니겠지?”
 
이렇게 반문해 보았다. 그러나 비는 거짓 울음을 울면서 말했다.
 
“대왕께서 제 말을 믿지 않으신다면 몸소 그 징조를 살피시어요.
만약 제 말이 거짓이라는 것이 밝혀진다면 무슨 죄라도 달게 받겠어요.”
 
이렇게까지 말하니 왕의 마음에도 의혹이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비밀히 사람을 놓아 호동이 하는 일을 일일이 감시하게 하였다.
 
이것을 알자 호동은 슬펐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부왕만은 자기를 믿어 주실 줄 알았는데
부왕까지 믿어 주리 않으니 살 맛이 없었다.
그리고 부왕에게 자기의 결백함을 밝히는 방법도 없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되면 국모인 원비의 죄악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부왕에게 근심을 끼치고 형제 사이에 더욱 치열한 암투를 벌이게 될 염려가 있었다.
 
“나 하나만 없어지면 모든 일이 무사히 해결 되리라.”
 
호동은 이렇게 생각하고 스스로 칼을 물고 땅에 엎드려 자결했다.
대무신왕 15년 11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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