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한국의 野史

8. 호랑이와 표범

오늘의 쉼터 2018. 12. 8. 17:44

8. 호랑이와 표범



왕자 호동이 자결하자 대무신왕은 그 다음 달인 12월에 해우를 태자로 삼았다.

 
원비의 강청을 물리치기 어려운 때문이었을 것이다.
해우가 태자가 된지 12년만인 대무신왕 29년에 왕이 승하했다.
그러니 응당 해우태자가 왕위를 계승해야 마땅할 것이지만
대신들은 그를 제쳐놓고 대무신왕의 아우인 해색주(解色朱)를 추대하여 왕위에 올려 앉혔다.
그가 곧 제4대 민중왕(閔中王)이다.
 
해우가 왕위를 계승하지 못한데 대해서 사기(史記)에는 나이가 어린 때문이라고 되어 있지만
태자가 된 후 12년 만이니 적어도 거의 다 성장한 젊은이였을 것이다.
사실은 해우의 사람됨이 사납고 어질지 못한 때문에 그를 멀리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민중왕은 즉위한지 겨우 5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마침내 해우가 왕위를 계승하였으니(西紀 48년) 제5대 모본왕(慕本王)이다.
 
5년 전에는 왕위 계승에 실패했던 해우가 거기 성공한데에는 여러 가지 기반을 닦아 두기도
했을 것이며 또 왕위 계승의 경쟁자가 별로 없었던 때문이었을는지도 모른다.
 
모본왕은 왕위에 오르자 그 사납고 잔인한 성격을 여실히 드러냈다.
앉을 때는 비록 대신이라도 그 등을 깔고 앉았으며 누울 때는 허리를 베고 누웠다고 한다.
그리고 그 아래 깔린 사람이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용서 없이 목을 베어 죽였고
신하들 중에 그 포악한 행동을 간하는 자가 있으면 당장에 활을 당겨 쏘아 죽였다고 한다.
 
이렇게 되니 백성들은 모두 왕을 원망하고 군신들은 언제 왕의 손에 죽을는지 알 수 없어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두로(杜魯)라는 사람은 누구보다도 겁을 먹고 있었다.
두로는 항상 왕의 걸상 노릇을 하는 처지이므로 언제 몸을 움직였다가
화를 당할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두로가 두려워하는 것을 보자 그의 친구 하나가 이렇게 말했다.
 
“여보게 그래도 자네는 사내대장부라고 자처하나?
옛 사람이 말하기를 나를 사랑하면 임금이요 나를 학대하면 원수라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지금 왕은 함부로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이니 곧 백성의 원수라.
자네가 아무래도 죽을 몸이라면 백성을 위해서 옳은 일을 하고 죽는 것이 좋지 않은가?”
 
그 말을 듣고 두로는 분연히 결심했다.
그 이튿날, 두로는 품에 칼을 품고 입궐했다.
그러나 왕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소리쳤다.
 
“이놈아! 어서 거기 엎드려.”
 
두로는 왕의 앞에 엎드렸다.
임금은 그의 등에 걸터앉았다.
그 순간 두로는 칼을 뽑아 밑으로부터 왕을 찔러 죽였다.
모본왕이 즉위한지 6년째 되던 해 11월이었다.
 
모본왕에게는 익(翊)이라는 왕자가 있었으며 즉위하던 해 10월에 태자를 삼았다.
그러므로 모본왕이 세상을 떠나자 응당 익이 왕위를 계승할 처지였지만
부왕을 닮아서 성품이 용렬하고 사납기만 하므로 대신들은 다른 왕족을 세우고자 했다.
그러나 마땅한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유리왕의 손자 즉 재사(再思)의 아들인 궁(宮)이라는 어린이를 맞아 태조왕(太祖王)을 삼았다.
궁은 아직 나이 7세밖에 안되는 어린아이였지만 세상에 태어나는 즉시 눈을 떠서 만물을 바라보았다고 전해지는 만큼 영리한 아이였으므로 잘 성장하면 누구보다도 훌륭한 왕이 되리라 생각되었던 것이다.
 
왕은 과연 어진 임금이었다.
많은 치적을 남겨 백성들의 칭송을 샀으므로 사상 유래가 드물게 오래도록
왕위에 머물러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영주(英主)라도 너무 오래 집권하면
그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이 생기는 모양이었다.
 
왕에게는 수성(遂成)이라는 아우가 있었다.
성품이 용감하고 위엄이 있어서 여러 번 크게 전공을 세웠으며 그를 따르는 심복들도 적지 않았다.
그리고 그 심복들은 연로한 왕을 몰아내고 수성을 세울 모의를 하고 있었다.
왕이 즉위한지 80년 되던 해 7월, 수성이 왜산(倭山)에서 사냥을 하고 사람들과 술자리를 벌였을 때
심복 미유(彌儒)가 어지류(於支留), 양신(陽神) 등 왕의 친구들을 보며 이런 말을 꺼냈다.
 
“전에 모본왕이 세상을 떠났을 때 태자가 불초하므로 여러 대신들이 왕자 재사를 세우고자 했습니다.
재사는 연로한 것을 빙자하고 그 아들에게 그 자리를 물려주지 않았습니까?
이와 같이 부형이 늙으면 자제에게 양위하는 것이 도리인데 지금 왕은 너무 연로했으면서도
양위할 의사가 없으니 왕제께선 마땅히 일을 도모하시는 게 좋을 줄로 아오.”
 
이 말은 수성에겐 무엇보다도 반가운 말이었다.
그러나 여러 사람들의 눈치를 살펴보니 몇몇 심복들을 제외하고는
그 말을 옳지 않게 여기는 모양이었다.
말하자면 때가 아직 성숙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능청스러운 수성은 이렇게 말하고 심복들의 입을 막아버렸다.
 
“왕위 계승은 반드시 적자로 하는 것이 천하의 상도요.
지금 왕은 비록 늙었다 하더라도 적자 막근(莫勤)이 있으니 내가 어찌 감히 왕위를 엿보겠소.”
 
그러나 수성의 마음은 초조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의 나이 벌써 60이 넘었으니 이러다가는 권력을 잡아보지도 못하고 늙어 죽을 판이다.
그 초조함을 달래기 위해서 수성의 생활은 날로 거칠어져 갔다.
항상 궁궐을 비우고 사냥이나 하러 돌아다녔으며 한 번 사냥을 나가면 닷새고 이레고 돌아오지 않았다. 왕제의 몸으로서는 마땅히 비난을 받아야 할 방종한 생활이었다.
 
수성에게는 백고(伯固)라는 아우가 있었다. 수성과는 딴판으로 총명하고 인자한 인물이었다.
그는 야망을 누를 길 없어 거친 생활을 하는 형 수성이 몹시 민망하게 보였다.
 
“형님, 복과 환난은 따로 문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사람이 부르는 것인데 형님은 왕제(王弟)된 몸으로 지위가 백관의 으뜸이니
마땅히 나라와 백성들을 위해서 마음을 써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지금 형님이 누리시는 부귀가 몸을 떠나지 않을 것이지 한 때 환락에 빠지면
어찌 화를 스스로 부르는 태도라 아니하겠습니까?”
 
그러자 수성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네가 나를 훈계하는 거냐? 그러나 백고야 듣거라.
사람치고 부귀와 환락을 바라지 않는 자가 어디 있겠느냐?
다만 그것을 누릴 복을 타고난 자가 만에 하나도 없을 따름이다.
그러나 나는 다행히도 부귀와 환락을 누릴 처지에 놓여 있으니
그것을 마음대로 누리지 않고 늙어 죽는다면 오히려 억울할 뿐이 아니겠느냐?”
 
두 사람의 인생관은 근본적으로 달랐다.
그러므로 말이 통할 까닭이 없었다.
그리고 후에 제7대 차대왕(次大王)이 된 수성과 제8대 신대왕(新大王)이 된 백고의 운명도
역시 판이했다.
 
90년 9월 어느 날 밤, 왕은 꿈을 꾸었다.
한 표범이 호랑이의 꼬리를 물어뜯는 꿈이었다. 
 
이상히 여긴 왕이 좌우에게 그 길흉을 물었다.
 
“호랑이는 백수(百獸)의 장(長)이며 표범은 그 동류이지만 호랑이보다는 작고 약한 자입니다. 
그런데 그 표범이 호랑이를 물었다면, 왕족 중에서 대왕의 뒤를 끊으려고 도모하는 자가 있는
 징조로 압니다.”
 
왕제 수성이 딴 뜻을 품고 있다는 것을 은근히 고한 것이다.
그러나 너그러운 왕은 아우를 의심하는 걸 즐기지 않았다.
그래서 우보(右輔) 고복장(高福章)에게 다시 해몽을 명해 보았다.
고복장은 원래 강직하면서도 원만한 중신이었다.
그러므로 해몽 역시 상식적이고 온건한 것이었다.
 
“옳지 못한 일을 하면 길한 것도 흉한 것으로 변하는 법이오며
옳은 일을 하면 재앙도 복이 되는 법입니다.
지금 대왕께서는 나라를 내 집같이 염려하시고 백성을 자식같이 사랑하시는데
비록 이상한 징조가 있기로 어찌 염려하겠습니까?”
 
그러나 왕의 꿈은 결국 불길한 일의 징조였다는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수성의 마음 속에서는 왕을 물리치고 정권을 잡을 야망이 나날이 자라가고
그의 심복들도 그 일을 위해서 은밀히 흉계를 꾸미고 있었다.
그리하여 왕이 흉몽을 꾼지 4년이 지난 94년 7월, 수성은 왜산(矮山) 밑에서 다시 사냥을 했는데
이때 숲 속으로 심복들을 불러 놓고 자기 야망을 털어놓았다.
 
“지금 임금은 백 살이나 나이를 먹고 90여년 동안이나 임금 자리에 있으면서
죽지도 않고 왕위를 물려 줄 생각도 없는 모양이다.
이제 내 나이 70이 넘었으니 이 이상 기다릴 수는 없다.
그대들은 나를 위해서 목숨을 걸고 일을 꾸며 주겠는가?”

수성의 말이 떨어지기가 바쁘게 심복들은 입을 모아 외쳤다.
 
“삼가 분부를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 단 하나 꼬장꼬장한 사람이 있었다.
 
“지금 왕제께서는 옳지 못한 말씀을 하셨는데
그럴 때엔 좌우에서 바른 말로 간해야 할 것인데도 불구하고
모두들 그저 분부만 따르겠다고 하니 간사한 무리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제 제가 바른 말을 드릴까 합니다만, 허락하시겠는지요?”
 
“바른 말은 약석(藥石)과 같다고 하니 어찌 듣지 않겠는가?”
 
“지금 대왕께선 현명하시어 모든 신하들은 말할 것도 없고 많은 백성들까지도
그 덕을 칭송하고 있는 터입니다.
그런데 왕제께선 임금의 아우 되시는 몸으로서 간사한 무리를 거느리고
현명한 대왕을 폐하려고 꾀하시니 어찌 부당하다고 아니 하겠습니까?
비록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그러한 생각은 아니할 것입니다.
지금 만약 왕제께서 그 마음을 고치시고 착한 마음으로 돌아가시어 웃어른을 섬기신다면
대왕께서도 왕제의 뜻에 감동되시어 반드시 왕위를 물려주실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신대로 일을 저지르신다면 반드시 화가 미칠 것으로 압니다.”
 
이 말에 수성의 안색은 불쾌한 빛으로 물들었다.
그러자 아참 잘하는 심복들은 그 눈치를 재빠르게 알아차리고 이렇게 고해 바쳤다.
 
“왕제께서는 임금이 연로한 때문에 나라에 해로울 것을 염려하시고 뒷일을 꾀하시는 터인 데
이렇게 우리와 뜻이 다른 자를 그냥 두었다간 우리의 계교가 누설되어 후환이 미칠까 두렵습니다.
마땅히 이 자를 죽여 입을 막아버리는 것이 상책일까 합니다.”
 
수성은 그말을 듣자 그 사람을 즉시 죽여 버렸다.
 
그해 10월, 비로소 우보 고복장(高福章)은 수성이 모반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는 당황했다. 임금을 뵙고 급히 아뢰었다.
 
“왕제 수성이 지금 모반하려고 무리를 모으고 있습니다.
먼저 그를 주살하시어 화를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상책일까 합니다.”
 
그러나 늙은 왕은 힘없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는 이미 늙은 몸, 수성은 아직 힘이 왕성하니 그에게 왕위를 곱게 넘겨줄까 하오.”
 
그 말에 고복장은 펄쩍 뛰었다.
 
“왕제 수성은 사람됨이 어질지 못하고 잔인해서 오늘 왕위를 이어 받으면
장차 대왕의 자손을 해칠 것입니다.
대왕께서는 어질지 못한 아우에게 은혜를 베푸셨다가
그 후환이 죄없는 자손들에게 미쳐도 좋단 말씀입니까?
다시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왕은 역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해 12월, 왕은 수성을 불러 말했다.
 
“내 이미 너무 늙어 모든 일을 게을리 하게 된다.
너는 아직 창창한 몸인데다가 안으로 국정에 참여하고 밖으로 군사를 이끌어 큰 공을 세웠으니
넉넉히 백성들을 복되게 할 것이다.
그런 뜻에서 나는 좋은 후계자를 얻었다고 할 수 있을 게다.
앞으로도 부디 백성을 사랑하고 잘 다스리도록 부탁한다.”
 
이렇게 말한 다음 왕위를 물려주고 별궁(別宮)으로 물러갔다.
 
수성은 마침내 그토록 갈망하던 왕위에 올랐다.
그때 그의 나이 76세, 바로 제7대 차대왕(次大王)이다.
 
왕위에 오르자 성품이 잔인한 수성이 맨 먼저 착수한 일은 자기의 뜻을 반대하던 사람의 숙청이었다.
일찍이 모반을 권고하던 심복 미유(彌儒)를 좌보(左輔)로 삼는 한편 그와 적대되는 세력의 거물
고복장을 잡아들여 목을 베려 했다.
그러자 고복장은 땅을 치며 탄식했다.
 
“아, 슬프고 억울하다.
내 선조(先朝)의 은혜를 받은 몸으로 모반을 꾀하는 사람을 어찌 그냥 둘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선군(先君)께 그대를 없애도록 아뢰었지만 듣지 않으신 탓으로 지금 이지경이 되었구나.
그대는 욕심대로 대위를 계승했으니,
마땅히 마음을 고치고 정교(政敎)를 새롭게 해서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야 할 터인데
옳은 말을 한 사람을 죽이려 하니 무도하기 비길 데 없다.
내 이러한 무도한 시대에 사느니보다 속히 죽는 편이 좋으니 어서 죽여 다오.”
 
고복장은 마침내 형을 받아 죽으니 사람들은 모두 격분해 마지않았다.
수성은 신하들만 숙청한 것이 아니었다.
3년 4월에는 태조대왕의 원자 막근(莫勤)을 죽여 버렸다.
태조대왕의 정당한 후계자를 죽임으로써 민심이 흩어지지 않게 하고
자기의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였다.
막근이 피살된 것을 보자 막근의 아우 막덕(莫德)은 화가 자기에게까지 미칠 것을 두려워하고
고민한 나머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여기에 대해서 <삼국사기(三國史記)>의 편자 김부식은 이렇게 논평했다.
 
<태조왕은 의(義)를 알지 못하고 대위를 경솔하게 어질지 못한 아우에게 주었으므로
화가 한 충신과 두 아들에게 미쳤으니 어찌 탄식하지 않으랴. >
 
그는 그 허물을 태조왕에게 돌렸는데 그 논평에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충신과 아들들이 죽을 때 태조왕은 아직 살아 있었지만 이미 실권을 내놓은 그로서는
속수무책(束手無策), 아무 대책도 강구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가 만일 좀더 현명한 눈을 가지고 있어서 정권을 내놓지 않았던지 그것을 물려주더라도
좀 더 사람을 가리어 물려주었다면 이런 참변을 당하지 않았을는지도 모른다.
 
수성은 잔인하고 사나운 독재자였는지 모르지만 형에게서 정권을 빼앗을 생각을 한 만큼
난폭하기만한 인물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70대에서 90대라는 늙은 몸으로 끄떡없이 정권을 유지한 수완으로 보면
단순한 폭군으로 돌릴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말로(末路)는 좋지 못했다.
 20년(西紀 165년) 10월 백성들의 원성이 날로 높아가자
명림답부(明臨答夫) 등에게 왕은 드디어 피살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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