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모래시계

<제24회> 모래시계 -end-

오늘의 쉼터 2018. 11. 7. 19:29

<제24회> 모래시계 




# 1 서울지검 전경




# 2 우석의 집무실


모두 퇴근하고 불은 꺼져있는 상태.

문이 소리 없이 열리더니 누군가 슬그머니 들어선다.

들어선 자는 열쇠로 파일함을 열고 뒤지기 시작한다.

따로 보관되어있는 서류 봉투를 꺼낸다. 그 안 의 내용물을 꺼내본다.

혜린이 넘겨주었던 복사본 장부이다.

사내, 장부를 챙기고 서랍을 닫는데 순간 환히 켜지는 불.

사내, 깜짝 놀라 돌아본다. 서 부장검사다.

입구에 서있는 장 수사관. 비켜주면 그 뒤로 들어서는 우석과 신 검사. 우석은 미리 예상했던 얼굴이지만 신 검사는 경악하고 있다.


검사 : 부장님.


그 뒤로 들어선 백 형사와 조 순경, 서 부장의 좌우로 붙어 선다.

서 부장 검사 당황한 대로 재빨리 수습을 해보려고……


부장 : 아 다 퇴근한 줄 알았지… 아직 안 갔었나…


장 수사관, 다가가더니 부장이 들고 있는 서류 봉투를 받아든다.


부장 : 아 잠깐 검토를 해볼까하구…그 거 윤재용 회장 딸이 놓고 간 거 그 장부 맞지?


우석, 서 부장의 당황함을 보고 있다가,


우석 : 이종도에게서 돈을 받으셨더군요. 가명구좌로 작년 4월 이래 여덟 차례에 걸쳐 총 사억 육천.


부장 : 무슨 소릴 하는 건가? 지금.


우석, 들고 있던 서류들을 하나씩 앞에 던져주며


우석 : 서초동의 빌라, 70평짜리를 단돈 오천만원에 사셨다구요. 원주인이 이종도 쪽 사람으로 되어있구요.


부장 : (화내기로 한다) 이봐 강 검사. 지금 날 의심하고 있는 거야? 내가 뇌물이라도 받았다는 거야? 어?


우석 : …예 그렇습니다.


부장 : 이…이…


장 수사관 우석을 돌아본다.


장 수사관 : 어떻게 할까요?



# 3 검찰 복도


우석을 따르고 있는 신 검사, 초조한 얼굴로 따르다가 불쑥 우석을 잡아 세운다.


신 검사 : 진심이야 자네? 정말로 부장검사를 구속할 거야?


우석 : 구속 사유 충분하잖아.


신 검사 : 이봐 잠깐 우리 생각 좀 해보자구. 그러니까 이 건……(가슴이 갑갑하여 서있다가) 부장검사가 폭력배한테 뇌물을 받았어.


우석 : 그래.


신 검사 : 이거 국민이 알면 어떻게 되겠어? 국민이 앞으루 우리 검찰을 믿을 거 같애? 이런 거 터뜨려놓구 우리가 법정에 서서 구형을 할 수 있을 거 같애? 무엇보다두 나라의 앞날을 생각해보자구.


우석 : 신 검사.


검사 : 어 그래 생각해보자구. 우선.


우석 : 지금은 믿을 거 같애?


검사 : 뭐?


우석 : 지금은 국민이 우리 검찰을 믿구 있다구 생각해? 우리가 터뜨리지 않으면 국민이 모를 거 같애?


신 검사 아무 말 못하고 보고만 있다.

우석, 혼자 걸어가는데 그 뒷모습이 우울하다.



# 4 장도식 사무실


불 켜지 않은 사무실에 의자를 돌려 앉은 장도식의 뒷모습.

잠시 후 장도식, 의자를 돌려 책상을 향해 앉는다.

표정 없는 얼굴로 전화기를 본다.



# 5 우석의 집무실 밤


우석과 오 계장,


우석 : 내일 당장 강동환의 소환장을 보내도록 하지요. 어렵겠지만 밤을 새서라도 준비를 했으면 해요.


오 계장 : 그래야죠. 속도전이라 이 거지요


우석 : 그리고…


우석 말을 멈춘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사내 세 명.


사내1 : 강우석 검사지요?


우석 : 그런데요.


사내1 : (신분증을 얼핏 보인다) 우리 부장님께서 잠시 얘기를 나누고 싶어 하시는 데요.


우석 : (말없이 보는데)


오 계장 : 그런 거라면 일단 전화를 주시고 약속시간과 장소를 정한 다음에…


사내2, 오 계장을 옆으로 밀쳐놓는다.

오 계장, 더 말을 못하는데


우석 : 정식으로 청하는 겁니까?


사내1 : 우린 그런 거 모릅니다. 가실까요?


그 때 문 밖에서 듣고 있던 장 수사관 들어선다.


장 수사관 : 가지 마십시오. 할 말 있으면 할 말 있는 사람이 오라고 해요.


우석은 아무 말 없이 사내들을 훑어보더니 일어선다.



# 6 검찰 마당


대기시켜져있는 승용차.

우석과 사내 세 명, 승용차로 다가선다.

우석을 뒤에 태우고 사내들 차를 출발시키려고 헤드라이트를 켜는데 그 불빛 앞에 가로막고 선 백 형사. 백 형사 성큼 다가오더니 뒷문을 연다.


백 형사 : 검사님, 내리십시오.


우석의 옆에 앉았던 사내2


사내2 : 당신 뭐야 ?


백 형사 대답보다 먼저 사내2를 끌어낸다.


형사 : 너는 뭐야?


조 순경, 반대편 차문을 연다.


조 순경 : 검사님 들어가세요. 이 자들 어디서 온 누군지 우리가 조사해보겠습니다. 다 조사할래면 며칠 걸릴 겁니다.


우석, 움직이지 않고 있다. 백 형사 버둥거리는 사내2를 차에 밀어붙인 채 벌컥


형사 : 내리십쇼. 검사님. 당신 검사 아니요? 검사가 힘도 없이 이따위 것들을 따라가요?


우석 차에서 내린다.


형사 : (계속) 이런 꼴 보여줄려구, 우릴 여기까지 델구 온 겁니까?


우석 : 놓아줘요.


형사 : 이런 빌어먹을.


우석 : 어서.


백 형사 사내2를 밀쳐버리더니


백 형사 : 검사가 이 모양이니, 우린 뭐야? 이런 검사 밑에서 일하는 우린 뭐냐구?


조 순경, 놀라 백 형사를 잡는다.


조 순경 : 왜 이래요?


백 형사 : 제엔장 으이구우.


우석 : 나 검사예요.


백 형사 : (벌컥 노려보는데)


우석 : 대한민국 법치국가에요. 그렇게 형편없지 않아요. 이상한 상상하는 거 내가 용납 못합니다.


백 형사 조 순경 말 못하고 보는데…


우석 : 같은 공무원끼리 얘기가 있답니다. 얘기하고 올 테니 들어가 기다려요. (사내들을 향해) 갑시다.


먼저 차에 탄다.

사내들도 눈치를 보며 슬그머니 차에 탄다.

문이 닫히고 차는 출발해간다.



# 7 낮 호텔로비


들어서고 있는 검사장과 신 검사.



# 8 호텔 내 작은 룸


기다리던 장도식 일어선다.

총장, 소개하여 검사장과 악수를 나누는 장도식. 신 검사도 악수를 한다.


(시간경과)


둘러앉은 네 명.

총장 : 강 검사 문제는 내가 엄중하게 항의를 했어요. 그 점에 관해서는 장 부장 쪽에서도 사과하고 있고.


장도식 : 솔직히 실무책임자로서 저 역시 고통이 많습니다.


검사장 : 구체적으로 어떤 고통인가? 그러니까 양심의 고통 같은 건가요?


신 검사 : 강 검사는 현재 열한 시간째 연락이 두절되고 있습니다. 이런 법은 없습니다.


장도식 : 허심탄회하게 말씀드리죠. 현재 정부는 5공 출범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이런 시국에 윤 회장 사건의 전말이 밝혀지면, 정부가 견디기 힘들다고 보고 있지요.


검사장 : 그래서요?


총장 : (어디까지나 중간에서 분위기를 좋게 하는 입장) 그래서 장 부장은 협조를 부탁하는 거예요.


장도식 : 강 검사는 아주 고집이 센 분이더군요. 선배님과 동료 분께서 설득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그걸 약속해주신다면 당장 돌려보내드리지요.


검사장 느닷없이 허허 웃는다.


검사장 : 장 부장 같은 분도 할 수 없는 일을 우리가 할 수 있을 거 같습니까?


장도식 : 그럼 할 수 없지요. 강 검사는 모종의 복잡한 사건에 연루가 돼있어서, 우리로서도 어쩔 수가 없겠습니다.


검사장 : 무슨 뜻인지요? 나같이 머리가 단순한 사람은 그렇게 빙빙 돌려 말하면 못 알아들어요.


장도식 : 강 검사 5.18때 광주에 있었습니다.


검사장 : 계엄군으루 있었어요. 나도 알아요.


신 검사, 검사장을 돌아본다.


장도식 : 당시 강우석 일병은 작전수행 도중 여러 차례에 걸쳐 명령불복종을 했다더군요. 동료들의 증언이 있었습니다.


검사장 : 아니 잠깐만요.


장도식 : (무시하고) 박태수도 같은 시기에 광주에 있었습니다. 이후 두 사람은 긴밀한 관계에 있었고. 그 배후에는 정부 전복을 기도하는 불순세력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국가보안 법에 적용되는 문제지요.


검사장 : (말 없이 장도식을 본다)


장도식 : 이젠 이해하시겠습니까?


검사장 : (내내 견지하고 있던 온화한 표정이 사라지더니 신 검사를 향해) 이 분들 뭔가 잘못 아시는군요. 검찰엔 강 검사밖에는 없는 줄 아시는 거 같애.


신 검사, 검사장의 뜻을 이해한다.

마음을 다잡더니 장도식을 본다. 겁은 나지만.


신 검사 : 강 검사가 이 사건을 계속하지 못한다면…… 제가 하게 됩니다. 저는 할 겁니다.


총장 : 어이 신 검사.


신 검사 : (더욱 용기를 낸다) 강 검사 몫까지 할 겁니다.


검사장 : 신 검사도 데려갈 겁니까? 그럼 또 다른 검사를 소개해드리지요. 우리 검찰에 검사 아주 많아요.


장도식, 아무 말 없이 그들을 본다.



# 9 검찰 로비


빠른 걸음으로 들어서는 선영.



# 10 합동수사본부


오 계장, 장 수사관 돌아보는 곳에 선영이 들어서고 있다.

오 계장, 시선을 피하고 싶은 심정이다.

그러나 선영 똑바로 그들이 있는 곳으로 와서


선영 : 우리 그이 어디 있어요? 무슨 얘기에요? 소식을 모른다니요?


오 계장, 옆에서 흘끔 거리는 조 순경을 손가락질하며


오 계장 : 사람 참 쓸데없이 연락을 해가지고.


선영 : 우리 그인 어디 있는지 모르는데 여러분은 왜 여기 있어요? 팀장이 없어졌는데 팀원들이 그냥 이렇게 손 놓구 있어두 돼요?


조 순경 : 검사님 남산에 계세요. 어제 밤…


장 수사관 : 입 다물어.


조 순경 : 하지만…


장 수사관 : (선영에게) 사모님에게두 말씀드릴 수 없는 게 있습니다. 아무리 사모님이라두 말이지요.


백 형사, 책상을 괜히 퍽 차더니 나가버린다.


선영 : 그럼 그이가 서울에 와서 어떤 일을 했는지… 그러니까 그이한테 이런 변이 생기 게 만든 일이 어떤 건지 그 것두 말씀해주실 수 없겠네요.


장 수사관 : 이해해주십시오.


선영 : (그들을 둘러보다가) 죄송해요. 제가 생각이 모자랐어요. (고개 숙여 보인다)



# 11 복도


걸어오는 선영을 뒤따라 나오는 오 계장 .


오 계장 : 저기 이해하세요. 이건 국가적인 일이라서 그래요. 에 저 어떻게 말씀드리면 이해하실까. 그러니까, 우리가 손 놓구 있는 건…(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선영 : 들어가세요. 바쁘신데…


고개 숙여보이고 가는데 오 계장 망설이다가


오 계장 : 윤 회장 사건을 조사하구 있었어요.


선영 멈춰 돌아본다.


오 계장 : 그 왜 윤재용 회장이라구 카지노계의 거물…그리고 고위직 공무원……그 거 뭐 다 그런 거 아닙니까? 사천만이 다 아는 거 위에서만 쉬쉬하고 있는 거지요. 걱정 마세요. 아무리 그래두 검사님 아닙니까? 지금 잘 계실 거예요.



# 12 남산 취조실


빈 방에 우석 혼자 의자에 기대앉아 창가에 발을 올려놓고 뒤에서 보면 잠이 든 듯 보인다.

그러나 앞에서 보이는 얼굴은 창문을 향한 채 허공을 깊은 생각에 잠겨 바라보고 있다.

그 방의 창문으로 보이는 옆방.

세 명의 사내가 책상 주위에 둘러앉거나 서서 서류들을 잔뜩 쌓아놓고 토론중이다.



# 13 옆방


밤새워 일해 지친 모습들…


사내1 : 아니 이 친구는 어떻게 대학 때 데모 한번 안 했어.


사내2 : 남들 데모할 때 미팅만 다녔나.


사내3 : 성적은 우수한데요.


사내1 : 부동산은 얼마나 갖구 있어?


사내3 : 부동산이란 게 없어요.


사내2 : 없어?


사내3 : 현재 검찰 관사 빌려 살구 있구. 저금은 좀 있는데 마누라 겁니다. 결혼 전부터 갖구 있는 건데요.


사내1 : 제엔장. (서류를 던져버린다)



# 14 신문사 복도


영진, 자판기에서 커피 두 잔을 뽑아 기다리고 있는 선영에게 간다.

선영, 커피를 받아들며 영진을 보는 눈을 떼지 않고


선영 : 도와주세요.


영진 : 도와야죠. 도와야 되는데…


선영 : 기사를 쓸 수 있죠? 신문에 내주세요. 사람들이 다 알면 그 쪽에서두 어쩔 수 없을 거 아녜요?


영진 : (생각해보다가) 뭘 쓰죠?


선영 : 네?


영진 : 기사를 쓸래면 내용을 알아야죠.


선영 : 대충 알려드렸잖아요.


영진 : 대충으론 안 돼요. 검찰에선 아직 아무 것도 발표하지 않고 있어요. 추측만 가지곤 쓸 수 없어요. 써도 안 실어줘요.


선영 : 검찰에 아는 사람 많잖아요.


영진 : 작은 아버지가 검사장이에요.


선영 : 그런데요?


영진 : 다른 기자한테 얘기 안 하는 건 나한테두 안 해줘요. 강 검사하구 비슷한 사람이에요.


선영 갑갑하다.

한숨을 쉬는데 영진 무언가 생각에 잠겼다가


영진 : 한 사람 있어요. 사건의 내용을 아는 사람. 이건 말 그대로 특종인데.


밝은 표정이 된다.


영진 : 같이 가실래요?



# 15 혜린의 사무실 건물



# 16 혜린의 사무실


혜린 책상 서랍을 열며


혜린 : 장부는 검찰에 줬어요. 강 검사한테요. (서랍에서 노트를 꺼내온다) 이건 그 중에서 중요한 몇 가지를 메모해 놓은 거예요. 이거라도 도움이 되신다면…


소파에 앉아 기다리는 영진과 선영.


영진 : 잠깐 볼 게요.


영진이 노트를 보는 동안 혜린 앞에 앉아 선영을 본다.

선영 어색해서……

영진은 연방 감탄하고 흥분하며 노트를 들춰보고 있다.


혜린 : (선영에게) 전에 한번 뵌 적 있지요?


선영 : 네 한번 집에 찾아오셨드랬어요. 그이가 우리 집에 하숙할 때…


혜린 : 맞아요, 기억나요.


혜린, 여전히 온화한 얼굴로 선영을 보고 있다.

선영, 마른기침을 하며 앞에 놓인 차를 들어 마시는데


영진 : 이거 정말 신문에 공개해도 되겠어요?


혜린 : (그제야 영진을 보고) 그러라구 드린 거예요


영진 : 이거 공개되면 윤 사장님 카지노 괜찮겠어요?


혜린 : 괜찮지 않아요. 그렇지만 우리 카지노, (선영을 본다) 우석 씨보단 중요하지 않아요.


선영 : (고개 들어 보는)


혜린 : 우석 씨하구 나 대학교 때 친구였어요.


선영 : …들었어요.


혜린 : 나 한때, 결혼을 하면 우석 씨 같은 남자랑 하겠다구, 생각한적 있어요.


영진 심상치 않아 양 쪽을 살피는……


혜린 : 그런데 보기 좋게, 거절당했어요.


선영 : 아 그런…(다음 말은 잇지 못하는)


혜린 : 인제 알겠어요. 그 때 만약 우석 씨가 나 같은 여자하구 결혼했다면, 이런 사건 시작 못했을 거예요. 그리구…오늘 같은 일이 있을 때, 우석 씨 떳떳하지 못했을 거예요. 아시잖아요, 우석 씨 떳떳할 수만 있다면 누구보다 강한 거.


선영 : (미소가 떠오른다) 알아요.


혜린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오른다.

그렇게 마주보는데

영진, 탁자를 두드려 노크를 해서 주의를 끌고


영진 : 얘기 끝났으면 이만 일어날까요? 마감 전에 기사 써야 되니까.


선영, 영진을 따라 일어난다. 혜린 일어선다.

영진은 벌써 문으로 가며


영진 : (노트 들어보이며) 이거 내일 중으로 갖다 드릴 게요.


혜린 : 그러세요.


선영 : 저…


혜린 : (보면)


선영 : 조금 전까지 저 한심한 생각하구 있었어요. 내가 좀 더 힘 있는 집 딸이었으면 그이한테 도움이 됐을 텐데 하구…


혜린 : …… 우석 씨 일 잘 안 될지도 몰라요.


선영 : (끄덕인다) 각오해야 한다구 생각해요. 그렇지만… (얼핏 목이 메는 거 삼키고) 가볼 게요


선영, 혜린을 보고 미소 짓고 서두르는 영진을 따라 나간다.

문이 닫히고 혜린 혼자 남는다.

잠시 무엇을 해야할지 모르다가 그냥 서있다.



# 17 신문사 사무실


밤. 대부분 퇴근하고 난 빈 사무실에 영진 혼자 남아 기사를 쓰고 있다.

마지막 줄을 완성하고 나서 원고를 가지런히 챙기며 잠시 생각을 하다가 기사의 맨 앞, 비어있는 제목 난에 굵게 제목을 쓴다.

[카지노 대부의 비밀장부 --- 수사 중 검사 실종 ]

영진, 자신이 쓴 제목을 갸웃하여 다시 본다.



# 18 밤 요정 전경



# 19 요정 방 안


강동환과 언론계 간부들 회식 중이다.

강동환은 너털웃음을 웃어가며 얘기를 하고 있다.

간부들 중에 영진의 부장인 문 부장의 모습이 보인다.

그는 말없이 술잔을 비우고 있다.



# 20 요정 정원


강동환과 간부들 헤어지고 있다.

악수를 나누며 화기애애한 모습들…

강동환과 악수를 나누는 문 부장.

문 부장은 공손하게 강의 손을 잡고 있다.



# 21 낮 신문사 부장실


문이 벌컥 열리며 영진이 들어선다.

영진은 갓 나온 신문을 들고 있다.

문 부장 일을 하다가 본다.


영진 : (신문을 던져놓고) 왜 없어요?


부장 : 취재 안 나가?


영진 : 내 기사 왜 없어요? 일면 톱기사에요. 특종이고! 그런데 왜 없어요?


부장 : 신 기자.


영진 : 왜요. 나한텐 처자식이 있어, 그 소리 하실려구 그러세요?


부장 : (잠시 영진을 노려보다가) 맞아


영진 : (말이 막히는데)


부장 : 그리고 여기 처자식이 있는 사람은 나뿐이 아니야. 그리고 기사 한줄 나간다고 해도, 세상은 바뀌지 않아. 바뀌는 건 아무 것도 없다고! 그 거 아직도 몰라?

영진 말없이 부장을 보다가


영진 : 내가 언제 세상을 바꾸자고 그랬어요? 신문에 기사 내자구 했지. 그게 기자가 봉급받구 하는 일이잖아요 (머뭇머뭇 보다가 눈물이 나올 거 같아서) 에이.

썩 돌아선다.



# 22 신문사 인쇄국


윤전기가 돌아가고 있다.

인쇄국의 여러 스케치.

그 안 에서 일하는 숙련공들의 여러 모습들……



# 23 인쇄국 한구석


영진, 바닥에 퍼질러 앉아있다.

숨어 앉아 혼자 훌쩍이고 있는 중이다. 아이처럼 팔소매로 눈물을 문질러 닦는데 나이 지긋한 인쇄공, 김 씨 다가온다.


김씨 : 어이 신 기자.


영진 : (불퉁해서) 신 기자 죽었어요.


김씨 : (영진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울고 있어?


영진 : (돌아앉는데)


김씨 : (뭔가 내밀어준다) 이거 때문인가?


영진의 기사만큼 조판이 끝난 판이다.

판까지 짜여진 상태에서 아웃이 된 기사인 셈이다.

영진, 그것을 받아들어 손으로 쓰다듬어 본다.

인쇄 전의 거꾸로 된 글씨들…


김씨 : 읽어봤어. 재미있든데.


영진 : (어이없어) 그냥 재미있어요? 정부 관료가 몇 년째 뇌물을 받아먹고 세금 눈감아 주고 그거 조사하던 검사는 끌려갔는데 그냥 재미있어요?


김씨 : 재밌지 그럼. 이런 얘기 사람들이 알면 어떻게 될까 생각만 해봐두 재밌잖아.


영진, 허 웃다가 조판을 넘겨주고 일어서려는데


김씨 : 이 기사 꼭 이 신문에만 내야 되나?


영진 : (돌아본다)


김씨 : 독립한 친구가 하나 있는데 말이지. 그 친구도 반평생을 신문사에서 굴렀거든. 요즘 학교신문이니 마을신문 같은 것두 찍는단 소릴 들었는데. 어때?


영진 무슨 소린가 해서 보는.



# 24 개인 인쇄소


인쇄공들이 몇 명 일하고 있는 내부 저 구석에서 김 씨와 그 친구인 같은 연배의 이 씨가 마주서있다.

이 씨는 김 씨의 조판을 읽고 있다.

이만치 떨어져서 그런 이 씨를 흘깃 거리는 영진.

이 씨, 사람 좋은 얼굴로 웃으며


이씨 : 이 예쁜 아가씨가 이 기사를 썼단 말이지.


김씨 : 예쁜 아가씨가 아니구 신 기자야.


이씨 : 그래 신 기자, 이 기사 말이에요, (판을 들어 보이며) 이거 요런 크기의 종이를, (호외크기의 종이를 들어 보이며) 메꿀만큼 더 쓸 수 있겠어요?


영진 : 이걸 메꿔요?


이씨 : 이 게 뭐 김밥집 광고두 아니구 손바닥만한 종이에 찍을 수는 없잖아요


영진 : (그제야 뜻을 알고 망설이다가) 저어 정말 하실려구요?


김씨 : 우리 노친네들이 장난칠까봐?


영진 : 이거 위험할 수도 있어요. 불법 유인물 살포죄루 걸릴 거예요.


이씨 : 불법으루 치면 벌써 시작했지. 저 친구들 말이지. (일하는 젊은이들을 가리키며) 다 불법 위장취업이에요. 학교 다니다 짤린 애들…하하


가까이서 일하고 있던 젊은이 하나가 돌아보며 웃는다.


(시간경과)


직공들 활자를 고르고 있다.

한 쪽 낡은 책상 앞에서 영진은 기사를 쓰고 있다.

인쇄 준비가 진행돼간다.

밤이 되고……작업은 계속된다.

작업이 계속되는 사이. 직공 한 명, 기사를 읽고 있다.



# 25 밤 인쇄소 앞


트럭 한 대가 와 선다.

인쇄소에서 직공들이 뛰어나오고 트럭에서 주문했던 종이 뭉치를 내린다.

그 옆의 골목 저 쪽, 승용차가 서있다.

혜린과 마주 서있는 영진.

혜린, 서류봉투를 영진에게 건넨다.

영진, 봉투 안 에서 현금 다발 한두 개를 꺼내 보고 감사의 미소로 혜린을 본다.

혜린, 종이뭉치를 내리는 트럭을 돌아보고 있다.



# 26 밤 인쇄소


각자 바쁘게 일하고 있는 직공들…

그 사이를 종이뭉치를 들고 도우는 영진.

그리고 한 쪽에서 난로에 라면을 끓이고 있는 선영.

문이 열리며 대학생들이 대여섯 명 들어선다.

분분이 인사를 하고 새로 일을 맡고 설명을 듣고……



# 27 새벽 인쇄소 앞


용달차 두 대가 줄을 이어 들어선다.

운전석, 조수석에서 뛰어내리는 대학생들…

인쇄소에서 호외크기의 인쇄뭉치를 들고 나오는 직공들, 학생들… 트럭에 싣고…

그 중의 한 명은 벌써 기사를 읽고 있다.



# 28 길


이른 새벽, 자전거들이 달려가고 있다.

학생들… 자전거마다 뒤에는 인쇄뭉치가 실려 있다.



# 29 새벽 길 거리 신문가판대


스포츠 신문 뭉치가 던져져있는 자리 옆에 호외뭉치가 던져진다.



# 30 새벽 아파트 경비실 옆


수십 장의 호외 뭉치가 놓여진다.

맨 겉장에 보이는 기사. 발행처 따위는 적혀지지 않은 유인물…

커다랗게 시커먼 바탕에 씌어져있는 제호.

[카지노 대부의 비밀장부---조사 중 검사 실종]



# 31 아침 신문 가판대 옆길


시민들 걸음을 멈추고 호외를 읽고 있다.



# 32 건물 복도


장도식,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고 있다. 회의실 앞에 멈춰선다. 문을 열기 전에 안에서 들려나오는 소리를 잠깐 듣는다.

소리 : 도대체 경찰은 뭘하고 있었어요. 다들 잠자고 있었나.



# 33 회의실


관계자 대책회의가 열리고 있다. 장도식, 한 쪽 의자에 가 앉는다.


사내1 : (아까의 목소리) 당장 이 따위 짓을 한 자들 발본색원하세요. 하나 남김없이 다 잡아들여요.


사내1이 들고 흔들어대는 것은 영진이 쓴 호외이다.


사내1 : 도대체가 나라가 뭐가 되려구 이래요? 출처도 없는 이따위 유언비어가 거리에 나돌고……국민이 우리 정부를 어떻게 믿고 생활하겠어요. 우리 정부를 뭘로 보겠느냐고.


다들 침울하게 앉아있는데.


사내1 : 장 부장 왔구만. 그래 이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해명 좀 들읍시다.


장도식 :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사내1 : 외람 돼도 좋으니 아무 거나 말 좀 해봐요.


장도식 : 유인물을 쓴 자들을 잡아들이는 건 지금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사내1 : 허 그럼 내가 중요하지도 않은 걸 붙잡고 헛소리하고 있다 이 거요?


장도식 : 불행한 건 이게 유언비어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실제로 카지노 대부와 고위 공무원이 돈을 주고받았습니다. 그걸 증명하는 장부도 실제하구요.


사내1 : 그래서요? 이 유인물 잘 썼다고 상이라도 주잔 얘기요?


장도식 : 한 가지 다행한 건 장부에 나오는 이름은 한 사람뿐이라는 겁니다. 장부의 모든 거래는 한 사람 이름으로 되어있습니다. 유인물에도 그 이름밖에는 없구요.


사내1 : (보다가) 강동환 실장 말이요?


장도식 : (말없이 고개 숙여 보이는)


사내들 웅성거린다.


장도식 : 무조건 덮어버리기엔 이미 너무 늦었습니다. 나라의 안정을 위해서 한 사람의 희생이 필요할 때입니다.


사내1, 말없이 장도식을 보고 있다. 좌중은 조용하다.



# 34 남산 건물 앞


(장도식의 사무실이 있는)

우석 혼자 걸어 나오고 있다.

추운 겨울날……

며칠 수염을 깍지 못한 모습으로 우석, 옷깃을 올린다.



# 35 검찰 로비. 밤.


늦은 밤. 인적이 드물다.

선영, 오 계장과 인사를 나누고 헤어져 나오고 있다.

입구 쪽으로 가다가 문득 걸음을 멈춘다.

돌아보면, 어두운 로비 구석에 앉아있는 그림자.

우석이다.

선영, 휘청하는 기분이다.

혼자 생각에 잠겨있던 우석, 고개를 든다.

그 앞에 와 서는 선영.

울듯한 얼굴로 한 손을 들어 수염이 거칠 게 자라난 우석의 턱을 조심스레 만져본다.


선영 : 당신 괜찮아요?


우석, 지친 얼굴에 미소를 지어 보인다.


선영 : 어떻게 …왜 여기 있어요?


우석 : 그건 내가 물어봐야 되는 말인데.


선영 : 난 그냥…… (눈물 어린 얼굴로 웃는다) 지나가다 들렀어요.


우석, 선영의 손을 끌어 옆에 앉힌다.

선영의 손을 잡아 자신의 무릎에 놓고 내려다보다가


우석 : 난 그냥… 좀 피곤해서…… 이런 얼굴로 동료들을 보고 싶진 않구… 어디 가서 한잠 자구 올까했는데, 결국 이리루 왔어요.


선영, 끄덕인다. 다 안 다는 듯.

우석, 길 게 기대앉으며 선영의 작은 어깨에 기댄다.

우석 : 한 십 분만 쉬면 될 거 같아… 오 분만…

선영 꼼짝도 안 하고 우석을 받쳐주고 있다.

잠시 후 조심스레 돌아보면 우석은 잠든 듯 눈을 감고 있다.

그렇게 오래 앉아있다.



# 36 고급 빌라 앞


대기해있는 승용차,

운전석의 조 순경, 차의 뒷문을 열어 기다린다.

안 에서 서 부장검사를 사이에 끼고 연행해 나오는 장 수사관과 백 형사. 부장을 차에 태우고 출발해가는 그림 위에 신문이 흘러간다.

크게 나와 있는 제호.

[폭력배 비호… 부장검사 구속]



# 37 검찰 입구


승용차가 도착하자 기다리던 기자들이 몰려든다.

차에서 변호사와 함께 내리는 강동환.

대기하던 장 수사관 등 기자들을 막아 입구로 데려오는데

강동환, 멈추어서더니 기자들의 카메라 앞에 의연하게 포즈를 취해준다.

태연한 척 하면서도 속으로는 끓고 있다.

기자 한 명 녹음기의 마이크를 대며


기자 : 구속을 하기 위한 소환이라고 하던데 알고 계십니까?


강동환, 그 마이크를 잡아채더니


강동환 : 이건 정치적인 음모입니다. 난 정치적인 희생양이에요 그걸 분명하게 밝힐 겁니다. 나 일개 정치검사의 잔 수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두고 보세요.



# 38 정부관청 기자실


대변인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내1?)


대변인 : 현재 정부의 모든 의지는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이루는데 집중되어있습니다. 이러한 중대 시점에 일부 공직자의 불미스런 행위가 자행되어왔다는 점에 대해서 실로 유감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아울러 공직자 단속을 제대로 하지 못한데 대해서 국민 여러분께 머리 숙여 사과드리는 바입니다.



# 39 우석 집무실


녹음기가 돌아가고 있다.

신 검사와 강동환이 마주앉아있다.

강동환은 어디까지나 권위적인 태도로 여유 있 게 앉아있다.


신 검사 : 그래서 이 장부의 내용을 전혀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겁니까? (혜린의 장부를 들어 보인다)


강동환 : 그 거 도대체 누가 만든 거요? 누군지 애썼구만.


오 계장, 받아 적으며 어이없는 얼굴.

우석,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보고 있다.


신 검사 : 그래서 지금 윤재용 씨한테 한 푼도 받은 게 없다고 말하는 거예요?


강동환 : 다시 말하지만 이건 음모야. 몇 번 말해야 알겠어요? 이건 정치적인 음모라고.


신 검사 : 음모라…… 대체 누가 무슨 음모를 꾸민다는 겁니까? 어디 그 얘기나 한번 들어봅시다.


강동환 : 이거 봐요, 나 사법고시 출신이에요. 당신들 두 사람보다 이십 년은 선배야.


우석, 강을 돌아본다.


우석 : 그래서요?


강동환 : (우석을 그제야 보고는) 당신들이 제대로 된 검사라면, 이따위 장난질에 놀아나면 안 되지.


우석, 뒷 쪽으로 천천히 걸어가는가 싶더니 느닷없이 거기 빈 의자를 발로 냅다 걷어찬다.

강동환을 비롯한 신 검사도 오 계장도 움찔 놀라 본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나뒹구는 의자……

우석, 강동환 쪽으로 오더니 상체를 굽혀 보며


우석 : 시간낭비 할 거 없이 간단하게 말씀드리죠. 우리로선 당신 잡아넣는 건, 아무 문제가 안 돼. 우리가 알고 싶은 건 당신 뒤에 누가 어디까지 관계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야. 당신 말대로 당신 희생당하고 있어. 이대로 혼자 다 뒤집어쓸 건가.

신 검사도 오 계장도 조용히 바라보고 있다.


강동환 한동안 우석을 바라보고 있더니 불쑥 웃는다.


강동환 : 어이 젊은 친구. 생각을 좀 해보겠나? 만약에 자네 말이 다 옳다고 해. 그렇다고 해서 내가 누구의 하수인이었다고 말할 거 같어? 어쨌거나 내가 믿고 의지할 곳은 거기밖에 없어. 내가 거기에 등을 돌리구나면 어디 다른 데 날 받아줄 데가 있을 거 같아?


우석 : ……


강동환 : 그리고 자넨 나 못 잡아넣어!


우석, 잠시 강을 보다가 상체를 펴고서더니


우석 : 그럼 시작해볼까요?



# 40 법정


증인석에 들어서기 전,

혜린, 정리가 내어준 선서문을 보며 선서를 하고 있다.


혜린 : 양심에 따라 숨김과 보탬이 없이 사실 그대로 말하고 만일 거짓이 있으면 위증의 벌을 받기로 맹세합니다.


방청객이며 기자들이 가득 메운 방청석.

기자들 중에는 영진의 모습도 보인다.

피고석의 강동환, 증인석으로 가 서는 혜린을 날카롭게 보고 있다.

그 옆에는 세 명의 변호사가 머리를 맞대고 뭔가 상의를 하고 있다.

검사석에는 신 검사와 우석이 나란히 앉아있다.

합의부 사 건. 세 명의 판사가 앉아있다.


판사 : 검사측 신문하세요.


우석 : (장부 복사본을 들고 일어서 혜린 쪽으로 간다) 이게 뭔지 압니까?


혜린 : 네. 제가 검찰에 전해줬던 겁니다.


우석 장부를 판사들에게 가져다준다.


(시간경과)


우석 : 지난 80년 10월 경주의 호텔에서 고 윤재용 회장과 피고 강동환과 함께 점심식사를 한 적이 있습니까?


혜린 :


우석 : 그 자리에서 윤재용 회장이 피고 강동환에게 돈을 주는 것을 직접 목격했습니까?


혜린 : 가방이 전해지는 걸 봤습니다.


우석 : 가방 안 에 뭐가 들었는지 압니까?


혜린 : 2억의 돈이 현금으로 들어있다고 들었습니다.


우석 : 어떤 용도의 돈인지 알고 있습니까?


혜린 : (잠시 생각해보는)


기자들 메모를 하느라고 바쁘다.


혜린 : 당시는 5공이 들어선지 얼마 안 된 때였기 때문에 아버진 새로 임명된 공직자들과 친분을 가질 필요가 있었어요. 강동환 씨가 그 중간 소개 역할을 맡아줬고 그에 대한 답례였을 겁니다.


변호사 : 이의 있습니다. 증인은 지금 모든 걸 추측으로 말하고 있어요. 가방 안 에 돈이 들어있었을 것이다. 답례였을 것이다. 기록에서 삭제해주길 바랍니다.

우석, 판사를 돌아본다.


판사는 표정 없는 얼굴로 듣고 있다가 끄덕인다.


판사 : 인정합니다. 삭제하세요.


방청석에서 웅성거림이 일어난다.

강동환, 미소를 짓는 듯한 얼굴로 여유 있게 앉아있다.


판사 : 증인은 확실하게 모르는 건 모른다고 답변하세요.


혜린, 판사를 보았다가 다시 우석을 본다.

우석,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얼굴이더니


우석 : 이상입니다.


자기 자리로 가서 앉아버린다.

판사 그런 우석을 보고 있다가


판사 : 반대신문하세요.


변호사 중의 한 명 일어나 혜린 쪽으로 오며 우석을 가리켜보인다.


변호사 : 증인은 저기 앉아있는 강우석 검사를 압니까?


혜린 : 네.


변호사 : 대학 때부터 친구였죠?


혜린 : ……네


변호사 : 얼마나 친한 사이였습니까?


신 검사 : 이의 있습니다. 본 사건과 관계없는 질문입니다.


우석 말없이 보고만 있다.


변호사 : 이 건 중요한 문제입니다. 증인과 검사는 오래 전부터 각별한 사이였습니다. 본 변호인은 이번 사건의 증거가 어떤 조작에 의한 것이 아니었는지 그걸 밝히고자 하는 것입니다.


검사 : 재판장님.


판사, 한손을 들어 제지하더니 혜린을 본다.


판사 : 계속하세요.


변호사 자신만만해서 혜린을 돌아본다.


변호사 : 답변해주시죠.


혜린 : ……질문의 뜻을 잘 모르겠군요. 그러니까 변호사님께서는 제가 대학 때 친구였던 한 검사를 위해서 돌아가신 제 아버지가 뇌물을 줬다고 거짓말을 한단 얘긴가요?


변호사 : (당황해서) 증인은 예 아니오로만 대답하세요. 친한 사이였죠?


혜린 : (무시하고) 바로 그 장부 때문에 요즘 저희 카지노는 세무조사를 받고 있습니다. 아마도 수백억이 넘는 세금이 추징될 겁니다. 대학 때 친구를 위해, 제가 그 돈을 거저 내놓을 거란 얘긴가요? 이미 다른 여자의 남편이 된 옛날 친구를 위해서요?


변호사, 멈칫 말을 못한다.

턱을 괴고 듣고 있던 판사, 얼핏 미소 지을 뻔한다.

입을 쓸어내리는 동작으로 미소를 감춘다.

메모를 하던 영진 웃으며 고개를 젓는다.


(시간경과)


증인석에는 윤 회장 밑의 회계사가 앉아 증언을 하고 있다.


회계사 : 제가 회계사이긴 하지만 비자금 장부는 제가 관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게 있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


(시간 경과)


증인석에는 민 변호사가 앉아있다.


민 변호사 : 장부는 회장님과 저만 관계했습니다.


검사 : 통상 어떤 식으로 돈을 전달했습니까?


민 변호사 : 직접 준 것은 몇 차례 되지 않습니다. 대개는 스위스의 은행으로 송금했습니다. 저희 카지노는 외국에서 수금을 하게 되기 때문에 외화를 송금하기가 쉬웠습니다.


신 검사 : 그런 행위가 외환관리법에 저촉된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민 변호사 : ……예


신 검사 : (재판장을 향해) 현재 민영훈 변호사는 불구속 수사 중에 있습니다. 변호사 면허는 일주일 전에 취소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민 변호사 말없이 자기 앞만 바라보고 있다.


(시간경과)


방청석 뒤의 문이 열리며 조용히 들어서는 장도식. 뒷자리를 찾아 앉는다.


판사 : 다음 증인 부르세요.


우석, 증인이 들어서는 앞문을 바라본다.

문이 열리며 교도관에 이끌려 들어오는 태수.

한복을 입고 포승을 하고 있다.

강동환, 동요가 이는 얼굴로 태수를 본다.


(시간경과)


증인석에 앉아있는 태수.

정리가 마이크를 태수의 입높이에 맞게 조정해준다.

우석, 자리에서 일어서 내수에게 다가선다.

태수, 우석을 보며 조금 미소를 띄운다.

우석도 그런 태수를 잠시 따스한 얼굴로 보다가


우석 : 증인, 이 법정에 아는 얼굴이 있습니까?


태수, 주욱 둘러보다가 강동환을 보더니


태수 : 예.


우석 : 누굽니까?


태수 : 강동환 실장이 있군요.


우석 : 언제 어떻게 알 게 되었지요?


태수 : 지난 81년 소개받았습니다. 저 사람은 날 박승철 회장에게 소개해 줬구요.

순간 변호사 벌떡 일어선다.


변호사 : 이의 있습니다.


판사 : 말씀하세요.


변호사 : 증인은 살인 폭력을 일삼던 자입니다. 현재 살인 등의 죄목으로 수감되어 있는 자이구요. 이런 자를 신성한 법정에 증인으로 세워도 되는지 다시 한 번 재고해주시기 바랍니다.


판사 잠시 생각에 잠긴 얼굴로 앞에 놓인 서류들을 뒤적인다.


우석 : 맞습니다. 증인은 살인죄를 저지른 자입니다.


판사 고개를 들어 우석을 본다.


우석 : 그러나 본 검사는 그 점에 있어서 증인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증인이 살인을 저질렀던 대상은 당시 검찰에 구속되어있어야 했던 자입니다. 검찰은 그를 방치했고 검찰을 믿지 못했던 증인이 심지어 살인을 하게 했던 겁니다.


변호사 : 지금 검사는 검사로서, 자기 비하를 하고 있는 거요?


우석 : 진실을 밝히고 있는 겁니다. 여기 증인도 이 법정에서 진실을 밝히면 살인에 또 하나의 죄가 더해지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알면서 증언을 해준다면 본 검사는 감사할 따름입니다.


태수, 피식 웃는다.

여기저기 얘기하는 사람들로 법정은 소란스러워진다.

판사는 배석판사들과 함께 머리를 모으고 뭔가 얘기를 나눈다.

태수, 무심코 방청석을 보다가 문득 멈춘다.

방청석 한곳에 앉아있는 혜린, 태수를 보고 있다.

태수, 그런 혜린을 본다.

판사. 봉을 두들겨 정숙하게 한 다음


판사 : 증인의 신뢰성 여부는 본 재판부에서 판단할 문제입니다. 검사 신문 계속하세요.


변호인들 못마땅하다는 듯 얘기를 나누고, 우석, 판사를 향해 감사의 시선을 보낸다.

판사, 못 본 척 무심한 얼굴


우석 : (태수에게) 피고가 증인을 박 회장에게 소개해줬다고 했지요? 소개한 이유가 뭡니까?


태수, 혜린을 보고 있다가


태수 :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윤재용 회장이 건방지게 군다구요. 박 회장을 도와서 윤 회장의 카지노를 접수하라고 했습니다.


우석 : 건방지게 군다는 건, 구체적으로 어떻게 했다는 얘깁니까?


태수 : 당시 윤 회장은 카지노 말고 슬롯머신을 이십여 개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그 이익금은 강 실장에게 전액 상납하기로 했구요.


우석 : 그런데 윤 회장은 자기 몫을 따로 챙겼군요?


태수 : 그랬습니다. 그리고 지리산 개발 허가권을 내주기 전까진, 스위스은행에 돈을 넣지 않겠다고 협박을 했다드군요.


강동환, 눈을 감는다.


태수 : (혜린을 보며 얘기하고 있다) 강 실장은 고분고분하게 상납을 해줄 새로운 카지노 주인이 필요했습니다. 내가 아니더라도 누군가 내세웠을 겁니다. 난 내가 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지요


혜린, 태수를 향해 보일듯말듯 미소를 짓는다.


우석 : 피고는 그렇게 상납 받은 돈을 혼자 착복한 겁니까?


변호사 : 재판장님, 주의를 환기시켜주십시오. 검사는 증인이 알 수도 없는 일을 답변하도록 강요하고 있습니다.


판사 : (물끄러미 변호사를 보더니) 변호인은 지금 본 재판장이, 제대로 판사 노릇을 못한다고 가르쳐주는 겁니까?


변호사, 말 못하고 자리에 앉는다.


우석 : (태수에게) 다시 묻겠습니다. 피고가 그렇게 상납 받은 돈을 어떻게 썼는지 알고 있습니까?


태수 : 강 실장 말로는, 나라를 위해서 쓴다고 하드군요. 자기가 먹는 건 한 푼도 없다구요.


우석 : 그런 얘기를 또 누가 들었습니까?


태수 : 장도식이라고 강 실장 밑에서 부장을 하던 사람이 있어요.


우석 신 검사에게 가서 서류를 넘겨받는다.

그 사이 뒤에 앉은 장도식, 태수 쪽을 보고 있다.


우석 : (서류를 판사에게 주며) 증인을 신청합니다. 성명은 장도식입니다.


장도식, 슬그머니 일어나 뒷문으로 빠져나간다.



# 41 법정 뒤 복도


우석, 관계 서류를 들고 걸어가다가 문득 선다.

법정 뒤 보호소로 통하는 문에서 나오는 변호사, 우석을 스쳐 지나간다.

우석, 더 걸어가다가 문득 멈춘다.

뒤를 돌아본다.

저만치 뒤에서 변호사가 만나고 있는 인물, 장도식이다.

장도식, 변호사의 얘기를 듣다가 우석과 시선이 마주치자 빙긋이 미소 지어 보인다.

우석, 언뜻 스치는 불안감.

급히 변호사가 나왔던 문으로 들어간다.



# 42 법정 뒤 보호소


우석 빠르게 다가온다.

우석, 창살 속의 강동환을 본다.

한복 차림의 강은 패기는 간데없이 초라하게 고개를 숙이고 앉아있다.


우석 : 방금 변호사 왔다갔지요?


강은 고개를 들지 않는다.


우석 : 장도식 얘기를 전하고 갔습니까?


강, 천천히 고개를 들어 우석을 본다. 체념의 빛이 드러나 있다.



# 43 법정


증인석에 앉는 장도식.

넥타이를 바로하고 자세를 잡는다.

어디까지나 순수한 얼굴.

신 검사 질문에 나선다.


검사 : 피고 강동환 밑에서 얼마나 일했습니까?


장도식 : 상관으로 모신지는 오 년하고 삼 개월쯤 됩니다.


검사 : 증인이 맡은 일은 뭐였습니까?


장도식 : (미안 하다는 듯) 국가기밀에 속하는 문제라 답변할 수 없습니다.


신 검사 : 윤재용 회장과 피고의 관계를 알고 있었습니까?


장도식 : 예.


신 검사 : 윤 회장에게 돈을 받는다는 사실도 알았습니까?


장도식 : 예.


검사 : 언제 어떻게 알았지요?


장도식 : 강 실장이 봉급에 비해서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다는 투서가 있었습니다. 그에 따라 자체적으로 내사에 들어갔었습니다. 내사 도중 알 게 되었습니다.

검사석의 우석, 강동환을 본다. 강은 고개를 숙이고 있다.


신 검사 : 얘기가 다르군요. 이제까지의 증언들에 의하면, 윤 회장과 피고가 함께 했던 자리에 증인도 늘 같이 있었다고 하든데요.


장도식 : 당연합니다. 검찰도 마찬가지겠지만 저희 기관은 상명하복 체계입니다. 명을 받으면 그대로 따르지요.


신 검사 : 윤 회장의 뇌물 공여 때도 명을 받았습니까?


장도식 : 아니요, 내사가 들어가기 전까지, 그런 내용은 전혀 몰랐습니다.


신 검사 : 증인은 신중하게 대답하세요. 위증죄에 걸릴 수도 있습니다.


장도식 : (미소를 짓는 듯) 신중하게 대답하고 있습니다.


신 검사 : 피고에 대한 내사를 자체적으로 했다고 했지요? 어떤 식으로 진행되었습니까?


장도식 : 기밀에 속하는 문제입니다.


신 검사 : 기관의 고위층이 뇌물을 받았어요. 그 대가로 불법을 도와줬구요. 그런 게 기밀사항입니까?


장도식 : 답변할 권리가 제게 없습니다.


신 검사 :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피고가 그동안 윤재용 회장에게 받아들인 스위스 은행의 돈, 지금 어디 있습니까?


장도식 : 그 건 저희 소관이 아닙니다. 검찰에서 조사 중인 걸로 알고 있는데요.


신 검사, 말을 잃고 보고 있다. 검사석의 우석 피곤한 듯 뒤로 기댄다.


(시간경과)


방청객에는 조용한 침묵이 흐르고 있다. 어떤 기자가 수첩을 넘기는 소리만 사각 들린다.


판사 : (옆의 배석판사들과 얘기를 끝내고) 피고 최후진술하세요


강동환, 꼼짝 않고 그대로 앉아있다.

우석과 신 검사, 강을 본다.


판사 : 피고


강동환 : ……


판사 : 할 말 없습니까?


강동환 : (그제야 판사를 바라보더니 마른기침을 한다) ……이번……이번 사건으로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게 되서 죄송한 마음 금할 수가 없습니다. 전……(말을 끊었다가 우석을 본다)


우석, 마지막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본다.


강동환 : 지난 이십 여년 국가발전에 공헌하기 위해 모든 걸 바쳐 일해 왔습니다. 나름대로는 최선이라고 생각한 일들을 해왔습니다. 결국 이렇게 되었지만…(문득 상체를 펴고 꼿꼿이 앉아 내부의 떨림을 끝까지 자제해가며) 이것이 나라를 위하는 길이라면 이 모든 것의 책임을 질 각오가 되어있습니다. 역사가 나의 충심을 알아줄 것입니다.


우석, 미동 없이 그렇게 말하는 강을 보고 있다.

더 이상은 뛰어넘을 수 없는 벽.



# 44 법원 밖


뛰어나오는 기자들……

공중전화에서 전화를 하는 기자…

그 위로 신문 제목들이 흘러간다.

[강동환 전 실장 징역 4년 선고]

[더 이상 확대수사 없어]

[비리공직자의 말로]



# 45 신문사 사무실


영진, 보던 신문을 내려놓는다.

일면 톱으로 나와 있는 제목

[검찰의 축소수사인가 -----스위스 은행돈의 행방은?]

그 밑에는 교도관들에 둘러싸인 한복 차림의 강동환 사진과 기사가 실려 있다.

지나가던 동료 기자가 영진의 어깨를 툭 치며


기자 : 뭐하구 있어? 아직 강동환 붙잡구 있어? 그 거 끝났잖아.


영진 : (그저 멍하니…)


기자 : 삼인조 강도 잡힌 거 법원으루 송치된다던데 안 가봐?


영진 무의식적으로 수첩 등을 가방에 챙겨 넣는다.

일어서다가 문득 신문을 들어 옆의 쓰레기통에 쳐넣는다.



# 46 혜린 사무실 건물



# 47 혜린 사무실.


민 변호사 혜린 앞으로 서류화일 세 개를 밀어놓는다. 혜린, 화일을 볼 생각은 않고 민 변호사를 본다.


민 변호사 : 나를 대신할만한 변호사들이야. 세 명에 대한 이력서니까 이중에서 골라봐. 경력도 성품도 괜찮은 친구들이야


혜린 : 꼭 그만두셔야 되겠어요?


민 변호사 : 벌금형으루 끝나 게 해줘서 고마와. 내가 빚졌어. 이젠 변호사두 아니니까 뭘루 갚아야 될지…


혜린 : (감정을 잡기가 어렵다)


민 변호사 : 이제 그만 쉬고 싶어 애들도 다 컸고. 마누라하고 여행도 좀 다니고 싶고.


혜린 : 그렇게 말씀하시면 더 잡을 수가 없잖아요.


민 변호사 : …… 곧 박태수 공판이 있지?


혜린 : (끄덕인다)


민 변호사 : 솔직히 말해서 나 그 거까지 보고 싶질 않아.


혜린 : ……네


민 변호사 : 괜찮겠어?


혜린 : (쓸쓸이 웃더니 ) 어제 그 사람 면회 갔었어요.


민 변호사 : 뭐래?


혜린 : 못 만났어요. 안 만나겠다구 그랬대요……그 거 아세요? 아저씨까지 떠나면…… 나 …아무도 없어요.


민 변호사 말을 못하고 혜린을 본다.

혜린은 딴 데를 보고 있다.



# 48 법정.


비어있다. 우석, 한 쪽에 우두커니 서있다가 문득 피고석으로 간다. 거기 앉아본다. 그 자리에서 보이는 검사석…아무도 없는 법정에 우석 혼자 피고석에 앉아있다.



# 49 검사장실


검사장, 한판 가득이 늘어져있는 바둑을 흰 돌 검은 돌 나누어 거둬들이고 있다.

그 앞에 앉은 우석. 기다린다. 이윽고 검사장 입을 연다.


검사장 : 딴 검사로 바꿔 달라?


우석 : 예.


검사장 : 이제까지 사 건을 맡아온 검사가 구형을 앞두고 딴 검사로 바꿔 달라.


우석 : 죄송합니다.


검사장 : 구속하고 조사하고 공소장을 만들 때까진 상관없었는데 막상 구형을 내리려고 드니까 상대가 친구라는 게 마음에 걸린다.


우석 : ……예.


검사장 : 난 그런 거 허락 못해요.


우석 : 검사장님.


검사장 : 정 구형 내리고 싶지 않 거든 검사 옷을 벗어요.


우석 : 예?


검사장 : 난 이제까지 댁이 검사인 줄 알았어요. 그래서 피의자가 옛날에 친구였든지 말든지 수사를 맡겼어요. 그런데 이제 보니 검사가 아니구만요.


우석 : ……


검사장 : 검사 아닌 사람이 검사 자리에 있으면 안 되지. 사직서 갖구 와요. 그리고 박태수 사건은 새 검사가 처음부터 다시 수사할 겁니다. 가짜검사가 수사한 건 믿을 수가 없어요.


검사장, 냉정한 얼굴로 바둑알 통 뚜껑을 덮고 챙긴다. 우석, 그런 검사장을 말없이 보고 있다.



# 50 검찰 보호실


일회용 컵 두 잔에 소주가 따라진다. 마주 앉은 우석과 태수. 우석이 가져온 소주를 마시는 중이다. 두 사람 각자의 컵을 들어 건배를 하고 마신다.


태수 : 좋은데. 근데, 이 거 규칙에 어긋나는 거, 아니냐?


우석 : (웃기만)


태수 : (또 한잔을 따른다)


우석 : 혜린이가 너 만나고 싶어하든데.


태수 : ……그 친구 참 소주 맛나게 마시지. 기억 나냐? 너 대학 다닐 때 그 자취방 말이야.


우석 : 그 때 혜린이 그 녀석 술 엄청 마셔댔지.


태수 : 우리 어머니두 술을 좋아하셨어.


우석 : (그렇게 말하는 태수를 본다)


태수 : 그래. 처음 혜린이 봤을 때, 어머니 생각했어. 비슷한 데가 있어. 둘이 만났으면 참 잘 통했을 거야. (웃는다)


(시간경과)


소주병은 비어있다. 둘은 나란히 앉아있다. 소주 한 병으론 술이 취하지 않는 밤.

우석 : 아마 검사가 바뀔 거 같다.


태수 : (돌아본다)


우석 : 재판 도중에 이런 일은 별로 없지만, 그렇게 될 거야. 어쩌면 너 다시 조사받아야할지 몰라 성가시더라도 협조해줘.


태수, 그런 우석을 보다가 웃는다. 대충 짐작이 간다.


태수 : 우석아.


우석 : 어.


태수 : 니가 해줘.


우석 : ……싫어.


태수 : 너 힘든 거 알어. 아는데 ……니가 해.


우석 : (고집스레 앞만 보고 있다)


태수 : 난 널 알어. 너 같은 놈이 구형을 주면 나 납득할 수 있어. 너 말구 다른 놈은 못 믿어. 너 말구 다른 놈이 나서서 내 죄가 어쩌구 그래봐. 나 속으루 그럴 거야, 웃기지 말구 너나 잘해라.


우석 : ……나 광주에서 너 봤어.


태수 : ?


우석 : (자기 앞을 본 채로 덤덤하게) 그 때 나 계엄군이었다. 몽둥이루 사람들 패구 총 들구 쏴댔어. 그 때 넌 시민군이었구. 광주에서 죽었다는 니 후배 우리가 쏜 총에 맞았어. ……너 이제까지 나한테 속아왔어.


태수, 잠시는 놀라움에 우석을 보다가 문득 웃기 시작한다.

웃음이 잦아들고 침묵이 흐르다가


태수 : 그 다음이 문제야. 그러구 난 다음에 어떻게 사는지… 하나는 너처럼 살구, 하나는 나처럼 산 거야.


우석 : ……


태수 : 어이. 너 대단해. 진심이야.


우석, 그대로 앞을 보고 있다가 목이 메어오며 문득 한 팔을 들어 이마를 가린다. 태수의 한마디가 내내 쑤시던 상처를 단숨에 어루만져놓았다.


태수 : 우석아.


우석 : ……


태수 : 니가 해줘. 다른 놈은 싫다. ……미안 하다.


우석, 그 자세 그대로……



# 51 서재


혜린 밤에 혼자 깨어있다.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가 문득 책상 위에 놓인 모래시계를 만지작 거린다. 뒤집혀진 모래시계에서 모래가 떨어져 내리기 시작한다.



# 52 법정


강동환 때와는 달리 썰렁한 방청석.

몇 명의 기자들의 모습도 더러 보인다.

문이 열리며 혜린이 들어선다. 혜린, 자리를 잡아 앉는다.

혜린이 보는 시선으로 앞 쪽으로 우석이 들어와 검사석에 앉는다. 우석은 우울한 얼굴로 서류들을 정리해놓고 있다. 문득 우석, 얼굴을 든다.

교도관들과 함께 태수가 들어서고 있다.

하얀 한복을 입고 포승을 하고 있다. 혜린, 태수의 시선을 잡아볼까 해서 애타 게 보지만, 태수는 아무데도 보지 않고 피고석에 앉는다.


정리 : 일어나십시오.


모두 일어선다. 세 명의 판사가 입장한다. 판사들 앉고.


정리 : 착석.


모두 앉는다.



# 53 법정 밖


영진, 혼자 계단 쪽에 걸터앉아있다.

남자 기자 한 명, 부지런히 뛰어오다가 영진을 보고.


기자 : 아직 시작 안 했어?


영진 : 했을걸요.


기자 : 뭐하구 있어.


영진 : 담배 한 대 줄래요?


기자 : 피지두 않는 담밴 아깝게…


투덜대며 담배 한 대를 빼준다.


기자 : 안 가?


영진 : 가요.


기자, 먼저 뛰어간다.

남은 영진 담배를 입에 물고 그저 멍청이 앉아있다.

겨울 하늘……

그 위에 논고문을 읽는 우석의 목소리.


우석 소리 : 세상엔 상식이란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모두가 알고 있는 기준이 상식입니다.



# 54 법정


우석이 논고를 하고 있다.


우석 : 물론 상식대로 사는 게 점점 어려워지고 있는 세상이며 시대라는 점을 인정합니다.


태수, 자기 앞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다.


우석 : 사람들은 상식을 무시하고 상식대로 살기 위해선, 때로 고통과 용기가 필요하기도 합니다. 피고인은 지난 30년간 살아오면서 여러 번 선택의 기로에 섰었습니다. 그때마다 피고인은 좀 더 쉬운 길을 택했습니다.


방청석에는 검사장도 뒷자리에 앉아 우석을 보고 있다. 그리고 뒷자리 어디쯤엔가 장도식도 온화한 얼굴로 앉아 듣고 있다. 장도식의 옆 몇 자리 건너엔 눈에 띄게 배가 부른 선영이 앉아있다.


우석 : (계속) 자신의 힘을 사용하고 힘 있는 자에게 붙어 지름길을 택하려 했습니다. 그 것은 상식대로 살고자 애쓰는 대다수 서민들의 희망을 꺽은 것이고, 그 것이 피고인의 첫 번째 죄입니다.


우석, 잠시 말을 멈춘다. 이마에 송글송글 배어나와 있는 땀. 모두 주시하고 있는 가운데 우석, 손수 건을 꺼내 이마의 땀을 닦는다. 선영은 손수 건으로 입을 막고 울음을 참고 있다.


우석 : 본 검사가 피고인을 인지수사하고, 공판까지 하면서, 줄곧 느껴온 것은 피고인은 과 거의 잘못을 충분히 반성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혜린, 희망을 가지고 우석을 본다.


우석 : 그러나 (멍하니 허공을 향한 채 외우는) ……우리는 반성하는 사람은 용서할 수 있어도, 그 죄는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의 상식을 지키기 위해섭니다. (용기를 내어 논고장을 들어 읽는) 본 검사는 피고인의 이러한 제 정상을 감안하여, 범죄단체 조직 및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 살인, 및 특수도주죄를 적용


우석, 태수를 본다. 태수, 천천히 우석을 돌아본다. 우석, 말을 못하고 있다. 태수, 얼핏 미소가 스친다.


우석 : 사형을 구형합니다.


혜린, 비명이 나오려는 것을 손으로 막는다. 검사장, 우석을 보고 있다. 우석의 손에서 떨어진 논고장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린다.


(시간경과)


다른 날 선고공판.


판사 : 박태수 일어서요.


태수 일어선다. 구형 때와는 색깔이 다른 한복 차림.


판사 : 1957년 5월 17일생 맞습니까?


태수 : 예.


판사 판결문을 낭독하는 모습이 아스라하게 보인다.

태수, 천천히 주위를 둘러본다.

태수의 시선에 비치는 모습들…

검사석의 우석, 뚫어져라 판사를 보고 있다가 절망적으로 태수 쪽을 돌아본다.

방청석의 사람들 더러 태수를 돌아보기도 하고… 그 중에 혜린의 모습이 있다.

혜린,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두 손을 가슴에 모아잡고 태수를 보고 있다. 그 모습을 기억에 담아둔다. 판사가 태수를 올려다본다. 문득 들려오는 소리.


판사 : ……피고인을 사형에 처합니다. 주문과 같이 판결합니다.


봉을 땅땅 두들긴다. 태수, 마지막 의지로 굳건히 서있다.



# 55 법정 밖.


장도식, 걸어 나오고 있다. 우두커니 앉아있는 영진의 앞을 지나쳐간다. 영진은 지나가는 자가 누군지 상관없이 혼자의 허무함에 빠져 있다. 장도식은 대기해있던 차의 뒷자리에 올라타고 차는 출발해간다.



# 56 거리.


추운 날씨에 총총히 걸어가는 사람들…

보도블럭 위에는 선 거 전단들이 휴지처럼 날리고 있다. (대통령 선 거를 위한 전단들…)

그 위에 자막 혹은 자막 날짜와 신문의 제호로.

자막 : 1987년 10월 31일. 재야인사 123명 야당의 대통령 후보 단일화 촉구.

미화원 한 명이 낙엽을 쓸듯 전단들을 쓸어 담고 있다.

자막 : 1987년 11월 12일. 평화민주당 창당. 총재, 대통령 후보에 김대중.

전파상 앞에 초라한 모습의 시민 둘이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

자막 : 1987년 12월 16일. 제13대 대통령 선 거 실시. 노태우 당선.

그들이 보고 있는 텔레비전에서는 구로구청 부정선 거 항의 농성 모습이 뉴스로 방송되고 있다.

자막 : 전국 11개 도시에서 부정선 거 규탄 시위.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시민 두 명 무심한 얼굴로 자리를 떠나 각기 갈 길로 간다.

미화원이 청소수레에 쓸어 모은 전단을 담고 있다. 쓰레받기를 탕탕 턴다.



# 57 감방.


문이 덜컹 열린다. 태수, 고개 들어 본다. 거기 서있는 교도관들. 세 명.



# 58 사형장 가는 길.


오전 열 시경.

수갑을 차고 교도관들 사이에 끼어 걷던 태수 문득 걸음을 멈춘다.

양갈래 길 한 쪽에서 기다리던 교무계장과 담당이 다가온다.

태수의 양 쪽에 바싹 붙어 선다.

태수, 순간 휘청이는 무릎을 세우고 뒤를 돌아본다.

세 명의 연출조(교도관) 사이로 그가 기거하던 감방 건물이 보인다.

태수, 천천히 걸음을 옮겨놓기 시작한다.



# 59 사형장 내부.


들어서는 태수의 눈에 남 쪽 벽을 가리고 있는 흰색 천이 보인다.

흰색 계통의 내벽. 천정에는 낮임에도 불구하고 백열등이 빛나고 있다.

태수 반대 쪽을 본다.

이십여 명이 서있는데 침묵 그 자 체……

그 사이에서 태수, 우석을 발견한다.

마룻바닥의 앞 쪽에는 높이 60세티미터 쯤의 강단이 있다.

강단과 마루 사이엔 경계목이 박혀 있다.

강단의 가운데에는 탁자가 놓여있고, 그 뒤에 세 사람이 앉는다.

가운데가 구치소장, 그 오른 쪽이 검사의 자리이다.

탁자 위에는 검은 보자기가 덮혀 있고, 그 위에는 두툼한 서류뭉치가 놓여있다.

구치소장이 앉은 자리 왼편에 작은 탁자를 두고 명적과 직원이 앉는다.

유언을 적기 위해서다. 그 뒤 의자에 목사와 신부 스님이 앉아있다.

강단 바로 밑 구치소장의 눈 아래 마룻바닥에 돗자리가 깔려있다.

사형수는 그 돗자리 위에 편하게 앉혀진다.

그의 양 쪽엔 교무계장과 담당이 서고 뒷 편엔 세 명의 연출조가 선다.

양 쪽 측문에 3명씩 모두 6명의 보안 과 직원이 서서 계호한다.

돗자리에 앉혀지는 태수.


구치소장 : 몇 번이죠?


태수 : (잠시 목소리를 내지 못하다가) 1925번


소장 : 성명은?


태수 : 박태수


소장 : 생년월일을 말씀해보세요.


태수 : 1957년 5월 17일.


소장 : 1925번 박태수는 1986년 3월 2일 1심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맞죠?


태수 : …예


우석, 결국 고개를 돌려버린다.


소장 : 항소를 포기했지요?


태수 : 예.


소장 : 그래서 사형이 확정되었습니다. 법무부 장관의 명령에 따라 지금 이 자리에서 사형을 집행하겠습니다. 유언이 있으면 하시죠.


태수, 우석을 본다. 우석은 고개를 돌리고 있다.


태수 : 우석아.


우석, 괴로움으로 태수를 본다.

태수, 고갯짓으로 가까이 오라고.

우석, 자리에서 일어난다.

보안 과 직원 한 명 놀라 다가오려는 것, 소장이 손을 들어 막는다.

우석, 태수에게 다가가 한무릎을 꿇어 가까이,


태수 : (우석의 귀에 대고 낮 게) 미안 하다. 여기까지 오게 해서…


태수의 목소리는 어쩔 수 없이 갈라져있다.


우석 : (목이 메며) 금방 …끝날 거야.


태수 : 나 떨고 있냐?


우석 : …아니.


태수 : 그게 겁나… 내가 겁낼까봐…


우석 : (눈물을 삼키며) 너 괜찮아.


태수 : 그래.


태수, 더 말이 없다.

우석, 일어선다.


소장 : 유언 없습니까?


태수, 창 밖의 빛을 찾아보는가싶더니 눈을 감는다. 기다리는 자세.

우석, 휘청이듯 강단으로 올라와 돌아보지 않은 채 벽을 향해 섰다.

태수의 뒤에 있던 자가 태수에게 용수를 씌운다.

문득 태수, 눈을 뜬다. 어쩔 수 없는 공포 속에서 태수, 마지막 세상의 한 점을 본다.

커튼 뒤의 직원, 포인트를 젖힌다.

어두움…



# 60 지리산.


옛날 태수와 우석이 태수 모친의 재를 뿌렸던 자리. 계곡과 능선…

검은 상복을 입은 혜린, 유골단지를 감싸 안 은 채 하염없이 앉아있다.

그 옆에 우석. 그렇게 나란히 앉아 계곡을 보며,


우석 (소리) : 이제 그만 보내줘.


혜린 (소리) : 어디루.


우석 (소리) : 어디든 여기 아닌데루.


혜린, 재를 한줌씩 뿌리기 시작한다.


혜린 (소리) : 이 사람 이렇게 보내는 걸루, 뭐가 해결됐어?


우석 (소리) : …아직은… 아무 것두


혜린 (소리) : 그런데 꼭 보내야했어?


우석 (소리) : 아직이라고 말했잖아. 아직은 몰라…


바람에 날리는 재…


우석 (소리) : 그럼 언제쯤이냐고 친구는 묻는다. 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대답한다. 어쩌면 끝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상관없다고. …… 먼저 간 친구는 말했다. 그 다음이 문제야. 그러구 난 다음에 어떻게 사는지… 그걸 잊지 말라고.

한 사람을 보내고 남은 두 사람이 그렇게 서있다.


-끝-


'소설방 > 모래시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23회> 모래시계   (0) 2018.11.07
<제22회> 모래시계   (0) 2018.11.07
<제21회> 모래시계   (0) 2018.11.07
<제20회> 모래시계   (0) 2018.11.07
<제19회> 모래시계   (0) 2018.1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