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모래시계

<제12회> 모래시계

오늘의 쉼터 2018. 11. 7. 18:35

<제12회> 모래시계  



# 1 카지노 회장실


새 단장이 한창이다.

종도 선두 지휘를 하고 있다.

커다란 책상 위에 화려한 명패가 놓인다.

[회장 윤재용]



# 2 종도의 카지노 내부


여전히 손님들로 득실대는 카지노 종업원 몇이 달려간다.

멈추어서 정중하게 절을 한다.

윤 회장이 민 변호사, 장근섭, 재희 등을 대동하고 들어서고 있다.

윤 회장, 잠시 걸음을 멈추어 내부의 상황을 둘러본다.

안 에서 종도 수하들을 거느리고 달려 나온다.

종도로서는 각하를 모시는 일인 셈이다.

앞으로도 나서지 못하고 비스듬히 떨어진 옆에서 허리를 굽힌다.

윤 회장 종도 쪽은 상관없이 안쪽으로 향한다.



# 3 회장실


윤 회장 자리에 앉는다. 종도가 애쓴 인테리어에는 일별도 안 한다.

종도, 한 뭉치의 서류며 장부를 들고 나서려는데 민 변호사가 받아 윤 회장에게 갖다 준다.

민 변호사, 옆에서 서류를 펼쳐, 볼 부분을 찾아주고 윤 회장, 안경을 낀다.

문 양족에는 재희와 장근섭이 서 있고, 종도 자신이 나설 기회를 엿보며 불안 하게 서 있다.

서류를 보던 윤 회장 힐끗 종도를 본다.


종도 : (재빨리) 이종도라고 합니다. 모시게 돼서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윤 회장, 민 변호사를 본다.


민 변호사 : 말씀드렸던 그 자입니다.


윤 회장 : 그래 이번에 수고했어. (다시 서류를 보는데)


종도 : 분부만 내려주십시요 저와 제 밑에 애들은 모두 회장님을 위해서 목숨 바칠 각오가 돼있습니다.


윤 회장 : 고맙군. (민 변호사에게) 얼마나 되어가고 있나?


민 변호사 : 서울 지역 열두개 슬롯머신 업소들하고 얘기를 끝냈습니다.


종도 : (얼른 끼어들어) 워낙에 도와주시는 분들이 많아서 얘기가 빨리 끝났습니다.

오성관광호텔만 하더라도….


윤 회장 : (민 변호사에게) 지방은 어떻게 됐어?


민 변호사 : 현재 추진 중입니다. 임대권을 살 수 없는 데는 지분을 살 예정입니다.


윤 회장 : 제일 큰 데가 어디야?


민 변호사 : 역시 오성입니다.


윤 회장 : 거기서 우리가 사들인 지분이 얼마나 되나?


종도 : 삼십오 프롭니다. 나머지는 공로주라고 해서 공무원들에게 나눠준 것도 있고 또…


윤 회장 : (여전히 민 변호사를 향해) 박승철 이름으로 십오 프로를 줘. 장부상에는

우리가 15프로만 산 걸로 해. 나머지 이십 프로는 다른 이름으로 매입해. 무슨 얘긴지 알지…


민 변호사 : 알겠습니다. 나머지도 그런 식으로 처리하겠습니다.


종도 무슨 얘긴가 듣고 있는데


윤 회장 : (종도를 향해) 일솜씨가 아주 좋구만…


종도 : (얼른 고개 숙여) 명하신 대로만 했을 뿐입니다.


윤 회장 : 여기 봉급이 변변치 않지?


종도 : 어이구 저야 돈 같은 거 바라고 하는 일이 아닙니다.


윤 회장 : 빠찡고 몇 개 지분을 이 부장 이름으로 해놓을 생각이야.

대신 다른 업소들도 이 부장이 돌봐줘야겠어. 할 수 있겠나.


종도 : 물론입니다. 감사합니다.


윤 회장 : 제일로 중요한 건 조용히 하는 거야 말썽 안 나게 애들 단속 잘하고…


종도 : 염려 놓으십시오. 은혜에 꼭 보답을 하겠습니다.


윤 회장 그런 종도를 잠깐 찌푸려 보고는 다시 서류를 본다.



# 4 회장실 앞 복도


종도, 뒤따라 나온 재희를 돌아본다.


재희 : 박태수라는 친구 소식을 들었습니까?


종도 : (잠깐 망설인다. 어떤 뜻인지 파악하려고) 삼청교육을 받았다는 데요


재희 : 그건 알고 있습니다.


종도 : 그리고는 근로봉사대로 갔다고 하든데…


재희 : 어디로 배치되었는지 아십니까?


종도 : 글쎄 그 것까지는…아실 필요가 있으시다면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알아봐야지요.


재희 : 그래주시겠습니까?


종도 : 저기 회장님께서 알아보라고 하시든가요


재희 : (대답없이 누르듯 잠시 보더니 )되도록 빨리 대답을 듣고 싶군요.


종도 : 그러죠. 그야 그래야죠…


재희 얘기 다 끝났다는 듯 다시 문을 열고 들어가 버린다.

종도 어정쩡하니 서 있다.

일단 상대가 어떤 신분인지 알 수가 없는 상황이다.



# 5 노역장


근로봉사대원들의 작업이 진행 중이다.

산을 깎아 헬기 착륙장을 만드는 작업이다.

다섯 사람이 한조. 각 조마다 총을 들고 수류탄을 찬 경계병들이 감시하고 있다.

이곳저곳에 기합을 받고 있는 대원들이 보인다.

그 중에 태수와 정인재가 곡괭이질을 하고 있다.

이미 봉사대 나날이 여러 날 경과되고 있다.

초췌하고 감정이 배제되어버린 얼굴…

말없이 작업만 계속하고 있다.

통제병의 호루라기 소리가 들린다.

여기저기서 연장을 내던지고 땅에 드러눕는다.

짧은 휴식시간이다.

태수와 정인재도 주저앉는다.

태수, 손바닥을 펴본다.

헤어지고 상처가 나 있다.

태수 슬그머니 주변을 둘러본다.

멀리 M16을 든 경계병들의 모습… 지형지물….


정인재 (소리) : 쉽지 않을 거야


태수 : (움찔하여 돌아본다)


정인재 : (계속 한곳을 보며) 상대는 총을 갖고 있어.

그런데 어쩌면 그래서 가능할지도 몰라… 총을 가졌기 때문에 안심을 하고 있을 테니까.


태수, 정인재가 보고 있는 쪽을 본다.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돌을 나르고 있는 일단의 무리.

그 중에 노주명의 구부정한 모습이 보인다.


정인재 (소리) : 부탁이네


태수, 자신의 팔뚝에 얹혀진 정인재의 손을 본다.


정인재 : 나가려 거든 형님을 모시고 나가줘.


태수 : (보다가 웃고 만다)어째서 그렇게 생각했습니까? 내가 도망칠 거라구.

 

정인재 : 박태수니까. 내가 사람을 잘못 봤나?


태수 대답할 수 없다.

저만치 보이는 노주명, 비틀 거리며 무릎을 꿇었다가 다시 일어나고 있다.



# 6 근로대부대 앞


교육장에 비해 더욱 산골.

고급 승용차 한 대가 서있고 그 옆에는 재희가 기대서서 보고 있는 곳.

혜린이 보초들에게 막혀 있다.

무언가 열심히 간청을 하고 있지만 보초들 쪽에서는 끄떡도 없다.

혜린의 앞에서 말을 듣고 있던 보초 한 명 완강하게 고개를 젓는다.

혜린, 결국 단념하고 돌아 나온다.

차에 들어가더니 문을 쾅 닫아버린다.

재희, 운전석에 탄다.



# 7 부대 근처 산길


차가 오고 있다.



# 8 차 내부


밖을 살피고 있던 혜린


혜린 : 세워 차 세워


재희 차를 세운다.



# 9 산길


차에서 나온 혜린, 길도 없는 언덕을 오르기 시작한다.

부대의 경계 표시인 철조망을 따르고 있다.

재희 급히 따른다.



# 10 철조망 옆


재희가 잡는 팔을 뿌리치고 철조망을 따라 오르는 혜린. 철조망 안을 보려고 발돋움을 해보기도 한다.


재희 : (앞을 막아서버린다) 여긴 갈 수 없습니다. 금지 구역이에요.


혜린 : 비켜 얼굴이라도 보고 갈 거야 할말이 있어. 꼭 해야 될 말이 있다구.


재희 : 소용없습니다.


혜린 : (재희를 밀치고 가려고)


재희 : (혜린의 팔을 잡아 끌어 당긴다. 다른 손으로 어깨를 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이런 식으로는 만날 수 도 없고 말도 할 수 없어요. 모르겠어요?


혜린, 동의할 수 없다.

뭔가 말하려는데 재희 다급하게 혜린을 끌어당겨 나무 뒤로 숨는다.

저만치 철조망 안으로 총을 든 경계병이 지나쳐가고 있다.



# 11 산 길가


길가에 혜린이 우두커니 앉아 있다.

손가락에 낀 반지를 돌리고 있다.

저만치 뒤에 세워져있는 승용차.

운전석의 재희, 핸들에 기대어 혜린 쪽을 보고 있다.

멀리 허공을 보고 있는 뒷모습. 천천히 고개가 숙여지더니 무릎에 파묻는다.

울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보고 있는 재희.

혜린, 무릎을 감싸 안은 채 점점 더 웅크려들고 있다.



# 12 윤 회장 집 전경 (밤)



# 13 홈 바


꼬냑을 따르고 있는 윤 회장

저편에 앉아있는 혜린.

쥬스잔을 앞에 놓고 있다.


윤 회장 : 영재는 내달에 파리로 가겠다는구나.

지 뜻이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너는 어떠냐, 돈을 갚으려면 일을 시작해야지.


혜린 : (결심하여) 내일부터 시작하겠어요.


윤 회장 : 그래? 좋지.


혜린 : 맨 밑에 일부터 하고 싶어요.


윤 회장 : 맨 밑에 일이라…


혜린 : 카지노에 청소일도 좋고 술 나르는 일도 좋아요.

그렇게 시작해야 제대로 배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윤 회장 : (태도가 변한 혜린의 저의가 뭔지 살피는 시선)


혜린 : 오빠가 그림을 그리겠다면 저라도 아버지 옆에 있어야할 거예요 그렇게 하겠어요.


윤 회장 : 그래 그 게 내가 바라는 일이지 그런데?


혜린 : ….


윤 회장 : 이유가 뭐냐?


혜린 : (침착하려고 하지만 잘 안 된다 사실은 분노를 누르고 있다.)


윤 회장 : 그 대신이 있을 거 아니냐?


혜린 : …태수 씨를 빼내주세요. 태수 씨를 그렇게 한 거 아버지가 시킨 거지요?


윤 회장 : 니가 그렇게 믿고 있다면 아니라구 해봐야 소용없겠구나.


혜린 : 빼내주세요. 다신 만나지 않겠어요. 약속드리겠어요. 저 약속하면 지켜요.


윤 회장 : (술잔을 돌려 마신다)


혜린 : 대답해주세요.


윤 회장 : …그러지.


혜린 : 아버지가 시킨 일이죠


윤 회장 : 그래 내가 시켰다.


혜린, 눈을 감는다. 잠시 후


혜린 : (목이 잠겨서) 아버질 절대 용서할 수 없을 거예요.


윤 회장 : (허허 웃는) 아직 어리구나. 용서도 힘이 있어야 할 수 있는 거야

힘도 없으면서 용서를 하구말구해? 말루만? 이제부터 넌 힘이 뭔지부터 배워야할 거다


혜린 싸느란 압력을 느끼며 아버지를 본다.

윤 회장, 술을 마신다.

혜린, 눈가에 맺힌 눈물을 선뜻 닦아내고 일어선다.

아버지만큼 냉정해져 있다.


혜린 : 태수 씨가 나오면 나온 걸 보구 일을 시작하겠어요.


윤 회장, 그런 혜린을 보고 미소 짓는다. 만만치 않은 혜린이 마음에 든다.


윤 회장 : 그렇지. 거래는 그렇게 하는 거야.


혜린도 미소 짓는데 눈은 웃고 있지 못하다.



# 14 군부대 근처 시냇가


근로대원들 주루루 앉아 빨래를 하고 있다.

이만치에 앉아 빨래를 하고 있는 태수와 정인재와 노주명.

정인재는 노주명의 빨래를 대신하고 있다.

노주명은 태수와 정의 사이에 앉아서 늙은이처럼 옛이야기를 하고 있다.


노주명 : 장비나 관우를 봐. 힘으루 치자면 그들을 당할자가 별루 없지.

그런데 걔네들은 제갈공명 밑에서 놀았다구.

아무리 힘이 좋아도 머리 좋은 놈은 못 당하게 되있어.

근데 공명이 왕을 했느냐 아니야 공명은 유비 밑에서 놀았지.


정인재, 노주명의 말을 듣지 않고 있다. 주위를 살피며 긴장이 되어서


정인재 : 이번 추석때루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경계가 허술할 겁니다.


노주명 : (상관없이) 유비가 가진 게 뭐가 있나.

머리루 치면 멍청이구 힘으루 치면 굼벵이지. 근데 딱 하나

보스의 자격을 갖고 있었던 거야. 뭐냐 덕이야 덕!


정인재 : 형님


노주명 : 덕치가 제일루 무섭다 이거야.


정인재 : 태수가 형님을 모실 겁니다. 전…


노주명 : (태수에게) 군사정치란 거 대단해보이지.

천년만년 갈 거 같지. 아니야 얼마 못가 두고 봐.


정인재 : 나가는 걸 원치 않으십니까? 여기 계속 계실 겁니까?


노주명 : (얼굴을 찌푸린다)


지나쳐가는 경계병. 모두 입 다물고 빨래를 한다.

경계병이 지나가고 난 뒤.


노주명 : 나는 예전 같지 않아. 자네들 짐만 될 거야.


태수 : 됐습니다. 없던 일로 하지요. 어차피 살아나갈 가능성은 별로 없습니다.


정인재 : 그래서 제가 말했습니다. 어쩌면 형님은 그 쪽을 원하실 거라구요.

이런 식으로 더 이상…


노주명 : 더 이상 추해지기 전에 차라리 그 쪽을 원할 거다.


정인재 : 예.


노주명 : 맞아 그게 내가 원하는 거야.


잠시 침묵이 흐른다.


노주명 : 인재는 나와 한 형제라 치구. 태수 자네한테 미안해서 어쩐다.


태수 : 어차피 저 혼자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노주명 : 빚을 갚을 수가 없을 거야


셋 다 조용하다.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고 빨래를 하던 감호생들 얼른 얼른 일어서고 있다.



# 14-1 금성호텔 앞


승용차 와서 대기한다.

종도와 태호, 또 다른 수하, 나온다.

운전사 얼른 뒷문을 열고 기다린다.

종도 차에 타려다가 멈춘다.

그가 보는 곳, 저만치 세워져 있는 차에 기대 서있는 장도식, 종도를 보고 빙긋이 웃고 있다.



# 14-2 룸살롱 로비


바에 앉은 장도식과 종도

양주 한잔씩 들고


장도식 : 이 부장…부장님 맞지?


종도 : 아아 그 참 부끄럽게 그러십니까?


장도식 : 요즘 윤 회장님이 총애를 하신다고…


종도 : 능력껏 하구 있습니다.


(갑자기 찾아온 장도식을 어느정도 경계하는 마음이 있다)


장도식 : (껄껄 웃어) 이 거 오랜만에 옛 친구를 만났는데 분위기가 서먹서먹하구만.


종도 : 제가 일찍 인사를 드리러 가야했는데 죄송합니다.


장도식 : 이거 봐 이거 봐 이 무슨 장사하러 만난 사람들 같잖아.


종도 : 아 예 그랬습니까? (좀 웃어보는)


장도식 : 이제 이 부장 뒷골목에서 나왔잖어.

 환한 데루 나왔으면 높은 데를 쳐다봐야지. 윤 회장 일하는 스타일을 내가 아는데,

자기 밑에 사람들은 좀 꽉꽉 가둬두는 편이야. 자기보다 앞서는 사람은 참질 못하지.


마담 다가와서 장도식에게 귓속말을 한다.

장도식 끄덕이고 일어선다.


장도식 : 가볼까


종도 : (아직 장도식의 말뜻을 생각해보며 어정쩡하니 일어서는)


장도식 : 이제까진 돈만 최곤 줄 알았지. 돈만 있다구 되는 게 아녜요

인맥. 알아? 돈 맥을 받쳐줄 인맥. 유쾌하게 웃으며 종도의 등을 밀어 간다.



# 14-3 룸 내부


대여섯 명의 고급 신사들 앉아서 술을 마시며 담소를 하고 있는 자리.

장도식이 들어오자 아는 척을 하며 맞아들인다.


신사1 : 어이구 장 선생 우리 아주 오래 기다렸어요


장도식 : 최의원님 요즘 지역구에서 활동이 대단하시다구요


뒤따라 들어온 종도 안 의 사람들의 위세에 눌려 서 있다.



# 15 부대 정문


군 트럭 한 대가 도착한다.

보초 다가와 운전석의 병사들의 신분을 확인한다.

서로 아는 사이다.

다른 보초는 트럭 뒤로 가서 실려 있는 물품을 확인한다.

조수석의 병사, 보초에게 봉지 하나를 내준다.

보초 받아서 열어보면 송편이 들어 있다.

좋아서 빨리빨리 통과를 시킨다.

다른 보초 얼른 다가와 송편을 싸워가며 나눠먹는다.



# 16 병사들 막사 뒤 공터


병사들 편을 나누어 족구를 하고 있다. 응원전도 열렬하다.

추석을 맞아 어느 정도 풀어져있는 모습들…

한 쪽에 내기 상품으로 놓여있는 라면 박스와 막걸리통.

그 옆의 고참 병사 한 명 슬그머니 막걸리를 한 대접 떠먹다가 옆의 동료에게 뒤통수를 얻어맞는다.

족구를 하는 병사 중 한 명 멋지게 공을 차 넘기고 상대가 아웃시키자 함성이 오른다.



# 17 부대 전경 밤


망루에 있는 경계병들의 모습….



# 18 막사 내부


깊은 밤. 모두 잠들어 있다.

태수 조용히 일어난다.

문가로 가서 밖의 동정을 살핀다.

돌아보면 기다리고 있던 정인재 일어난다.

노주명도 몸을 일으킨다.

정인재, 담요를 재빨리 말아 든다.



# 19 철조망 부근


초소에 보초 두 명 즐겁게 얘기를 나누고 있다.

한 명이 편지 봉투 안 에 사진을 보여주고 다시 뺏으려하고 안 뺏기려 하고 장난을 치고 있다.

숨어서 그들의 동태를 살피고 있는 정인재.

그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면서 뒤를 향해 손짓을 한다.

대기하고 있던 태수, 담요를 들고 소리 없이 반대편 철조망을 향해 기듯이 뛰어간다.

철조망 밑에 납작 엎드려 잠시 동태를 살핀다.

뒤 쪽의 정인재가 다시 손짓을 하다.

태수, 빠른 솜씨로 철조망 위에 담요를 덮어씌운다.

노주명이 소리 없이 이동해간다.

정인재가 보는 시선 속에서 보초들은 담배를 나눠 피우고 있다.

태수, 노주명을 철조망을 덮은 담요 위로 넘긴다.

반대편으로 떨어지며 쿵 소리가 난다.

초소 안 의 보초 중 한 명 이 쪽을 본다.

정인재, 숨이 막히는데 다른 보초 한 명이 편지를 뺏어가는 바람에 그들 다시 몸싸움을 벌인다.

그 틈에 정인재, 얼른 철조망 쪽으로 간다.

정인재를 먼저 넘기고 태수 뒤따라 넘는다.

정, 담요를 다시 벗기려 한다. 그러나 걸려서 벗겨지지 않는다. 태수 다급해서 돕는다.

여전히 벗겨지지 않는 담요.

정과 태수 시선을 마주친다.

저만치 이동해간 노주명이 초조해서 이 쪽을 보고 있다.

정인재, 태수를 노주명의 쪽으로 밀어낸다.

태수, 잠깐 망설이다가 노주명 쪽으로 뛴다.

노주명을 부축하여 어둠 속으로 사라지며 정의 쪽을 돌아본다.

정은 담요를 벗기느라고 애쓰고 있다.



# 20 노역장 부근


태수와 노주명 어둠 속을 달려오고 있다.

태수, 어느 부근에 이르자 바위를 힘을 주어 밀기 시작한다. 노주명도 돕는다.

바위가 굴려지고 그 밑에 감추어두었던 밧줄이 드러난다.

태수, 밧줄을 들다가 보면 노주명 뒤 쪽을 보고 있다.

어둠만 보일 뿐 아직 정인재는 따라오지 않고 있다.



# 21 철조망 부근


정인재, 담요를 거의 벗겨내고 있다.

다급해서 휙 잡아당기는데 다시 걸린다.

순간, 저만치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

정인재 몇 번 더 당기다가 단념하고 뒤 쪽으로 달려가 나무 뒤로 숨는다.

교대하러 오는 보초 둘이 저만치 오고 있다.

그들이 좀더 다가오면 철조망에 걸쳐진 담요를 볼 터이다.

정인재 잠시 눈을 감는다. 마음이 정해진다.

정인재, 노주명이 간 쪽을 향해선다. 그리고 깊숙이 허리를 굽혀 절을 한다.

보초들은 점점 다가오고 있다.

담요 옆을 그대로 지나치는가 싶다가 그 중 한 명이 담요를 발견하다.

놀라는 그들.

나무 뒤의 정인재, 노주명이 간 쪽과는 다른 방향으로 뛰기 시작한다.

절뚝이며 뛰는 그의 발자국 소리…

보초들은 이내 그를 발견한다.


소리 : 누구냐! 정지!


뒤쪽에서 들리는 호루라기 소리.

어둠 속에 요란하게 울려 퍼진다.



# 22 절벽 위


밧줄을 묶고 있던 태수와 노주명 놀라 고개를 든다.

부대 쪽에서 들리는 비상 사이렌 소리.

노주명 절망하여 눈을 감는다.

태수, 잠시 정지했다가 마음을 다잡듯이 밧줄을 세게 당겨 묶는다.



# 23 숲 속


절뚝이며 달리는 정인재.

사방에서 요란한 호루라기 소리. 군화 발자국 소리.

서치라이트가 숲속을 훑듯이 지나가고 총을 든 군인들이 달리고 있다.

개 짖는 소리.

줄에 묶인 개들이 방향을 잡아 달린다.

도망치는 정인재, 순간, 서치라이트가 정의 모습을 찾아낸다.

불빛 속에서 순간 방향을 잃고 멈추는 정인재. 눈이 부시다.



# 24 절벽


밧줄에 의지하여 깎아지른 절벽을 내려가던 태수와 노주명.

순간 들리는 총소리

태수 평정을 잃고 발을 헛디디며 밧줄에 매달린다.

그렇게 밧줄을 부여잡고 태수, 잠시 동안 계속되는 총소리를 듣는다.

총소리가 그치고 정적….

태수, 더듬더듬 발 디딜 곳을 찾아 간신이 중심을 잡는다.

아래를 내려다본다.

먼저 내려가던 노주명, 고개를 들어 태수와 시선이 마주치는가 싶다. 잠시 아래위에서 마주본다.

다음 순간, 노주명은 밧줄을 놓친다. 마치 놓아버린 듯이.



# 25 강물 기슭


태수, 노주명을 붙잡고 힘겹게 강을 건너온다.

무너져 내리는 노주명을 업다시피 간신이 기슭에 도착한 태수, 함께 뒹굴어버린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태수 다시 일어난다.

노주명은 힘겹게 숨을 쉬고 있다.

태수, 노주명의 다리를 살펴본다.

두리번거리다 물에 떠내려 온 나무판자를 발견하고 기어가서 주워온다.

지쳐서 힘겨운 상태에서 판자를 길게 쪼갠다.

쪼개는 힘에 엎어졌다가 다시 일어나 앉는다.

윗도리를 벗어 찢는다.

노주명의 부러진 다리에 대고 감는다.

눈을 감고 고통을 참던 노주명 문득


노주명 : 이봐


태수 : 부러진 거 같습니다. 조금만 참으세요.


노주명 : 부탁이 있어. (고통에 낮 게 신음한다)


태수 : 괜찮을 겁니다. 여길 벗어나는 대로 병원을 찾아보겠습니다.


노주명 : 내 부탁 들어주겠나?


태수 : (손을 멈추어 본다)


노주명 : 내 애들을 만나 게 되면 말이야. 그 얘긴 하지 말아줘.

내가 개처럼 기었던 거. 개처럼 꼬리치고 짖은 거.


태수 : (울컥 목이 멘다. )…예


노주명 : (누운 채 하늘을 보고 있다)


새벽이 되어가는 하늘…강가…


노주명 : 아들이 있어. 그 놈을 만나주겠나


태수 : (그런 말을 하는 노가 심상치 않아 본다)


노주명 : 그놈한테 이걸 가르쳐줘. 아버진 죄 값을 받았다고. 평생 몹쓸 짓 많이 했어.

남의 눈에 피눈물 게 하고 더러 병신도 만들고…그 값을 받는 거야.

내 아들놈은 절대 나처럼 살면 안 돼.


태수 : 무슨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노주명 : (힘겹게 일어나 앉는다)이제 가봐


태수 : 형님


노주명 : 여기 맘에 들어. 인재가 목숨걸구 골라준 장소답구만.

인재 그 놈은 언제나 나보다 머리가 좋았어.


태수 : (다투기도 지쳤다. 등을 댄다) 업히세요. 시간 없습니다.


노주명 : 건방지구만.


태수 : (돌아본다)


노주명 : 나는 노주명이야. 자네 같은 피래미 등에 업혀 살진 않아 알겠나. 난 노주명이야.


태수 : (언뜻 할 말을 찾지 못한다)


노주명 : 가봐. 날 더 추하게 만들지 말어


태수 말없이 보다가 노주명의 다리에 감던 천을 힘주어 잘 묶는다.

정성스럽게. 그리고 무릎을 꿇는다. 고개를 숙인다.


태수 : 가보겠습니다.


노주명 귀찮다는듯 손을 내둘러보인다. 어서 가라고.

태수 일어선다. 다시 고개를 숙여 보이고 돌아서 간다.

가다가 멈추어서 잠시 망설이지만 돌아보진 않는다.

태수의 모습이 사라진다.

노주명 천천히 물가로 기어간다.

손을 씻고 낯을 씻는다. 삭발된 머리도 닦는다.

찢어진 옷을 단정히 하고. 물로 들어가기 시작한다.



# 26 외딴 농가


아직 이른 새벽.

추녀 밑에 거두지 않은 빨래가 걸려 있다.

그 중 남자의 옷을 재빨리 거두는 손길.

태수다.

벽에 걸려있는 밀짚모자도 집어 든다.



# 27 길


태수 걸어오고 있다.

옷을 갈아입고 모자를 쓰고 있다.

문득 걸음이 느려진다.

저만치 앞에 검문소가 설치되어 있다.

통과하는 차들이나 사람들이 조사를 받고 있다.

태수, 슬그머니 뒤로 돌아 걷는다.

또 한 대의 군인들을 태운 트럭이 검문소를 향해 오고 있다.

길가에 세워진 자전거에 탄 사내. 돌아서 오는 태수를 무심히 본다.

태수, 바로 옆을 지나쳐간다.

순간 불어온 바람에 태수의 밀짚모자가 날려 떨어진다.

태수, 모자를 집을 사이도 없이 머리를 감싸듯 걸음을 빨리한다.

자전 거의 사내, 모자를 집어들어


사내 : 이보쇼 어이


그러나 태수는 거의 뛰듯 간다.


사내 : 모자 떨어졌어.


사내의 시선이 태수의 발로 간다.

낡은 보건화를 신고 있다.

그제야 태수의 삭발된 머리가 눈에 들어온다.

자전거 사내를 지나쳐가던 트럭이 정거를 한다.

조수석의 하사관급 한 명이 고개를 내밀어 본다.



# 28 동네


태수 뛰고 있다.

사방에서 호루라기 소리. 군화발소리.

죄어들고 있다.

태수, 꺾어진 담장을 돌기 전에 멈춘다.

몸을 숨겨 동태를 살펴보면 한 무리의 병사들이 총을 들고 달려오고 있다.

태수, 오던 길을 다시 뛴다.



# 29 동네 일각


좁은 골목. 달려온 태수, 다급해서 어느 집 대문을 박차 연다.

마악 들어서려다 보면 마당에서 놀고 있던 어린 아이 두 명, 태수를 바라본다.

태수 그들과 시선이 마주친 상태에서 골목으로 밀려드는 군화발소리를 듣는다.

태수 다시 대문을 닫아준다.

돌아서면 골목의 양 쪽을 메우고 있는 군인들…

태수를 향한 총부리들….



# 30 부대 일각


눈감은 정인재의 얼굴이 잠간 보이고 이내 검은 비닐이 덮어진다.

들 것에 실려 트럭에 태워진다.

그 것을 보고 있는 장교 한 명과 군의관.

군의관은 들고 있는 서류에 기록을 하고 있다.

사망진단서 사인난에 심장마비라고 적는다.



# 31 독방


햇빛이 들지 않는 독방에 문이 열린다.

태수가 던져진다.

문이 닫히고 죽음처럼 어둠…



# 32 강


강물이 흐르고 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듯…



# 33 간이역


열차가 들어오고 있다.

열차가 서고 내리고 타는 몇몇 사람 중에 우석,

급히 열차를 내린다. 군복 차림이다.

개찰구 근처에서 기다리던 영석, 우석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어 보이고 있다.

우석, 다가서자마자

우석 : 아버진 어떠셔



# 34 우석의 시골집 전경



# 35 안방


자리에 누워있던 부친, 한손을 저어대며


부친 : 일으켜 어서


영석, 얼른 부친의 등 뒤에서 상체를 받쳐 일으켜준다.

영석에게 기대어 보는 부친의 얼굴은 병색으로 초췌해져 있다.

목이 메는 기분으로 그 앞에 서있던 우석, 큰절을 한다.

부친 기진함을 감추고 무뚝뚝한 얼굴로 우석의 절을 받고는 쇠잔한 목소리로


부친 : 뭐허러 왔냐. 요즘 군대는 세월 좋구먼 애비가 고뿔 좀 들었다고 병사를 홀랑 내보내


그 정도 말한 것이 힘에 겨워 가쁜 숨소리를 낸다.

우석, 얼른 다가앉아 영석을 도와 부친을 자리에 눕힌다.


부친 : (성가시다는 듯 손을 저어)이왕 온 거 닭이나 한 마리 잡아먹고 가. 나가봐.


가쁜 숨소리….

우석, 영석을 본다.

영석, 우석의 시선을 피한다.



# 36 부엌


석유곤로에 신식 찬장과 같은 가재도구들은 더러

들여놓아져있지만 여전히 아궁이에 불을 때는 부엌.

모친, 김이 나는 솥에 털을 뽑은 닭을 넣는다.

마늘도 한줌 넣는다.

솥뚜껑을 닫고 주저앉아 불을 쑤석인다.

들어서는 우석.


우석 : 병원에선 뭐래요 입원하셨을 때 진작 전보 쳐 주시지요


모친 : (돌아보지도 않고) 느이 아버지 고집에 행여 허락을 했겠다.


우석 : 퇴원하신 거면 좀 괜찮아지신 거죠


모친 : 씻구 옷 갈아입어 금방 될겨. 백숙허구 국물루는 닭죽을 끓여줄 것인 게 많이 먹어. 먹구…


목소리가 잠기더니 잦아든다. 모친, 화가 나는 듯 행주로 부뚜막을 훔쳐댄다.

우석 다가가 모친을 감싸안아 얼굴을 보려한다.

모친, 얼굴을 피하며 행주로 우석을 치며


모친 : 에그 얼릉 나가 씻지 못하겄냐.


우석 웃으며 나가고 난 뒤 모친 부뚜막에 주저앉는다.

그렇게 앉아 있다가 문득 연기가 매운듯 눈물을 훔친다.



# 37 우석의 마을


밤….개구리 소리…풀벌레 소리…



# 38 안방


백열전등이 켜져 있다.

이슥한 밤.

부친, 누운 채로 손짓으로 명령하고 있다.

모친, 궤를 끌어다 연다.

그 옆에 앉아있는 우석.

궤 안 을 보고 동한다.

안 에는 우석의 책들이 차곡차곡 쌓여져 있다.

우석 몇 권의 책을 꺼내본다.

사법고시용 책들이다.

부친을 쳐다보면 부친 누운 채 손짓을 해보인다. 어서 공부하라고….

우석 그 중의 법률책 한권을 펼친다.

잠시 책을 들여다 보고 있는데…


부친 : 소리 내서 혀


우석, 망설이다가 읽기 시작한다.

모친은 한구석에 앉아 전구에 씌운 양말을 깁기 시작하고 우석은 읽는다.

부친은 흐믓하게 듣는다. 이따금 힘겹게 끄덕이기도 한다.



# 39 건넌방


곡식 가마도 들여놓아져있고, 메주(계절이 맞으면)도 달아매어져 있는 방.

우석이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서보면 어둠 속에 두 채의 이불이 깔려 있다.

그 중 한 채에는 영석이 누워 있다.

우석, 자신의 이불에 눕는다. …


우석 : 자냐


영석 : ……아니


우석 : 아버지, 서울 병원으로 모시면 어떨까.

대학병원 같은데서 정밀검사 다시 하구 수술할 수 있으면 하구…


영석 : 그렇게 말하면 내가 섭섭하지

내가 배운 게 없구 무식해서 고칠 수 있는 아버지 병 냅둔 것처럼 들려…


우석 : … 그래 내가 말 잘못했다.


영석 : 나 그래두 고등학교는 나왔어.


우석 : 내가 잘못했다니까.


영석 : 걱정 말어. 아버지 알잖어. 그렇게 쉽게 맥 놓으실 분 아녀…


잠시 침묵이 흐른다.

문득 영석 배를 깔고 엎드리더니


영석 :


우석 :


영석 : 그 아가씨 부를 수 없나?


우석 : 누구?


영석 : 전번 여름에 형 군주소 묻는다구 왔던 아가씨 말여 면회 안 갔었어?


우석 : 혜린이 ….


영석 : 밥도 안 먹고 후딱 갔다고 어무니가 얼마나 섭해하시는지…애인 아닌가?


우석 : 아니야.


영석 : 에에…(안 믿는)


우석 : 그 친구 ….약혼한 남자 있어.


영석 : (놀라 보다가 실망하는) 별나네 약혼한 여자가 왜 넘의 남자 집엔 찾아오구 그려…

 (화난듯 이불을 쓰고 눕는다)


우석, 어두운 천정을 쳐다보고 있다.


영석 : 병원서 아버지 그런 말씀하시데.

돌아가시기 전에 소원이 두개 있는데 하나는 형이 판사되는 거 보는 거고

또 하나는 며느리 보는 거라고 ……형


우석 :


영석 : 나 먼저 장가들까?


우석 : 여잔 있어?


영석 : 어허 무시하지 말어. 번호순으로 불러봐?

나 땜에 지들끼리 머리끄댕이 잡구 쌈박질한다니까.


우석 : 어이구우


영석 히히 웃고 돌아눕는다.

우석, 잠깐 웃음소리를 내어주지만 영 웃을 수 있는 심정이 아니다.



# 40 집 마루


이른 아침

잠에서 깨어 방에서 나온 우석, 마당으로 내려서려다가 안 방 쪽을 본다.



# 41 안방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오는 우석.

모친은 이미 나갔는지 없고, 부친 소리도 없이 잠들어 있다.

우석, 부친의 머리맡에 있던 자리께 물 쟁반을 들고 나가려다가 문득 멈춘다.

부친은 너무나 조용하다.

우석, 얼어붙은 듯 부친을 내려다보는데 일순 공포가 엄습한다.

떨리는 마음으로 주춤주춤 부친의 얼굴에 귀를 대본다.

잠시….

천천히 상체를 일으키는 우석, 안도의 한숨을 조심스럽게 내뱉는다.

부친은 한손을 가슴에 얹어놓고 있다.

우석, 그 손을 잡으려다가 그만둔다.

건드리기만 해도 사그라질 듯 부친은 그렇게 쇠약해져 있다.



# 42 아침 우석 집 마당


우석, 잔도끼질을 하여 잔나무들을 불쏘시개에 맞게 자르고 있다.

삼십대와 사십대의 동네 남자 둘이 대문을 들어선다.

우석 얼른 일어나 40대의 남자에게 절을 한다.


우석 : 오셨습니까?


40대 : 어 왔단 소린 들었구먼. 이장님 차도는 좀 있으신가?


우석 : 오늘 조반은 맛나게 드셨습니다.


40대 : 그려 그렇겄지. 장남이 왔으니 이제 쾌차하시겄구먼…


부엌에서 모친이 나온다.


모친 : 또 들러주셨구먼요.


40대 : 예 고생이 많으십니다.


30대도 인사를 하고.


40대 : 여기…


30대의 손에 들려온 보자기에 싸인 약재를 넘겨준다.


40대 : 영지를 좀 구해왔습니다.


모친 : 아이구 이 귀한 걸…


40대 : 제가 아니구요. 우리 장년회에서 힘을 합했습니다.


모친 절하고 남자들도 절하고 모친 40대를 안내하여 안방 쪽으로 간다.

30대는 남아서 우석 쪽으로 온다.

우석이 쏘시개 나무들을 한 아름씩 묶는 것을 도우며


30대 : 아직 제대는 멀었지.


우석 : 몇 달 남았습니다.


30대 : 그새 자네 동생이 고생이 많았어.

이장님 누워 계신 동안 혼자서 소 키우구 밭일하구 하우스꺼정 허구….

자넨 제대하는 대로 시험쳐야지.


우석 : ….


30대 : 얼릉 시험 붙어갖고 판사되라고. 출세를 하면 우리도 덕 좀 보자고.

시험만 붙어봐 이장님 그 시로 자리 걷고 일어나실 거구만.


우석 : (불쑥) 사법고신 그만둘 생각입니다.


30대 : 뭐?


우석 : 제대하면 여기로 돌아올까 해요.

아버지 건강 찾으실 때까지 동생 도와서 농사일을 해보려구요.

농사는 잘 모르니까 많이 가르쳐 주십시오.

우석은 웃으며 얘기하고 있는데 30대는 놀라서 멍청하니 바라보고 있다.



# 43 부엌


우석, 부엌 구석에 쏘시개 뭉치를 차곡차곡 챙겨 얹고 있다.

그때 부엌 문으로 다급하게 다가온 영석, 들여다보더니

영석 : 형 아버지가 부르셔 얼른



# 44 마당


우석 영석을 따라 나오다 보면 30대와 40대, 대문을 나서고 있다.

30대, 불안 한듯 뒤를 돌아보는데 40대가 그 등을 밀다시피하여 나간다.



# 45 안방


부친, 모친의 도움으로 일어나 앉아 있다.

분노로 인해 힘이 나 있다.


부친 : 무슨 소리여 시방 내가 들은 게. 무슨 소리여? 시험을 안 치겠다고?


우석 : (꿇어앉은 채 …)


모친 : 잘못된 거라고 말씀드려 얼릉.


부친 : (모친을 막아) 임잔 입 닫아. 뭐냐 무슨 소리여?


우석 : (결심하여) 죄송합니다. 나중에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


모친 : (다급하여) 그럼 나중에 혀.


부친 : 입 닫으라고 혔네.


모친 : 아이구 (더 말은 못하고)


부친 : 계속혀봐. 그려서


우석 : 전 판사구 검사구 되구 싶지 않습니다. 사법고시 같은 거 칠 수가 없어요.


부친 : 어째서?


우석 : 아버지 이해해주세요. 여기 집으루 와서 살 게 해주세요.

저 시험 못쳐요. 저 이제 그런 자격 없어요.


부친 : 자격이 없다? 나라에서 그러는겨? 너 시험치지 말라고?



우석 : 아닙니다.

부친 : 아니며언?


우석 : 아버지


(어떻게 설명을 해야할 지 모르겠다)

부친, 갑자기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방비를 주워든다.


부친 : 일루 가까이 와


모친 : 아이고 우석 아부지.


부친 : 비켜. 애비가 아들놈을 가리키는겨


모친, 차마 잡지도 못한다.


부친, 가까이 다가온 우석의 등짝을 후려친다.


부친 : 다시 말해봐


우석 : ….나중에 설명 드리겠습니다.


모친 : 이놈아아


절망하여 보는 문가의 영석.


부친 : 이놈이 (패면서) 다시 말해봐 이놈아 뭣이 어째?


우석 고개를 수그린 채 맞다가 차츰 고개를 든다.

등이며 어깨에 떨어지는 부친의 매는 그러나 점점 위력이 떨어진다.

부친은 헛손질을 하기도 하고 매를 들기도 힘이 든다.

우석, 목이 메이고 눈물이 차오른다.


우석 : 아버지


부친, 결국 매를 놓치고는 맨손으로 우석을 툭툭 때리며


부친 : 이놈 이놈 이 못된 놈


그러나 우석은 말이 없다.



# 46 마당


와장창 요란한 소리를 내며 영석이 집어던진 농기구가 리어카 위에 떨어진다.

우두커니 서있는 우석의 옆에서 영석, 화가 난 상태로 손에 닥치는 대로

농기구들을 리어카에 집어던져 싣고 있다.

우석 보다 못해


우석 : 영석아


영석 : (버럭) 됐구먼. 대꾸하고 싶지 않은 게 말 걸지 말어.


우석 : 나두 할 말 있어


영석 : 암말두 말어. (성을 누르느라 애쓰고 있다)

나 시방 형이 형으루 보이질 않어. 그니까 암말두 말어.


우석 : (영석이 막 집 어들고있는 것을 거칠 게 뺏어들어)

그동안 군대에서 내가 무슨 짓을 했는 줄 알어? 나 사람을 패구 뇌물을 바치구

그리구 어쩌면 사람두 죽였어.

그런데 판사되구 검사돼서 너는 폭력죄다 넌 살인죄다 판결내릴 수 있을 거 같아?

그럴 수 없어. 내 말 듣구 있니? 난 자격 없어. 못해.


씨근거리며 듣고 있던 영석, 못하겠다는 말에 그만 우석의 멱살을 잡아 벽으로 밀어붙인다.


영석 : 여기루 돌아오겠다구? 여기가 어딘데 형 맘대루 돌아오구 말어?


우석 : 영석아


영석 : 형은 어째 그렇게 저밖에 몰라. 형만 편하면 되는겨?

형만 맘 편하게 살겠다고? 그래두 되는겨


우석 말없이 영석을 보고 있다.

영석, 손을 놓는다.

놓고 나서도 남은 화를 어쩌지 못해하다가 발에 걸리는 것을 냅다 걷어찬다.

그러더니 그만 비죽비죽 화를 내며 운다.

우석, 영석의 어깨에 한손을 얹어


우석 : 아버지께 이렇게 말씀드릴 생각은 없었어.

그렇지만 속일 수는 없잖어. 어차피 알 게 되실 건데…


영석 : (손을 뿌리쳐) 뭐가 어차피야.

어이구 젠장 아버지…. 간암이셔 혀엉. 병원에서도 포기했다고


우석, 정지되어 본다.



# 47 뒷마당 밤


정한수가 올려져 있다.

이만치 약탕기에서 김이 오르고 있다.

그 앞에 퍼질러 앉은 모친.

이따금 기계적으로 부 채질을 하며 넋을 잃은 듯 그저 멍하니 앉아 있다.

어디선가 개가 짖는다



# 48 안방


방구석에 영석이 웅크리고 잠이 들어 있다.

부친의 이불 옆에 우석, 고개를 숙이고 앉아 졸고 있다.

그러다 퍼뜩 잠이 깨어 부친을 본다.

섬뜩하여 정지한다.

부친은 눈을 뜨고 우석을 바라보고 있다.


우석 : (낮게) 아버지


부친 끄덕이는듯 싶다.

두어 번 바튼 기침을 한다.

우석 : 물 드릴까요?

부친 고개를 젓는다.

그저 우석을 바라본다.

부친과 마주 보면서 우석, 차츰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낀다.


부친 : (들릴듯 말듯)우석아


우석 :


부친 : (힘겹게 손짓을 한다)


우석 : (부친의 얼굴 가까이 귀를 댄다)


부친 : 넌 잘할겨. 넌 할 수 있어.


우석 : ……


부친 : 내가 알어. 넌 잘 할 수 있어.


우석 : ….(끄덕인다) 예


부친 입가에 안심한 듯 미소가 어린다. 한손을 내민다.

우석, 그 손을 잡는다.

부친, 우석의 손을 잡고 마음이 놓여 눈을 감는다.

우석, 부친의 손을 잡은 채 그대로 앉아 있다.

(시간경과)



# 49 뒷마당


새벽이 밝아오고 있다.

주저앉아 밤을 샌 모친, 뻣뻣한 다리를 주먹으로 치며 일어선다.

정한수를 향해 두어 번 절을 올린다.

앞치마로 약탕기의 손잡이를 감싸 쥐어든다.



# 50 부엌


모친 약을 짠다.

대접에 약이 고인다.



# 51 안 방


영석은 아예 댓자로 누워 잠들어 있다.

우석, 부친의 옆에 모로 누워 잠이 들어 있다.

딱딱한 바닥이 불편하여 뒤척이다가 잠이 깬다.

간밤에 마주 잡았던 부친의 손이 요 밖으로 나와 있다.

우석, 그 손을 잡아 올려주려다가 섬뜩함을 느낀다.

손을 놓는다.

부친의 손은 맥없이 툭 떨어진다.

우석, 얼어붙은 듯 부친을 본다. 부친은 잠이 든 듯 평안한 모습이다.

그렇게 부친을 내려다 보고있는 우석의 뒷모습….

차츰 소리 없이 오열하며 수그러진다.



# 52 독방 영창


문이 열리며 암흑에 빛이 새어든다.

태수, 빛을 이기지 못하여 눈을 가린다.



# 53 막사 안


멍하니 바라보는 눈길들….

소리 없는 시선들을 받으며 태수, 관물을 챙기고 있다.

혹독한 독방 생활을 통해 태수는 생기를 잃고 퀭해져 있다.

물건을 다루는 손길이 늙은이처럼 떨리고 있다.



# 54 부대 앞

트럭 한 대가 흙먼지를 날리며 지나간다.

가라앉는 먼지 속으로 태수의 모습이 보인다.

끌려갈 때 입었던 사복으로 갈아입은 태수,

허청거리는 발걸음으로 걸어 나온다.

한길 가운데 선다.

선뜻 갈 바를 모르고 두리번거리다가 하늘을 우러른다.

눈이 부시지만.


<12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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