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모래시계

<제9회> 모래시계

오늘의 쉼터 2018. 10. 25. 19:15

<제9회> 모래시계   




# 1 보안사 취조실


혜린의 모습…시간경과에 따라 점차 피폐해져가고 있다.

처참하고 공포스러운 주변상황들….


(시간 경과)



# 2 수감실


한구석에 웅크려 잠이 든 혜린, 문이 열리는 소리에 짐승처럼 놀라 깬다.

이미 인간의 모습은 간 데 없이 공포만 남아 있다.

군화발 들어서서 혜린을 끌어간다.

그저 맞는 것만 겁이 나서 끌리는 대로 허 겁지겁 끌려가는 혜린.



# 3 취조실


밀쳐져 들어서는 혜린.

눈부신 빛.

누가 뭐래기도 전에 먼저 무릎을 꿇어앉는다.

군화발 다가오자 혜린, 저도 모르 게 머리를 감싼다.

그사이 맞는데 익숙해져 있다.

혜린의 옆에 쭈그려 앉은 군화발, 종이뭉치를 보여준다.

진술서라는 이름으로 빽빽이 적혀진 글자들.

주루루 넘기더니 맨 뒷장을 펼친다.

그 위에는 이미 계보도가 그려져 있다.

네모 칸들 속에는 이름들이 적혀져 있다.

군데군데 빈칸이 남겨져 있다.


소리 : 거기 빈 데 있지. 메꿔넣어.


혜린, 떨리는 손으로 볼펜을 주워든다.

간신이 한 글자 적는데 머리통을 갈기는 손.


소리 : 잘 써. 어? 대학원 다녔다며! 글씨가 그 게 뭐야?


혜린, 있는 힘을 다해 또박또박 적어 내려간다.


소리 : 맞아?


혜린 : 예.


인주가 들이밀어진다.


소리 : 그럼 찍어.


혜린, 덜덜 떨며 인주를 묻혀 지장을 찍는다.

훽 나꿔 채간다.

혜린, 문득 꿈틀 놀란다.

빛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구석에서 들리는 신음소리.

군화발 둘이 그를 끌고나온다.

빛 속에 던져져 엎어진 그. 고개를 들어 혜린을 본다.

운경이다.


소리 : 누구야


혜린, 떨리는 손을 들어 그를 가리킨다.


소리 : 누구냐고.


혜린 : 우…리


소리 : 느네 대학 두목이지. 반정부, 친북한, 광주 해방, 대학연합 사무총장.


혜린 : 예 (대답과 함께 소리 없는 오열이 터져 나온다)


운경 아무 표정 없는 눈으로 혜린을 쳐다보고 있다.

군화발들이 운경을 끌고나간다.

시체처럼 끌려 나가며 운경은 혜린을 내내 보고 있다.

두런두런 사내들의 소리가 들린다.


소리1 : 확인 끝났어. 다음 누구야?


소리2 : 밥먹구 하지. 새로 생긴 한정식 집 말야 거기 배달 해준대. 반찬이 깔끔하드라구.


혜린, 넋 나간 여자처럼 앉아 소리 없이 오열하고 있다.



# 4 호텔 라운지


장도식, 칵테일 잔을 들어 성분이라도 알아보려는듯

이리저리 돌려 살펴보고 있다.

그 앞에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앉아있는 영재.


영재 : 어쨌든 같은 계통의 분들이니까 통하는 데가 있을 거 아닙니까?


장도식 : 아 이걸 어떻게 말씀드려야 되나 예전하군 달라요.

어쨌거나 우리 우두머리였던 분이 대통령 시해범이란 말씀이에요.

말하자면 우린 역적 졸개처럼 돼있는 분위기에요.

어디서 입 벙긋 못하고 있어요.

숨도 조용히 소리 안 나 게 쉬고 있다구요.


영재 : 이번 일만 애써주시면 내 어떻게든 은혜를 갚겠습니다.

장 선생님 우리 집하고는 오랜 인연이 있잖습니까.

그러니 어떻게…


장도식 : (물끄러미 보다가) 저를 만나러 오신 거 회장님이 분부하신 일이 아니죠?


영재 : 예?


장도식 : 회장님 방식이 아니에요.

회장님이 저한테 시킬 일이 있으시다면, 이런 식으론 하지 않으세요.

윤 실장님 아버님께 많이 배우셔야겠어요. 

(재미 있다는 듯 낄낄 웃는다)



# 5 윤 회장 집 식당


윤 회장, 긴 테이블의 한 쪽 끝에 앉아 간단한 아침 식사를 들고 있다.

재희의 안 내를 받아 장도식이 들어온다.


장도식 : 안녕하십니까?


윤 회장 : 어 오셨구만. 아침은?


장도식 : 했습니다.


윤 회장 : 앉아요, 어이 여기 차 한 잔 내오지.


재희, 머리 숙여 보이고 나가고


윤 회장 : 장 선생도 아침에 빵으로 때우나?


장도식 : 아닙니다.


윤 회장 : 그래 영양이 어쩌니 하지만 우린 밥을 먹어야 제대루 에너지가 돼요.


장도식 : 그런 거 같습니다.


윤 회장, 그리고는 같은 속도로 밥을 먹는다.

앞에 앉아있는 장도식에 대해서는 잊어버린 것 같다.

장도식, 기다린다.



# 6 정원


장근섭이 눈에 띄지 않게 지키고 있다.

윤 회장과 장도식.


윤 회장 : 내가 듣기로는 거기 장 선생 일하는데 말이야 조만간 감원바람이 불거라든데,

내가 제대루 들은 건가?


장도식 : 그렇게 짐작들 하고 있습니다.


윤 회장 : 장 선생이야 감원 대상이 될 분은 아니실 테고.


장도식 : 그야 두고 봐야지요.


윤 회장 : 장 선생, 참 재미있는 사람이야. 내보기엔 돈에 욕심이 있는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우두머리가 되고 싶어 하는 것 같지도 않고.


장도식 : 제 분수를 지키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윤 회장 : 분수를 지킨다. 위험한 우두머리보다는 영원한 이 인자가 되겠다. 현명하구만.


장도식 : 그 정도로 머리가 좋지는 못합니다.


윤 회장 : 아니야 나 같은 사람한테는 신문에 이름이 나는 사람보다는 장 선생 같은 사람이 더 무섭지. 내가 요즘 골프라는 걸 배우기 시작했어요.

근데 그 골프라는 거 말이야,

친구가 있어야 이 게 재미가 있드라구.


장도식 : 그렇다고들 하드군요.


윤 회장 : 장 선생 위에 계신 분들… 이번에 아마 많이 바뀌셨지.

그분들 나 같은 골프 친구가 재미있을 거예요.


장도식 : 감사합니다.


윤 회장 : 감사하다….


장도식 : 저를 밀어주시겠다는 뜻으로 들었습니다.


윤 회장 : (보다가 껄껄 웃는) 상부상조하는 걸로 합시다.

사실이 그러니까. (얘기 끝났다는 듯 가려는데)


장도식 : 회장님.


윤 회장 : (돌아보면)


장도식 : 보안사에 계신 어른들 중에 골프를 좋아하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

그 쪽 분들부터 모시겠습니다.


윤 회장 유쾌하게 웃으며 끄덕이며 간다.

남은 장도식의 입가에도 미소가 떠오른다.

역시 생각했던 대로의 윤 회장의 방식이다.



# 7 고급 빌라 앞


민 변호사가 부동산 사람과 함께 집을 둘러보고 있다.



# 8 부동산


민 변호사, 부동산 매입 서류에 도장을 찍고 있다.

서류는 봉투에 넣어진다.



# 9 골프장


호쾌하게 날아가는 골프공.

머리가 짧은 중년 신사가 주위에 사람들을 거느리고 골프를 치고 있다.

그들 뒤에서는 장도식과 중년 신사의 부관이 얘기를 나누고 있다.

부관이 신사에게 가서 낮 게 말을 건넨다.

신사 힐끗 장도식 쪽을 본다.

장도식, 얼른 다가가 인사를 여쭙고 나서 이쪽을 가리켜보인다.

이쪽에서는 윤 회장이 장근섭 등을 데리고 골프채를 고르고 있다.


(시간 경과)


윤 회장과 신사 친밀하게 얘기를 나누며 함께 골프 코스를 걷고 있다.


(시간 경과)


윤 회장, 케이스에서 꺼낸 금장의 로렉스 시계를 건네준다.


윤 회장 : 국사를 보시는 분께 제일로 중요한 건 시간 아니겠습니까?

국민의 한사람이 채찍질하는 의미에서 드리는 겁니다.

(신사의 기색을 슬쩍 살핀다)


신사 : 하하 국민의 채찍질이라, 야아 이거 겁나는데 하하.


신사, 로렉스 시계를 받아 손목에 차본다.

이리저리 살펴보며 기분이 좋다.

그 앞에서 웃고 있는 윤 회장.

저만치 장도식을 본다. 장도식 남들이 보지 않게 슬쩍 고개를 끄덕인다.

윤 회장 옆의 민 변호사에게 눈짓을 한다.

뇌물을 받기 좋아하는 사람인지 테스트해본 것이다.

민 변호사 조용히 사라진다.



# 10 골프장 주차장


신사 부관이 열어주는 차에 올라타던 신사.

달려온 민 변호사를 맞는다.


민 변호사 : 그 시계의 보증서입니다.


서류봉투를 내놓는다.

신사 별 뜻 없이 받아든다.

민 변호사의 뒤 저만치에 서있던 장도식이 신사와 시선이 마주치자 공손히 고개를 숙여 보인다.



# 11 차 내부

달리는 차 안 에서 신사 봉투를 열어본다.

그 안 에는 부동산 매입서류가 두툼하니 들어 있다.



# 12 밤 건물 뒤


건물 뒤편으로 있는 뒷문 앞.

승용차 옆에 영재와 재희,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다.

문이 열리는 소리.

후딱 쳐다본다.

군인에 의해 부축되어져 나오는 혜린.

재희 달려가 받아 안다가 놀란다.

처참한 몰골. 촛점을 잃은 눈.

달려온 영재도 혜린을 본다.


영재 : 혜린아 (그만 목이 메어 버린다) 야 이자식아.


재희, 혜린을 안 다시피하여 일단 차로 데려간다.

영재, 혜린을 쫓아 뒷좌석으로 들어가며 연방


영재 : 혜린아 뭐라고 말 좀 해봐. 야, 나 알아보겠어? 오빠야. 혜린아 나 좀 봐.

재희, 분노에 떨며 시동을 건다.


재희 : 병원으로 가겠습니다.


영재 : 집으루 가. 아버지께서 이 꼴을 보셔야 돼.


재희 : 병원으로 먼저 가겠습니다.


급출발을 한다.



# 13 서울 야경


나이트클럽 등이 즐비한 화려한 불빛들…



# 14 VIP 클럽 앞


달려온 오토바이 정 거한다.

내리며 헬멧을 벗는 태수.

달려온 종업원 차림의 부하 중 하나가 얼른 오토바이를 받아간다.

태수, 입구 쪽으로 가려다가 문득 멈춰 선다.

저만치 멈추는 승용차.

옆을 지나가는 차의 불빛으로 뒷좌석에 타고 있는 두 사람이 비친다.

장도식과 종도이다.

태수, 얼핏 눈살이 찌푸려진다.

대충 옆에 기대어 그들의 꼴을 지켜본다.

잠시후 차에서 내린 종도, 깊이 고개를 숙여 출발해가는 장도식을 배웅한다.

장도식의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렇게 서있던 종도, 돌아서다가 태수와 눈이 마주친다.

종도 잠깐 당황한다.



# 15 클럽 내 밀실


성범, 백민재, 종도, 일도, 태수 등이 모여 있다.

무거운 분위기.

종도 성범의 눈치를 본다.

성범 담배 연기를 길 게 내뿜더니 혼자 웃는다.


성범 : 인간 박성범이 꼴이 우습 게 되는구만.

새파란 후배 자식이 불러 앉혀놓고 한다는 얘기가 뭐? 형님 배신을 하십시오.

안 그러면 신상에 해로울 겁니다?


종도 : 아니 그런 뜻이 아니고요.


성범 : 입 다물어.


종도 : 제 말을 오해하셨나본데…


성범 : 일도야 .


일도 : 예 형님.


성범 : 저 자식 다시 한 번 입 벌리면 아예 찢어놔.


일도, 종도를 돌아본다.

종도 찔끔하여 입을 다문다.


성범 : 오해할 것도 없구만. 지금 카지노 사장을 내쫓고 새 주인을 맞아들여라.

이건 나라에서 분부한 일이니 딴 생각마라. 그 얘기잖아. 그래 안 그래?


종도 : ……


성범 : 너 잘 들어. 나 인간 박성범이 자부하는 거 있어.

의리. 내 평생 그 거 하나는 하느님처럼 받들구 살아왔어. 그 거 하나루 떳떳해.


종도 뭔가 말하고 싶지만 입을 열지는 못한다.


성범 : 태수야. 저 새끼 델구 나가. 꼴두 보기싫다.


태수 말없이 일어나 종도를 데리고 나간다.

문이 닫히자 백민재 난처한 듯 머리를 긁더니


백민재 : 괜찮겠수?


성범 : (벌컥) 뭐가


백민재 : 종도 저 자식이 끼구 있는 줄, 그 거 만만히 보면 안 될텐데.


성범 : (얼굴을 바짝 민재에게 댄다)


백민재 : (찔끔하는데)


성범 : ( 그냥 저리로 가며 스스로에게 설명을 하듯)

우리가 가진 게 뭐가 있냐 가방줄이 기냐, 기술이 있냐? 아니면 사기 칠 이빨이라도 있냐.

신용 하나야. 신용 잃으면 우린 이 바닥에서 끝장이야.


일도 : 그럼 어쩌지요?


그냥 모른 척 합니까?


성범 : ….(담배를 빼어 문다)


일도 : (불을 붙여주려는데)


성범 : (손을 저어 말리고 입에 물었던 담배를 도로 뱉어버린다.)

… 내가 잘못 생각하는 건지도 몰라


처음 들어보는 보스의 자신 없는 소리. 일도와 백민재, 다소 놀라서 본다.

성범 저 혼자의 생각에 빠져 있다.



# 16 클럽 홀


비어있는 홀에 한 테이블,

종도 혼자 앉아 있다.

종업원 하나 다가와서 말을 걸려다가 종도의 얼굴이 험악하여 그냥 주춤주춤 물러나버린다.

종도, 생각에 빠져 있다.

점점 차가와지는 얼굴.



# 17 기차 안


완행열차 안 . 김밥이며 달걀을 팔며 지나간다.

휴가 나온 군인들이 드문드문 눈에 띈다.

헌병이 휴가병들을 검문하고 있다.

창가의 좌석에 우석이 앉아 있다.

병장 계급. 공수부대 군복을 입은 채이다.

검문하는 헌병이 우석 쪽으로 다가오고 있다.

우석 주머니에서 휴가증을 꺼낸다.

그러나 헌병, 우석을 힐끗 보더니 그냥 지나쳐간다.

그 뒤의 군인에게로 간다.

우석, 휴가증을 내려다보다가 다시 집어넣는다.



# 18 청량리 역 대합실


간이매점.

텔레비전이 틀어져있고, (아직 칼라가 나오기 전.)

우석, 매점으로 다가온다.

주인은 손님이 오는 것에는 상관없이 텔레비전에 빠져 있다.

일반 병졸 한 명이 생각 없이 다가와 주간지를 집어 들었다가 우석을 보더니

군복을 보고는 슬그머니 집었던 주간지를 도로 놓고 가버린다.

우석, 씁쓸함으로 잠시 서 있다.



# 19 화장실


우석, 가방 속에 군복을 쑤셔 넣는다.

우석은 일반복으로 갈아입고 있다. 모자를 눌러쓴다.

낡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 낯설다.



# 20 VIP 클럽 내부


안 에서 급히 나오던 태수 우뚝 선다.

거기 좌석에 앉아 우석, 태수를 보고 빙긋이 웃고 있다.

태수, 놀라움과 반가움에 허 웃는다.



# 21 선술집


마주 앉아 술을 마시는 우석과 태수.

우석, 독한 소주를 들이키고 있다.


태수 : 짜식 기특한데 응? 휴가 나와서 형님부터 찾아뵙구.


우석 : 휴가를 왜 냈는데, 니가 보구 싶어서 낸 거라구.


태수 : 어쭈.


태수 웃다가 보면 우석이 심상치 않다.

우석, 연거푸 술잔을 비우고 있다.


태수 : 군대 가더니 사람됐네. 어이 언제부터 술이 그렇게 늘었어?


우석 또 한잔을 한 번에 비운다.


우석 : 마셔. 안 마셔? 줘.


태수의 술잔까지 갖다가 비운다.


태수 : 어어 이 자식 봐라.


우석 그저 빙긋이 웃어 보이며 또 술을 따르고 있다.


태수 : 자작까지 하셔.


우석 남은 술을 탈탈 털어내고 있다.



# 22 길 (여의도 윤중로?)


늦은 밤.

차가 드문 길로 속력을 내어 달려가는 차들…

잔뜩 취한 우석, 태수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고래고래 노래를 부르며 걷고 있다.


우석 : 비가 오면 생각나는 그 사람. 언제나 말이 없던 그 사람 … 야 그 담에 뭐냐?


태수 : 몰라. 야 똑바루 걸어.


우석 : 어이.


태수 : 왜애.


우석 : 저기 차 온다.


태수 : 차 뭐.


말릴 새도 없이 우석 길로 뛰쳐나가더니 달려오는 차를 향해 두손을 든다.


우석 : 어이


태수 기겁을 해서 우석을 밀어 뒹군다.

급정거로 서는 차.

뒹굴어 넘어진 두 사람.

세운 차에서 운전사 내다보며 욕을 퍼붓는다.

태수, 어처구니가 없는데 우석은 낄낄 웃고 있다.



# 23 샛강 옆 둑길


토하는 우석의 옆에서 등을 쳐주는 태수


태수 : 다 토해. 싹 빼내라구.


우석, 기진해서 헐떡이는데 태수 문득 히히 웃는다.


태수 : 너 취하니까 좀 사람 같다 어?


우석 : 야 미치겠다.


태수 : 뭐가?


우석 : 술이 안 취해 .


태수 : (어처구니없어 웃는다)


웃다 보면 우석, 물끄러미 태수를 보고 있다.


태수 : 뭐.


우석 : (미소 짓는 듯) 너 …살아있을 줄 알았어.


태수 그 뜻을 알지 못하고 그저 웃는다. 에라 미친놈 하는 기분.


(시간 경과)


우석, 둑에 길 게 누워 있다.

태수, 그 옆에 앉아 있다.

그들 앞에는 마른 강.

태수 손에 잡히는 잔돌을 마른강으로 툭툭 던져본다.


태수 : 느네 부대 어디냐?


우석 : …전방


태수 : 면회 한번 가야지…


우석 : 올 거 없어…


태수 : 하긴 금방 제대니까. (목의 땀을 훔친다) 완전 여름이네…


우석 :


태수 : 지난 봄에 대단했다. 봄에 나… 광주에 있었어.


우석 : (하늘만 쳐다보고 있다)


태수 : 거기서 뭘했는지 아냐? 사람 죽는 거 봤다.

어처구니 없이 그냥 죽는 거야. 내 후배 한놈두 내 앞에서 죽었어.

(웃고) 꿈꾼 거 같아. 가끔 그런 생각이 들어.

꿈이었나………공수 애들이 사람 패구 죽이는데, 야 나두 주먹질루 살아온 놈이지만,

눈 뜨구 못보겠더라. 약을 멕여서 들여보냈대. 그랬을 거야 안 그러군 그렇게 못하지.


우석 : (아무 표정 없이 그저 하늘만 본다)


태수 : 그 때 느네 부대두 비상 걸렸었지?


우석 : ……


태수 : 자냐?


우석 : 아니


태수 : 군대에서 광주 얘기 들었어?


우석 : ……아니


태수 : 그래. 그랬을 거야. 서울 오니까 아무도 모르고 있드라구.


태수 문득 일어서더니 멀리 돌을 힘껏 던진다.

하늘을 보고 있는 우석, 눈물이 고인다.

모자를 눌러쓴다.

그도 모자라 한 팔을 들어 얼굴을 가린다.



# 24 낮. 윤 회장 집 전경



# 25 혜린의 방 문 앞


문이 열리며 채 박사와 간호사가 나온다.

복도에 서있는 재희. 그들의 표정을 살핀다.

어두운 표정이다.

채 박사 가고, 방안에서 영재의 소리가 들린다.


영재 : 혜린아


재희 열려진 문으로 안을 들여다본다.



# 26 혜린의 방


닫혀져 있는 커튼.

어두컴컴한 방구석에 웅크려 앉아있는 혜린.

아무 것도 보지 않는 눈빛.

그 앞에 영재, 어떻게든 혜린의 시선을 자기에게 돌리려 애쓰며


영재 : 정원에 한번 나가보지 않을래? 방이 답답하지 않아? 오빠하구 같이 나갈까?

그러나 혜린 아무 것도 듣고 있지 않다.



# 27 거실


정원을 내다보고 있는 윤 회장.

그 뒤의 채 박사.


채 박사 : 보름이 지났는데 여전히 그 상탭니다.

자의적으로 외부세계와 단절을 시켜버렸다고 할까요.

아무래도 병원에 입원을 시키는 게…


윤 회장 채박사를 향해 돌아선다.

돌아섰을 땐 경직되었던 얼굴이 평소의 얼굴로 돌아와 있다.


윤 회장 : 집에 있을 겁니다.


채 박사 : 집에선 효과적인 치료를 할수가 없어요.

병원에서는 그때그때 증세에 따라 적절한 치료를 …


윤 회장 : 집에 있을 거예요. 우리 애 멀쩡해요. 강한 애에요.

내가 잘 압니다. 조만간 지가 털구 일어나요, 두고 보세요.


채 박사가 뭐라 말할 여유를 주지 않고 장근섭에게


윤 회장 : 박사님 가신다. 모셔드려.


채 박사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장근섭, 박사를 모시고 나간뒤, 계단에서 내려오는 영재.

윤 회장을 보더니 외면을 하고 문소리를 거칠게 내며 나가버린다.

아무도 보지 않는 상태에서 윤 회장, 피곤한 얼굴로 우두커니 오래 서 있다.



# 28 혜린의 방


닫혀진 커텐 사이로 밖을 내다보는 재희.

밖은 밤이고 달빛….

돌아보면 혜린은 여전히 구석자리에 멍하니 앉아 있다.


(시간 경과)


재희 방의 한 쪽 끝에 앉아 지키고 있다.

혜린은 침대 옆 구석 그 자리에 웅크린 채로 잠들어 있다.


(시간 경과)


혜린의 방문 앞 복도

재희, 벽에 기대 서 있다.


(시간 경과)


혜린, 그 자리에 멍하니 있다.

창백해지고 생기 없이 초췌해진 얼굴.


(시간 경과)


방으로 들어서는 재희.

구석 자리 혜린의 앞에 놓인 테이블 위에 식사 쟁반을 치워 가려다가 문득 시선이 멈춘다.

테이블 옆 바닥에 놓인 신문.

펼쳐져 있다.

재희, 언뜻 혜린을 본다.

혜린,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초점 없이 웅크려 앉아 있다.

재희 쟁반을 도로 내려놓고 신문을 접는다.

맨 앞장 일면에는 커다란 글씨로

[계엄사 국기문란, 부정축재, 시위주모 등 혐의로 329명 지명수배]

에 대한 제호가 씌어져 있다.

(1980년 6월 17일자)



# 29 낚시터 앞


거칠게 들어서는 경찰 찝차

수사관들 뛰어내려 낚시터로 들어서고



# 30 낚시터


성범 한가로이 낚시를 하고 있다.

문득 돌아보면 형사들 달려오고 있는데 움직이는 찌… 걸려든 잉어



# 31 밤거리


경찰차, 빨간 경광등을 단 형사의 차들이 속력을 내어 달리고 있다.



# 32 카지노 앞


수하 두 명과 나서는 백민재.

대기해 있던 차에 오르려는 순간, 형사들에게 둘러싸인다.

순식간에 차 지붕에 엎드려 박히고 손을 꺽여 수갑이 채워진다.



# 33 카지노입구


카지노 입구로 들어서는 경찰.

백민재에게 신분증을 내미는 순간, 달아나는 백민재. 저항하지만 체포되고 만다.



# 34 호텔 방


침대에 잠들어있는 태수.

계속해서 울려대는 전화벨소리.

태수, 잠결에 수화기를 들었다가 다시 놓는다.

계속 잠을 자려는데 문이 박차지며 부하 한 명이 뛰어든다.


부하 : 형님


잠이 깨는 태수.

부하 : 빨리 피해요, 다른 형님들 다 걸려들어 갔대요.

태수, 잠깐 믿을 수가 없어 본다.



# 35 장도식의 사무실


장도식, 사탕 통을 열어 사탕 한 알을 꺼내고 껍질을 벗겨 입에 넣는다.

껍질은 돌돌 말아서 책상 밑의 쓰레기통에 넣는다.

사탕을 쪽 쪽 빨며 돌아보는 곳.

종도가 창문가를 서성이며 초조해하고 있다.

창문 밖은 밤.

장도식 여유롭게 미소 짓는다.

초조해하던 종도,


종도 : 저기 태수는 아니지요?


장도식 : (그저 재미 있다는 듯 보고 있는)


종도 : 태수는 안 됩니다. 애들은 걔만 따라요.

태수 걔가 없으면 애들, 순식간에 오합지졸이 돼요. 정말입니다. 쓸 수가 없 게 돼요.


장도식 딱하다는 듯 보고 있다.



# 36 밤길 국도.


서울 외곽으로 빠지는 국도.

태수가 탄 오토바이가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다.



# 37 검문소 주변


달려오던 태수 급정거를 한다.

저만치 앞에 보이는 검문소.

바리케이트가 임시로 설치되어있고, 자동차 몇 대가 늘어서서 검문을 받고 있다.

헬멧 속으로 잠시 지켜보던 태수, 오토바이를 돌린다.



# 38 국도변 간이 휴게소.


공중전화 박스 앞에 세워져있는 오토바이.

이만치에 태수, 맥주를 병째 마시며 공중전화 쪽을 보고 있다.

전화박스에서는 누군가 전화를 하고 있다.

그가 전화를 끊고 나가고 나자 태수, 주변을 경계하며 공중전화 박스로 다가선다.

주머니를 뒤져 동전을 넣는다.

멀리보이는 태수의 모습. 무언가 얘기를 하고 있는데 점점 성이 나고 있다.

잠시 후 전화를 끊는 태수.

그의 얼굴 분노로 경직되어 있다.



# 39 취조실


(보안사와는 다른 시멘 바닥의…)

책상과 의자, 취조관이 자는 간이침대. 한 쪽에는 방화수 통.

서있는 성범 앞으로 서류를 보며 다가오는 사복의 취조관.


사복 : 니가 두목이냐


성범 : (그저 보고 있다)


사복 : 두목이니까 나한테 한 대 맞아볼래?


그러더니 성범의 뺨을 찰싹 약올리듯 때린다.

성범 성을 누르고 보는데 사복은 얄밉게 웃고 있다.



# 40 취조실 다른 곳


백민재 앞에 앉은 남자.

단조롭게 지친 듯 빨리 외우듯 말하고 있다.


남자 : 우리는 검사의 지휘에 의해 취조 중 니가 죽더라도 책임지지 않는다는

상부의 명령을 받고 너를 취조한다.


책상 위에 한 뭉치의 백지를 던져준다.


남자 : 지금까지 니가 지은 죄는 누구보다 니가 잘 알 것이다. 써!



# 41 다른 취조실


방화수의 더러운 물을 한바가지 뜨는 손.

사내는 일도에게 가서 그 얼굴에 물을 들이붓는다.

졸도해있던 일도 깨어난다.

일도, 긴 의자에 뒤로 묶여 발까지 묶여 있는 상태.

이미 한참 얻어맞은 뒤다.

그 앞에 선 사내들 중의 하나가 말한다.


사내 : 항복하면 발가락을 까딱 거려 알아들었나?


일도 정신이 없는 상태에서 고개를 끄떡이려는데

그 얼굴이 사내의 우악스러운 손에 의해 잡혀지더니 그 얼굴 위에 젖은 물수건이 덮혀진다.

일도의 숨 막힌 신음소리와 함께 열개의 발가락이 필사적으로 까딱 거리고 있는데

그 앞의 사내들은 본 척도 않고 저희들끼리 잡담을 나누고 있다.



# 42 사우나 앞


종도, 젖은 머리에 마악 사우나를 끝내 말끔해진 모습으로 문을 나선다.

사우나의 종업원, 고개를 숙여 배웅한다.

종업원 : 살펴 가십시오.



# 43 지하 주차장


승용차에 앉아 기다리던 부하격인 운전기사 종도가 다가오는 것을 보더니 차에서 나간다.

종도는 의례 차 문을 열어줄 것이라고 기다리는데 기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린다.

종도 의아해서 부르려는 순간,

뒷덜미를 움켜잡는 손.

태수, 종도의 멱살을 잡아 그대로 벽으로 밀어붙여 박아버린다.


종도 : (숨이 막히는 대로) 태 태수야


태수 : 너 어떻게 여기에 있니? 서울 한복판에서 사우나까지 하면서. 아무 걱정 없이 응?


종도 : 내 말부텀 들어…


태수 : (더욱 죄어) 왜 그랬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어. 어?


종도 :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금새 눈물이 고이며) 날 죽여줘 태수야.


태수, 이를 갈듯 보다가 그 손에 점차 힘이 빠진다.

태수의 손에서 풀려나자 종도 무너지듯 그 자리에 주저앉는다.


종도 : 나두 할 수 있는껏 다했어. 차라리 날 대신 넣어달라구.

무릎 꿇구 빌었어. 그 심정 알어? 내가 무릎까지 꿇구.


설움이 북받치듯 운다.

태수, 잠시 어째야 할지를 모르겠다.



# 44 한적한 곳 밤


인적이 없는 곳.

세워져있는 승용차 주변에 종도와 태수.

침묵… 나무를 스치는 바람소리?

종도가 중얼중얼 말을 잇는다.


종도 : 그 다음 날에사 형님들 소식을 들었어.

장 선생한테 달려갔지. 달리 아는 사람이 있어야지.

장 선생도 어쩔 수가 없대는 것이야,

국가 시책이고 이미 명단은 떨어졌고.

그래 따졌지. 어째 나는 뺏냐고. 내가 뭣이 되냐고.

장 선생이 애써서 뺏다는구만, 아직 피래미라 거기까진 할 수 있었다는겨.

참말로 죽을 맛이드라고. 근데 태수 너도 뺏다대.

(힐끗 태수의 눈치를 본다)


태수는 어둠만 노려보고 있다.


종도 : 앞으로 그러니까 우리 손에 달려 있다고 그런 말을 하드만.

형님들 군사재판을 받게 되는데 그 게 살벌하대야.

아예 빼낼 수는 없지만 형기는 최대한 낮춰보겠다고…(다시 눈치를 본다)


태수 :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히지 못하고 중얼 거리듯) 개 같은놈들…

(삭지 않는 분노. 허공에 대고 악을 써버린다) 야 이 개새끼들아.


그 뒤의 종도 대충 각본대로 성공되고 있음을 안 다.



# 45 호텔 회의장 밖 복도


정재계 인사들의 회의가 끝난 직후.

신사들이 몰려나오고 있다.

외교적인 인사들이 오고가며…

젊은 보좌관들이 각각 보호해가고…

그중에 윤 회장, 민 변호사와 함께 나선다.

장도식, 다가와 윤 회장을 남들 눈치 채지 못하게 안내를 한다.



# 46 밀실


윤 회장 들어서자 기다리고 있는 사내. 강동환.

넥타이를 느슨하게 하여 윤 회장을 맞아 악수를 대충 하며


강동환 : 아 덥지요. 에어컨을 끄라고 했어요. 그 인공 바람이 난 싫어서 말이에요.

 

윤 회장 : (나이가 어린 강동환의 앞에서 어디까지나 정중하게) 몸에 나쁘다고 하더군요.


강동환 : 은밀히 이렇게 모신 건 부탁이 있어서예요.


윤 회장 : 부탁이라니요, 과합니다.


강동환 : 하하 어이 여기 시원한 거 좀 줘.


젊은 사내 명을 받아 나가고


강동환 : 이번 윤 회장 도움에 감사도 드리고


윤 회장 :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좌불안석입니다. 힘껏 했습니다만 너무 약소했습니다.


강동환 : 인사는 대충 차렸으니까 본론으로 들어갈까요?


윤 회장 : 경청하고 있습니다.


강동환 : 우린 윤 회장에게 기대하는 바가 큽니다.


윤 회장 : (여유 있는 표정을 견지하여)


강동환 : 기업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재벌들도 물론 있지요

그러나 그 사람들은 아까도 보셨지만 뿌리가 없어요.

기본적으로 양 다리 세 다리 네 다리를 걸치고 사는 사람들이에요.

그 사람들한테는 도움을 받으면서도 항상 뒤통수가 서늘해요.

우린 믿을 수 있는 우리 편이 필요합니다. 내 말 이해하시겠습니까?



# 47 복도


윤 회장 장도식, 민 변호사 걸어 나오고 있다.


윤 회장 : (심기가 편치 않다) 대체 얼마를 원하는 건가?


장도식 : 생각하는 이상일 겁니다.


윤 회장 : 카지노 허가권을 유지하기 위해 카지노라도 팔라는 건가?


장도식 : 다른 방법이 있을 겁니다.


윤 회장 : 내 집까지 팔까?


장도식 : 정상적인 방법을 원했다면 굳이 윤 회장님을 택하진 않았을 겁니다.


윤 회장 걸음을 멈추어 본다.


장도식 : 이 정권을 안정시키는 게 첫째입니다.

그 다음에 윤 회장님의 안정이 있는 거지요.


윤 회장 : 장 선생 많이 높아졌구만.


장도식 : 말씀드렸잖습니까. 전 높아지는 데는 욕심이 없습니다.

이 나라를 조화롭게 만드는데 흥미를 느낄 뿐입니다.

힘과 돈과 이 나라 사람들이 조화롭게 되면 그 게 제 낙이지요.

믿어주십시오. 전 윤 회장님을 좋아합니다.


윤 회장 잠시 장도식을 바라본다.



# 48 윤 회장 집 전경



# 49 현관 쪽


정원사가 신문을 들고 들어온다. 재희 신문을 받아든다.

무심코 신문을 보다가 멈춘다. 일면에 크게 나와있는 제호.

[계엄사 광주사태 수사결과 발표]

(1980년 7월 3일자)

재희, 뭔가 생각되는 게 있는 듯.



# 50 혜린의 방


여전히 구석 자리에 있는 혜린의 앞에 놓여지는 신문.

새 것인 그대로 칼같이 접혀져 있는 대로 커다란 제호가 보이 게.

그러나 혜린은 여전히 촛점없는 눈으로 미동도 없다.

커튼은 닫혀진 채 어두컴컴한 대로.



# 51 정원


혜린이 늘 앉던 그네.

재희 그네의 줄을 살펴본다.

재희는 기다리고 있다.



# 52 혜린의 방


문이 열리며 재희, 식사 쟁반을 들고 들어온다.

혜린의 구석자리에 있는 테이블에 쟁반을 놓는다.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있는 혜린.

재희 눈으로 신문을 찾는다.

아까 놓았던 자리와는 다른 곳에 접혀져 있다.

재희, 들어본다.

일면이 보이 게 처음처럼 접혀져있기는 하지만 가장자리가 줄이 맞지 않는다.

분명히 보고나서 다시 접어놓은 상태.

재희 말없이 신문을 들고 나가려다가 문 앞에서 멈춘다.

돌아본다.

여전한 혜린.

재희, 문득 신문을 팽개치더니 다가가서 테이블 채로 들어 방의 가운데에 가져다 놓는다.

그리고는


재희 : 가운데로 와요.


혜린 듣지 못한듯.


재희 : 구석자리 거긴 아가씨 자리가 아닙니다. 가운데로 오세요.

(재희, 평소의 절제된 감정, 목소리 톤은 잃지 말 것.)


혜린 그대로…


재희 성큼성큼 다가가더니 다짜고짜 혜린의 팔을 잡아 가운데로 끌고 온다.

혜린, 생각이 없는 사람처럼 끌려온다.

재희 혜린을 테이블 앞에 앉힌다.

그러더니 창문으로 가서 커텐을 확 열어젖힌다.

한꺼번에 방에 들이차는 여름햇살.

혜린, 기겁을 하여 두 팔로 얼굴을 가린다.

재희, 혜린의 두 팔을 잡아 얼굴에서 떼어낸다.

혜린 눈을 감은 채 팔을 빼내려고 기를 쓴다.

재희 더욱 굳게 움켜잡은 채


재희 : 놓을까요? 놓기를 바래요? 그럼 놓으라고 해요. 손 떼라고 해요.


둘이 실갱이를 하는 사이 테이블이 걷어차지고 음식들이 깨지고 구른다.


재희 : 언제까지 이럴 겁니까? 언제까지 속일 거예요?


순간 혜린 비명처럼 소리를 지르며 팔을 빼낸다.

손이 자유로와지는 순간 혜린 저도 모르 게 재희의 따귀를 후려친다.

잠시 사이 재희가 고개를 돌려 혜린을 보았을 때. 혜린은 헐떡이며 재희를 노려보고 있다.

처음으로 촛점을 잃었던 눈에 촛점이 돌아와 있다.

재희 목이 메이는 기분.


재희 : 그래요, 그렇게 해요.


재희를 노려보고 있던 혜린, 차츰 속으로부터 울음이 솟구쳐 오르기 시작한다.

눌러보려고 하지만 누를 수가 없다.

비명처럼 울음을 터뜨려버리고 만다.

울며 앞에 선 재희의 가슴을 있는 힘을 다해 치기 시작한다.

치다가, 치다가 재희의 앞자락을 움켜잡더니 고개를 파묻고 섧게 운다.

재희 움직이지 못한 채 서 있다가 혜린이 무너져내리는 대로 무릎을 꿇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조심스럽게 우는 혜린을 감싸 안아준다.



<9회 끝>


'소설방 > 모래시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11회> 모래시계   (0) 2018.10.25
<제10회> 모래시계   (0) 2018.10.25
<제8회> 모래시계   (0) 2018.10.18
<제7회> 모래시계   (0) 2018.10.18
<제6회> 모래시계   (0) 2018.1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