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모래시계

<제8회> 모래시계

오늘의 쉼터 2018. 10. 18. 19:48

<제8회> 모래시계   




# 1 도청


어스름 저녁 무렵.

태극기의 하기식이 거행되고 있다.

정중하게 국기의 줄을 당기고 있는 시민 두 명,

하나는 구겨진 신사복 차림. 또 한 명은 머리에 띠를 두르고 있다.

그 뒤에서 가슴에 손을 얹고 보고 있는 시민 몇 명.

총을 들고 군인에게서 뺏은 화이바를 쓰고있거나 띠를 두르고 있어 시민군임을 알 수가 있다.

도청은 이제 시민군에게 접수된 상황이다.


(21일 저녁 )



# 2 도청 마당


한 쪽에서는 총을 쌓아놓고 줄을 지어 선 지원자들에게 나누어주고 있고

한 쪽에서는 총을 든 자들에게 총을 쏘는 법을 교육 시키고 있다.

교육자 앞에 줄을 지어 선 사람들은 각양각색의 옷차림을 하고 있다.

교련복을 입은 고등학생에서부터 계엄군의 화이바를 주워 쓴 사람도 있다.

계단 위에 올라선 예비군복 차림의 교관이 연설 중이다.


교관 : 요것이 안전장치라는 것입니더.

요 것을 풀고, 방아쇠만 당기면 총알이 나가는 것이고,

총알을 맞으면 사람이 죽 게 되있십니더.

그란데, 요 총알에는 눈이 없어예, 내 말 무슨 말인지 알겠지예?

오발사고에 각별히 주의해달라,

이 말입니더. 보소보소 거기 둘째줄 빨간 셔츠 아재, 총을 우째 들고 있는교.

그러다 앞 사람이 맞으면 아제가 책임질랍니까?


이만치 총을 나누고 있는 장소.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던 중학생 한 명, 총을 나누던 청년에게 머리통을 얻어맞고 있다.


청년 : 야 임마, 말 안 들을래? 집에 못 가!


중학생 : 나두 총 쏠 수 있어라.


청년 : 전쟁놀이 하는 줄 아냐. 집에 가 얼른.


엉덩이를 때려서 쫓는다.

쌓아놓은 무기 앞에서 주민등록증을 보아가며 총을 나누고 있는 청년들.

총을 나누는 사람들 중에 진수가 있다.

또 한사람에게 총을 건네주고 힐끗 앞을 본다.

저만치 혼자 서서 주위를 둘러 보고있는 태수.

진수, 에잇 자리를 떠서 태수에게로 다가간다.

계속 따라다니는 태수가 아무래도 신경이 쓰인다.

결론을 내야할 것 같으다.

태수 다가오는 진수를 물끄러미 본다.


진수 : 형, 아무리 그래도 소용없소. 나 델고 갈라고 하는 것이면,

그 얘기는 볼쎄 끝나부렀소. 이 사람들을 내뻔져두고 나만 들어갈 수는 없지라.


태수 : (끄덕이더니) 그래 그런 것 같어.


진수 : 그러면 뭣땀시 자꼬 따라당기시오. 나 참말로 뒷통수 땡겨 죽겄네 제기.


태수 : (진수와는 상관없이 교육받는 쪽을 보고 총을 나눠주는 쪽을 보고)

주민등록증만 있으면 총을 주냐?


진수 : 예?


태수 : 전과조회는 안 해? (농담 했다는 듯이 웃더니 총을 나눠주는 쪽으로 간다)


진수 : (벙해서 따르며) 형.


태수 : 느 어머니께 약속했다. 너 살려서 델구간다구.


진수 걸음을 멈추고 본다.

가는 태수, 총을 받아드는 태수.

총을 하나 들어 살펴보는 태수의 옆얼굴.

진수, 제에기, 머리를 벅벅 긁다가 그만 비식 웃음이 새어나온다.



# 2 거리 전파상 앞


몇 명의 시민들이 구경하고 있는 유리창 너머로 텔레비전에서

이희성 사령관이 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이희성 : 경고1, 지난 18일에 발생한 광주지역 난동은 치안 유지를 어지럽게 하고 있으며,

폭력으로 치안 유지를 어지럽게 하는 행위에 대하여는 자위를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권한을 소지하고 있음을 경고합니다.



# 3 거리


지나쳐가는 방송차, 여자의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나온다.

방송 : 광주 시민 여러분. 방송과 신문은 거짓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에 우리 시민군은 우리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광주 외곽지역으로 나갈 것입니다.

 뜨거운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거리의 시민들이 박수를 보낸다.



# 4 거리 수퍼마켓 앞


종업원이 빵과 우유를 박스째 밖으로 내어놓고 있다.

밖에서는 주인이 빵을 들어 지나가는 시민군들의 트럭에 던져주고 있다.

트럭 위의 시민군들은 총을 들고 혹은 머리에 띠를 두르고 무장을 하고 있다.



# 5 거리


진수와 태수가 탄 트럭이 시장 앞 거리에 서 있다.

총을 든 무장 시민군들이 타고 있는 트럭이다.

길가의 아줌마들이 바가지에 물을 떠서 시민군들에게 올려주고 있다.

바가지의 물을 마신 태수, 진수에게 건넨다.

시원하게 마신 진수


진수 : 오메 시원한 거. (바가지를 아줌마에게 건네는데)


태수 : 진수야.


진수 : 예. (돌아보면)


태수가 턱으로 가리키는 곳, 거기 사람들을 헤치고 앞으로 다가오고 있는 교련복 차림의 명수.


진수 : 얼레.


명수 : (반가워서) 형. (하더니 트럭에 타려고 한다)


진수 : 너 시방 뭐하는 것이냐?


명수 : 나두 갈겨. (트럭에 반쯤 얹었다)


진수 : (트럭에서 뛰어내리더니 다짜고짜 명수를 끌어내린다)


명수 : (반항하며) 형만 사낸 중 아는가? 나도 사내여.


진수 : 입 닥쳐어 꼬매불기 전에.


명수 : 우리 반 내 짝도 총들고 나갔는디.


진수 : 어무니 알기 전에 어여 집으루 가. 가서 내 봤단 소리도 말고.


명수 : 고로켄 안 되겄는디.


진수 : 뭣이여?


명수 : 저어기.


진수 명수가 가리키는 곳으로 돌아보다가 굳는다.

거기 진수의 모친이 다가오고 있다.


모친 : 진수야, 진수야.


진수 외면을 한다.

그냥 차에 올라탈까 생가하는데 모친 옆에까지 헐떡이며 와서


모친 : 진수야 귓구멍이 쇠말뚝을 쳤냐?


진수 : (벌컥) 왜 자꾸 불러싸요? 나가 시방 숨넘어가요?


모친 : 이눔의 자슥. (진수를 펑 때리고)


진수 : 글시 어무니가 무슨 말을 혀도 소용 없응 게, 명수나 데불고.


모친 : (주먹으로 펑펑 때린다)


진수 : 아야 아야.


모친 : (겨우 분이 풀려 씩씩대더니 손가락의 반지를 낑낑 뺀다)


진수 : 뭐합니까?


모친 : (반지를 건네주더니) 끼구 가그라.


진수 : 반지는 무신…


모친 : 너도 죽어나온 송장들을 봤겄지만,

이리저리 깨져서 얼굴을 알아볼 수가 없지 않드냐.

그란 게 이 반지를 끼고 있으라 이 말이다.

그래야 만에 하나 무신 일이 나드라도 나가 널 알아볼 수 있지 않겄냐.


진수 반지를 받아든 채 말이 막힌다.

진수 모친, 트럭위의 태수에게로 오더니


모친 : 작업반장님.


태수의 손을 찾아 두 손으로 쥐고


모친 : 반장님만 믿고 가겄소, 내 말 알겄지요.


태수 : 예. (웃어 보인다)


모친 더 이상 진수 쪽은 보지도 않고 명수의 손을 끌어 잡더니


모친 : 가자.


명수 : 어무니.


명수 뒤를 돌아보며 어머니에게 끌려간다.

사람들 틈으로 사라져가는 모친…

태수, 진수를 돌아본다.

진수, 반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트럭 쪽으로 돌아서는데 수그린 얼굴은 찔끔찔끔 울고 있다.



# 6 다리 뒤 쪽


헬기가 선회하고 있다.

집결한 우석의 부대, 헬기에서 공수되는 탄약과 식량 상자들…

그 상자를 수거하는 우석의 중대원…

강 일병, 감격스럽게 식량 상자를 들어낸다.


강 일병 : 먹을 거다. 먹을 거여


뒤에서 중대장 버티고 서서 소리 지르고 있다.


중대장 : 실탄부터 챙겨 실탄상자!


중대장의 옆에 탄약상자를 풀어헤치는 우석.

중대장이 중얼 거리는 소리를 듣는다.


중대장 : 실탄만 있으면 먹을 건 절로 생기는 거야.


우석, 잠깐 손동작을 멈추었다가 마저 푼다.

거기 가득 들어있는 실탄들…



# 7 집결지 일각


어둠이 깃들고 있다.

중대장, 중대원들을 모아놓고


중대장 : 현재 광주시내는 차단되어 있다.

폭도들은 어떻게든 저지선을 뚫고 외곽으로 진출하려고 할 것이다.

우리가 지키는 이 다리는 적들의 일차 목표가 될 수 있다.

이에 우리는 목숨을 걸고 이 다리를 사수한다.

쥐새끼 한마리 통과시켜선 안 된다. 작전은 간단하다.

누구든 접근하면 발포한다. (시선을 천천히 돌려 멈추는 곳. )


우석과 시선이 마주친다.


중대장 : (우석을 바로 바라보며) 잊지 마라.

적들은 간첩의 사주를 받고 있고 총을 들고 있다.

지금은 전시상황이다.



# 8 다리 초소


우석과 강 일병, 그리고 또 한 병사가 한조가 되어 매복중이다.

병사 한 명은 모포 한 장을 덮고 잠이 들어 있다.

우석과 강 일병이 보고 있는 다리 앞길 …

그리고 어둠…

강 일병 추위에 몸을 움추리다가 생각난 듯 주머니에서 라면을 꺼낸다.

이미 튿어져 있는 생라면을 조금 부숴서 입에 넣고 우물우물 씹는다.


강 일병 : 죽었으까, 그 아이 말여. 동맥이 끊어졌으면 죽었겄재.


우석 :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 어둠 속의 소롯길만 보고 있다)


강 일병 : (스프 봉지를 찢어 조금 입속에 털어 넣어 우물 거리며)

참말로 간첩들이 백혀있을까이, 있겄재?

안 그러고서야 그렇게 죽자고 뎀빌리가 있는가?


우석 : …….


강 일병 : 너도 고로코롬 생각허재, 간첩들이 선동하고 있다고 말여. (우석을 돌아보지만)


우석 : (여전히 미동도 없다)


강 일병 : 우리가 첨부터 너무 팼는가.

그려도 부마사태때는 첨부터 오지 게 팼드마 조용해지더라미.


우석 : 졸리면 자라. 내가 깨있을께.


강 일병 : 나 말여 사람들 팰때 화이바를 푹 쓰고 팼구먼. 날 알아보는 사람이 있으면 어쩔겨?

워메, 이 게 누구여 ? 강 씨네 둘째 아녀. 나여 나 ….이러고 달려들면 워츠켜.


우석 : (짜증스레) 안 잘 거야?


강 일병 : (움찔해서) 워메 놀라겄네.


우석, 에잇해서 뒤로 길 게 드러눕는다.

밤…바람 소리…


강 일병 : (중얼중얼) 하필이면 요때에 군대에 들어왔을꼬이. 재수를 했등가,

대학교 일학년때 확 군대를 끝내버리는 것인디…


우석, 한 팔을 들어 눈을 가린다.

그 손에 차츰 힘이 들어가며 주먹이 쥐어지고 부르르 떨린다.



# 9 공터


몇 대의 트럭이 서 있다.

시민군들이 모여 있다.

예비역 교관 트럭에 올라서서 얘기하고 있다.


교관 : 들으신 바와 같이 광주시 외곽으로 통하는 길은 계엄군들에 의하여 막혀있십니더.

그로코롬 막아놓고, 쌀가마니 하나 안 들여주는 것은 괘않십니더.

까짓 거 이웃끼리 나눠먹고 줄여먹고 그랄 수 있어예.

문제는 밖에 사람들이 우리 소식을 너무 모른다는깁니더.

몰라도 너무 몰라예, 신문도 방송도 거짓말만 치구 있으니까네…


모여선 사람들 중에 한 명이


시민 : 그란디요, 교관님은 고향이 어딘고라?


교관 : 아따 몰라서 묻습니꺼. 내 고향은 대한민국 아닙니까?


사람들 사이에서 와르르 웃음이 터져 나온다.


교관 : 현재 주민등록은 광주시로 돼있고예, 처자식하고 가 게도 여기 있십니다.

몇몇이 박수를 친다.


사람들 중에 태수와 진수가 있다.

진수 웃으며 박수를 치고 있다.


교관 : 자자 고만하시고 본론입니더. 인자부터 광주시민 기동타격대를 뽑겠십니다.

우쨌 거나 한사람이라도 내보내서 우리 소식을 알려야겠다 마 그래서 목숨을 걸고

놈들이 지키고 있는 길목을 뚫어보자 그래서 인자부터 지원자를 받겠십니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나요 나요 손을 들고 앞으로 밀려나오는 사람들…

진수도 더 생각할 거 없이 앞으로 나선다.

뒤에 섰던 태수, 잠깐 성가신 얼굴이 되지만 따른다.

앞서가던 진수 돌아본다.

그 앞으로는 사람들이 교관에게로 몰려가고 있다.


진수 : 이럴 필요꺼정은 없는디요


태수 : 내가 빠지면 너두 빠질래?


진수 : 그럴 수는 없지라


태수, 진수의 등을 밀어 사람들에게로 간다.



# 10 밤 무등산 산자락 아래 쪽


시민군들 조심스럽게 산을 오르고 있다.

진수, 앞서겠다는 욕심에 겅중겅중 걸어간다.

태수, 진수의 목덜미를 잡아 걸음을 멈추게 하고 주위의 사람들을 돌아본다.

훈련 받지 못한 사람들답게 총은 들었으나 어정어정 두리번거리며 걷고 있다.

나뭇가지 밟히는 소리에 한 사람 화들짝 놀라고 있다.

태수, 걸음을 빨리하여 앞서가던 예비역 교관을 잡는다.


태수 : 이대루 몰려가면 위험하지 않을까요?


교관 : (긴장이 잔뜩 되어있는 상태로) 맞십니더. 우짤까예?


태수 : 제가 앞장 서지요. 사람들 조를 나누 게 해서 분산시키는 게 어떨까요?


교관 : 그라입시더 (낮은 소리로 ) 보소, 전달. 스톱하라카이소. 전달, 스톱.

태수, 앞서 나간다.


진수 부지런히 따른다.

태수 돌아보더니


태수 : 넌 뒤루 빠져.


진수 : 그럴 수는 없지라.


태수 : (잠깐 사이…) 니가 형님할래?


진수 말 못하고 멈춘다.

태수, 진수의 뒷 쪽을 본다.

예비역 교관이 조용조용 사람들을 모으고 있다.



# 11 무등산 윗 쪽


중대장, 무전병을 데리고 걸으며 각곳에 경계 근무 중인 중대원들을 점검해보고 있다.



# 12 무등산 우석 쪽


강 일병은 모포를 쓰고 잠이 들어있고, 우석, 깨어 있다.

그 때 뒷 쪽에서 부시럭소리.

우석 절컥 장전하며


우석 : 손들어.


어두운 그림자 멈춰 선다.


우석 : 서울.


중대장 : 탱크. 중대장이다.


우석 얼른 총을 내린다.

중대장, 뒤에서 나온다.

자고 있는 강 일병을 보고 다시 우석을 보고


중대장 : 어이 대학생.


우석 : 예.


중대장 : (딴말이 있는 듯 하지만)…자지 마라.


우석 : 예.


중대장 : (가려다가 다시 오더니 우석의 옆에 앉는다.)

그리고. 생각도 마라. 내 말 알겠나. 아무 생각도 하지 마. 지금 니 할일만 해 적이 오면 쏴라.


우석 : ……예.


중대장의 뒤에서 무전병, 무전기를 조절하고 있다.

우석, 왠지 맥이 빠지는 기분.

중대장과 나란히 앉아 보는 하늘엔 반달이 떠 있다.



# 13 무등산 태수 쪽


태수, 달빛에 의지하여 어두운 수풀을 조심스레 헤치며 기어오른다.

윗쪽 주변의 기척을 살핀다.

조용하다.

아래쪽을 돌아본다.

거기 납작하게 엎드려 태수를 보고 있는 진수와 몇 사람들…

태수, 손짓을 한다.

아래쪽의 사람들 조심스레 오르기 시작한다.

진수가 앞장을 서고 그 뒤로 한사람, 그리고 또 한사람…

그 뒤로 대학생이 따른다.

대학생의 손에 쥐어져있는 총…

대학생, 순간 발이 걸리며 고꾸라질 뻔 한다.

그 손에서 떨어지는 총.

땅에 떨어지는 순간, 정적을 깨는 총소리.

태수, 후딱 돌아본다.



# 14 무등산 우석 쪽


우석 엄폐물 뒤로 엎드리며 총을 겨누어든다.

중대장 무전병에게


중대장 : 뭐야


무전병, 무전기를 조작하고, 잠들었던 강 일병 놀라 깨어난다.



# 15 무등산 교관 쪽


교관 다급하게 낮은 소리로 외쳐댄다.


교관 : 숨으이소, 아무데나 숨으소, 퍼뜩 대가리 박고.


교관 주변을 따르던 시민군들 급히 지형지물을 찾아 엎드린다.

그러느라고 요란한 소리가 난다.

그 중 하나 에잇 계엄군 쪽을 향해 총을 쏘아대기 시작한다.



# 16 우석 쪽


양 쪽에서 쏘아대는 총소리가 요란한데 엄폐물 뒤에 숨어 총을 겨눈 채

적을 찾지 못하고 있던 우석과 강 일병, 무전을 받고 있는 중대장.

순간 강 일병이 외친다.


강 일병 : 저기다


외침과 동시에 총을 쏘기 시작한다.

우석도 본다.

저 아래 숲 속에서 희뜩희뜩 뛰고 있는 시민군들…

우석 총을 겨눈다.

그 옆에서 중대장이 쏘는 탄피가 튄다.

순간 억 소리와 함께 강 일병이 뒤로 나가넘어진다.

우석, 끌어 잡는다.


우석 : 뭐야 왜그래?


강 일병 가슴을 부여잡고 있던 손을 내린다.

피가 물들이고 있다.


우석 : 위생병!



# 17 뒤의 일각


우석 강 일병을 끌어 잡아 머리를 숙이고 뛰고 있다.

저만치 위생병이 고개를 숙이고 달려온다.

우석, 강 일병을 넘겨주려는데 강 일병 우석의 옷자락을 잡은 손을 놓지 않는다.


강 일병 : 나 워쪄.


우석 : (그제야 비로소 강 일병의 상태를 보았다)


강 일병은 헐떡이며 죽음에 가까와져가고 있다.

위생병 재빨리 응급처치를 하기 시작하고


강 일병 : (기를 쓰고 얘길 하고 있다) 나가 죽겄냐, 나가 죽으까. 어무니, 어무니이,

우석, 정지되어 있다.



# 18 교관 쪽


윗 쪽으로부터 사격을 받고 있다.

교관 미친 듯이 응사를 하며 몸을 굴려 바위 뒤로 숨는다.

순간 옆의 시민군 한 명이 총에 맞아 비명을 지르며 구른다.

교관 정신없이 소리를 질러댄다.


교관 : 숨으라카이. 거기 나무 뒤로 숨으라꼬


하고 외치면서 안타까운 마음에 저도 모르 게 머리가 바위 위로 나온다.

순간, 교관 총에 맞고 잠시 멍해지다가 이어 또 한발을 맞는다. 무너져 내린다.

순간 주위가 대낮같이 밝아진다.



# 19 태수 쪽


조명탄이 오르고 있다.

정신없이 미끄러지고 구르며 도망쳐가는 태수 쪽 사람들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태수 : 엎드려


사람들 허겁지겁 엎드리고 숨는 사이 이쪽을 향하여 총알이 날아들기 시작한다.

어쩔 줄 모르고 우왕좌왕하던 대학생 총알에 맞는다.

엎드렸던 진수, 바로 자기 옆으로 굴러와 멎는 대학생을 본다.

대학생은 헐떡이며 진수를 본다.

다리를 움켜쥐고 있다.

진수, 순간 이성을 잃는다.


진수 : 개새끼들…


벌떡 무릎을 세워 앉더니 위를 향해 총을 쏘기 시작한다.

태수 그를 본다.


태수 : 진수야


땅을 기듯 달려와 진수를 잡아챈다.

그러나 막 진수의 옷자락을 잡기 전 진수는 벌떡 일어나더니

총을 쏘며 소리를 지르며 위를 향해 달린다.


진수 : 그만두란 말여, 그만혀어.



# 20 우석 쪽


엄폐물을 향하여 날아오는 총탄 . 진수가 쏘아대는 총소리 특별히.

우석 중대장의 옆으로 굴러들어온다.

밑에서부터 날아오는 총알은 이내 멈춘다.

총알이 떨어진듯 절컥거림.

순간, 중대장, 자동으로 절컥 놓더니 재빨리 상체를 일으키며 총을 쏘아댄다.

우석도 상체를 일으킨다.

그리고 본다.

그 아래 쪽 소롯길에 총에 맞아 쓰러지는 진수.

소롯길 옆의 숲에서 이쪽을 향하여 총탄이 날아온다.

중대장 머리를 숨긴다.

다시 터져 오르는 조명탄,

머리를 숨기던 우석, 놀라 다시 본다.

숲에서 튀어나오는 사내, 태수.

이쪽을 향하여 있는 대로 총을 쏘아대다가 총탄이 떨어지자 총을 던져버린다.

우석의 옆에서 상체를 일으키는 중대장.

우석, 자기도 모르 게 중대장의 총을 잡아 눌러버린다.

그러면서 우석 다시 본다.

조명탄 불빛 아래 진수를 들쳐 업고 일어서는 그 얼굴 태수다.

놀라 총을 빼내려는 중대장.

우석, 있는 힘을 다해 중대장의 상체를 잡아 누른다.

뒤엉켜 쓰러지는 중대장과 우석.



# 21 밤


호젓한 길

태수, 진수를 어깨에 둘러메고 힘겹 게 걸어오고 있다.

걸으며 태수, 계속 말을 걸고 있다.


태수 : 조금만 참아라, 다 와 간다.

좀 참아, 어이 진수야, 진수야. (대답 없음에 걸음을 멈추어) 진수야.


진수 : (간신히) 어 형.


태수 : (안심이 되어 다시 걷기 시작하며)

그래, 말하지 마라. 힘쓰지 마. 조금만 참아. 다 와간다.


태수, 비틀 거리면서도 계속 걷고 있다.

그러다 힘에 부쳐 넘어진다.

태수 황급히 진수를 보듬어 안 는다.


태수 : 괜찮니? 미안 하다, 내 다시 업을 게, 조금만 참아.


태수, 있는 힘을 다해 진수를 다시 어깨에 둘러메려다가 문득 이상한 예감.

진수의 얼굴을 받쳐본다.


태수 : 진수야 어이 진수야 야 임마


그러나 태수의 팔에서 힘없이 떨어지는 진수.

태수, 단념할 수가 없다.

진수의 가슴에 귀를 대어 들어본다.

어쩔 줄 모르는 대로 가슴을 눌러 충격을 주어보고 흔들어보고 다시 귀를 대어본다.

아무런 기색이 없다.

태수 어쩔 줄 모르고 진수를 끌어안아 흔들다가 운다.



# 22 계엄군 쪽


부상자들이 운반되어가고 있거나 치료를 받고 있다.

(그렇게 많지는 않음)

그 중에 강 일병의 시 체가 있다.

얼굴 위로 덮개가 덮여진다.

그 옆에 우석이 멍하니 서 있다.

강 일병의 시 체가 운반되고 있다.

우석, 그저 서 있다.

그 주위로 전투 뒤끝의 군인들의 움직임….



# 23 도청 앞


벽에 사망자 명단이 붙고 있다.

그 앞에 가득이 모여 명단을 보려고 애쓰는 시민들…

그 중, 명단에서 이름을 발견한 여인네, 남편의 품에 쓰러지며 오열을 한다.

이름을 찾는 사람들의 공포에 가득한 표정들…



# 24 상무관 앞


간이 책상을 놓고 행불자 접수를 받고 있는 대학생들…

그 앞에 끝없이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시민들…

교련복의 고등학생들이 안내를 하고 있다.

그 시민들 뒤로 또 하나의 급조한 관이 들어가고 있다.

관을 메고 있는 젊은이들…

그 뒤를 울며 따르는 가족.

관이 지나는 길에 사람들, 비켜서 길을 터주며 모자를 벗거나 두 손을 모은다.

관 위에는 대형 태극기가 덮여 있다.



# 25 상무관 내부


끝없이 늘어져있는 관들….

중년의 사내 한 명 벽에 머리를 찧으며 절망하고 있다.

그 뒤로 명수의 부축을 받으며 들어오고 있는 진수 모친. 우뚝 멈춰선다.

따르던 여동생들도 멈춘다.

진수의 관 옆에 웅크려있던 태수, 고개를 돌려 진수 모친을 본다.

일어선다.

진수 모친, 태수를 보고 관을 보고, 그러다가 문득 옆을 지나가던

교련복의 고등학생이 들고 있는 대형 태극기를 보고


모친 : 학생 그거 나 줘도 되겠는가.


학생 상황을 알고 태극기를 건네주더니 고개를 숙여 보이고 간다.

모친 태극기를 받아 관으로 다가온다.

마치 화가 난 사람처럼 썰렁한 관 위에 태극기를 덮는다.

이리저리 펴서 잘 덮어주고 이제 더 이상 주름을 펼 곳이 없다.


모친 : 진수야


이름 끝에 오열이 묻어나온다.


모친 : 야 이눔아, 에이 이 못된 놈아, 진수야아.


결국 관을 끌어안으며 쓸어내리며 모친 무너지듯 오열한다.

그런 모친의 뒤에서 명수도 흐느끼고, 태수.

우두커니 서 있다.



# 26 도청


바람에 날리고 있는 태극기.

조기로 내려져서 검은 띠가 묶여져 있다.



# 27 진수 식당 앞


모친 닫혔던 모든 문을 활짝활짝 열고 있다.



# 28 식당 내부


모친, 커다란 솥을 터엉 내놓는다.

거기에 씻어놓은 쌀을 와장창 붓는다.



# 29 식당 앞


열려진 식당 문 안 으로 동네 여자들이 바쁘게 일하는 모습이 보인다.

여자들은 엄청난 양의 주먹밥과 김치를 만들고 있거나 큰 양푼에 담고 있다.

진수 모친이 그 중심으로 지휘를 하고 있다.

식당 앞에는 커다란 통이 나와 있어서, 시민들,

저마다 봉지에 들고 온 쌀을 넣고 있다.



# 30 길거리


지나는 시민군의 트럭에 올려지는 주먹밥과 김치. 물병…

음료수를 상자째 들어올려주는 모습도 보인다.

주먹밥을 먹는 시민군들의 초췌한 모습들…



# 31 경찰서 앞


대학생들이 벽보를 붙이고 있다.

매직으로 급히 쓴 큰 글자는

[본 광주 경찰서는 우리의 재산. 기물 파괴는 세금의 과중. 스스로 보호합시다. 학생 일동]



# 32 거리


시민들이 거리 청소를 하고 있다.

노인들은 쓸고 젊은이들은 쓰레기를 나른다.

어린아이들도 돕고 있다.



# 33 광주 시내 일각


밤이 되어가고 있다.

사람들 모여 대토론회가 계속되고 있다.

연단에 선 나이든 사내가 말하고 있다.


사내 : 군인들만 철수하면 경찰에 의해 얼마든지 수습할 수 있다.

우리끼리 잘 해나가고 있는데 왜 찬물을 끼얹느냐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들은 척도 안 해요


이만치에 태수가 있다.

총을 안 고 피곤하여 기대 앉아 있다.

우울한 눈빛을 들다가 흠칫하여 본다.

저만치 진수 모친이 걸어오고 있다.

태수, 얼른 일어난다.

모친, 태수를 본다.



# 34 일각


사람들 사이를 걸으며 태수와 진수 모친.


모친 : 오늘 밤쯤에 놈들이 공격해 올 거라는 것이 참말인 게라.


태수 : 그럴 거란 얘기가 있습니다.


모친 : 이번에는 탱크여 뭐여 완전 전쟁판을 벌일 거라든디.


태수 : 공격을 해온다면 그렇겠지요.


모친 : 그려서 싸우고 잡은 남정네들은 몽땅 도청으로 모인다고.


태수 : 예.


모친 : (걸음을 멈춘다) 우리 명수가 거기 도청에 있다고 하는구만.


태수 : (놀라 보는)


모친 : 나 그놈 얼굴 한번만 보고 잡은디.


태수, 선뜻 모친의 팔꿈치를 잡더니 사람들을 헤쳐 나가기 시작한다.



# 35 도청 뒷문


밤. 바쁘게 드나드는 시민군들…

그 중에 고등학교 교련복을 입은 명수의 친구인 경석, 반색을 하고 뛰어온다.


경석 : 명수 어무니, 저 경석입니다.


태수와 도착한 모친.


모친 : 오냐, 경석이 그려.


태수 : 명수 친구냐 ?


경석 : 예.


태수 : 명수 안에 있니?


경석 : 예 이 층에 있는디.


태수 : (모친에게) 제가 불러오겠습니다. 기다리세요 (가려는데)


모친 : (태수의 옷을 잡는다)


태수 : (멈추면)


모친 : 그려서 너두 여기 있는 거여?


경석 : 예.


모친 : 총 들고?


경석 : (손에 든 총을 들어보이며 밝게 웃는)


모친 : 느 어무니도 아시냐?


경석 : 예 말씀드리고 왔는디요. 어떻게든 도청은 지켜야겠다구,

그렸드니 그려, 그 건 그려, 그러셨어라.


모친 : 그려 그렸구먼 (태수를 본다. 망설임이 나타나 있다)


태수 : (자기 옷을 잡은 모친의 손을 잡아 가만 떼어놓고는) 기다리세요,

명수를 불러오겠습니다. 제가 명수 대신 남을 거니까 걱정마십시오. (웃어보이는데)


모친 : (문득 정신을 차려) 아녀. (경석을 향해) 경석아.


경석 : 명수 불러올 게라?


모친 : 아녀, (눈물이 그렁그렁하여) 널 봤으니 됐구먼. 널 봤으니 내 아들을 본 것 같다.


경석, 씨익 웃더니 거수 경례를 하고는 안으로 뛰어들어간다.

태수 안 되겠다 싶어 안으로 가려는데 그 옷자락을 부여잡는 진수 모친.


모친 : 반장님은 안 되여.


태수 : 어머님.


모친 : (들고 있던 수건으로 코를 풀고)

반장님은 타지 사람잉 게 살아있어야지라. 살아서 넘들한티 우리 얘길 해주시오.

우리 말은 안 믿을지 모른 게 반장님 같은 타지 사람이 해줘야지라.

이것이 나으 부탁이고 우리 진수의 부탁이여. 거절하지는 않겠지요이?


태수, 가슴이 막혀 도청 건물을 다시 본다.

그리고는


태수 : 이대루 그만두란 말씀이십니까?


모친 : 그려.


태수 : 제 후배가 죽고 그 동생이 죽는데두요?


모친 : 그려 나허구 집에 가.


태수 : 그럼 어머님, (눈물이 고인다) 저 앞으루 살면서 내내 괴로울 겁니다.


모친 : 그려 그렇겄지. 죽는 것이 편헌 것이지. 그려서, 그렇기 땀시, 부탁하는 거 아닌가요이.


태수, 눈물 고인 눈으로 모친을 보다가 단념하여 먼 곳을 본다.



# 36 도청 일각


반납되는 총들이 쌓이고 있다.

그 위에 또 하나의 총이 툭 던져진다. 태수가 던진 총이다.



# 37 광주 전경 (밤)



# 38 식당 옥상


태수, 올라와 보면 옥상 가장자리에 모친이 앉아 있다.

태수, 그 뒤에 앉는다. 어둠 속의 광주 시내



# 39 도청 내부


정적 속에 저마다 총을 들고 창문마다 지키고 있는 시민군들.

나란히 밖을 지키는 명수와 경석. 문득


경석 : 오늘 밤만 버티면 살 수 있으까?


명수 : 모르지.


경석 : 우리 중간고사 보다 말았는디.


명수 : 시험공부 다 했냐?


경석 : 외는 건 대충 혔는디 그놈의 수학이 문제여.


명수 : (문득 손에 집히는 것, 주머니에서 꺼낸다. 태수가 주었던 칼이다. 펴본다)


경석 : 오늘 밤만 버티면 살 수 있으까?


실내의 다른 시민군들…

쌓여져 있는 실탄 달랑 몇 상자.

먹다 남긴 김밥

벽에 걸린 태극기. 벽시계가 밤 두시를 넘고 있다.

경석, 총을 든 채 멍하니 창 밖의 밤하늘을 보고 있고,

그 옆의 명수, 주머니칼로 나무 바닥에 무언가 긁어 쓰고 있다.

어머…까지 완성되었다.

어머니의 ㄴ자를 파는데 …

하늘을 뒤흔드는 일제 사격소리 명수 멍하니 고개를 든다.

그 위에 타이프로 쳐지는 자막



# 40 옥상


천지를 흔드는 총소리 속에서 진수의 모친, 무너져 내린다.

모친을 받아 안 는 태수.

모든 것이 하얗게 바랜다.

그 위에 들리는 공수부대 군가.



# 41 도청 자료


늘어져 있는 시체들…

끌려나오는 포로들…

엎드려 포박당한 젊은이의 멍한 눈빛…

등등등…



# 42 일각


우석중대의 공수부대원들 줄을 지어 선 채 군가를 부르고 있다.

그 중에 우석이 있다.

동료들을 따라 몸은 흔들고 있는데 노래는 부르지 못하고 있다.

우석의 고개가 차츰 꺾여진다.



# 43 부산시 전경


광주의 혼란과는 상관없이 평화롭기만 한 부산시내며 부산시 전경.

광주의 혼란과는 상관없이 평화롭기만 한 부산시내며 항구의 모습이다.



# 44 양산댁 동네


밤이다.



# 45 양산댁 단칸방


밤. 불 끄고 잠이 들어있는 양산댁과 혜린, 그리고 선애 잠이 들었던 혜린, 얼핏 잠이 깬다.

어둠 속에서 들리는 소리.


소리 : 잘못했어예 살려주이소.


그리고 울음소리.

혜린 돌아보다가 일어나 앉는다.

어둠 속에서 선애가 눈을 감은 채 무릎을 꿇고 앉아 몸을 흔들며 울고 있다.


선애 : 잘못했어예 살려주이소.


그러더니 옷을 벗기 시작한다.

옷을 하나 벗어서는 두 손으로 허공에 바치는 시늉을 하며 머리를 조아리며


선애 : 잘못했어예 살려주이소.


혜린, 놀라 보고 있는데 양산댁, 늘 있었던 일인듯 일어나 다가가더니 옷을 뺏어 다시 입힌다.

선애는 잠을 자는 상태에서 몽유병 환자처럼 계속 몸을 흔들며 중얼 거리고 있다.

양산댁, 잠이 덜 깬 눈으로 선애를 안 아 자리에 눕힌다.

혜린이 쪽은 보지도 않고 선애의 이불을 덮어주고 다독 거려 준다.


양산댁 : 오냐. 됐다. 고마 자라. 됐다. 인자 됐다.


선애의 흐느낌도 차츰 잦아든다.

혜린 더 이상 그들을 보지 못하고 외면한다.



# 46 부둣가 창고 옆


혜린,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아 조개를 따고 있다.

주욱 늘어앉은 여자들…

떠들며 일하는 가운데 한 쪽에서는 수협에서 나온 이가 저울에 조개를 달고 있다.

양산댁도 저울질을 기다리는 줄에 서 있다.

혜린의 옆에 앉은 합천댁이 말해주고 있다.


합천댁 : 그 집 딸내미가 인천인가 공장에 안 다녔나,

으이고 차라리 술집에 팔렸는기 나았을긴데.


혜린 : 인천 어느 공장이요?


합천댁 : 어느 공장이라면 니가 아나? 뭐라카더라 동일방직인가 ?


혜린 : (합천댁을 돌아본다. 그 이름이라면 잘 알고 있다.)


합천댁 옆자리의 아낙이 자리를 치우며, 조개껍데기를 합천댁 쪽으로 밀어놓자,

합천댁,

발끈하여


합천댁 : 이짝으로 치우면 우짜노.

(조개껍데기 한뭉치를 그리로 밀어놓으며) 이 것도 니끼라. 자자.


아낙 실쭉해서 치워간다.


합천댁 : (중얼중얼) 여시같애가지구… 뭘 보나. 여시보고 여시라카는데.


아낙, 으유해서 간다.


혜린 : 공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요?


합천댁 : 무신 공장? 아 선애? 하이고 말 마라. 선애 그 것이…

(하다가 갑자기 입을 다문다) 내가 뭐 아는기 있나. 조개나 따는기지.


혜린 : 선애… 노동조합 했었어요?


합천댁 : (움찔해서 보는) 니가 우째 아노?


혜린 : 그랬군요.


합천댁 : (아무래도 입이 근질 거린다. 괜히 주위를 살피고 나직하게)

거기 노조에서 무슨 간부도 했다카드라 (주위 살피고 더 가까이 다가대어)

공장 가시나들이 수백 명이서 데모를 하는데 옷을 홀랑 벗고 했다 안 카나.


혜린 : 그런 게 아녜요.


합천댁 : 뭐가 아니고. 시집 갈 가시나들이 돈 몇푼 더 벌자고 옷을 벗어.


혜린 : (갑갑한 마음에 조금씩 이성을 잃어 자기 처지를 잊고)

돈벌자구 그런 게 아니구 노조를 만들겠다구 그런 거예요.


합천댁 : 그 게 그기지 뭐꼬 ?


혜린 : 옷두 그냥 벗은 게 아녜요. 그때 상황이 그랬어요. 며칠씩 기숙사에 감금돼서요,

밥두 굶구, 경찰들이 연행해 갈려구 들어오니까, 끌려가지 않을려구…


합천댁 : 하이고 그럼 경찰들 앞에서 벗었단 말이가.


혜린 : 회사에서 그애들한테 어떻게 했는 줄 아세요.

노조를 만든다구 그러니까 똥물을 갖다가 퍼부었다구요.

회의할려구 모여 있는 애들한테요. 그 얘기두 들으셨어요?


합천댁 : (갑자기 경계를 하며) 니도 그기 있었나.


혜린 : 아뇨. (앗차 정신이 든다) 그냥… 들었어요.


합천댁 : 니가 그걸 우째 들어. 신문엔 한 줄도 안 났다카든데


혜린 : 사람들이 얘기해줬어요.


합천댁 : 아이고. (혜린에게서 한 발짝 떨어져 앉으며) 야야 수상하네. 수상하면 간첩인기라.


혜린 : (어쩔까 하다가 웃음으로 때운다) 아니에요.


합천댁 : 하긴 뭐 니가 간첩이면 내는 좋재. 신고하고 보상금 받고. (말해놓고 웃는다.

그리고 한숨) 선애, 그 것이 그때 끌려가갖고 무신 일을 당했는지…

정신병원에 다섯 달쯤 있었는기라 돈은 돈대로 다 까먹고



# 47 양산댁 집 마당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있는 선애.

멀리 보이는 바다.

그 위에 계속되는 합천댁 소리


합천댁 : 노동청인가 어디서 명단을 쫙 돌리갖고 취직을 시켜줘야 말이재.

안 그래도 머리가 오락가락 하는 아가 시집이나 가겠나. 인자 인생 종쳤다. 종쳤어.


선애, 하늘을 본다.

눈이 부신 햇살을 걷어내듯 손으로 눈앞을 저어댄다.



# 48 아침 양산댁 마당


혜린, 물 뿌린 마당을 비로 싹싹 쓸다가 양산댁이 나서는 것을 보고 얼른 다가간다.

노점으로 들고나가는 함지박을 머리에 이는데,


혜린 : 아래까지 제가 들어드릴 게요.

양산댁 : 일없다. (자기 머리에 인다.)


혜린 : (할 수 없이 돕고 )


양산댁 : (나가며) 찬밥 있으니까 때 되면 챙겨 묵고.


혜린 : 예.


양산댁 : 선애 저 것도 좀 멕이고.


혜린 : 예, 다녀오세요.


양산댁 : (문득 걸음을 멈추어) 니 집에는 연락 안 할끼가?


혜린 : 봐서요.


양산댁 : (혀를 차고 가며) 으이그 꼭 니 닮은 딸만 낳그라.


혜린 웃으며 배웅하며 차츰 웃음이 사그러진다.



# 49 방안


들어서던 혜린 보면.

구석에 박혀있는 선애, 무언가를 하다가 얼른 감춘다.

그 옆에는 서랍장에서 빼낸 옷들이 즐비하니 늘어져 있다.

혜린 흠칫 놀란다.

선애가 들고 있는 커다란 가위가 눈에 들어왔다.

선애는 가위로 옷을 자르고 있던 중이다.

혜린 다가서며


혜린 : 이리 줘요 .


선애 더욱 웅크리며 고개를 젓는다.


혜린 : 가위 줘요. 얼른.


헤린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다.

혜린 잠시 조용하자, 선애 눈치를 보더니 다시 옷을 자르기 시작한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


혜린 : 그러지 마요


고 말해보지만 물론 아무 소용이 없다.

혜린 다가앉아 가위를 뺏으려든다.

선애 막무가내로 버틴다.

그러다 앗 짧은 비명을 지르며 혜린, 손을 뺀다.

가위에 찔린 손끝에 피가 배어나오고 있다.

혜린, 불끈 무언가 치솟으며 벌컥 달려들어 강제로 싸우다시피 가위를 뺏어낸다.

가위를 뺏긴 선애 삐지며 팽 벽을 향해 돌아앉는다.

혜린, 잠깐의 몸싸움에 지쳐앉았다가


혜린 : 이봐요. 정말 아주 미쳐버렸어요? 아무 것두 기억못해요?


등을 보이고 앉은 선애, 아무 일도 없다는듯 천정을 보고 있다.

혜린, 선애의 어깨를 잡아 자기 쪽으로 돌리고


혜린 : 나 동일방직 얘기 알아요. 선애 씨 거기 노조 간부였다는 거 맞아요?


선애의 눈이 혜린의 얼굴로 와서 멎는다.


혜린 : (희망이 생기며) 나 대학교 때 기독교 회관에서 당신들 봤어요.

(고개를 돌리려는 선애의 얼굴을 잡아 눈을 마주하고) 노동삼권 보장하라, 똥을 먹고는 살 수없다.


선애, 있는 힘을 다해 혜린을 밀치고 벽을 향해 숨듯 앉는다.


혜린 : 그 때 당신들이 한 얘기죠? 당신들 단식 농성하면서 쓰러지는 것두 봤어요.

(자기 생각에 빠지며) 나 당신들 얘기 들으면서 서클에두 들구 사회과학 공부도 했어요.

그러니까 나한테 당신들은 선생이에요, 내 말 들어요?


그러나 다시 본 선애는 돌아 앉은 채 이번에는 이빨을 사용해가며 옷을 찢고 있다.

혜린, 벌컥 그 옷을 뺏는다.

다시 뺏으려는 선애와 실갱이를 하며 화가 치솟아서


혜린 : 이러지 마요. 이러지 말라구. 당신 이러면 내가 미치겠잖아.

이러지 마. 이렇게 바보같이 굴지 말라구. 당신 이러면 난….


그러다 말이 막힌다.

옷을 뺏는데 성공한 선애, 구석으로 박혀서 숨었다.


혜린 : (기어코 눈물이 나온다) ….난 미치겠다구 아유 증말…

( 거칠 게 눈물을 닦는다) 증말 미치겠다구.

당신들 때문에 난 편히 살 수가 없다구우 무슨 말인지 알어? 어유 증말…


다리를 뻗고 앉아 혼자 울고 만다.

도피생활의 어려움이나 집 생각이 그냥 터져버리는 기분이다.

그렇게 우는 혜린을 선애, 힐끔 돌아본다.



# 50 양산댁 집의 동네 골목


선애, 늘 그러하듯이 슬렁슬렁 걷고 있다.

걷다가 담장을 이루고 있는 무늬를 유심히 보기도 하고 하늘을 쳐다보기도 한다.

문득 주저앉아서 신발에 묻은 흙을 꼼꼼히 닦는다.

그러다 후딱 고개를 들어본다.

가 게안 에서 나오고 있는 정복 경찰 두 명.

가 게 앞에 있는 순찰함을 열어보려는데, 순애, 벌떡 일어나더니 도망치기 시작한다.

갑자기 도망치는 순애를 보는 경찰들.

순애는 경찰을 돌아보며 도망치다가 넘어진다.

더 도망갈 생각도 못하고 머리를 감싸 주저앉았다.

경찰 다가서 선애를 툭툭 쳐


경찰 : 어이 무슨 일이야

선애 : (벌컥 두 손을 마주잡더니 머리를 조아리며 )잘못했어예, 살려주이소.


경찰들 마주보며 이 거 미친 여자 아니야,

하는 시선을 교환하는데 선애 불쑥 한 경찰의 다리를 잡더니


선애 : 우리 집에 있어예. (한 손을 뻗어 집 쪽을 가리키며)

대학생 우리 집에 숨었어예. 내가 아니라예, 대학생이라예.



# 51 간이부엌


혜린, 곤로를 말끔히 닦아놓는다.

양산댁, 방문턱에 걸터앉아 면장갑으로 몸빼 자락을 털며


양산댁 : 그래 어디로 갈라꼬?


혜린 : 그냥, 아는 친구네루 찾아갈까 하구요.


양산댁 : 아는 친구 누구?


혜린 : (웃고마는)


양산댁 : 니 광주 갈라꼬 하는 거 아이가 ?


혜린 : (움찔해서 보는)


양산댁 : 내도 알만큼 안 다.

선애 그 것 때문에 경찰서도 들락 거려보고, 노래도 몇 개 배웠고, 못 들을 소리도 듣고.


혜린 : 선애는 아직 안 들어온 모양이죠?


양산댁 : 말 돌릴 거 없다. 오냐 가는 게 맘이 편타면 가야재.

(앞주머니를 뒤져 돈을 꺼낸다) 차비나 하그라.


혜린 : 아녜요.


양산댁 : 받그라.


혜린, 말문이 막혀 보는데


양산댁 : 팔 떨어진다.



# 52 양산댁 대문 밖


혜린, 나오고 있다.

짐가방도 없이 단출한 차림.

양산댁 대문 안 에서


양산댁 : 가다 못가겠거든 돌아오고.


혜린 :


꾸벅 인사한다.

양산댁 어서 가란 듯 손짓하고 그냥 돌아서 들어간다.

혜린 몇 걸음 걷다가 돌아본다.

낮은 대문 너머로 양산댁은 부엌으로 들어가고 있다.



# 53 역


나서는 혜린.

바다… 바람…

기차를 기다리는 혜린.

문득 고개를 돌려 보는 곳, 저만치 역사를 나서는 선애. 이 쪽을 가리켜 보이고 있다.

혜린, 반가움에 미소가 번지다가 멈춘다.

선애의 뒤로 나오는 경관 두 명과 사복.

저만치 기차가 다가오고 있다. 멀다.

기차가 플랫홈에 도착했을 무렵, 혜린은 체포된다.

보안사 복도.

군복을 입은 자들이 오가고 어디선가 고문을 받는 비명소리, 문이 거칠 게 여닫기는 소리.

그 복도를 두 명의 군인에게 이끌려 걸어오는 혜린.

어떻게든 침착하려고 애쓰고 있지만 공포를 어찌할 수가 없다.



# 54 조사실 앞 복도


끌려오던 혜린, 문득 얼어붙는다.

어느 방에선가 끌려나오는 남자.

지독한 고문을 받은듯 제대로 걷지 못해 질질 끌려나오던 남자가 얼핏 고개를 든다. 운경이다.

혜린과 시선이 마주치지만 얼른 돌려버린다.

혜린도 다시는 돌아보지도 않고 이끌리는 대로 간다.

운경이 나왔던 바로 그 방으로 들어선다.



# 55 조사

 

거칠 게 밀려들어온 혜린, 눈부신 빛에 얼굴을 가린다.

빛 저편에서 들리는 사무적이고 단조로운 목소리.


(소리) : 윤혜린 한국 대학교 대학원 일학년 맞아?


혜린, 빛 너머로 상대의 얼굴을 보려고 애쓴다.


(소리) : 고개 숙여.


혜린 : (언뜻 무슨 소리인지 못 알아듣는데)


혜린을 데려왔던 남자, 난데없이 혜린을 후려갈긴다.


(소리) : 어디서 고개를 빳빳이 들어?


혜린, 숨이 가빠지는 상태에서 고개를 숙인다.


(소리) : 신발 벗어.


혜린, 주춤주춤 신을 벗는다.

행동이 느리자 옆 남자 그대로 조인트를 깐다.

혜린, 저도 모르 게 비명이 나온다.

무릎이 꿇려지는 혜린.

(보안사 취조실의 벌건 양탄자, 군데군데 얼룩이 져있는)

그 앞으로 종이 몇장과 볼펜이 떨어진다.


(소리) : 계보, 그려.


혜린, 고개를 들려다가 다시 숙인다.


(소리): 느네 계보 있잖아. 그려.


혜린 :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소리) : (귀찮다는 듯 한숨) 이 또 하나 시작해야겠구만, 꿇려.


옆의 남자 그대로 혜린의 머리채를 휘어잡아 눌러박는다.

혜린, 무릎을 꿇는 형상이 된다.

고개를 들지 못하는 상태에서 군인의 군화발만 보인다.


(소리) : 윗도리 벳겨.


혜린 놀라서 고개를 드는 순간, 옆구리로 발길질이 들어온다.

숨이 막혀 뒹군다.



<8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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