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모래시계

<제5회> 모래시계

오늘의 쉼터 2018. 10. 15. 19:19

<제5회> 모래시계   




# 1 윤 회장 집 대문


육중한 대문이 열린다.

밤.

안 에서 문을 열고 있는 장근섭.

밖에서 기다리는 장도식. 껌을 꺼내 종이를 벗겨 씹는다.

들어서며 정중히 안내하는 장근섭을 따라가다 문득 생각난 듯 껌 하나를 건네준다.

얼결에 받는 장근섭에게 껌을 씹으며 웃어보인다.

대문에서 현관까지 이어지는 긴 길 .



# 2 윤 회장 서재


책상 위에 놓여져 있는 모래시계에서 모래가 조금씩 흘러 내리고 있다.

그 위에


장도식 : 언질을 주기는 했습니다만 그렇게 전격적으로 일을 처리할 줄은 몰랐습니다.


앉아있는 장도식.

책상 너머로 앉아있는 윤 회장은 케이스에서 꺼낸 도자기를 살펴보고 있다.

민 변호사 조용히 옆에 앉아있고.


장도식 : 한 달 새에 노주명의 사업체를 여러 개 손에 넣은 모양입니다.

워낙 물불을 안 가리는 애들이라 노주명이 쪽도 손 놓고 구경하는 꼴이구요.


윤 회장 : 그야 그럴 수밖에. 붙어봤자 떨려들어가는 건 자기네들 뿐이고,

저 쪽은 거의 치외법권이니…


장도식 :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가 살피는)


윤 회장 : (장도식 쪽을 향해 웃어 보인다)


장도식 : (얼른 마주 웃어) 최동만 사장의 카지노는 어떻게 좀 더 두고 볼까요?


윤 회장 : 글쎄 어쩐다… (민 변호사를 향해) 민 변호사.


민 변호사 :


윤 회장 : 난 이런 방식이었으면 좋겠어.

나는 뭐, 카지노 한개 더 있 거나 말 거나 신경을 쓰지 않는데 말이야.

최 사장이 지 손으루 들구 온단말이지. 이 거 벅차서 그러는데 맡아주십사 이러구, 말이야.


민 변호사 : 그래야겠죠. (장도식을 향해) 그렇지 않습니까?


장도식 : 그러믄요, 물론입니다.


윤 회장, 모래시계를 본다.

거의 다 떨어져 내리고 있다.

장도식, 옷깃을 바로 한다.

이제 회견시간이 끝나가고 있는 것이다.


장도식 : 아 저 그리고 따님 말씀인데요.


윤 회장 : 혜린이? (껄껄 웃고는 민을 향해) 이봐 이래서 되겠어?

내 딸 얘기를 이렇게 남한테서나 얻어 듣구 말이야.


민 변호사 : 조용히 웃기만.


장도식 : 요즘 몇 개 대학이 연합을 해서 지하신문을 만들고 있는 모양입니다.

 혜린 양이 거기서…


윤 회장 : 이거 어떤가? (도자기를 들어 보인다.)


장도식 : 예? 아 도자기 쪽은 잘 모릅니다만.


윤 회장 : 나두 이런 거 잘 몰라요 근데 이거 진품이래는구만,

이름이 뭐래더라… (케이스 안의 서류를 대충 보는) 가서 읽어봐요,

자아. (케이스와 도자기를 내준다)


장도식 : 절 주십니까?


민 변호사 얼른 받아서 넘겨준다.


장도식 : 소중히 보관하겠습니다.


윤 회장 : 뭐 보관할 필요 없어요. 편한 대로 바꿔 써요.


장도식 : (감읍한 태도로 도자기를 케이스에 넣는다)


모래시계의 모래가 다 떨어졌다.

윤 회장 일어선다.

장도식 얼른 일어난다.


윤 회장 : 아 위에선 아직 결정이 안 나셨나.

이번에 총장으루 내정된 분이 있다는 소리는 들었는데.


장도식 : 알아보겠습니다.


윤 회장 : 총장 자리 그거 어려운 자리에요 내 식사래두 대접해야되는데.


장도식 : 마련하겠습니다.


윤 회장 : 이 바쁜 분을 내가 오래 잡고 있었구만.


장도식 : 그럼 가보겠습니다.


장도식 정중하게 절을 하고 민 변호사가 열어주는 문으로 나간다.

윤 회장 창문 밖을 보며 선다.


민 변호사 : 도자기루 되겠습니까? 돈을 좀 더 준비할까요?


윤 회장 : 아니 저 친군 좀 달라. 돈보다 다른데 야심이 있어. 쉽지 않은 인물이야


윤 회장 맨손으로 골프하는 자세를 취해보며


윤 회장 : 재희는 혜린이한테 갔나?


민 변호사 : 분부대로 멀리서 지켜보기만 하는 모양입니다.


윤 회장 : 오는 대로 들여보내.


민 변호사 : 예.


윤 회장 가상의 골프채를 힘껏 휘두른다.



# 3 밤 동네 골목


숨어 보는 시선으로 저만치 혜린, 터덜터덜 걸어오고 있다.

큰 가방은 어깨에 메고 한 손엔 쌀 봉지를 무겁게 안고 다른 한손엔 찬거리가 든 봉지를 들고,

그리고 어지간히 취해 있다.

보고 있는 시선, 으슥한 곳에 몸을 숨겨있는 재희다.

재희, 어슴프레한 빛에 비추어 손목시계를 본다.

다시 혜린 쪽을 보다가 꿈틀 놀란다.

혜린, 발이 삐끗하여 넘어진 상태.

쌀 봉지가 떨어져 땅에 흩어져있고 장본 봉지도 마찬가지.

혜린, 아픈 발목을 만지며 일어서려다가 아예 주저앉는다.

흩어진 물건들을 보며 잠시 일어나고 싶은 생각이 없다.

두어 번 기침을 한다.

재희 그런 헤린의 모습을 그저 보고만 있다.

나아가 도와주고 싶은 마음은 마음 뿐이다.

벽을 짚은 손에 힘이 들어가 있다.

혜린, 코를 훌쩍이며 겨우 마음을 다잡고 흩어진 물건들을 주워 담기 시작한다.

땅에 깔린 쌀알들을 조심스럽게 봉지에 쓸어 담는다.

취한 눈을 애써 뜨고 한 알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애쓰며.



# 4 자취집 마당


우석, 대문 쪽으로 간다.

발로 대문을 차대며 혜린이 외치는 소리.


혜린 : (소리)문 열어, 강우석. 대문 열라구우.


우석이 대문을 열자 발로 차던 기세로 비틀 들어서는 혜린.


우석 : 뭐야 또 술이야?


혜린의 봉지들을 받아든다.


혜린 : 아아, 그담에 무슨 말할 건지 알어. 여자가 이 게 뭐냐 허구헌 날 술에 쩔어서,

아이구우 그치? 맞지?


우석은 봉지를 부엌에 들여놓고 있다.


혜린 : (부엌에 대고) 그 말할려구 그랬지? 그래 안 그래?


우석 나오며


우석 : 니 방 연탄불 꺼졌어. 좀 전에 불 넣어서 아직 찰 거야.


혜린 : 좋아.


우석 : 내 방에 들어가 있어.


혜린 : 좋지.


우석 한심해서 보고는 먼저 들어간다.

혜린, 취한 한숨을 내쉬고는 잠깐 하늘을 본다.

우울할수록 더욱 기세를 내는 습성.



# 5 우석의 방안


우석, 뒤따라 들어오는 혜린을 힐끗 보고 책상 앞으로 간다.

책을 보던 중이다.

혜린, 들어서자 방안을 휘 둘러보고


혜린 : 나 이 방 맘에 안 들어 언제나 너무 깨끗해. 아주 같잖아 죽겠어.


우석, 무시하고 책을 넘겨 아까 보던 곳을 찾는다.

혜린 그 뒤로 가서 우석의 어깨를 쳐 방해를 하며


혜린 : 어이 강우석 창피하지 않어?


우석 : 뭐가 또?


혜린 : (우석이 보는 책을 덮고 우석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자기 혼자 잘 살겠다구,

고시 공부 하는 거. 나같으면 아아주 창피할 거 같애. 창피하지?


우석 : 너 취했어.


혜린 : 알어.


우석 : 저기 가서 좀 자. 니 방 따뜻해지면 깨워줄게.


혜린 : (항복하는 표시) 알았어. 알았다구.


아랫목 쪽으로 가서 이불에 기대 눕는다.


혜린 : 우석 씨?


우석 : (책 들치며) 왜.


혜린 : 나한테 너무 잘해주지 마.


우석 : (어쭈하는 기분으로 돌아보면)


혜린 : (한 팔로 얼굴을 가린 채) 나 있지, 누가 나한테 잘해주면 창피해.


우석 : (무시해버린다)


혜린 : 나 있지. 창피한 게 너무 많아 미치겠어. 난 소주보다 맥주가 맛있는데

맥주를 마시는 건 창피해.


우석 : (책의 것을 메모한다.)


혜린 : 나 있지 나두 데이트 같은 거 하구 싶은데,

그런 거 하면 너무 창피할 거 같애. 난 말이지,

 (문득 말을 끊더니 잠시 후 일어나 앉는다)

갈래. 주정하는 것두 재미없어.

 (일어나려다가 중심을 못 잡고 다시 주저앉는다)


우석, 책 보는 것을 단념하고 물을 따라 들고 와 앞에 앉으며


우석 : 마셔.


혜린 : (순순히 받아 마신다)


우석 : 무슨 일 있었니?


혜린, 우석을 보고는 고개를 숙인다.

우석 기다려준다.


혜린 : 오늘 기독교 회관 갔었어. 동일방직 애들이 단식농성하는 거 봤어.


우석 : 그래서 술 마셨어?


혜린 : 돌아오는 길에 난 쌀을 샀어. 걔들은 목숨 걸구 단식하구 있는데,

난 돈을 내구 쌀을 샀다구. (울음이 새어나오려고 한다)


우석 : 어깨 빌려줘?


혜린 : (머뭇거리다가 우석의 어깨에 고개를 묻더니 그예 운다)


우석, 한 손을 들어 감싸주려다가 그만둔다.

움직이지도 못하고 그저 앉아 있다.


(시간 경과)


우석, 스탠드의 갓을 기울여 빛이 가지 않 게 하고 방의 불을 끈다.

그새 혜린은 잠이 들어 있다.

우석, 그 옆에 가서 앉는다.

잠들어있는 혜린의 얼굴.

얼굴위로 흩어진 머리칼을 조심스레 걷어준다.

그들의 상태는 우정 이상 사랑 이하.



# 6 택시 회사 (밤)


통금이 가까와지고 택시들이 들어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 7 사무실


우석, 다른 운전기사 몇의 뒤를 이어 경리에게 사납금을 낸다.

밤마다 이루어지는 익숙한 과정.



# 8 사무실 밖


나오던 우석을 보고 소주를 나누던 나이 지긋한 두 명의 기사가 말을 건넨다.


기사1 : 이번에 시험쳤다고?


우석 : …예


기사2 : 뭔 시험?


기사1 : 어허 이 사람 깜깜이구만. 고시 시험 말야. 판사시험. 어이 일루와 한잔해.


기사2 : 시험 저번에 쳤다고 안 했나. 붙었대매.


기사1 : 그 건 1차고 이번엔 2차. 판사가 시험 한 번에 제깍 되는 줄 알어?

(우석에게 한 잔 따라주며) 한잔 쭈욱 하라고.


우석 : (고개를 돌려 마신다)


기사1 : 그렇지, 그렇지.


기사2 : (혼자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다)


기사1 : 이 젊은 친구가 보통 친구가 아냐.

아침부터 낮에는 학교 다니고 저녁부터 밤까진 택시 몰고 그러면서 판사시험 공부를 했단 말야. 주경야독이란 말 알어?


기사2 : 난 무섭네. 무서워.


기사1 : 무섭지. 우리하곤 어디가 달라도 다른 인종이라니까.


기사2 : 밑바닥서부터 독하게 굴어갖구 출세한 사람들…나 무서워.

밑바닥을 아니까 밑바닥 인생들을 도와줄 거 같지? 아냐 더 무서워.


기사1 :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지금.


기사2 : 이 젊은 친구두 지금은 우리하구 소주마시구 있지. 아냐 두구봐.

일단 출세해보라구. 다신 굴러 떨어지구 싶지 않 거든. 그 게 어떤 건지 아니까.


기사1 : 이 사람 취했군 취했어.


기사2 : 더 독해. 더 독하게 군다구.


기사1 : (우석에게) 마음 쓰지 마. 취했어 이 사람….


우석, 웃고 있지만 어두운 얼굴은 어쩔 수 없다.



# 9 지하실 방


여학생 남학생들 작업을 하고 있는 중이다.

등사기가 두 대 나란히 놓여있고 한 쪽의 야전침대에서는 남학생 한 명이 잠들어 있다.

가리방을 긁고 있던 혜린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편다.

남학생 한 명 등산 버너 위 코펠에 라면을 끓이며 맛을 본다.

그 때 문을 거칠 게 두들기는 소리.

일제히 문 쪽을 본다.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멈추는가싶더니 달그락 거리며 열쇠를 여는 소리가 이어진다.

계단 밑 가까이에 있던 여학생이 안쪽의 아이들을 보며 계단을 올라간다.


학생 : 누구세요?


순간 문이 벌컥 열려지며 형사들이 들이닥친다.



# 10 지하실 앞 골목


어두운 곳에 세워져있는 승용차.

운전석에 타고 있는 재희.

핸들을 부여잡은 채 앞을 노려보고 있다.

그가 보는 저 앞.

형사들과 경찰들에 의해서 차에 실려지고 있는 학생들…

거칠게 두들겨 맞으며 연행되는 학생들 중에 혜린이 있다.

그러나 재희 차에서 꼼짝하지 않는다.



# 11 우석의 집 앞


가방을 끼고 걸어오던 우석, 대문을 나서는 두 명의 사내를 본다.

형사 차림.

우석 뛰기 시작한다.



# 12 마당


대문을 들어선 우석, 마당에 서있던 자취생을 본다. 우석을 보자


자취생 : 형사들이 왔어요. 저기 혜린이 누나 방에.



# 13 혜린의 방


우석 방문을 열다가 굳어 선다. 방안 은 엉망이다.

책들은 모두 나와 팽개쳐져있고 옷장 서랍까지 죄다 빼어져 나와 있다.



# 14 골목 공중전화 앞


우석, 동전을 넣으며 수첩을 뒤져 번호를 찾는다.

번호를 돌리고 신호를 기다리고


우석 : 여보세요 윤혜린 씨 집입니까? 저……혜린이하고 같은 자취집에 사는 친군데요.



# 15 큰길


우석 기다리고 서 있다.

택시에서 내리는 사람이 있어 유심히 보지만 차에서 내린 젊은 사내는 자기 갈길로 가버린다.

무심코 돌아본 길 저 쪽에 고급 승용차가 오고 있다.

우석 시선을 돌린다.

기다리는 사람이 그런 차를 타고 올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차는 바로 우석의 앞에 와서 선다.

운전석에 앉았던 재희, 손을 뻗어 조수석의 문을 열어준다.


재희 : 타시지요.


우석 뒷자리를 본다.

거기는 영재가 앉아 있다.



# 16 자취집 마당


혜린의 방 옆에 붙어있는 간이 부엌을 살펴보던 영재


영재 : 혜린이가 여기서 밥을 해먹었나요? 자기 손으루요?


우석 : 예 그야… 저 실례지만 혜린이 친오빠 맞습니까?


영재 : (돌아본다)


우석 : 아니 그저…(실소가 나온다) 단칸방에 사는 분으로는 보이지 않는군요.


영재, 잠시 우석을 보다가 돌아선다.

우석, 이 모든 상황이 어처구니없게 느껴진다.



# 17 길


재희와 영재, 승용차가 세워진 곳까지 걸어가는 도중.

무거운 낯빛으로 걷던 영재 걸음을 멈춘다.

재희 따라 멈춘다.


영재 : (재희를 보지 않는 상태에서) 재희 너 아까 보니까 가르쳐 주지 않아도

이 집을 잘 찾아오던데. (재희를 돌아본다) 이 집 알고 있었지?


재희 :


영재 : 아버지가 시키셨나?


재희 : …예


영재 : 혜린이가 집을 나간 뒤로 계속 감시한 거니?


재희 : 지켜보라고 하셨습니다.


영재 : (얼굴빛이 사나와진다) 혜린이가 잡혀가는 것두 보구 있었고?


재희 : …예


영재 : 보고만 있었단 말이지?


재희 : 회장님 분부가 그랬습니다.


영재 : 그럼 아버진 벌써 알고 계셨겠구나, 혜린이 일.


재희 : 보고 드렸습니다.


영재 : 그랬드니?


재희 : 그냥 두라고 하셨습니다.


영재 : (어처구니없어 딴 데를 보다가) 그러셨겠지.

내가 연락을 받지 못했다면 그저 계속 그냥 두었겠지.

아버지 말 안 듣고 나간 자식 혼 좀 나봐라.

어떻게 혼나는지 보고만 받으면서…

아버지 그리구 너 재희 그 쪽 세계에 사는 사람들…

대단해 응? (분노와 쓸쓸함으로 차에 타며) 아주 대단한 사람들이야.


재희, 여전히 표정을 감추며 차의 문을 닫아준다.



# 18 취조실


혜린 들어선다.

혜린을 데리고 왔던 남자는 밖에서 문을 닫는다.

문이 닫히는 소리에 혜린 움찔해서 돌아본다.

방안 에는 책상 하나와 그 앞에 놓여있는 의자.

책상 뒤에는 취조관이 서류를 뒤적이며 보고 있다.

혜린 애써서 고개를 바짝 들고 그의 앞에 가서 선다.

사내 그제야 혜린을 힐끗 보더니 앞의 의자를 턱으로 가리킨다.

혜린, 그 의자에 앉는다.


취조관 : 윤필용 회장 딸이라고.


혜린 : …네 (목이 잠겨 있다. 헛기침을 해서 바로잡는다)


취조관 : 왜 진작 말 안 했어.


혜린 :


취조관 : (서류를 탕 밀어놓더니) 임마 너 같은 부루조아까지 껴서 날뛰면 어뜩하니.

안 그래두 우리 손 모잘라 죽겠어. 취미생활을 할 거면 느이집 수준에 맞는 걸루 하면 되잖아.

골프를 치든지 스키를 타든지.


혜린 : (보다가 그만 웃는다)


취조관 : 가난한 집 애들이 그러는 건 이해가 가는 구석두 있어.

근데 너 같은 애들이 이러는 거 나 솔직히 눈꼴시다.

마 너같이 자란 놈이 뭐 분한 걸 알아서, 평등이구 민주주의야? 어이 말해봐 누구야?


혜린 : …?


취조관 : 니 애인 누구냐구. 애인 따라서 멋 모르구 날뛴 거 다 알아.

어때 시커먼 작업복 입구 말 잘하니까 가슴이 콩콩 뛰어?

그래서 같이 잤어? 세미나한답시구 밤새 뭐했어.


혜린 점점 분노에 차오르는데

문이 열리며 장도식이 들어선다.

취조관 얼른 일어나며


취조관 : 서류정리는 다됐습니다.


던져놓았던 서류를 잽싸 게 챙긴다.

혜린, 아직도 취조관을 노려보고 있다.

장도식, 혜린에게 다가와 어깨를 툭툭 쳐준다.

친밀하게 오래 전부터 아는 사이답게…



# 19 경찰서 앞


기다리고 있던 영재, 장도식과 나오는 혜린을 맞아 어깨를 감싸주고는

대기하고 있던 승용차 쪽으로 밀어준다.

영재는 장도식 쪽으로 가고 혜린은 차 쪽으로 간다.

차 옆의 재희 뒷문을 열어준다.

차에 타기 전에


혜린 : 다른 친구들은?


재희 : (고개를 젓는다)


혜린 다시 한 번 경찰서 쪽을 돌아보고 차에 탄다.

그들 뒤 저만치에서는 영재가 장도식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

재희 문을 닫아주고 앞자리에 오른다.

백밀러로 슬쩍 보는 혜린의 얼굴. 혜린은 굳은 표정으로 울고 있다.

흘러나온 눈물을 얼른 닦아버린다.



# 20 윤 회장 집



# 21 윤 회장의 서재


신문을 보던 윤 회장, 돋보기를 내려 들어서는

혜린을 본다.

혜린을 감싸다시피 들어선 영재.

그 뒤로 들어선 재희는 구석으로.


영재 : 혜린이 왔어요. 아버지 (언제나 부친에게 얘기할 때는 주눅이 들어 있다)

윤 회장, 다시 신문을 읽는다.


윤 회장 : 제발루 들어온 게냐.


영재 : 저 혜린이는…


혜린 : 아뇨. …집에 연락할 생각은 없었어요.


영재 : (얼른 혜린이를 만류하고) 아버지 미리 말씀드릴 시간이 없었는데…


윤 회장 : 쓸데없는 짓을 했어. (신문만 읽는)


영재 더 말을 하지 못한다.

혜린 윤 회장에게 다가온다.

윤 회장 신문만 읽고 있다.

혜린 문득 뒤에서부터 윤 회장의 목을 끌어안 는다.


혜린 : 죄송해요. (아버지의 머리칼에 얼굴을 묻어) …가볼 게요.


윤, 신문을 읽는 자세 그대로.

혜린 선뜻 떨어져 방을 나가버린다.

영재 어쩔 줄 모르다가 혜린을 쫓아나간다.

문이 닫히고 잠시 후에 윤은 신문을 접는다.


윤 회장 : 물.


재희, 얼음물을 따른다.

윤 회장 갖다 준 물을 달 게 마시고


윤 회장 : 연락을 해온 게, 그 법대생 아인가?


재희 : 예.


윤 회장 : 그애두 데모 패거리라고 했나?


재희 : 아닌 걸루 알고 있습니다.


윤 회장 : (문득 킥킥 웃는다) 그래 잘 살고 있드란 말이지. 연탄도 쌓아놓고.


재희 : 이번 학기 등록금도 냈습니다.


윤 회장 : 그래 그랬겠지. (유쾌하게 웃는다)



# 22 윤 회장 집 정원


재희 나와 본다.

거기 정원에 혜린과 영재가 얘기를 나누고 있다.

영재는 계속 설득을 하는 모양이고(집으로 들어오라)

혜린은 그저 웃으며 고개를 젓고 있다.

재희는 이 쪽 구석에서 그들 남매의 말이 끝나길 기다린다.

영재, 답답한 듯 말을 멈추었다가 뭐라 한마디 더하고 집 쪽으로 걸어온다.

재희를 힐끗 보고는 지나쳐간다.

시선을 내렸던 재희 다시 혜린 쪽을 본다.

혜린은 그네 쪽으로 가서 앉고 있다.

조금씩 흔든다.

어린 날 늘 그러했던 것처럼.



# 23 정원 그네 쪽


그네를 흔들던 혜린 고개를 들어본다.

재희가 다가와 선다.


혜린 : (미소로) 그네 줄을 새로 바꿨네 재희가 신경 써준 거지?


재희 : (묵묵히 그네 줄을 살핀다)


혜린 : 아버지 건강하시지?


재희 : (끄덕인다)


혜린 : 오빠가 집에 들어오래 싫대니까, 아파트를 사주겠대. (웃음) 우리 집 참 부자야 그치?


재희 : 저도…(사이) 그러길 바랍니다.


혜린 : (보는. 재희가 말을 하는 건 드물다)


재희 : 상도동에서 연행되어갈 때 거기 저도 있었습니다.

(비로소 혜린을 본다) 그냥 보고만 있었어요. 다시는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혜린 : (보다가 어색함을 웃음으로. 일어선다.

웃음기를 거두어) 이 집이 싫은 이유 중에 하나가 뭔지 알어?

재희가 나한테 존댓말을 하는 거야, 나는 재희한테 반말을 하고.


혜린 선뜻 재희를 지나쳐 간다.

집에서 나오던 영재가 혜린에게 온다.

재희 시선을 떨군다.



# 24 당구장


자욱한 담배연기 속, 당구장 특유의 소음…

손님들이 꽤 있다.

카운터에 있던 주인, 옆의 사내가 쿡쿡 찌르는 바람에 그가 가리키는 곳을 본다.

거기 태수와 진수가 당구장에 들어서고 있다.

태수 등은 아무 것도 모르는 채, 당구를 시작할 준비를 한다.

주인, 몸을 돌리더니 전화기를 들어 다이얼을 돌린다.



# 25 노주명의 사무실


노주명, 앉아있는 뒤로 바바리 차림의 그 부하, 전화를 받고 있다.



# 26 당구장 내부


태수와 진수의 내기 당구가 한참 진행 중이다.

태수의 차례가 좀처럼 끝나지 않고 있다.

진수, 태수의 공이 정확히 맞을 때마다 아쉬워하고 있다.

태수, 또 하나의 공을 겨누다가 문득 주위의 낌새를 의식한다.

하나둘씩 당구장으로 들어오고 있는 사내들…

그리고 소리 없이 당구장에서 밀려나고 있는 손님들.

태수, 모른 척 하며 당구를 치고 있지만

신경이 그리로 뻗쳐있는 바람에 실수를 한다.

진수, 좋아하며 큐대를 든다.

태수, 여전히 모른 척,

겨냥하고 있는 진수의 등 뒤로 가더니 낮게


태수 : 공치면서 말 들어.


진수 : (의아하지만 하란대로 한다)


태수 : 오른 쪽으루 뒷문 있다.


진수 : (공을 놓친다)


태수 : (위로하는 척 웃으며 진수의 어깨를 두드리며)

어떻게든 빠져 나가서 창문 밑에다 오토바이 대라.


진수 그제야 주위 상황을 눈치 챘다.

어느샌가 주위를 포위하다시피하고 있는 사내들…

그 중에 바바리 사내.

태수, 반지를 빼어 주머니 안으로 깊숙이 넣는다.

태수, 자기 등 뒤의 사내들 중의 하나가 옷 밑에서 자전거 체인을 빼내는 것을 본다.

큐대로 공을 겨누는 듯 하다가 진수를 밀쳐냄과 동시에 큐대로 뒤의 사내를 가격한다.

싸움이 벌어지고 진수, 뒷문 쪽으로 달린다.

마악 뒷문 앞에 도착하는 순간,

그에게로 다가온 바바리 사내,

진수, 어깨를 맞으며 쓰러진다.

바바리 사내, 칼을 다시 칼집에 꼽는다.

태수, 싸우며 그 광경을 본다.

흠칫하는 사이 한 대 맞는다.

그러나 이내 유리한 장소와 기물들을 이용한 버티기.

바바리 사내 태수 쪽으로 달려든다.

쓰러졌던 진수, 꿈틀 일어선다.

있는 힘을 다해 문을 열고 기어 빠져나간다.

태수, 또 한 대 얻어맞으면서 진수를 본다.

다시 힘을 얻는다.

상대의 두목급은 바바리다.

그는 칼집 채로 든 채 부하들의 싸움을 보고 있다.

태수, 옆 사내의 무기를 뺏어 바바리에게로 돌진한다.

바바리 기다렸다는 듯 칼을 빼어든다.

주위의 부하들 멈칫 선다.

바바리 태수를 겨냥하여 다가들고 태수, 뒷걸음질 쳐서 유리창 쪽으로 간다.

바바리 공격해오려는 순간,

태수, 의자를 발로 차버리고는 유리창을 부수고 몸을 날린다.



# 27 건물 밖


이층의 당구장에서 떨어져 내리는 태수.

밑을 지나던 행인들 놀라 피하는데 거기 부상을 당한 진수가 오토바이를 끌고 온다.

진수의 어깨는 피범벅.

태수, 진수를 뒤에 태우고 오토바이를 출발시킨다.

뒤늦게 계단으로 노주명의 부하들이 쏟아져 나온다.



# 28 병원 응급실


거의 혼수상태에 빠져드는 진수를 업다시피 부축하여 태수, 응급실로 뛰어들며 소리 지른다.


태수 : 의사, 의사아.


두어 명 밀침대를 밀고 뛰어온다.

태수, 진수를 침대에 눕히고, 자신의 손으로 밀어 들어가며


태수 : 의사 없어? 의사 불러.


간호사 한 명 혈압계를 갖고 와 재려고 하자 태수 다급한 마음에 낚아채며


태수 : 의사 부르라구 했잖아. 이 병원 의사 없어!


그 때 희미한 목소리


진수 :


태수 돌아본다.

진수가 보고 있다.

침대는 계속 안으로 밀려들어가는 상태

태수, 진수의 손을 잡는다


태수 : 왜 말해 뭐.


진수 : 형.


태수 : 어.


진수 : 나 잘 했지요이?


태수, 말문이 막힌다.

고개를 드는데 안 에서 급히 나오는 당직 의사의 모습이 보인다.



# 29 룸살롱 로비


수하들 몇을 데리고 선 채 담배를 피고 있는 종도.

그가 안 보는 듯 보는 곳.

검사를 낀 중년신사들 몇이 아가씨들의 환대를 받으며 들어서고 있다.

그들, 안 의 룸 쪽으로 가고 난 뒤, 종도, 지배인을 부른다.

지배인 얼른 달려와 공손히 선다.


종도 : (품안 에서 수표 한 장을 꺼내준다.)


지배인 두 손으로 받아 허리를 꺾는다.



# 30 룸 내부


신사들 아가씨들을 끼고 술을 마시는데 문이 열리며 지배인을 따라 종업원들이

안주에 양주를 들고 들어온다.


신사 : 뭐야?


지배인 : 옆 방 손님이 보내셨습니다.


(시간 경과)


종도, 신사와 공손하게 악수를 하고 있다


종도 : 오종도라구 합니다.

이성범 형님을 모시구 있습니다.



# 31 룸살롱 밖


차에 타고 떠나는 신사를 배웅하고 있는 종도.

거나하게 취한 신사,


신사 : 언제 한번 사무실에서 보지.


종도 : 찾아뵙겠습니다.


정중히 절을 하여 보낸다.



# 32 나이트클럽


아직 영업시간 전

정리를 하고 있거나 얘기를 나누던 종업원들 지나가는 태수를 향해 깍듯이 절을 한다.

태수의 패에 의해 접수된 나이트클럽임을 알 수 있다.



# 33 사무실?


태수가 들어섰을 때

이미 성범과 백민재, 종도, 일도 등이 모여 있다.

성범, 장부를 보고 있다가 태수를 힐끗 본다.

태수, 꾸벅 인사를 해보이고 빈 자리에 가 앉는다.


성범 : 다친 애는 어때?


태수 : 며칠 안으루 퇴원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성범 : 노주명이 그 거 별명이 찐드기라드니 …… 태수, 너 당분간 조용한 데 가 있을래?


태수 대답하려는데


종도 : 건 좀 곤란합니다.


성범 : (찡그려 본다)


종도 : (어디까지나 공손하게) 태수가 없으면 애들 사기 문제두 있구…


성범 : 그래서 태수는 총알받이루 내놓구, 종도, 너는 높은 사람들하구 안면 트구 다니구…

그렇게 보직 나누기루 결정한 거냐?


잠시 분위기가 험해지는데


태수 : 무슨 일루 다 불렀어요? 뭐 사고 생겼어요?


성범 : (자세를 고쳐서) 내가 앞으루는 자주 서울 올라오기가 힘들 거 같다.

니들 애쓴 덕분에 여기 사업체두 만만찮게 늘어났는데, 내가 빠지게 되서 안 됐다만,

그렇게 됐어. 내려가기 전에 정리나 좀 해줘야겠다싶어서. (담배를 빼어 문다)


일도 : (불을 붙여주고)


성범 : 일도야.


일도 : 예.


성범 : 너 앞으루 나 따라다닐 거 없다. 여기 남아서 주류도매상 책임져.


일도 : 형님. (서운해서)


성범 : 쉽지 않을 거야, 정신 차려서 애들 단속하고 태수야.


종도 긴장해서 자기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태수 : 예.


성범 : 여기 나이트 중심으루 이 구역을 맡아 항상 쓸만한 애들 붙여서 다니구,

한군데 오래 있지 말구 옮기군 해.


태수 : (웃고) 예.


성범 : 그리고 카지노는.


종도 기다린다.


성범 : 백곰 니가 맡아.


백민재 : 산구석에 귀양을 보내는군.


태수 등 웃는…

종도 웃지 못하고 있다.


성범 : 부산 떨 거지들까지 노리구 있대니까, 애들 군기 늦추지 말고.


백민재 : 알았수.


태수, 종도를 본다.

종도, 아뭇소리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기색이 좋지 않다.

그 위로


성범소리 : 무슨 일 있으면 즉시 연락하고.


대답들 한다.

종도는 대답할 기분이 아니다.



# 34 강변 밤


한강 다리 위로 지나쳐가는 차들…

강변의 포장마차.

포장마차 주변에 깔리다시피 지키고 있는 성범의

수하들…



# 35 포장마차 내부


다른 손님은 없이 성범과 태수가 소주를 마시고 있다.

성범 달 게 한잔을 들이키고 태수에게 술을 따라준다.


성범 : 왜 왜 못하겠다는 거야?


태수 : 형님두 알잖우 난 장부 챙기구 그런 일 안 맞아요.


성범 : 종도 때문에 그러냐?


태수 : 종도…그 녀석이면 잘 할 걸요, 적성에두 맞구.


성범 : 태수 너만 아니었음, 종도 그 자식 벌써 내쳤어.


태수 : 형님.


성범 : 종도 그 자식 언제구 너하구 날 잡아먹을 거다.


태수 : (웃기만)


성범 : 니가 원한다면 일 시켜. 허나 항상 니 밑자리라는 걸 확실히 해두라구.


태수 : 그럴 게요 (웃는)


성범 먼데를 본다.

앞이 터진 포장마차 천정 밑 저만치 보이는 서울 야경.

태수가 보기에 어쩐지 지쳐 보이는 얼굴.


태수 : (술을 따라 주며) 왜 갑자기 낙향할 생각을 하셨수?


성범 : ……넌 서울이 좋냐?


태수 : (보는)


성범 : 난 싫다. 요물 같은 데야 여긴. 너 땅꾼이 잡아놓은 뱀을 본 적 있냐?

한번 봤는데 말이지. 땅에다가 큰 독을 묻어놨드라구.

손전등을 비추니까 거기 수백 마리나 되는 것들이 바글바글 엉켜있는 거야,

근데 말이다.

그 숭악한 뱀새끼들두, 지 배고프지 않으면 쥐새끼두 잡아먹질 않아. 여긴 달라.

여기 서울이란데 … 지 배가 터져두 남을 잡아먹어야 돼. 왜. 안 그러면 지가 먹히니까.


태수 : ….주먹 세계란 게 원래 그런 거 아니우?


성범 : 그럴지두 모르지. (쓸쓸한 웃음) 야, 너 제일루 무서운 게 어떤 건지 아냐?

끊어야 할 때를 알구 두 말 없이 끊을 줄 아는 놈이야.

그 게 참 그 게 쉽지가 않아. (술을 마신다.)

태수, 언뜻 성범의 외로움을 본다.



# 36 우석의 집 마당


밤. 대문이 열리며 혜린 들어선다.

자기 방 쪽으로 가려다가 시선을 느끼며 돌아본다.

우석, 툇마루에 앉아 혜린을 보고 있다.

우석, 아무 말이 없다.

혜린, 우석에게서 떨어진 곳에 앉는다.

한참 만에


혜린 : 우리 오빠 여기 왔었다며?


우석 : 응.


혜린 : 어디까지 얘기 들었어?


우석 : (웃는다)


혜린 : (돌아보면)


우석 : 니 아버지 어떤 분인지 알았어. 사람들이 그러더라.

카지노계의 대부라구. 아마 대한민국에서 현금이 제일 많을 거라며.


혜린 :


우석 : 재밌어.


혜린 : 뭐가?


우석 : 재밌잖아. 나한텐 친구가 둘 있는 데 말야,

한 놈은 너무 밑바닥이라 가까이 할 수가 없구.

또 하난… 너무 높아서 가까이하면 안 될 거 같단 말야.


혜린 : (웃는다) 신파 연극해? 멜로드라마 써?


우석 : 내가 무슨 드라마를 썼었냐하면 말이지,

음…. 아주 괜찮은 검사가 하나 있어. 교과서에 나온 그대루 정의롭고 용기두 있구….

그래서 그 검사는 남들처럼 애정도 없이 부잣집 딸한테 장가를 가거나 그러지 않거든.

그 아내는 아주 가난한 집 출신인데, 자기보다 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많은 일을 한다구.

둘은 아주 잘 어울릴 거야. 왜냐믄 그 검사두 누구보다 가난한 사람들의 편에 설 줄 아니까.


혜린 : 다했어?


혜린, 발끈하여 일어나 간다.

가다가 가던 속도로 돌아와 우석 앞에 서서


혜린 : 지금 말한 거 무슨 뜻이야? 말 돌리지 말구 똑바루 말해,

그러니까 뭐야,

우석 씨 나 가난한 집 딸인 줄 알구 좋아했는데, 좋아서 결혼할 생각까지 했는데,

부잣집 딸이라서 관두기로 했다는 거야? 그 얘기야?


혜린 말하는 도중 우석, 일어나 마주서서 미소라도 지을 듯한 얼굴로 들어주고 있다.


혜린 : 웃겨 우석 씨 그렇게 훌륭해? 우리 아버지 돈 더러운 돈이 틀림없으니까,

그런 집 딸하곤 상종도 안 하겠다? 어이구 (우석의 가슴을 퍽 치고) 대한민국 경사났네,

(또 치고) 이렇게 훌륭한 검사님두 계시구, 어이구. (또 치려는데)


우석 : 그 손을 잡는다)


혜린 : 놔! 못놔?


우석 : 시… 떨어졌어.


혜린 : 뭐?


우석 : 오늘 휴학계 냈다. 나 내일 고향 내려가.


혜린, 보다가 잡힌 손을 빼낸다.

충격에 대한 반발로 몸을 돌려 가버리려는데 우석 그 어깨를 잡는다.

혜린, 움직이지 않는다.

우석, 뒤로부터 혜린을 안는다.

그리고


우석 : 다행이야, 작별인사를 하구 떠날 수 있게 돼서.


혜린 말을 잊고 있다.

혜린을 안았던 우석의 팔이 풀린다.

잠시후 혜린이 돌아보았을 때 우석은 이미 자기 방으로 들어가고 있다.

등 뒤로 방문이 닫힌다.



# 37 농촌


추수기의 들판

우석의 시골 마을



# 38 우석의 집 마당


우석, 아버지의 일을 거들고 있다.

우석 , 문득 허리를 펴서 본다.

저만치 우편배달부가 자전거를 밟아오고 있다.



# 39 신체검사장


신체검사를 받고 있는 우석.



# 40 들판


너른 밭을 바라보고 있는 우석 부자.

영석은 밭에서 일을 하다가 이쪽을 향해 손을 들어 보인다.

우석도 마주 손을 들어준다.


부친 : 느 동생은 이제 농꾼이 다 되었다.

가뭄도 당해보고, 홍수도 당해보고, 인제서야 땅이 얼마나 중한 줄 알 게 된겨.

 사람이 흉작을 당해보지 못하면, 풍년 고마운 줄도 모르는 법인 게.

나가 이 말을 무슨 뜻으로 하는 줄 알겠냐.


우석 :


부친 : 나가 걱정한 것은 그 것이여. 너가 고시 한번 실패했다고 혀서,

학교를 달랑 중단하고 온 것이 아닌가, 고 것이 걱정이었어.


우석 : 그런 건 아닙니다.


부친 : 아니라면 됐다. 어차피 당겨와야할 군대라면 힘 좋을 때 다녀오는 게 좋지.

(농기구를 주섬주섬 챙긴다) 들어가 봐라. 나는 아직 일이 좀 남았구먼.


우석 : 거들겠습니다.


부친 : (밭으로 들어가며) 아녀. 들어가 책 봐. 군대 가기 전에 글자 하나라두 더 봐둬야지.

거기 가면 글자 구경 하기두 힘들 것인디 잊어먹기 전에 새겨두어.


부친은 영석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고 있다.



# 41 철로길


우석, 집으로 가는 도중.

철로길을 따라 걷다가 문득 걸음을 멈춘다.

저만치 철로길 중간, 햇살 가운데 우뚝 서있는 사내.

우석, 햇살에 눈을 가늘 게 뜨고 본다.

태수다.

우석, 웃고 다가가기 시작한다.

태수는 더 이상 가까이 오지 못하고 발로 땅을 차며 서 있다.

우석, 태수의 앞에 선다.

태수, 우석을 힐끗 보더니


태수 : 군대?


우석 :


태수, 스스로에게 화가 솟구치며 딴 데를 본다.


(시간경과)


둘 나란히 걷고 있다.

늦은 봄의 햇살…

그렇게 걸으며 도란도란 나누는 대화…


태수 : 알어? 우석이 너 참 아주 정떨어지는 자식이야.


우석 : 섭한 소린데 그 거.


태수 : 너 같은 자식은 교회에서두 안 받아줄 거야.


우석 : 왜?


태수 : 교회라는데 갈래믄 회개라는 걸 해야된대매. 넌 회개할 게 없는 놈이잖아.


우석 : 그럴 리가 있냐?


태수 : 너 기억나냐? 나 학교 그만두구 뒷골목으루 들어갈 때.


우석 : 그 때 끝까지 말렸어야 했는데.


태수 : 그봐 넌 그런 놈이야. 한번 아니면 끝까지 아니지. 안 돼 그 건 틀렸어.

그딴 소리밖에 할 줄 모른다구.


태수, 걸음을 멈춘다.

우석, 따라 멈춘다


태수 : 너 아냐 그 때 너 한 번두 나한테 묻지 않았다.


우석 : 뭘?


태수 : 왜 그래야 되냐구.


우석 : (웃고 생각해보다가) 물었으면 넌 대답할 놈이냐?


태수 : (웃는. 웃다가 문득 돌아본다)


저기 멀리 산굽이를 돌아 기차가 오고 있다.

둘이 함께 오고 있는 기차를 보다가


태수 : 야.


우석 : 어.


태수 : 미안 하다.


우석 : 시끄러.


기차는 점점 다가오고 있다.

여전히 철길 위에 서있는 두 사람.


태수 : 야.


우석 : 어?


태수 : 너 아직 여자하구 못 자봤지. 군대 가기 전에 한번 해볼래?


우석 어처구니없어 보다가 웃는다. 태수도 낄낄 웃는다.

웃는 그들 저편으로 기차가 달려오고 있다.



# 42 기차 안


밤을 새워 달리는 기차,

훈련소 생활을 마치고 자대배치를 위해 이동 중인 신병들…기차 한칸 가득 타고 있다.

모두가 이등병 계급장들…

그 중에 우석이 있다.

웅성거리던 소리가 조용해지고 모두 앞을 주시한다.

통로 가운데 버티고 선 중사 계급의 호송관.


호송관 : 너희들은 서울로 간다.


신병들 사이에 피어오르는 흥분…


호송관 : 편의상 너희들을 재경부대라 칭하겠다. 복창한다. 재경부대.


신병들 : (신이 나서) 재경부대!


호송관 : 너희들은 복 많은 놈들이다.

왜냐하면 너희들은 서울로 가기 때문이다. 재경부대!


신병들 : 예에


우석의 옆에 앉은 신병(후의 강 일병) 신이 나서


신병 : 서울이면 국방부는 되겄재. 카츄샤는 어떠냐. 보안사도 좋을 거인디.

머리도 길러불고 끗발도 좋다든디. 서울이면 최하 수경사는 되것재.



# 43 용산역


이리저리 몰려선 신병들, 여기저기서 자대의 번호를 부르고,

그 앞으로 모여드는 신병들, 더플백을 둘러멘 우석,

두리번거리며 자신이 속할 부대를 기다리고 있다.

한겨울 새벽의 역전 공터이다.

그때 저만치 어슴푸레한 새벽의 어둠을 헤드라이트로 밝히며 다가오고 있는 군트럭.

멈추어서더니 몇 명의 군인이 튀어 내린다.

헤드라이트 불빛 앞으로 걸어 나오는 그들의 실루엣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그들은 낯선 군복 검은 베레모를 쓰고 있다.

그 중의 하나가 소리친다.


소리 : 3578부대 3578부대 어딨나?


우석 흠칫 놀라 다시 본다.

방금 들은 소리를 믿고 싶지 않은 순간이다.


<5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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