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모래시계

<제2회> 모래시계

오늘의 쉼터 2018. 10. 14. 00:52

<제2회> 모래시계




# 1 대학의 대강당


정문에 붙여진 포스터.

[심포지움. 4.19의거에 대한 우리의 견해

일시 : 4월 18일 오후 2시

장소 : 대강당]

저벅저벅 들리는 위협적인 발소리 포스터 앞에 다가오더니 그대로 포스터를 찢어내린다.

그 위에 붙여지는 새로운 안내문.

[대강당 내부수리중]

대강당의 정문 콰앙 소리를 내며 닫히고 잠긴다.

대강당의 옆문 역시 콰앙 소리를 내며 닫히고 잠긴다.

다른 문 역시 닫히고 잠긴다.



# 2 대학 캠퍼스


어느 건물 앞.옥상 위에 서 있는 학생.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높이.

그 학생은 유인물을 멀리 뿌린다.

색종이처럼 공중을 날라 뿌려지는 유인물. 건물 밑의 오가던 학생들 유인물을 들어본다.

역시 등교 중이던 우석(대학생) 유인물 한 장을 들어본다.



# 3 건물 입구


사복 사내들 몇이 뛰어 들어간다.



# 4 강의실


칠판에 굵고 크게 쓰인 글자들. 한 쪽에 마치 낙서처럼 기울게 쓰인 글자.

[군독재의 망령 학도호국단을 철폐하라]

다른 쪽의 문장.

[우리의 손으로 우리의 학생회장을!]

그리고 중앙에 번듯하게 쓰인 문장.

[수업 거부의 일환으로 중간고사 역시 거부합니다. 서클연합회]

입구 앞에 멈추어 선 채 칠판을 읽어보는 우석.

교실에 남아 있던 몇 명의 학생들 가방을 챙겨 나가버린다.

학생들과 엇갈려 교수가 시험지를 들고 들어온다.

보면, 중앙에 우석 혼자 남아 있다. 교수 아무 말 없이 시험지를 준다.



# 5 교실 밖 복도


웅성거리며 남아있던 열 명 남짓한 학생들…

창문 너머로 우석 혼자 시험을 치고 있는 모습을 본다.

그 중 한 명 결심한 듯 문을 열고 들어간다.

교수 그 학생에게도 시험지를 준다.

뒤따라 또 몇 명의 학생들이 들어선다.



# 6 강의실 건물 일각


가방을 들고 나서는 우석. 그 앞을 기다린 듯 막아서는 서너 명의 학생. 그 중 한 명.

 

학생 : 잠시 대화를 하고 싶은데요.



# 7 서클실


열명 정도의 학생들이 반원을 그리며 앉아 있다.

그 반대 쪽에 혼자 앉아있는 우석.

마악 문을 열고 들어서는 운경. 우석을 보더니 성큼성큼 다가가 손을 내민다.


운경 : 어이, 나 경제학과 삼학년 정운경이야.


우석 : (일어나 악수를 받는다)


운경 : (뒷머리를 긁으며 동료들에게) 이 친구가 법대 과대푠가? (우석에게) 미안 하다.

자리가 좀 우습지만 이해해라. 이게 다 시대의 비극 아니겠냐?


학생1 : (항의조로) 형.


운경 : 그래 알았어. 난 구경만 할 게. (운경 옆자리로 가서 대충 걸터앉고)


학생1 : (우석에게) 용건만 간단히 하죠. 수업 거부는 전체 학생이 투표로 결정한 사항입니다.

그에 반대하는 이유가 뭡니까?


우석 : (어쩐지 웃음이 나올 것 같은 기분, 이런 상황이 우스꽝스럽게만 느껴지는)


학생2 : 반대뿐이 아니구, 시험을 쳐야한다구, 선동을 했다면서요.


학생1 : 해명해 주시죠.


우석 : …왜 안 됩니까?


학생1 : 예?


우석 : 왜 반대를 하면 안 되죠?


일순 침묵이 흐른다.


우석 : 반대를 용납하지 못하는 건 독재라고 배웠는데요. 아닙니까?


학생1, 운경을 돌아본다.

운경, 남의 일이라는 듯 귀를 후비고 있다.



# 8 대학가 술집


허름한 학사 주점.

삼삼오오 앉아서 열띤 토론을 하기도 하고 더러 노래를 부르기도 하는 70년대 말의

대학가 주점의 분위기 주인아줌마가 어느 테이블을 지나가며 소리지른다.


아줌마 : 니들 정말 안주 안 시킬 거야.


학생 : 죄송합니다. 김치 한사발만 더 히히


아줌마 학생의 머리통을 쥐어박고 간다.

그 중의 한 테이블에서 우석과 운경, 술을 마시고 있다.


운경 : 왜 반대를 하면 안 되느냐? (껄껄 웃어)

민주주의란 반대와 비판을 받아들임으로서 강해진다.

맞아. 맞는 말인데. 어이 사법고시 칠거지?


우석 : (끄덕인다)


운경 : (딱딱 거리는 게 아니라 친한 후배에게 하듯 사분사분)

우리가 걱정하는 건 바로 너 같은 애들이 판검사가 되는 거야,

고향에서는 신동 소리 듣고 중고생 시절엔 전교 몇 등 안 에서 놀고

대학에서는 들입다 학점이나 따고, 그리구 시험 쳐서 스물 몇 살에 판검사가 된단 얘긴데.

어이 이 사회에 대해서 아는 게 뭐 있어?


우석 : (피식 웃기만)


운경 : 하긴 아는 게 없으니 겁나는 것두 없겠지. 아무 생각 없이 감옥 보내구,

사형시키겠지. 이 사람이 왜 도둑질을 했는지, 이 사람이 감방가면

그 처자식이 굶어죽 거나 말 거나. (술을 따라준다)


우석 : (말없이 술을 마신다)


순간 들리는 소리


남자 소리 : 야!


우석, 술 마시다 말고 돌아본다. 술 취한 남학생 한 명, 비틀비틀 한 테이블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그 테이블에는 여학생 두 명이 마주 앉아 술을 마시고 있는데,

그 중 한 여학생 담배를 피우고 있다.

남학생, 다가서는가싶더니 그대로 여학생의 따귀를 때린다.

비명을 지르며 얼굴을 감싸 쥐는 여학생.


학생 : 계집애가 어디서 담배를 피워대.


혜린, 벌떡 일어나 친구를 보고 남학생을 돌아본다.


학생 : 뭘 봐.


순간 혜린, 남학생의 따귀를 올려붙인다. 우석, 꿈쩍 놀라 본다.

술집 안의 사람들 모두 돌아보고 있다.


혜린 : 남자가 돼서 여자를 때려?


남학생, 폭발해서 달려들려는데 혜린 테이블이며 의자를 밀어 진로를 차단하며

우석 쪽으로 서너 걸음 물러나며 계속 떠들어대고 있다.


혜린 : 힘 좀 세다구 약한 사람을 때려? 야 이 자식아, 너 학교에서 뭐 배웠어?

그 게 바루 독재라는 거야.


이제 혜린은 우석의 옆에 서 있다.


혜린 : 너만 옳구 너만 잘나서 남들 다 니 뜻대루 해야 되는 거,

말 안 들으면 힘으루 패서 말 듣게 하는 거 그게 독재야. 알아?


달려드는 남학생, 운경 일어나 그를 잡아 말린다.


학생 : 너 일루 와 일루 못 와.


혜린 : 니가 와라.


혜린, 우석은 보지 않은 상태에서 우석의 뒤를 돌아 피하며 계속


혜린 : 너 같은 게 등록금 좀 있다구 대학오구 말야. 어이구,

니 어머니두 아시냐 너 그렇게 멍청한 거. 니 어머니두 아셔?


이제 남학생의 동료들이 달려와 남학생을 끌고 나간다.

끌려 나가며 남학생 계속 소리 지르고 있다.


학생 : 놔 이거 저년 버릇 고쳐야 돼. 저거, 이거 못 놔?


혜린 : 가긴 어딜 가. 너 사과해, 사과하구 가라구.


쫓아가려는 것을 운경이 막는다.


운경 : 고만해.


혜린 : 선배 저 자식 하는 짓 봤잖아.


운경 : 취해서 그래. 취하면 개야.


혜린 : 어이구 저런 돌대가리가 대한민국 대학생이야. 나라 망칠 놈이야 저거.


우석, 어이없어 보고 있다.

혜린, 우석은 아랑곳없이 아직도 분이 안 풀려 우석의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 벌컥벌컥 마시더니 친구가 있는 곳으로 가며


혜린 : 야 괜찮니? 아주 반 죽여 놓는 건데, 괜찮어?


운경, 고개를 흔들며


운경 : 혜린이 저 자식 누가 말려.


혼자 낄낄 웃고 있다. 우석 혜린 쪽을 본다.

저만치에서 혜린은 친구를 잡고 위로하며 뭔가 얘기하고 있다.



# 9 도서관


책상에서 책을 보고 있던 우석, 문득 한 곳을 본다.

책을 한 아름 들고 들어서는 혜린. 우석의 건너편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책을 뒤적이다가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어 우석을 본다.

우석, 저도 모르게 입가에 번지는 미소를 애써 누르고 자신의 책을 본다.

혜린 책을 넘기다가 후딱 다시 우석을 본다.

우석 혼자 빙글거리며 책을 보다가 혜린을 본다.

시선이 마주치자 다시 책을 보는데 영 웃음을 참을 수가 없다.



# 10 도서관 복도


우석, 가방을 들고 걸어 나오고 있다.

긴 복도를 걸어 코너를 돌다가 멈칫 선다.

그 앞에 혜린이 기다리고 있었던 듯 그를 보고 있다.

또박또박 걸어와 바로 앞에 멈춰서더니 묻는다.


혜린 : 나, 알아요?



# 11 학교 밖 밤


며칠째 농성중인 학생들의 무리를 배경으로 혜린, 교문을 나선다.

학교 밖, 떨어진 곳에 전경 버스… 전경들 그 중에 사복 차림의 두 사람

혜린을 보고 수첩을 뒤져 사진을 확인하고 혜린의 뒤를 따른다.



# 12 주택가 입구


상점들이 있어서 밝은 곳. 혜린, 빠른 걸음으로 온다.

그 뒤를 사복 둘이 따른다.

그들도 혜린이 이미 눈치를 채고 있음을 안다.

다만 사람이 많은 곳을 피하자는 생각이다.

혜린 순간 옆의 가게로 들어간다.

사복들 멈칫 선다.



# 13 가게 내부


다른 손님을 상대하고 있던 가게 주인, 어어해서 본다.

혜린, 뒷문으로 해서 나가고 있다.



# 14 우석의 자취집 대문 앞


우석, 대문을 나서고 있다. 공부를 하다가 가까운 가게에 다녀오려고 나온 가벼운 차림.

가볍게 운동을 하며 걸어 나오다가 멈칫 선다.

저만치 샛골목으로 튀어 들어온 여자. 우석은 발견하지 못하고 어둠 속에 몸을 감추더니

헐떡이며 골목 밖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다.

우석, 고개를 기웃해서 본다.

혜린이다. 우석 다가가 어깨를 툭 친다.

순간 혜린, 기겁을 하며 놀라더니 무조건 우석을 치고 도망치려 한다.

우석 다급해서 혜린의 팔을 잡는다.


우석 : 이봐요.


혜린 정신없이 우석의 팔을 뿌리치려 하다가 그제야 우석의 얼굴을 본다.

공포로 얼이 빠진 얼굴이다.



# 15 우석의 자취집


우석 혜린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와 대문을 닫는다.

잠시 대문에 귀를 기울이고 밖의 소리를 듣는다.

조용하다.

우석 돌아보면 혜린, 우두커니 서 있다가 벽에 기대어 주르르 주저앉는다.

우석, 한심해서 보다가 그 앞에 쭈그려 앉는다.


우석 : 그렇게 겁나는 짓을 왜 해요?


혜린, 멍청이 보다가 헤에 웃는다.

아직 긴장이 풀려있지 않아서 영 바보스러운 웃음이 된다.


혜린 : 반가워요.


우석 : 그렇겠죠.


혜린 : 여기 댁의 집이에요?


우석 : 자취집이에요.


혜린 : 집이 좋네요.


우석 : (웃고 만다) 좋아 보이겠죠.


혜린 : 이름이 뭐라구 했죠?


우석 : 강우석이요.


혜린 : 이제 보니 잘생겼네요.


우석 어이없어 웃음도 안 나온다.

혜린 멋적게 웃는다. 이제 긴장이 좀 풀어졌다.



# 16 학생 식당


식사 때가 아닌 시간. 많지 않은 학생들, 공부를 하기도 하고 얘기를 나누기도 하고

라면도 먹고….그 중의 한 테이블에서 우석 책을 읽으며 라면을 먹고 있다.

다시 한 젓가락을 들다가 멈칫하여 본다.

앞자리에 와서 앉는 혜린.


혜린 : 안녕.


우석 : 어 … 왜?


혜린 : 그냥.


우석, 싱거운 자식하는 기분으로 계속 책을 읽으며 먹으려다 다시 보면

혜린은 턱을 괴고 앉아 우석이 먹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다.


우석 : 왜?


혜린 : 그거 다 먹을 거야? 남길 거지?


우석, 할 수 없이 먹던 라면 그릇을 밀어준다.

혜린, 반가워서 먹기 시작한다. 먹는 혜린을 보다가


우석 : 라면 값도 없니?


혜린 : (라면이 입에 잔뜩 들어 대답도 못하고 고개를 가로 젓는다)


우석 : 아직 아르바이트 못 구했어?


혜린 : (끄덕이는)


우석 : (먹는 혜린을 보다가 마음을 정하여) 중학교 삼학년. 여학생 일주일에 네 번.

영어 수학. 시험 때는 전과목 총정리 해볼래?


혜린, 안 믿겨서 우석을 본다.

우석을 보다가 혜린은 고개를 젓는다.


우석 : 왜?


혜린 : 우석 씨 하든 거지? 나 주면 우석 씬.


우석 : 다른 데 있어. 삼 초 내루 대답해. 일 초 이 초.


혜린 : (얼른) 할래.


우석 : 됐어.


다시 책을 읽는데 책과 우석의 얼굴 사이에 고개를 들이밀어 올려다보는 혜린.


우석 : (저도 모르게 남들이 보나 둘러보는데)


혜린 : 고마워.


우석 의자를 옆으로 밀어 비켜나 앉는다.


혜린 : 우석 씨.


우석 : (책 보며) 뭐.


혜린 : 나 나중에 우석 씨 같은 남자한테 시집갈 거야.


책을 보는 자세로 정지되었던 우석이 고개를 들고 보았을 땐

혜린은 이미 라면 쟁반을 들고 저만치 가고 있다.



# 17 밤 택시 회사 전경



# 18 사무실


택시 기사 유니폼을 입은 우석, 들어선다.

경리 아가씨에게 가서 그날치 사납금을 내고…

그러는 사이 동료 기사들과 인사를 나눈다.

수고하셨습니다.

어 일찍 들어왔네, 수고했어, 등등



# 19 택시 회사 밖


사복으로 갈아입은 우석, 나온다.

걷다 멈춘다. 저만치 앞에 우뚝 서있는 혜린.

잔뜩 굳어있는 얼굴이다.

우석, 난처하지만 다가선다.


우석 : 여긴 어떻게 알았어?


혜린 : 잘하는 짓이다.


우석 : (성가신데)


혜린 : 고시 공부 한다는 애가 잘하는 짓이야.


우석 : 목소리 좀 낮춰.


다른 기사들 지나가고 있다.


혜린 : (그들을 향해 고래고래) 얘 좀 보래요. 얘 법대생인데요,

쩡한 아르바이트 자리 여자한테 홀려서 다 내주고요 택시 운전한대요 .


우석 : 혜린아.


혜린 : 고시공부 하는 법대생이요.


우석 다급해서 혜린의 입을 막아버린다. 혜린 우석의 팔을 뿌리쳐버린다.


혜린 : 멍청이


우석, 에라 놔둬버리고 먼저 걸어간다. 혜린, 그 뒤를 따라 걸으며.


혜린 : 친구가 뭔지두 몰라.

우석 씨가 그 따위루 하면 내 맘이 어떻겠어.

내 맘이 편하겠냐구.

그러니까 친구가 하나두 없지 그치? 멍청이! 미련퉁이!



# 20 다른 길


여전히 빠른 걸음으로 걷고 있는 우석. 그 뒤를 따라 걷는 혜린.

이제 조용하다. 혜린 걸음을 빨리하여 우석의 옆을 걷는다.

우석, 모른 척 걷는다. 혜린 땅만 보고 걸으며 우석의 팔을 툭 친다.

우석, 모른 척 걷는다. 걷다가 내려다보면 혜린의 손이 슬그머니 우석의 팔목을 잡는다.

우석, 걸음을 멈춘다. 혜린, 우석은 보지 않은 채 우석의 손 안에 자기의 손을 밀어 넣는다.

펼쳐진 채 잠시 가만있던 우석의 손이 결국 혜린의 손을 감싸 잡는다.

혜린, 힐끗 우석을 본다. 우석, 혜린의 손을 잡은 채 잠자코 걷기 시작한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 길가에는 인적이 별로 없다.



# 21 버스 정류장


마지막 버스가 떠나려한다.

우석과 혜린 손을 흔들며 달려가 간신히 버스에 올라탄다.



# 22 버스 내부


맨 뒷자리에 나란히 앉은 우석과 혜린. 혜린은 잠이 들어 있다.

버스에 흔들리며 우석이 보는 앞에 저만치 나란히 앉아있는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남학생 두 명. 뭔가 얘기를 나누며 낄낄대고 있다. 그들의 모습에 회상으로 빠져든다.



# 23 우석의 어린 시절 마을 전경


그 위로 들리는 우석 부친의 노한 음성


부친 소리 : 천지가 개벽해두 안 파는 건 안 파는 겨.



# 24 우석의 집


울 밖으로 십여 명의 주민들 마당 안 에서 벌어지는 일을 구경하고 있다.

마당 안에는 우석 부친이 버티고 있는 앞에 서울 사내 한 명과 농협장.


사내 : 혼자 땅을 안 팔면 어떻게 하겠다는 겁니까? 여기 다 개발되구 나면,

초가집 모시구 혼자 살 거예요?


부친 : 혼잔 왜 혼자여? 내 아들들이 있구 내 땅이 있는데, 내가 왜 혼자여.


농협장 옆에서 안타까운 듯 혀만 끌끌 차고 있다.



# 25 건넌방


밤, 호롱불 밑에서 부친은 새끼를 꼬고 있다.

그 앞 불빛 바로 앞에서 국민학교 육학년인 우석 상을 놓고 공부하고 있다.

우석, 까물까물 졸리고 있다가 마악 하품을 하려는데 부친이 불쑥 말을 꺼낸다.


부친 : 세상엔 옳은 게 있고 그른 게 있구먼. 옳은 건 백 년이 가도 옳은 것이고,

그른 건 천 년이 지나도 그른 겨. 내 말 알아듣겠냐?


우석 : 우리 땅을 팔라고 합니까?


부친 : (버럭 성을 내어) 땅을 팔고 안 팔고가 문제가 아녀.

사내자식 세상보는 눈이 어째 그리 좁아터졌어?


우석 : (찔끔해서)


부친 : (화를 가라앉혀) 놈들이 우리 땅을 사서 골프장인지 뭔질 만든다는 겨.

아니 언놈 놀이터 만들자고 백성들 생계터를 뺏어? 그런 법은 없는겨.

내 말 알아듣겠냐?


우석 : (잘 모르겠지만) 예.


부친 : 공부혀라.


우석 : (다시 책을 잡는다. 잠시 후)


부친 : 큰소리로 혀.


우석 : (책을 읽기 시작한다.) 민주주의의 근본정신은 사람은 누구나 아무도 무시할 수 없는

인격을 가지고 있으므로.


부친 : (새끼를 꼬며) 옳지!


우석 : 인권은 누구에게도 억눌릴 수 없을 뿐 아니라 함부로 남을 짓밟을 수도 없다는 생각이다.


부친 : (끄덕 거린다)옳은 소리여.


우석 : 그러므로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우선 누구나 자기 인격의 소중함을 알고

자기의 권리와 자유를 아무에게도 뺏기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부친 우석의 책읽는 소리에 따라 고개를 주억거리기도 하고 옳은 말이여

장단을 맞추기도 하며 새끼를 꼰다.



# 26 마을 농협


벽에 걸린 태극기와 박정희의 사진. 당시의 낯익은 표어들…

농협에는 젊은 남자 직원만 있어서 우석 부친이 내민 돈을 받아든다.

부친 뒤에는 영석이 서있다.

그 뒤에 농협장실의 문이 조금 열리더니 농협장이 살그머니 내다보고 있다.



# 27 길


부친 리어카를 끌고 있다.

리어카에는 여섯 푸대의 비료와 그 위에 장을 본 물 건들이 얹혀져 있다.

북어대가리도 달랑달랑 매달려 있다.

리어카를 뒤에서 힘겹게 밀고 있던 아홉 살의 영석.


영석 : 아버지.


부친 : 왜?


영석 : 아버지.


부친 : 말을 혀.


영석 : 아버지…. 저기 어째 형만 공부시켜요?


부친 : 넌 학교 안 댕기냐.


영석 : 학교 공부 말고요.

형은 집에서 김도 안 매고 소도 안 치고 맨날 나만 일하라 그러잖아요.


부친 : (허허 웃더니) 국가적인 이유여.


영석 : 국가면 나란디…


부친 : 그려 나라적으로 볼 때 한집서 아들 한 놈이 공부를 하면

다른 한 놈은 일을 해야 되는 겨. 나라에서는 공부하는 놈도 필요하지만

일하는 놈도 필요하니께. 영석이 너는 공부하는 게 좋으냐?


영석 : 좋지는 않지만서두…


부친 : 좋지두 않은 공분 뭐하러 혀. 내 말 알아듣겠냐?


영석 : (입만 비죽해져서 그러나 열심히 리어카를 밀고 있다.)


그렇게 두 부자는 리어카를 당기고 밀며 황토길을 간다.



# 28 밤 방안


우석의 한 가족이 한방에 잠들어 있다. 난데없는 여러 사람의 발소리.

우석, 잠이 깬다.


소리 : 강만석 강만석 있나?


문이 벌컥 열어젖혀진다. 부친과 모친, 어리둥절 잠이 깬다.

우석도 부시시 일어나 앉는다. 그 얼굴 위를 플래쉬가 강하게 비춘다.



# 29 마당


옷도 제대로 차려입지 못한 부친, 제복의 경찰과 사복의 형사에게 끌려나간다.

모친, 정신없이 부친을 끌어잡아 버티며


모친 : 아이고, 우석 아버지 이 무슨 일이요? 이보시요. 놓고 말부텀 합시다.

이 추운디 옷이라도 입어야지. 아이고 순사나리.


형사 귀찮아서 모친을 밀어버리고 나가려는데 문 앞에 우석이 양팔을 벌리고 버티어 서 있다.


우석 : 얘기해줘요. 울 아버지가 무슨 죄를 졌는지 얘길해줘요?


형사 : (우석의 당돌한 기세에 허어 웃고) 이놈아 니 아버지 절도죄다.

농협에서 비료를 훔쳤어.


우석 : 거짓말이요.


형사 : 그놈


뒷마당에서 젊은 순경 하나가 비료 포대 하나를 들고 나온다.


순경 : 여섯 포대 다 있어라. 남바가 신고한 거랑 맞는디요.


부친 : 뭣이 어째. 그 비료는 내가 내 돈 주고 산 거여.


형사 : 증인 있어?


부친 : 뭐여?


형사 : 당신이 돈 내는 거 본 증인이 있냐고.


우석 초롱초롱한 눈으로 보고 있다.



# 30 낮/농협 안


젊은 직원 고개를 젓는다.


직원 : 난 못 봤어요. 그날 강 이장 온적 없는데요.


아이고오 우석의 모친 주저앉는다. 농협 문 밖에는 구경을 하는 주민들이 모여 있다.

모친의 옆에 선 우석



# 31 산길


해가 저물어가는 산길을 우석 달려가고 있다.

언땅에 미끄러지면서 계속 달린다.



# 32 밤 농가 마당


방문이 열리며 김 노인 내다본다.


김 노인 : 누구라고?


우석 : (아직도 헐떡이며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이고) 우리 아버지가 아랫마을 강 이장인데요.


김 노인 : 그럼 니가 강 이장 아들이냐? (방안의 부인을 향해) 강 이장 아들이면 그 신동으로


우석 : 여쭤볼 말씀이 있어서 왔는디요.


김 노인 : 니가 사서삼경도 왼다며.


우석 : 그게 아니고 어르신 지난 십오일 날 농협에 가셨지요.


김 노인 : 십오일이 언제여?


우석 : 장날이었는디요.


김 노인 : 그려 장날에 나가 농협엘 갔지. 니가 그걸 어찌 아냐.

(부인을 향해) 신동은 신동인가벼.


우석 : 거기서 울 아버지 보셨는 게라.


김 노인 : 봤지. 나허구 같이 비료 샀지.


우석 : (반가와서) 울 아버지 돈 내구 샀지라.


김 노인 : 그럼 돈내구 사지 발내구 사?



# 33 이른 아침 지서 앞


우석의 모친 퍼질러 앉아 기다리고 있다.

그 옆에는 영석이 영문을 모르는 채 불안 한 얼굴로 있다.

우석은 발돋움으로 안을 들여다보려고 애쓴다.


(시간경과)


동네 주민 두어 명 지서 쪽으로 온다.

이미 지서 앞에는 우석네 가족 말고 십여 명의 동네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며 함께 기다리고 있다.

지서 유리창에 고개를 쳐박고 안을 보고 있던 우석 재빨리 뛰어나와 문 쪽을 주시한다.

모친도 일어서 그 쪽을 본다.


동네 사람들도 말을 멈추고 본다.

이윽고 문이 열리며 김 노인이 아들인 듯한 청년과 나선다.

우석, 그 앞으로 달려가는데 노인은 우석을 피하는 듯 길을 비켜 지나가려한다.

만면에 웃음을 띄고 잔뜩 기대하던 우석의 얼굴에서 웃음이 가신다.


우석 : 할아버지


김 노인 : (후다닥 우석을 향해) 난 못 봤구먼. 난 강 이장이 누군지도 몰러.

그러니께 난 아무 것두 못 봤어.


청년 김 노인을 끌어 동네 사람들 사이를 뚫고 가버린다.

모친 다시 절망으로 주저앉고 우석, 깎아놓은 듯 그 자리에서 김 노인이 간 쪽만 보고 있다.



# 34 지서 안


밤, 침침한 백열등…그 아래 책상 앞에 우석의 부친 앉아 있다.

부친 나이 또래의 지서장, 부친에게 담배를 권한다. 부친 반응이 없다.

지서장 담배를 도로 집어넣고 헛기침을 한다.

자신으로서도 그다지 내키지 않는 얘기다.


지서장 : 딴 생각 복잡하게 할 거 없어. 그저 자식놈 생각만 혀.

장남이 국회의원감이라구 다들 그러든데 부친 호적에 뻘건 줄이 그어져 있어서야 되겠는가.

그 생각만 혀. 절도구 살인이구 뻘건 줄 생긴 모양이야 똑같응 게 피하구 보는 게 상수여.


부친 고개가 점점 수그러들더니 어깨에 파묻혀버릴 듯하다.



# 35 마을길 (새벽)

 

우석의 일가 작은 트럭에 짐을 싣고 이사를 가고 있다.

조수석에는 모친과 영석이 타고 있고 지저분한 짐이 가득 실린 트럭 뒤에는

부친과 우석이 타고 있다.

우석, 힐끗 부친을 본다. 며칠새 확 늙어버린 듯한 부친은 잠바를 뒤집어쓰고

바람을 막으며 웅크리고 앉아 있다.

그 초라한 모습에 우석 얼른 눈길을 돌린다.

바람을 막기 위해 둘러쓴 담요로 부친에게서 얼굴을 가리고 우석 찔끔찔끔 운다.


부친 : (불쑥) 우석아.


우석 :


부친 : 너 법대 갈 수 있겠냐?


우석 : (돌아보는)


부친 : 법대 가서 나라시험 쳐갖고 판사가 되라.

판사가 되면 억울한 사람들 원을 풀어줄 수 있을 겨. 할 수 있겠냐?


우석 : …예


부친 : 애빈 배운 게 없어서 더 말해줄 게 없다.

그저 학교서 배운 대로만 해라.

학교서 뭐라고 하드냐 우리나라는 민주국가이고. 민주 국가는 백성이 주인이 되는 것이다.

안 배웠냐? 그런데 나같이 어리석은 백성은 지 밥그릇도 못 찾아 먹는다 말이여.

그러니 니가 판사가 되어 도와줘야겠다. 알겠냐?


우석 : 예.


부친은 더 이상 말이 없다. 어린 우석의 눈에 비치던 부친의 옆모습…



# 36 회상. 태수의 요정 집 앞


고등학생인 우석과 태수. 대문 앞에 도착한다. 태수, 우석의 표정을 살핀다.

우석, 요정의 간판과 내걸려있는 등에 어리둥절해져 있다.

태수 모자 속의 머리를 벅벅 긁어


태수 : 이게 우리 집이야. 나 여기 살어. 우리 엄마가 이 요정 마담이거든.


우석 : …공부……우리 집에 가서 해두 좋아.

자취방이니까 집두 아니지만, 좁아두 조용하긴 해.


태수 : 공부는 우리 집에서 해. 왜냐면… 우리 엄마 나 공부하는 거 좋아하시거든.

그리구 너… 나 가르치면 가정교사비 받어.


우석 : …돈을 받으란 얘기냐?


태수 : 너 신문 배달하는 거 알어. 그 시간에 날 가르치니까 당연히…


우석 돌아서 간다. 태수 가는 우석을 보며 성가시게 됐다는 얼굴이 된다.



# 37 운동장 수돗가


우석 주전자에 물을 받고 있는데 그 옆에 태수.


태수 : 우리 집에 언제 올 거야?


우석 대꾸없이 주전자를 들고 간다. 태수 그 앞을 막아선다.


태수 : 언제 올 거냐구.


우석 : 친구한텐 돈 안 받어.


태수 : 멍청하긴. 친구니까 돈 받아두 되는 거야.


우석 말이 막힌다.


태수 : (화난듯) 내 말 틀렸냐?



# 38 태수의 방


방문을 열어놓은 채 우석과 태수 공부하고 있다.

태수, 집중이 안 되어 우석을 힐끗 보고 방 밖을 힐끗 보다가

얼른 시선을 거두고 웃음을 감추어


태수 : 우석아 저기…


우석 : (태수가 가리키는 대로 무심코 방 밖을 본다.)


뒷마당으로 통하는 입구 쪽 담 옆으로 웬 아가씨 둘이 이쪽을 보고 있다가

우석과 시선이 마주치자 한 손을 흔들어 보인다.


우석 : (당황하여 시선을 거둔다.)


태수 : (책을 보는 자세로) 분홍색 입은 여자 이름이 춘심이다.


우석 : (못 들은 척 수학문제를 연습장에 베낀다.)


태수 : 너한테 관심이 많나보더라. 나이가 아마 우리하구 비슷할 걸….


우석 : …(문제만 푼다)


태수 : (재미있어서 다시 밖을 보다가 표정이 굳는다) 우석아. 야.


우석 : (문제 풀던 것 놓치고 성이 나서 고개를 드는데)


밖에서 들리는 소리


여자 (소리) : 일루 들어오시면 어뜩해요.


소리 : 우석이 여기 있냐.


우석 놀라 밖을 본다. 거기 여자를 뿌리치며 뒷마당으로 성큼성큼 들어서는 우석의 부친.


(시간 경과)


태수모친 치맛자락을 감싸 쥐고 황급히 뒷마당으로 들어선다.

태수의 공부방인 별 채가 있는 뒷마당 한가운데에 우석의 부친이 우뚝 서서 호령하고 있고,

그 앞에 우석이 고개를 푹 숙이고 서 있다.

그 뒤에는 난처해서 서있는 태수.


부친 : 그려서 너가 숙식을 신세지고 있다는 친구집이 여기냐?.여기가 친구집이여?

홍등 걸린 여기서 살겠다고 자취방을 나온겨.


모친 : (다가서며) 우석이 학생 아버님이시라구요. 태수 에미되는 사람입니다.


부친 : (얼른 태수모친으로부터 외면하여 서서 아무 얘기도 못 들은 듯 우석에게 계속)

뭘하구 섰어. 후딱 짐 챙겨갖구 못 나오겠냐.


모친 : (부친의 앞으로 돌아나오며)잠시 안으로 드셔서 얘기를…


부친 : (다시 외면하여 돌아서) 애비 말이 안 들려.


우석, 어쩔 수 없이 안으로 걸음을 옮기려는데 태수모친 잽싸게 부친 앞으로 오더니

부친이 미처 피할 사이도 없이 그 앞에 무릎을 꿇어 머리를 조아린다.


모친 : 제 욕심 때문입니다.


우석의 부친, 당황하여 할 수 없이 비스듬히 땅바닥을 두 손으로 짚어 맞절의 모양새를 갖춘다.


모친 : 우리 태수가 아드님 덕분에 겨우 마음을 잡고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아드님을 못난 자식의 스승님처럼 생각하구 있답니다.

에미 욕심에 생각이 모자랐습니다.

멀찌감치 따로 방을 구하겠어요.

제발 아드님을 우리 태수하고 같이 있게 해주십시요.

부탁입니다.


태수의 모친은 조아린 머리를 들 생각을 않고,

우석의 부친, 일어설 수도 없어 난처하여 그대로 있다.



# 39 버스 정류장


우석의 부친과 우석, 버스를 기다리며 서 있다.

우석은 부친의 짐을 들고 있다.

한참 만에.


부친 : 우석아.


우석 :


부친 : 아무리 그려도 옳은 건 옳은 거고 그른 건 그른겨. 인정에 끌리고 뭣에 끌리고

야금야금 그른 것을 허용하다보면 종내는 빠져나올 수가 없게 되는겨.


우석 : 예…


부친 : 그려서 예로부터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야 아예 가지두 말라구 한겨.

너는 장차 법을 집행할 사람인께 특히 명심해야 할 것이구먼. 내 말 알아 듣겄냐.


우석 : 예…


부친 : (무슨 말인가 더 하려다가 ) 알아들었으면 됐다.


버스가 와서 선다. 우석이 내어주는 가방을 들고 부친은 차에 오르면서 한 번도 돌아보지 않는다. 우석을 믿는다는 표시인지도 모른다.



# 40 몽따쥬 사진관


우석에게 돈 봉투를 건네주는 태수.



# 41 몽따쥬 화장터


모친을 화장하던 날의 태수.



# 42 중앙로


번화한 중앙 거리에 거칠게 들어서는 트럭에서 뛰어내리는 수십 명의 건달들 정류장에 선

버스에서도 건달들이 우루루 쏟아져 나온다.

비명을 지르며 피하는 시민들에는 아랑곳없이 맞부딪히는 양 쪽파 건달들의 난투극

그 중에 고등학생인 태수의 모습이 보인다.

각목 하나를 거머쥐고 누구보다 거칠고 맹렬하게 상대편 건달들을 향해 돌진하고 있다.



# 43 몽따쥬


건달인 태수의 성장과정 고등학생 나이에서 성인 나이로의 변모.



# 44 거리


앞 씬과 거의 유사한 거리의 패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성인이 된 태수가 지휘를 해가며 난투를 벌인다.

그러다 보면 거리 한 쪽에 아이를 안은 여자가 미처 도망가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다가 넘어진다.

태수, 성가신 얼굴이 된다. 할 수 없이 그리로 뛰어간다.

여자를 일으키려는 순간,

상대 쪽의 누군가가 태수의 뒷머리를 각목으로 내려친다.

불끈해서 뒤의 사내를 공격하려는데 또 다른 상대의 손이 공중에 휘둘러지며

가로등 빛에 번뜩이는 칼날.



# 45 병원 내부


급하게 가는 시선으로 응급실까지 가는 복도의 스케치.

한바탕 건달패들의 패싸움이 벌어지고 난 뒤에 실려온 건달들과

그 동료들로 복도는 붐비고 있다.

시선은 그들 중에 한 사람을 찾고 있다.

응급실 문을 벌컥 연다.

중상을 입은 자들이 치료를 받는 중에 거기 침대에 누운 태수의 모습.

무심코 고개를 돌리다가 시선, 우석을 발견한다.

우석, 태수 옆에 가 선다.

윗도리를 벗은 태수는 가슴을 찔린 듯 붕대를 칭칭 감고 있다.


태수 : (의외라 놀라 보다가 멋적게 웃는다) 웬일이냐. 학교는 어떡하구.


우석 : (좀 화가 나 있는 상태…진정하여) 추석이잖아. 고향 가다 들렀어.


태수 : 아, 추석이구나 참.


우석 : 너 만나려구 왔어.


그 때 건달 한 명 다가와 우석의 팔을 잡아챈다.


건달 : 이 자식 뭐야.


태수 : (벌컥하여 그를 쳐낸다) 건들지 마!


(그래놓고 상처가 아파 웅크리는) 건달 머쓱해서 보는데.


태수 : 가 봐 자식아.


건달 힐끔 거리고 가고 우석 주위를 둘러본다. 다 그렇고 그런 건달들…


태수 : 어이 학교는 어때? 법대공부 할 만하냐? 잘난 척 하는 자식들 많지?


우석 : 일어날 수 있냐?


태수 : 뭐?


우석 옆에 보이는 휠체어를 끌어다 무조건 태수를 일으켜 태운다. 화가 나 있다.


태수 : 야, 임마 어어.



# 46 병원 앞


밤. 태수를 태운 휠체어를 밀고 나오는 우석.

택시라도 잡을 생각이다.

태수 가슴의 상처를 아파하면서 우석을 잡는다.


태수 : 왜 이래 너


우석 : (자꾸 치밀어 오르는 화를 주체하지 못하면서) 가자. 너 데려가려구 왔어.


태수 : 가긴 어딜 가.


우석 : 어디든 여기보단 나아. 모르겠니? 모르겠어?


태수 : 우석아


우석 : 너 언제까지 저런 애들하구 이렇게 살 거야.

쌈질이나 하구 술집 가서 돈 뜯어내구 경찰서 들락거리면서.


태수 : (손을 들어 뭐라 말하려다가 가슴의 상처에 통증…웅크린다)


우석 : (다가와 언성을 낮춰) 가자. 가서 새루 시작하자. 내가 도와줄께. 너 할 수 있어.


태수 : (천천히 고개를 들더니)난 갈데 없어.


우석 그렇게 말하는 친구를 본다.


(시간경과)


빈 채로 세워져있는 휠체어 그 옆 벤치에 나란히 앉아있는 우석과 태수.

묵묵히 각기 딴 데를 보고 있다가


우석 : 난 판사나 검사가 될 거야


태수 : 그래 될 거야, 넌.


우석 : 그렇게 되면… 니가 계속 이렇게 살면 내가 널 잡 게 될지두 몰라.


태수 : (웃는다)


우석 : 그렇게 되길 바래?


태수 : 넌 날 못 잡아.


우석 : 태수야.


태수 : 넌 못해. 난 아주 크게 될 거니까, 거물은 놔두고 피래미만 건드리잖어. 안 그러냐?


우석, 말없이 앉아 있다가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태수에게 준다.


우석 : 너한테 빌린 등록금이야. 봉투에 내 서울 주소 적어놨어. 언제든 찾아와.


선뜻 일어서더니 걸어간다. 태수 얼른 말을 못 꺼내고 있다가.


태수 : 어이 강우석.


우석, 돌아본다.


태수 : 너 아직 내 친구지?


우석, 대답 없이 그저 보고만 있다.



# 47 교도소 밖


출감하는 사람들… 기다리던 사람들과 만나고. 대학생인 우석, 기다리고 있다.

출구 가까이는 가지 못하고 이만치에서 서성인다.

손에는 두부를 들고 있다. 그러다가 문득 보는 곳에 승용차 한 대가 와서 선다.

승용차의 문이 열리며 조수석에서 내려서는 종도. 운전석에서 내리는 일도.

뒤늦게 모자를 뒤집어 쓴 태수가 나온다.

반갑게 달려가는 종도. 태수를 얼싸안고 승용차로 데려간다.

일도도 반갑다고 어깨를 쳐주고. 승용차 뒷문을 열어준다.

뒷좌석에 타고 있는 성범. 태수, 성범을 향해 깍듯하게 절을 한다.

성범이 무슨 말을 했는지 태수, 씨익 웃어보인다.

이만치 서서보고만 있는 우석. 태수가 타고 차는 출발해간다.

우석, 하릴없이 손에 들려있던 두부를 내려다보다가 하늘을 본다.

다른 세상에 있는 친구.



# 48 버스 정류장


통금이 가까운 시간이라 인적이 없는데 와서 서는 마지막 버스. 내리는 우석과 혜린,

떠나는 버스… 우석 혜린을 돌아본다. 혜린, 딴청을 피우고 있다.


우석 : 정말 집에 안 갈 거야?


혜린 : (아이처럼 끄덕인다)


우석, 나아참 하는 기분. 난처하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하고… 문득 주위를 둘러본다.



# 49 여관 앞


입구에 선 혜린, 찡그리고 안을 들여다보고 있다.

카운터에서 우석 돈을 치루고 열쇠를 받아든다.

입구로 나오며 혜린에게 열쇠를 건넨다.


우석 : 문 잘 잠그고 자.


혜린 : 왜 쓸데없는 짓을 하구 그래, 돈이 썩어나? 우석 씨 방에서 하루 재워주면 어때?

정 같이 자기 싫으면 우석 씬 옆방에서 자구 …옆방 친구 있잖아. 그리구 난…


우석 : 자기 전에 집에 전화해. 걱정하구 계실 거 아냐.


혜린 : 걱정하는 사람 없어. 집에 가구 싶지 않아.


우석 : 너 사춘기니? 딴소리 말구 어머니께 전화해.


혜린 : 엄마…돌아가셨어.


우석 : ……미안 하다.


혜린 : 아버진… 노름꾼이야 나까지 팔아먹을려구 해.


우석 : 바보 같은 소리.


혜린 : 정말이야 집에 있으면 얼마 못가서 나 돈에 팔릴 거야.


혜린은 턱을 바싹 들어 우석을 본다. 도저히 거짓말이라고 볼 수 없는 얼굴이다.

우석, 얼핏 말을 잇지 못하다가


우석 : 자라.


그렇게 말해놓고도 머뭇거리다가 간다. 혜린, 그 모습 보다가 할 수 없이 돌아선다.


(시간 경과)


여관 앞 아침이다. 혜린 햇살에 눈부셔하며 나서다가 보면 저만치 옆 벽에 기대어

책을 읽고 있던 우석, 손을 들어 보인다.

혜린, 의외의 반가움과 아침 햇살의 멋쩍음으로 주춤주춤 다가서면서


우석 : 아침 먹어야지.


앞서 걷는다. 혜린 갸우뚱해서 그 옆을 걷는데 우석, 팔을 들어 혜린의 어깨를 감싼다.

혜린, 에개해서 보면 우석, 모른척하고 혜린을 밀어간다. 입가에 슬쩍 만족함이 스친다.

사실 혜린의 어깨를 감싼 것은 나름대로 용기를 낸 것이다.



# 50 강의실


빈 강의실 한 구석에서 우석 편지를 쓰고 있다.


우석 (소리) : 아버지. 보내주신 돈은 도로 부쳤습니다. 다시는 돈을 보내지 마세요.

사내 나이 스물이 넘어서 아버지께 돈을 타쓰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51 학교 서클룸


한참 바쁘게 일하는 아이들 바닥에 엎드려 피켓의 문구를 쓰기도 하고 (유신 철폐…)

여럿이 함께 신문을 보면서 뭔가 토론하기도 하고…

그 중에 혜린, 커다란 종이에 매직으로 대자보를 쓰고 있다.

옆을 지나가던 누군가 혜린의 어깨를 툭 쳐서 문 쪽을 가리켜 보인다.

혜린 보면, 우석이 반쯤 열린 문 밖에서 손가락으로 나오라고 신호를 보낸다.

그 위에 우석 소리 계속


우석 (소리) : 신문에서 어떤 기사를 읽으셨는지 모르겠지만 학교 수업은 정상으로

계속되고 있습니다.

더러 데모하는 친구들도 있지만 아버지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제 길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 52 중국집


혜린, 입을 벌려 보고 있는데 종업원이 테이블 위에 탕수육 접시를 내려놓는다.

혜린, 감격해서 젓가락을 쪼갠다.

그 앞에 앉은 우석 품에서 만 원짜리 몇 장을 일부 꺼내 보여준다.

고기 한 점을 입에 넣은 혜린, 으음 녹아드는 표정으로 눈을 감는다.

그런 위에 계속


우석 소리 : 그런 말씀을 하셨었지요.

사람이 살면서 지켜야 할 바른 뜻 하나와 지켜야 할 사람 하나만 있으면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다구요.



# 53 캠퍼스 잔디


나무에 기대어 책을 읽고 있는 우석.


우석 (소리) : 그런 의미에서 아버지 전 무서울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행복하고 평화롭습니다.


문득 돌아보니 옆에 혜린이 모로 누워 잠들어 있다.

우석, 하늘을 보고 혜린을 본다.

나무 그늘이 비켜나서 햇살이 바로 혜린의 얼굴 위에 떨어지고 있다.

우석 노트를 집어 혜린의 얼굴에 그늘이 지게 들어주고 계속 책을 읽는다.



# 54 도서실


공부를 하고 있는 우석. 문득 창 밖에서 들리는 함성.

공부하던 학생들 하나 둘 우루루 창가로 가서 밖을 본다.

우석도 고개를 든다.

창 밖의 함성은 유신철폐 유신철폐라는 구호로 바뀌고 있다.

우석 들고 있던 책을 던져버리고 후다닥 뛰어나간다.



# 55 교문 앞


구호와 함성을 지르며 학생들이 우루루 뛰쳐나오고 있다. 교문 돌파다.



# 56 교문 밖 일각


우루루 뛰어나오는 전경들, 맨 앞줄 절도있게 한무릎을 꿇으며 최루탄을 쏘아 올린다.



# 57 교문 쪽


터지는 최루탄 연기 속에서 흩어지거나 돌을 던지고 있는 학생들…

그 중에 달려온 우석, 정신없이 누군가를 찾고 있다.



# 58 학교 근처 골목


한 떼의 학생들 도망치고 있다. 그 뒤를 쫓아오는 전경들.

도망치는 학생들 중에는 더러 뒤돌아서 돌을 던진다.

그 중에 혜린이 있다.

혜린, 전경을 향해 힘껏 돌을 던지는데 그 팔을 잡아채는 손. 우석이다.

혜린이 놀랄 사이도 없이 우석 혜린을 끌고 한 쪽으로 뛰기 시작한다.



# 59 경양식집


학교 근처에서 볼 수 있는 작은 규모의 경양식집 테이블 사이에는 칸막이가 있다.

우석, 혜린을 끌고 다급하게 뛰어 들어온다. 혜린, 우석의 손을 뿌리치려 하며…



혜린 :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그러나 우석, 혜린은 아랑곳없이 테이블을 둘러보고

그 중에 아직 치우지 않은 테이블 앞에 끌고 가 앉힌다.

테이블 위에는 누군가 먹고 나간 맥주병이며 잔이 남아 있다.

그들의 뒤를 이어 두세 명의 학생이 도망쳐 들어온다.


혜린 : 나 우석 씨, 지 공부만 하는 거 상관 안 해. 그러니까 나 데모하는 거 상관 마.


우석, 혜린이가 떠들거나 말 거나 혜린을 안으로 밀어 넣고 옆에 앉는다.

옷의 최루탄 냄새를 맡아보고 찡그린다.


혜린 : (계속) 우리 이 얘기 벌써 끝낸 거 아니야?

우석 씨 이럴 때마다 나 정말 실망스러워 법대 저질이란 말 들어봤지?

정말 그래? 정말 저질루 이럴 거야?


우석, 앞에 놓인 병에 남은 맥주를 테이블에도 뿌리고 손에 따라서

자기 얼굴과 머리에 묻히고 혜린의 얼굴에도 묻힌다.


혜린 : 왜 이래 어어 이게 뭐야.


순간 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사복형사 둘과 전경 몇 명.

우석 혜린의 머리를 칸막이 밑으로 눌러 숙이게 한다.

입구 쪽에 몰려있던 학생들 (도망쳐 들어온) 그대로 잡혀서 끌려 나간다.

사복형사, 안쪽을 본다.

칸막이들에 막혀 보이지 않는 내부 .형사 안으로 걸어 들어온다.

칸막이 이쪽의 우석과 혜린, 다가오는 형사의 발자국 소리를 듣는다.

순간, 우석, 혜린을 끌어안더니 의자 위로 쓰러져버린다.

형사, 칸막이 안쪽을 본다.

 여자 위에 엎어져 있던 우석 부시시 돌아본다.

형사 어처구니없어 웃고는 술냄새를 킁킁 거리더니 돌아가 버린다.

그들 나가는 소리. 우석, 그제야 얼른 일어나 앉아 옷깃을 바로 한다.

혜린도 부스스 일어난다. 우석, 민망해서 딴 데를 본다.

혜린도 우석 쪽을 보지 못한다.

그러다가 조심스레 시선을 돌리다가 마주치고는 얼른 외면을 한다.

잠시… 문득 혜린 킥 웃는다. 서로 보지 않은 상태에서 우석도 피식 웃는다.


<2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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