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부 그림자 도시 9
어리석다.
너무 어리석다.
자책감으로 머릿속이 덜컹댔다.
태오와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무참한 속도로 흔들릴 것을 진정 몰랐단 말인가?
그동안 그는 좀 야윈 것 같고, 피부도 더 하얘진 것 같다.
“어디 아파?”
나도 모르게 첫 마디를 뗐다.
태오가 입술을 벌리지 않고 미소 지었다.
내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는 것과 똑같은 미소였다.
“그냥 조금.”
마지막으로 그가 보내왔던 문자의 내용이 그제야 떠오른다.
그래, 아팠다고 했지.
나의 무심하고 어둔한 질문이 그를 섭섭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문다.
“어디가?”
“위가 조금. 걱정 말아요. 심한 거 아니에요.”
“어쩌다가?”
“별 거 아니에요. 스트레스 때문이라던가…. 일은 안 하고, 먹기만 해서 그런가 봐요.”
오는 웃었지만 나는 따라 웃지 않았다.
그가 스스로에 대해 이렇듯 냉소적인 농담을 던지는 모습이 처음이라 더욱 가슴이 아렸다.
“자기는 더 예뻐졌어요. 뭐랄까, 편안해 보여요.”
“…”
“나 안 보니까 맘 편했나보다…. 회사는 여전히 바쁘죠?”
“회사, 그만 뒀어.”
그는 깜짝 놀라는 눈치다.
내가 마치 재벌총수의 숨겨진 딸이라고 고백하기라도 한 것처럼 눈을 둥그렇게 치켜떴다.
언제인가 이 아이를 앞에 두고 미친 여자처럼 소리를 질러댔던 것이 기억난다.
“회사가 무슨 학교인 줄 알아? 으휴, 정말, 아무 것도 모르면서!”
허공으로 갈기갈기 흩어졌던 그 말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우리는 침묵 속에 잠겨 각자의 눈꺼풀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웨이터가 메뉴판을 가져왔다.
맨 뒤 페이지를 열어 음료 메뉴들을 훑어보고 있는 나를,
태오가 물기어린 시선으로 응시했다.
“…밥 먹어요. 맛있는 거 사주고 싶어.”
그 말을, 그는 아주 또박또박 했다.
뜨거운 돌멩이를 삼킨 것처럼 목구멍이 홧홧해졌다.
이 아이는 알고 있었던 거다.
고작 데이트 비용 몇 푼을 자존심으로 치환해,
내심 주판알을 굴려대던 내 궁색한 이유들을.
그 부박한 핑계들을. 이제 알겠다.
변명은 필요 없다.
나는 그 사랑에, 전부를 걸지 않았을 뿐이다.
안심스테이크-35,000원,
연어스테이크-32,000원,
바닷가재와 새우구이-39,000원.
“자기, 위 안 좋다며? 쌀로 된 거 먹어야겠다.”
는 짐짓 밝은 음성을 꾸며 재잘거렸다.
아직도, 어쩌면 영원히,
나는 구제불능의 속물일지 모르지만
그것은 속물로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초라한 배려였다.
오므라이스 두개. 이별한 두 연인의 마지막 만찬으로
과하거나 모자람 없이 수수하다고 애써 자위해본다.
“점심으로 또 라면 먹은 거 아니에요?”
“아니야. 밥 먹었어.”
나는 과장되게 고개를 흔들었다.
거짓말임을 뻔히 안다는 듯 태오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난 다른 걱정은 안 했어요.
자기 씩씩하잖아요.
그렇지만 혼자 있을 땐 워낙 안 챙겨먹는 스타일이니까,
오늘은 뭘 좀 제대로 먹었을까.
그것만 항상 맘에 걸리더라.”
“…”
오므라이스가 나왔다.
밥은, 샛노란 계단지단으로 완전히 덮여 있었다.
계란지단 위에 브라운소스가 하트 모양으로 뿌려져 있었다.
태오 것과 내 것. 갈색 하트가 두 개였다.
숟가락 등으로 쓱 문지르자 하트는 물감이 번지듯 스르르 뭉개졌다.
태오는 하트무늬를 건드리지 않으며,
접시 바깥쪽부터 밥을 조심조심 허물어가고 있었다.
나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얼음물을 들이켰다.
“참, 재인이, 이혼했어.”
“어… 정말?”
“응. 결국 그렇게 되더라.”
“아, 그렇구나. 많이 힘들겠어요. 유희누나는?”
“잘 지내나봐. 용길이랑 아직 만나고…. 참, 용길이 유부남이래.”
“…”
“그래도 아주 나쁜 일만 있는 건 아닌가봐.
며칠 전엔 무슨 창작뮤지컬 오디션에 뽑혔다고 하더라.”
친구들 안부를 전하고 나니,
더 할 말이 없었다.
나는 사족처럼 중얼거렸다.
“자기도, 하는 일 다 잘 됐으면 좋겠다.”
태오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우리 끝났다는 생각, 한 번도 해보지 않았어요.”
제6부 그림자 도시 10
나는 웃었다.
비겁하게.
웃지 않는다면 대체 뭘 하겠는가.
“정신 차려. 우린 끝났어”
라고 쐐기를 박을 수도 없고,
“사실은 나도 그래”
라고 그를 부둥켜안을 수도 없다.
곤란한 질문에 맞닥뜨렸을 때,
대답 대신 쑥스러운 미소로 국면을 전환시키는 잔머리.
아무런 입장도 표명하지 않음으로써,
결국 아무 것도 잃지 않으려는 술수.
그게 나였다.
태오가 조그맣게 한숨을 쉬며 말을 돌렸다.
“요새도 술 많이 마셔요?”
“아니. 마실 일이 별로 없네.”
요즘 만나는 남자는 술을 입에도 대지 않는다고 고백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정적이 다시 우리를 감쌌다.
“…자기, 술 먹으면 참 귀여워지는데…”
“왜애. 취하면 다른 사람 같아지잖아.”
“그건 평소에 너무 억누르고 살아서 그래요. 착해서… 앞으론 그러지 말아요.”
세상에 어느 누가, 나라는 인간에 대해 그런 견해를 가지고 있을 것인가.
그는 나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
눈가가 뜨뜻해져왔다.
“오랜만에 한 잔 어때요?”
태오가 넌지시 제안했다.
술 한 잔? 헤어진 연인들의 허망한 에필로그에 썩 잘 어울리는 소품이었다.
‘오뎅바’에서 보글보글 끓는 국물을 앞에 두고 정종을 한 모금 마시고 싶다는 욕망이 솟았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내가 두려운 건, 그가 아니라 나였다.
알코올의 위력 뒤에 숨어 책임지지 못할 행동을 반복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엄습했다.
나는 마지막 절제력을 쥐어짜 말했다.
“아니. 오늘은 좀 그렇고.”
태오의 입술에 핏기가 사라졌다.
나는 황급히 덧붙였다.
“다음에 하자.”
“…그래요. 다음에.”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레스토랑에서 나와 우리는 잠자코 거리를 걸었다.
스산한 바람이 불고, 잔뜩 흐린 저녁이었다.
나는 고개를 살짝 아래로 기울인 채 걸었다.
태오는 반 발자국 뒤에서 나를 따라왔다.
지하철역까지는 멀지 않았다.
지하철역사 계단 앞에서 우리는 동시에 걸음을 멈추었다.
“나, 갈게.”
그때, 태오의 손이 내 왼팔을 잡았다.
강한 완력은 아니었지만 왠지 얼얼하게 느껴졌다.
그에게 한 팔을 맡긴 채, 나는 한참동안 꼼짝하지 않았다.
이대로 도망치듯 스륵 몸을 빼내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자유로운 오른손으로, 내 왼팔 위에 놓인 그의 손등을 감쌌다.
태오의 손등이 내 손바닥 아래에서 꿈틀 움직였다.
우리는 서로의 눈을 쳐다보지 않았다.
내가 그를 놓는 순간, 그도 나를 놓아주었다.
나는 지하도 계단을 천천히 걸어 내려갔다.
“연락할게요.”
등 뒤에서 태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 대신, 나의 뒷모습이 대답했을 것이다.
열차 안은 한산했다.
빈자리가 간간이 눈에 띄었지만 자리에 앉지 않고 문가에 기대섰다.
창 너머는 암흑이었다.
그 안에서 정처 없이 흔들리는 한 여자의 그림자를 나는 유령보듯 응시했다.
지하철 역 밖으로 올라서는 순간 깜짝 놀랐다.
눈이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봄눈이 거짓말처럼 거리에 흩날리고 있었다.
싸락눈은 땅바닥에 닿지 못하고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맥없이 휘날려댔다.
어떤 시에서였던가, 봄눈은 ‘단념하듯 내린다’는 구절을 읽은 기억이 났다.
행인들은 핸드폰을 귀에 대고 어디론가 전화를 하며 걸었다.
나는 재킷 주머니에 손을 넣어 전화기를 만지작거렸다.
김영수는 한참 만에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너머로 왁자지껄한 소음이 전해져왔다.
“무슨 급한 일이에요?”
“아니… 그런 건 아니고요…”
“미안해요. 지금 좀 바빠서.”
“네…”
“나중에 내가 다시 걸게요.”
“저… 저기요.”
나는 왜 그를 기어이 불러 세웠을까?
“에?”
“저, 지금 눈이 와요.”
“눈? 어, 희한하네.”
“…”
“그럼 조심해서 들어가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예의 바른 목소리였다.
“네, 그럴게요”
하고 대답하는데 전화가 뚝 끊겼다.
김영수에게는 아무런 잘못도 없었다.
모든 것은 나의 문제였다.
나는 눈 속을 휘적휘적 걸었다.
봄눈이 어깨 위에 허술하게 쌓여갔다.
편의점에 들러 참이슬 한 병과 허쉬 초콜릿을 샀다.
쓰라리고 또 달콤한 양식(糧食)들을 비닐봉지에 넣어 품에 그러안고 집 앞에 도착했다.
그곳에, 태오가 있었다.
“눈이 와서요.”
나직하지만 힘이 담긴 음성이었다.
[정이현 글/권신아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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