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달콤한 나의 도시

제6부 그림자 도시 3

오늘의 쉼터 2017. 8. 6. 16:07

제6부 그림자 도시 3




나는 키스를 좋아하는 편이다.
키스를 하고 있는 동안,
나 자신에 대해 한층 더 잘 알게 되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타인의 혀가 내 입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순간에야말로 나라는 존재가
태곳적부터 오롯이 혼자였음을 부정할 도리가 없다.
타인의 혀로부터 오는 쾌락의 감각을 느끼고 있으면,
 원래의 나는 반쪽의 불완전한 존재에 불과했다는 걸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이다.
 
런데 이 남자, 진도가 느려도 너무 느리다.
나의 몸과 김영수의 손 사이에는 아직도 얇은 헝겊 한 장이 가로 놓여 있었다.
준법정신이 투철한 그는 브래지어 위로 가슴을 더듬는 것과 브래지어 속으로
손을 쑥 밀어 넣는 것 사이에 엄청난 간극이 존재한다고 믿는가 보다.
뭐, 요즘처럼 험한 세상에 상당히 바람직한 자세가 분명하다.
그러나 이거 원. 질금질금 감질나서 못 견디겠다.
 
맨 먼저 입술을 조심스레 갖다댄 다음, 천천히 상대의 입술을 열고,
곧이어 혓바닥을 살살 돌리면서 밀어 넣는 것이 김영수 표 키스였다.
만약 ‘HOW TO KISS’라는 교본이 있다면 모범적인 예시라고 소개될 수도 있을 것 같다.
나 역시 모범커플의 여성파트너 역할에 충실하면서, 그의 예의바른 딥키스를 성실하게 맞받았다.
차 안에서의 페팅은 고릴라와 헤어지고 처음. 그러니까 꽤 오랜만이었다.
한적한 양평국도변 한 쪽에 차를 세워 둔 채 하는 키스는 색다른 맛이었다.
 마치 지상의 마지막 연인이 되어 외따로 고립되어 있는 느낌이라고 할까.
 

슬쩍 실눈을 뜨고, 키스에 열중한 그의 얼굴을 훔쳐본다.

그는 눈을 아주 꽉 감고 있다. 조금 웃음이 난다.

어렸을 땐 키스할 때 눈을 감지 않는 남자는 전형적인 바람둥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젠 오히려 사랑의 행위를 할 때에 절대로 눈을 뜨지 않는 남자를 의심하게 되었다.

이 사람, 혹시 내 입술을 빌려 다른 여자와의 키스를 상상하는 건 아닐까 하는

어처구니없는 걱정이 드는 것이다.

간혹 내가 현실의 남자를 통해 강동원이나 비, 조인성의 입술을 상상하곤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은편에서 환하게 전조등을 밝힌 차 한대가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우리는 서로에게서 황급히 몸을 뗐다.

키스의 끝은 냉혹하다.

피아 구분 없이 혀가 얽히고 타액을 교환했을지라도 입술을 떼고 나면

또다시 각자의 존재 안으로 되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5분쯤 더 가면 중세의 고성처럼 지은 몇 채의 러브호텔들이 사이좋게 모여 있었다.

드라이브를 좋아하던 옛 남친 고릴라와 함께 두어 번 와 본 적이 있었다.

 

나는 손등으로 제 입술에 번진 침을 닦고 있는 김영수를 흘끔 바라보았다.

김영수는 좀 더 호젓한 장소로 이동하는 대신 카 오디오의 전원을 켰다.

거리에 가로등불이, 하나 둘씩 켜지고… 동물원의 ‘거리에서’였다.

 

“어머, 나 이 노래 무지 좋아하는데.”

 

내가 반색을 하자 김영수가 빙긋이 웃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예요.”

 

그는 낮은 음성으로 노래를 따라 불렀다.

유리에 비친 내 모습은 무얼 찾고 있는지 뭐라 말하려 해도 기억하려 하여도

허한 눈길만이 되돌아와요.

우리는 가만히 어깨를 맞댄 채 음악 속에서 가늘게 흔들렸다.

 

“시간 참 빨라요.

이 노래 첨 나왔을 때 나 중학생이었는데.

영수씨는 한 스무 살 정도?”

 

그는 대답이 없다.

왠지 이 남자의 스무 살이 쉽게 상상이 되지 않는다.

나는 무심결에 되물었다.

 

“가끔은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그때로…”

 

그가 딱 한 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싫어요.”

 

“왜요? 너무 어려서?”

 

“글쎄… 그런 것도 있지만, …그땐 아직 진짜 내가 아니었던 것 같아서.”

 

알 듯 모를 듯한 얘기였다.

 

“아, 맞다. 영수씨 그때는 유학 중이었겠네요?”

 

“은수씨.”

 

그가 갑자기 내 이름을 그윽하게 불렀다.

 

“네?”

 

“나, 쑥스러워서 이런 말 잘 못하는데,

요즘 은수씨 덕분에 참 여러 가지로 새로 배우는 게 많아요.

정말 고마워요.”

 

그의 입술이 내 입술 위로 지그시 포개졌다.

나는 눈을 꼭 감았다.

그러나 김영수가 아닌 다른 남자와의 입맞춤을 상상하지는 않았다.

우리의 키스는 아까보다 더 오래 지속되었다.





제6부 그림자 도시 4

양평에서 돌아온 후 우리는 명실상부한 연인관계가 되었다,
고 나는 생각했다. 일주일에 두세 번 씩은 꼭 만나고, 정기적인 스킨십을 하며,
나날이 그 강도를 높여 가고 있는 30대 미혼남녀가 연인이 아닌 다른 어떤 관계로
정의될 수 있단 말인가.
 
“좋겠네. 이젠 국수 먹을 일만 남은 거야?”
 
유희의 말투가 어쩐지 냉소적으로 들린다.
그녀와 나는 네일 숍 의자에 나란히 앉아 손톱손질을 받는 중이다.
 
“넌 재인이가 그렇게 무너지는 걸 보고도 제도의 품 안에 안착하고 싶니?”
 
맹세코, 제도의 품이라는 용어는 사용한 적 없다.
결혼하고 싶다는 말도 꺼낸 적 없다.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 네일리스트의 눈치를 살피며 유희를 곱지 않게 흘겨보았다.

“네 남자친구의 와이프는 잘 있니?”

라고 커다랗게 물어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그건 너무 과도한 복수였다.
만날 때마다 점점 수척해지는 그녀의 뺨을 바라보며,
그녀가 택한 사랑의 고단함을 유추해볼 뿐이다.
 
“은수야. 우리, 코 할래?”
 
“뭐?”
 
‘코 할래?’라는 말을 유희는 마치 ‘쇼핑 갈래?’ 라거나 ‘떡볶이 먹을래?’처럼 대수롭지 않게 했다.
 
“코 말이야, 코. 평소에 내가 말은 안 했지만, 너 인간적으로 코가 좀 낮잖아.
어릴 때야 귀엽다고 대충 우겨볼 수 있었다지만, 점점 나이 들수록 좀 그렇지 않아?
콧대만 살짝 높이면 인상 확 달라 보일 거야. 세련되고 도시적인 이미지가 될 거라고.”
 
지금은 퍽이나 촌스러운 이미지라는 뜻이겠지.
뭐, 코에 대해서라면 확실히 약간의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기는 하다.
 
“은수 너, 얼굴 손 댄 데 하나도 없잖아?”
 
“으응.”
 
구석기 시대의 여자원시인이 된 기분이다.
 
“하긴 그 많은 점들도 안 빼고 있는 걸 보면 네가 그쪽으로 좀 무신경하긴 하지.
 내 후배 하나가 이번에 코 수술 했거든. 걔도 그전엔 나처럼 매부리였는데,
여기 깎고, 또 요 아래를 이렇게 줄이고, 암튼 뭘 어떻게 했는지 인물이 완전히 달라졌어.”
 
이십년 가까이 보아왔지만 유희가 매부리코라는 걸 의식해 본 일은 한 번도 없다.
본인의 고백을 듣고 유심히 살펴보니 정말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쉬는 동안 빨리 해치워 버리자.
우리 둘이 같이 하면 안 무섭잖아. 둘이니까 디스카운트도 해 달라고 하고.”
 
“만약에, 실패하면 어떡하게?”
 
유희가 단호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야, 요새 기술이 얼마나 좋은데. 또 좀 실패하면 어때?
지금이랑 다른 얼굴이 된다는 게 중요하지.
솔직히 넌 삼십년 넘게 달고 살아온 네 얼굴이 지겹지도 않니?
난 아주 지겨워서 미쳐버리겠다.”
 
갑자기 귀가 솔깃해진다. 유희가 조용히 덧붙였다.
 
“지금이랑 다른 존재가 되고 싶지 않아?
코라도 좀 바꾸고 나면 이 놈의 인생 제대로 돌아갈 것 같지 않느냐고.”
 
빙고! 바로 그거다.
코 하나를 살짝 바꿔 내 인생을 쪼아대는 모든 문제들을 한방에 해결할 수 있다면,
콧등에 실리콘이 아니라 분필이라도 넣고 다닐 수 있을 것 같다.
엄마 것과 똑같이 생긴 이 코를 내가 얼마나 싫어하고 있는지 새삼 상기되었다.
외증조할머니로부터, 아니 어쩌면 그 윗대로부터 시작된 동그랗고 낮은 코의 대물림은
외할머니를 거쳐 엄마에게로, 엄마를 거쳐 나에게까지 유구히 이어져 내려왔다.
이 코는 내 얼굴의 한 복판에 당당히 자리 잡은 채 모계유전자의 끈질긴 생명력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열 손톱에 연보랏빛 매니큐어를 바르고 거리로 나왔다.
나는 역시 조선 팔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팔랑 귀’였다.
 아까까지는 아무 관심 없이 지나쳤던 길가는 행인들의 얼굴,
그 중에서도 코에만 유독 시선이 가 박힌다.
밤에, 김영수에게서 전화가 왔을 때도 코 얘기를 하고 말았다.
 
“친구는 잘 만났어요?”
 
“뭐 그냥. 근데 글쎄, 걔가 코를 고치겠대요.”
 
내게도 강권했다는 말은 슬쩍 생략한다.
 
“...요새 여자들, 많이 하잖아요.”
 
그의 목소리가 영 기운 없이 들린다.
 
“걔가 요즘 여러 가지로 좀 복잡하거든요.
그런데 그거 해결할 생각은 안 하고 생뚱맞게 얼굴을 바꾸겠다는 거예요.
그럼 새로운 날이 시작될 줄 아나?
죄 없는 납작코에다가 제 문제를 몽땅 덮어씌우는 거죠.”
 
죄책감이 심장을 콕콕 찌른다. 미안하다, 친구야.
 
“...그런 마음, 이해해요.
그렇게라도 해서 현실을 벗어나고 싶은 순간이 있죠.”
 
유난히 반듯한 콧날을 가진 김영수가 그렇게 말하다니,
참으로 안 어울린다. 전화를 끊으면서도 왠지 알쏭달쏭했다.
전화 끊어지기를 기다렸다는 듯 곧바로 벨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정이현 글/권신아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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