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달콤한 나의 도시

제6부 그림자 도시 13

오늘의 쉼터 2017. 8. 9. 22:30

제6부 그림자 도시 13




재인이 소개해 준 것은 전자사보 전문회사의 콘텐츠 기획직이었다.
 
“신생회사야. 옛날 거래처에 있던 분이 그쪽으로 갔거든.
실무경험 있는 사람 좀 추천해달라고 부탁하는데, 네 생각이 나더라고.
일단 네 얘기는 대충 해놨어. 자기네는 딱 좋대.”
 
“그래?”
 
반가운 표정을 지었지만 솔직히 썩 내키지는 않았다.
내가 발 벗고 알아보지 않아서 그렇지,
그 정도 일은 내 힘으로도 어렵잖게 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너, 만약 재취업할거면 서두르는 게 낫다.
너무 오래 쉬면 감각이 녹슬어. 또 막상 찾아보면 생각만큼 자리도 없고.”
 
재인의 충고가 틀리지 않다는 건 나도 알고 있었다.
결혼과 동시에 일을 그만두었던 그녀는, 이혼과 동시에 다시 직장을 구했다.
 
“첨엔 솔직히 망설여지더라.
이 좁은 업계 바닥에 복귀하면 뭐라고들 수군댈까.
이참에 아예 유학이라도 가 버릴까. 별별 생각 다 했어.
하지만 그렇게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잖아? 내가 무슨 죄졌니?”
 
재인은 사랑니를 뽑기 위해 치과진료대에 누운 소녀처럼 결연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다음날 오전, 늦잠을 자고 있는데 전화가 울렸다.
재인이 말한 그 회사였다.
오늘 중으로 면접을 보러 올 수 있느냐는 질문을 받고서야 비몽사몽간에 시계를 확인했다.
10시가 넘어서고 있었다.

“오늘이라니. 좀 심한 거 아니에요? 어차피 오늘은 곤란해요. 선약이 있다고요”

라고 당차게 대꾸하고 싶은 마음 굴뚝같았으나 내 입에서는

“네. 몇 시까지 갈까요?”

 라는 말이 먼저 흘러나왔다.

아, 이놈의 지긋지긋한 노예근성.
 
면접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의상 콘셉트 잡기가 맞선볼 때보다 몇 배는 더 어려웠다.
다른 여자들도 옷장을 열 때면 늘 한숨부터 날까?
벗고 다니지는 않았으니 무언가 몸에 걸치고 다녔음이 분명할 텐데 왜 옷이 없을까?
대체 매일매일 무슨 옷으로 연명하고 있는지 불가사의할 뿐이었다.
목둘레를 레이스로 장식한 블라우스를 꺼내들었다가 도로 집어넣었다.
드라마 속의 프로페셔널 커리어우먼이라면 절대 선택하지 않을 아이템 같았다.
계절에 어울릴 만한 검은색 스커트 정장을 입고 거울 앞에 섰다가 황황히 지퍼를 내렸다.
핏기 없는 얼굴색과 어우러져 자칫 장례식장에서 곧바로 나타난 것처럼 보일지도 몰랐다.

 

중견의 경력을 가진 30대 여성이라면 뭐니 뭐니 해도 깔끔하고 단정하면서도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어필하는 게 나을 것이다.
골똘히 궁리한 끝에, 도톰한 봄 재킷에, 살짝 주름이 잡힌 플레어스커트를 받쳐 입었다.
그러나 장고 끝에 악수 둔다던가.
거리에는 꽃샘바람이 윙윙 불어대고 있었다.
치마가 훌러덩 뒤집어질까봐 한 손으로 치맛자락을 붙든 채 잰 걸음을 놀려야 했다.
 
핸드백 속에는 이력서가 들어있었다.
‘이력서(履歷書)’라는 단어를 한자의 뜻 그대로 풀면 ‘신발의 역사를 담은 종이’ 쯤 되려나?
출생, 입학, 졸업, 입사, 퇴사로 이어지는 한 인간의 인생 여정.
그 여정이란 그동안 신발로 꾹꾹 밟고 지나온 길을 의미할 터이니 어쩌면 참 무서운 표현이었다.
오늘 내가 신고나온 것은 아무런 무늬가 없는 7CM 검정 하이힐이었다.
 
이 세상의 여자들을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알록달록 화사한 색깔과 과감한 디자인의 구두를 선뜻 고르는 여자,
그리고, 그 색색의 구두에 동경의 시선을 던지면서도
결국엔 언제나 무채색의 평범한 구두를 선택하는 여자. 나는 후자에 가까웠다.
내 검은 소가죽 구두를 내려다본다.
긍정적인 성격의 사람이라면 무난하다고 평가할 것이고,
부정적인 사람이라면 진부하다고 말할만한 구두였다.
매장에 전시되어 있던 형형색색의 구두들 가운데 이걸 집어든 이유는
아마도 심리적 안도감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무
난하고 진부한 형식 속에 맨발을 깊숙이 밀어 넣으면,
 ‘진짜 나’를 꽁꽁 은닉시킬 수 있을 것 같았기에...
 
과연 이 구두는 어떤 옷에 매치시켜도 그럭저럭 80점은 되어주었다.
100점 아니면 0점인 극적인 인생을 두려워하는 나는,
평균점의 인생을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 난 건가?
이를 악물며 사표를 던진 것이 얼마나 되었다고,
또다시 고만고만한 회사의 고만고만한 사무원이 되기 위해
길을 떠나고 있는 스스로가 우습고 또 안쓰러웠다.
 






제6부 그림자 도시 14




“희망 연봉을 안 쓰셨네요?”
 
내 이력서를 훑어보다 말고 중년의 면접관이 물었다.
 
“아, 예.”
 
안 그래도, 급하게 이력서를 꾸미면서 그 부분을 어떻게 해야 하나 망설였었다.
하지만 뭐라고 써야 하는지 감이 안 잡혔으므로 아예 기입을 하지 않기로 했었다.
이것이 바로 결정적인 순간에 나타나는 나의 아마추어적인 면모였다.
 
“본인 생각이 있을 거 아니에요? 자신이 대충 어떤 수준이라는.”
 
어디서 들어 본 적 있는 소리였다.
고3 때, 내 모의고사 성적표를 펼쳐놓으며 담임이 물었었지.

“너도 생각이 있을 거 아니냐?”

한심해 죽겠지만 억지로 참고 있다는 듯한 뉘앙스도 똑같았다.
대답을 재촉하는 표정으로 남자가 나를 빤히 쳐다본다.
차라리 전 직장에서 얼마를 받았느냐는 질문이면 훨씬 편할 것 같다.
객관화된 수치를 제시하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마음속의 숫자를 고백하라는 요구는 영 난처하다.
 
나는 달달한 자판기 커피를 한 모금 삼켰다.
아무리 단도직입적인 형식이 미덕인 시대라지만,
그래도 그런 민감한 문제는 이 커피 한 잔을 다 비운 뒤에 물어봐주었더라면
휴머니즘적 측면에서 더 좋을 뻔했다.
하긴, 면접을 보러 와서 휴머니즘 타령을 하고 앉아있는 내가 제정신이 아닌 거겠지.
어차피 이 남자와 나는 노동력을 사고팔기 위해 마주앉은 사이였다.
가장 노골적인 것이 가장 인간적인 것일지도 몰랐다.
 
그래. 만만해 보이면 끝장이야.
나는 허리를 꼿꼿이 곧추세웠다.
머릿속에 모스 부호 같은 숫자들이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기회는 잡는 자의 몫이다! 아니, 거기서 왜 별안간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
내 입에서 흘러나온 액수를 듣는 순간, 남자가 짧게 헛기침을 했다.
 
“흐음, 그렇군요.”
 
바로 후회가 되었다.
그가 놀라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내가 말한 금액은, 저번 회사에서 받았던 연봉의 약 1.5배에 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남자가 눈가의 근육을 풀며 허허 웃었다.
나도 따라서 어정쩡한 미소를 머금었다.
 
“본인의 커리어가 그 정도는 된다고 생각하나 봐요?”
 
성공적인 면접의 첫 번째 노하우는 면접관의 숨은 의도를 명확히 파악하는 것이다.
 
“글쎄요. 대단한 경력을 쌓아온 것은 아니지만 제 분야에서 일하는 동안에는 최선을 다해왔어요.”
 
눈 앞의 상대방이 지금 내가 하는 말을 비웃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짐작만큼 비참한 것도 별로 없다.
그보다 더한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던 말을 지속해야 하는 경우.
 
“…그러니까, 음, 그 정도는 적당한 권리라고 생각합니다.”
 
아아, 아무래도 ‘권리’ 라는 단어가 너무 강했다.
그러나 남자는 그 앞의 형용사가 더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적당하다고 했나요? 그런 건 원래 본인이 판단하는 게 아니지 않은가?”
 
“…”
 
“이건 딴소리지만, 구직자들 불러서 얘기 해보면 참 가관이에요.
 어쩜들 그렇게 하나같이 자기 능력을 과신하는지.
포트폴리오나 이력서 보면 우리는 사실 딱 견적이 나오잖아요?
이 사람은 얼마짜리고 또 저 사람은 얼마짜리다. 근데 정작 본인들은 그걸 몰라요.
남들은 모르는 자기만의 숨겨진 잠재력이 있다고 착각한다고. 물정 모르는 신입도 아니고
사회생활깨나 해봤다는 사람들이 그렇게 나오면 진짜 할 말이 없어요.
아, 오해는 하지 말아요.
오은수씨한테 하는 얘기는 아니니까.”
 
내 이력서를 거기 두고 돌아 나오면서, 지독한 가뭄 끝의 밭뙈기처럼 가슴속이 쫙쫙 갈라졌다.
그 남자의 말은 몹시 재수 없었지만, 한마디만은 반박하기 힘들었다.

“본인들은 그걸 몰라요.”

24시간 함께 지내지만 정말이지 나는, 나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있다.
객관적이고 가차 없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30대 여성 오은수는 어떤 모습일까.
 
가진 것-입가의 팔자주름, 알량한 통장잔고, 깔고 앉은 원룸 전세금, 반 의절상태인 부모,
‘한심하게 살기 대회’ 대표선수 같은 친구들, 사랑에 관한 몇 가지 실속 없는 추억들.
 
못 가진 것-남편, 아이, 직장.
 
겨우 세 가지가 부족할 뿐인데, 왜 이렇게 처참한지 모를 일이었다.
이 사람이라도 있어서 다행이야. 김영수를 만나러 가는 길,
나는 아무도 듣지 못하게 웅얼거렸다.
그런데 김영수는 ‘가진 것’ 리스트에 올려야 하나? 아니면 ‘못 가진 것’?





제6부 그림자 도시 15


“은수씨, 저기 올라가 봤어요?”
 
운전을 하던 영수가 턱짓으로 가리킨 곳은, 남산타워였다.
아니, 내 고향 서울에 대한 나의 애향심을 어떻게 보고 하는 소린가?
 
“그럼 영수씬 안 가봤어요?”
 
내가 자신만만하게 대꾸하자 그는 좀 당황하는 눈치였다.
 
“아니, 공사해서 새로 싹 바뀌었다던데.”
 
엥?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그런 뉴스를 본 적이 있는 것도 같다.
나의 애향심은 종종 이 도시의 변화속도를 따라잡지 못한다.
 
“회전 레스토랑이 근사하게 바뀌었대요.
정호 형이 예약해줬어요.
은수씨랑 같이 가라고.”
 
그가 정호 형이라고 지칭하는 사람은,
 언젠가 직원결혼식에서 나와 인사를 나눈 적이 있는 그의 회사 조정호 이사였다.
중학교 영어교사인 와이프와 일곱 살짜리 딸내미가 있다는 얘기를 들은 뒤로는
조금 안심이 되었지만,
그래도 김영수의 입에서 그 이름이 나올 때마다 괜스레 신경이 쓰이곤 한다.
 
승용차는 올라갈 수 없다고 하여, 주차장에서 버스로 갈아탔다.
우리는 맨 뒷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굽이굽이 이어진 길을 오르며 차가 기우뚱거릴 때마다 우리의 어깨가 붙었다 떨어졌다.
남산타워는 1975년 개통되었다.
내가 태어난 해였다.
일반인에게 관광전망대가 개방된 것은 1980년대 초반.
우리 가족 역시 유행에 뒤질 세라 어느 일요일,
그곳으로 나들이를 갔었다.
젊은 아버지와 젊은 엄마, 장난꾸러기 사내아이였던 오빠,
토실토실한 부끄럼쟁이 꼬마였던 나, 이렇게 네 명이서 말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속내를 알고 보면
곪아가는 바나나 같은 집구석이지만 어쨌거나 남들 눈에는
중산층 도시 핵가족의 행복한 나들이로 보였을 것이다.
그 전날 밤 중간규모의 부부싸움을 치렀던 부모가 무슨 이유에서 오빠와 나를 데리고
 집을 나섰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포니2 택시 뒷좌석에 실려 가면서,
혹시 고아원에 버려지는 건 아닐까 가슴을 졸였던 기억만 흐릿하다.
택시가 꼬불꼬불한 산길을 지나 당도한 곳은, 멀리서 올려다보기만 하던 남산 타워 앞이었다.
그 날 찍힌 사진 속에서 양 갈래로 머리를 묶은 나는 한 손에 솜사탕을 든 채 어설프게 웃고 있다.
 
전망대 5층의 레스토랑은 모던한 분위기로 바뀐 모습이었다.
몇 가지 안 되는 메뉴들은 다 값이 비쌌다.
그는 함부로 낭비하는 스타일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중요한 순간에 돈을 아끼는 남자도 아니었다.
 
“이거 지금 돌고 있는 거, 맞죠?”
 
영수의 천진한 질문에 웨이터가 웃으며 설명했다.
 
“예. 한 바퀴 도는 데 48분 걸립니다.”
 
“아무 노력 안 해도 제가 알아서 조심조심 한 바퀴 돌고 또 제 자리로 데려다주기까지 하다니.
인생이 이 회전판만 같다면 참 좋겠죠?”
 
영수의 말이 씁쓰레하게 와 박혔다.
통유리창 너머 서울의 야경이 벌판처럼 펼쳐져있었다.
벌판은 온통 주황색 불빛들로 가득하다.
이렇게 높은 곳에 올라, 내가 살고 있는 도시를 내려다보면
내가 저 속에서 태어나 자라왔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사랑하고 이별하고 울고 웃고 절망하고 기뻐하고 망각하며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죄다 거짓말 같다.
저 무수한 불빛들은 누군가의 집이고 일터겠지.
그런데 왜 여기서는 저 건물들의 그림자가 하나도 보이지 않을까?
 
그림자란, 빛이 지나가는 통로에 불투명한 물체를 놓으면 생기는 것이다.
그림자는 실체에 대한 환영이며, 빛이 만들어낸 허상이다.
세상의 모든 실체들이 저마다 하나씩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살듯이,
세상의 모든 그림자들은 저마다 하나씩의 실체를 가지고 산다.
 
그림자가 없는 것은, 그림자뿐이다.
 
그렇다면 바로 저기, 그림자 없이 반짝반짝 빛나는 도시
서울은 어쩌면 거대한 그림자 그 자체인 것은 아닐까. 내
가 이 그림자도시 귀퉁이에 빛없이 숨어사는 한 뼘 그림자인 것처럼.
 
“은수씨.”
 
그가 고기를 자르다 말고 머뭇머뭇 내 이름을 불렀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눈치였다.
그때, 내 전화벨이 울렸다.
오빠였다.
불길한 예감이 스쳐 지났다.
 
“잠깐만요.”
 
오빠는 다짜고짜 소리부터 질렀다.
 
“야, 너 빨리 좀 와야겠다.”
 
“엉? 어딜?”
 
“어디긴. 엄마네 집이지. 긴급 상황 발생이야. 얼른 총알같이 튀어 와.”
 
세계대전이라도 발발했단 말인가. 심상찮은 상황임이 직감되었다.
 
“저, 먼저 일어나야겠어요. ...집에, 엄마한테, 일이 좀 생긴 것 같아요.”
 
나보다 먼저 영수가 겉옷을 집어 들었다.
 
“같이 가요. 데려다 줄게.”
 
우리는 다시 저 그림자도시 속으로 귀환해야 했다.
 
 
[정이현 글/권신아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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