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부 그림자 도시 5
“나다.”
오빠였다. 피를 나눈 나의 친오빠.
“엉, 오빠. 번호 바꿨어?”
“얌마, 바뀐 지가 언젠데. 너무 성의 없는 거 아니냐?”
“어이구. 자기가 안 알려줘 놓고 나한테 떠넘기기는.”
오빠가 쿡쿡 웃었다.
오빠와 나는 하늘 아래 단 둘뿐인 남매였지만, 자랄 때부터 그다지 살가운 사이는 아니었다.
워낙에 성정도 다르고 호오도 달랐다.
오빠가 MBC 청룡의 팬이라면 나는 OB 베어스의 팬이었고,
오빠가 가족 외식으로 불고기를 먹자고 하면 나는 탕수육을 먹으러 가자고 했다.
안 좋은 사이라기보다는 심심한 사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겠다.
오빠가 결혼하여 분가하고, 나 역시 집을 나온 뒤로는 얼굴 한번 보는 일이
교황폐하 알현하기만큼 힘들어졌다.
간혹 저 인간이 어떻게 처자식을 거느리고 사는지 불가사의할 때가 있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현재스코어, 나보다 여러 모로 ‘정상적인’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며 사는 건 분명했다.
“어디야? 퇴근했어?”
오빠는 심상하게 물어왔지만 나로서는 불시에 허를 찔린 느낌이다.
회사를 그만뒀다는 말을 하면 5분 안에 부모님 귀에 들어갈 것이다.
“으응.”
“요새도 바쁘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 분당 집에 간 지 너무 오래된 거 아니야?
엄마 아버지가 이만저만 걱정이 아니셔.”
혀로 입술을 축인다.
“집엔, 별일 없지?”
“어휴, 몰라. 별일인지 아닌지.
엊그제 갔다 왔는데 지호 엄마한테 아주 쪽팔려 죽을 뻔했어.
노친네들 나이 드셨으면 좀 적당히 하시지.
아무리 싸웠어도 며느리 앞에선 연극이라도 좀 하든가.”
“왜에? 부부싸움이라도 난 거야?”
“그게 뭐 새삼스럽냐.
근데 이번엔 좀 다른 것 같기도 하고.
아버지 얘기는 ‘느이 엄마가 늙으니 뵈는 게 없나보다.
이혼하자는 소리를 다 하고. 그런다고 누가 겁낼 줄 아냐’,
뭐 그러시던데. 저러다 진짜 무슨 일 나는 거 아닌지 몰라.”
가슴에 먹먹한 통증이 번진다.
“혹시 너. 뭐 아는 거 있냐?”
나에게 전화한 용건이 결국 이것이었나 보다.
아무렇지 않은 척 묻고 있지만 오빠가 속으로는 꽤나 예민해져 있음을 단박에 알아챘다.
그것이 혈육이다. 나는 냉정하게 태연을 가장한다.
“아니. 없는데.”
“하긴, 집에도 안 오는 주제에 네가 뭘 알겠냐.
엄마도 참 답답해. 아버지 성질 모르냐? 좀 참으시지.
삼십년 넘게 참아놓고 그걸 조금 더 못 견뎌서 집안 시끄럽게 하고 말이야.”
“오빠. 말, 되게 이상하게 한다.”
“뭘?”
“그렇잖아. 그 긴 세월 동안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면서 그런 소리가 나와?
아버지가 원인제공한 거지. 두 분 잘못 돼도, 엄마 잘못 없어.”
혹시 나는 미친년일까? 나도 모르게 엄마 편을 들고 있다니.
오빠와 통화를 하고는, 며칠동안 계속 속이 편치 않았다.
주말에 만난 김영수가, 바깥거리가 환히 바라다 보이는 커피숍 창가로 내 손을 이끌었다.
“기분전환에는 햇빛이 제일 좋대요.”
우울하다고 언질을 준적도 없는데 어떻게 알았을까.
조용히 배려해주는 태도가 고맙다.
그가 주문하러 간 사이 스툴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잘게 쪼개진 한낮의 햇살이 이마 위로 쏟아져 들어왔다.
김영수가 플라스틱 쟁반에 머그잔 두 개를 받쳐 들고 왔다.
카페모카 위에 올려진 흰 휘핑크림에 입술을 살짝 가져다댔다.
보드랍고 달콤했다. 그
가 상체를 조금 내 쪽으로 기울였다. 떨리지는 않지만 편안하다.
언제부턴가 이 사람과 함께 있으면 따뜻한 물에 맨발을 담근 것처럼 평화롭고 안온해졌다.
그걸로 충분했다.
문득 선뜩한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들었다.
한 남자가 유리창 너머에 꼿꼿이 서있었다.
머리에 노란 안전모를 쓴 젊은 사내였다.
근처 공사장에서 일을 하다 점심밥을 먹으러 가는 길인 것 같았다.
그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나를 보며 웃고 있는 김영수였다.
“저기 밖에, 아는 사람이에요?”
그때, 창밖의 사내가 주먹을 동그랗게 말아 쥐고 유리 창문을 똑똑 두들겼다.
조심스러운 노크였다.
김영수의 눈동자가 아주 조금 흔들렸다가 빠르게 정지하는 것을 나는 보고 말았다.
제6부 그림자 도시 6
사내가 출입문 쪽으로 걸음을 움직였다.
그러나 김영수의 동작이 더 빨랐다.
그는 의자에서 스프링처럼 튀어 일어났다.
조급한 몸짓으로 유리문을 밀고 밖으로 나서는
그의 뒷모습을 나는 그저 멀거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문은 곧 힘없이 닫혔다.
노란 안전모를 쓴 사내와 김영수는,
얼굴을 맞대고 무슨 이야기인가를 나누었다.
안전모 사내는 다소 흥분한 듯 계속하여 무어라 떠들어댔지만,
창문 안쪽에 앉은 나에게는 그들의 대화내용이 전혀 들리지 않았다.
내가 앉아 있는 위치에서는 김영수의 뒤통수만 보일 뿐이었다.
나는 하릴없이 그의 뒤통수를 응시했다.
물음표나 느낌표, 말줄임표가 아니라 단정한 마침표가 어울리는 범상한 뒤통수였다.
요즘 바빠서 블루클럽에 갈 시간이 없었던지,
언제나 바짝 치켜 깎곤 했던 뒷머리칼이 더부룩이 자라있었다.
아아, 그런데 저 사람은 대관절 누구일까?
5분은 긴 시간이 아니다.
아니, 체감시간이 그 정도일 뿐 실제로는 2~3분도 채 지나지 않았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동안에도 김영수의 커피 잔은 싸늘히 식어가고 있었다.
창밖의 두 남자는 악수도 하지 않고 헤어졌다.
안전모 사내는 뒤돌아서 제 길을 갔고, 김영수는 느릿느릿 안으로 들어왔다.
별 일 아니라는 제스처일까,
그는 스툴에 엉덩이를 붙이며 내 쪽을 향해 싱긋 미소 지어보였다.
평소보다 입 꼬리가 지나치게 말려 올라가서 좀 어색했다.
“누구, 예요?”
결국 성질 급한 내가 먼저 물었다.
그는 커피로 입술을 축였다.
“아무도 아니에요. 예전에 알던 친구.”
“동창?”
“네. 뭐.”
“그런데 그렇게 그냥 보내도 돼요? 오랜만에 만난 거 같은데.”
“…그럴 만한 사이 아니에요.”
그는 짐짓 커다랗게 팔을 뻗어 기지개를 켰다.
“아, 배고프다. 은수씨, 점심 뭐 먹을래요?”
그 사내에 대해 더 이상 얘기하고 싶어하지 않는 눈치다.
이럴 때, 다른 여자들은 어떻게 할까?
예전의 나였다면 여기서 추궁을 중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언제적 동창인지, 왜 내게 인사시켜 주지 않았는지
못내 의아한 점들을 꼬치꼬치 따지고 들었을 것이다.
적어도 사귀는 사이라면 그쯤은 마땅히 행사할 수 있는 권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2006년 3월, 오은수는 그러지 않기로 했다.
“…스파게티 어때요?”
치밀어 오르는 궁금증을, 그렇게 애써 접었다.
왠지 그것이 예의일 듯싶었고, 어쩌면 나의 자존심에 관한 문제이기도 했다.
‘그래, 어른들의 연애란 이런 거야.’ 진정제를 삼키듯 혼잣말을 삼켰다.
내가 변한 건지 아니면 세월이 나를 변하게 한 건지 잘 모르겠다.
우리는 근처의 이탈리안 레스토랑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토마토소스의 해산물 스파게티를, 나는 크림소스의 카르보나라를 시켰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뭔가 아주 느끼하고 뜨거운 음식을 목구멍에 우겨넣고 싶은 기분이었다.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몇 가지 시답잖은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었으나
평소와 달리 대화가 자주 끊겼다. 막상 음식접시를 대하자 식욕이 일지 않았다.
면을 포크로 집어 스푼에 대고 돌돌 말았다 놓았다 하기만을 반복했다.
김영수는 뻘뻘 땀을 흘리며 포크질을 했다.
마치 ‘빨리 먹기 대회’에 억지로 출전한 사람 같았다.
“아아….”
그가 갑자기 짧고 돌연한 탄식을 뱉어냈다.
놀라서 고개를 들어보니,
토마토소스가 그의 셔츠 앞자락에 점점이 튀어 있었다.
붉은 얼룩은 흰 옷감 속으로 핏물처럼 차츰차츰 스며들었다.
김영수의 미간이 예민하게 일그러졌다.
혹시, 정말 맨살에서 배어나온 피가 셔츠를 붉게 물들이고 있는 건가.
그는 셔츠 앞섶을 손으로 움켜쥔 채 화장실로 갔다.
혼자 남겨진 나는 굳어가는 면발을 입속으로 꾸역꾸역 밀어넣고 어금니로 꼭꼭 씹었다.
-지금 들어온 거야? 오늘은 데이트 일찍 끝났네?
집에 들어와 컴퓨터를 켜자마자, 메신저의 유희가 말을 걸어왔다.
언제나 변화무쌍한 그녀의 대화명은 이번엔 ‘환멸과 그리움 사이’였다.
볕 좋은 토요일 오후 용가리를 만나지 않고 인터넷을 유령처럼 떠돌았나 보았다.
미안하지만, 지금은 타인에게 객쩍은 위로를 선사할 기운이 없었다.
나는 대답 없이 인터넷 익스플로러를 클릭했다.
포털 사이트의 메인화면에 새로 뜬 뉴스들을 건성으로 훑어보았다.
‘30대 미혼여성실업자 대폭 증가. 해결책은 정녕 결혼뿐인가?’
같은 분석기사는 눈에 뜨이지 않았다.
습관적으로 이메일을 확인했다. 새로운 편지 한 통이 도착해 있었다.
[정이현 글/권신아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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